미치도록 투명한 (ME TOO) 03
나는 그날 너를 들여보내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 설마 네가 나쁜 생각을 할까봐.
불이 꺼지기까지 나는 아파트 앞에 서서 보고 있었다.
꼭 사귀는 사이 같잖아. 이런 건.
돌아오는 길은 사람 발걸음조차도 잦아들어 자동차가 달리는 주홍빛 소리만이 눈앞에 번쩍였다.
처음으로 치여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일 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려면 오늘은 죽을 날이 아니었다.
너 역시 그렇다.
"심 쌤, 어제는 죄송했어요."
다음 날 너는 조금 피곤해 보이고 붓긴 했지만 어쨌든 이민형으로 학원에 나왔다.
해맑은 웃음을 잔뜩 짓고, 어려운 질문을 잔뜩 하고, 초롱초롱한 눈을 잔뜩 빛내는 이민형으로.
중학생 반에서 네 그림을 보고 까르르르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은 네 그림을 품평하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그치지 않는다.
너 역시도 웃지만 투명해서, 노란 물결 가운데 홀로 맑게 일렁인다.
눈앞이 노오란 민들레 빛으로 만개한다.
너는 점묘법으로 산을 그리겠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는 대나무를 치는데 선이 너무 곧고 바르다.
자 대고 했단다.
내가 못 살아.
여전한 너로 인해 웃음은 조금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불안불안하다.
네가 물고기가 될 테면 나는 너를 적시는 비가 되고 싶다.
물 밖을 나왔어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
금요일은 어딘지 모르게 조급하다.
주말이 빨리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모든 국민이 다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지나갈 주말일지라도.
너는 지쳐 보였다. 이번 주에 뭘 했더라.
하나하나 세어 보다가 네가 꽤 많은 그림을 그렸고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특하긴.
한산한 저녁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언제나 단짝이랄 사람이 없는데 어디서 밥을 먹었던 걸까.
너에게 묻자 그냥 그날 옆자리 친구끼리 먹어요, 하고 웃어 보인다.
귀찮아지는 건 싫은데.
지금 같이 먹으면 어쨌거나 네가 학원을 끊기 전까지 같이 먹어야 하는데.
점심이고 저녁이고 너랑 같이 먹을 텐데- 하는 복잡한 걱정도 잠시.
내 입은 밥 같이 먹겠냐고 묻고 있었다.
네 표정이 조금 묘해진 건 내 착각일까.
학원 근처의 밥집은 애들로 북적여서 괜한 소문이라도 날까 싶었다.
그래서 너를 차에 태웠다.
너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차 안은 내 생각보다 조용했고,
너는 생각보다 말이 없었으며,
우리는 생각보다 어색해서 나는 헛기침을 몇 번이고 한 끝에 메뉴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 냈고,
또 한참 만에 네가 대답을 했다.
부대찌개 식당에 도착한 너는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아저씨들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가 치고 빠지는 흔한 부대찌개 집이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부대찌개는 제법 감칠맛이 났고 묵은지와 햄과 사리는 적절하게 섞여 끝내줬다.
퇴근 무렵의 저녁이라 소주잔이 쨍쨍 부딪쳤고 왁자한 테이블 틈틈이 건배! 하는 목소리가 터져라 울렸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불꽃놀이라도 한 듯 정신없는 눈앞은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처럼 사고회로를 뚝뚝 끊어놨다.
핸드백 안의 실리콘 귀마개를 찾는 손이 바빴다.
왼쪽, 왼쪽은 찾았는데 오른쪽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하얗고 긴 네 손가락이 내 손 사이를 불쑥 비집고 들어와 오른쪽 귀마개를 집어 내 손에 쥐어 준다.
난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테이블 사이로 우리의 시선이 엉켰다.
엉킨 시선을 풀려다가 나는 너의 눈빛에 막혀 고개를 틀었다.
“심 쌤, 나 진짜 진지하게 물어볼 거 있는데요.”
“응.”
“쌤 남자친구 있어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야, 내가 남자친구 없을 것 같아?
없어.”
넌 장난끼가 담뿍 담긴 웃음을 짓고는 턱을 괴고 내게 물었다.
얄미워, 하여튼.
“어떻게 쌤은 남자친구가 없을 수가 있어요?”
"놀리지 마. 쌤 서럽다."
"심 쌤 정도면 남자 많 것 같은데."
“그러게.
내가 영앤리치인 남자 좋아해서 그런가.”
“그거 난데.”
“아닌데.”
“맞는데.”
유치한 투닥임에 너는 작게 웃고 내 볼을 쓰다듬었다.
네 온기가 내게 닿아왔다.
옆 테이블에서 오늘 죽자, 하면서 잔이 부딪쳤다.
유리의 빨간 마찰음이 눈앞에서 경광등처럼 반짝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늘 너무 시끄러운 곳에 와서 그래.
너도, 나도.
조금 당황한 채 일어났다.
카드로 해 주세요, 일시불이요, 아니요.
계산하는 내내 머리는 꼬였다.
방금 전 네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정말 나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내 망상의 최고치라는 팩트일까.
“가자, 민형아. 쌤이 바래다 줄게.”
복잡한 건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네가 맑은 눈을 하고서 나를 봤다.
퍽 맑아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눈이었다.
운전하는 내내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나는 운전인생 처음으로 사고를 낼 뻔 했다.
“조심해요, 쌤.”
네가 내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였다.
카운터의 플라스틱 통에 담긴 박하사탕, 그걸 집어 먹었는지 화한 박하냄새가 났다.
“그래야겠다.”
창가로 조금 몸을 빼자 넌 다시 네 자리로 돌아간다.
진지한 걸까, 아니면 그냥 장난일까.
나도 하루 정도는 네 장난에 맞춰 놀아줄 수 있다.
네가 만약 지나가다 본 남자애였다면.
하지만 너는 화가를 하기까지는 나랑 있어야 하는데.
문득 화가조차 핑계가 아닐까.
그냥 모든 게 다 장난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대도 필요 없다고 하고.
뭐야, 도대체.
복잡한 생각은 클랙슨의 색이 눈앞을 가리자 흩어졌다.
어지간히 눌렀나 본데.
미안한 마음에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만 별 것 없는 차 안에 자리한 기계들의 모터 소리는 다른 색보다 훨 엷어서, 나는 별 수 없이 아까의 상황을 반복하게 된다.
내 눈앞은 너와 거의 같을 것이다.
네 얼굴이 선명해서 나는 흐려진 마음을 감추려 한다.
내가 너의 ‘쌤’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고 별 짓을 다 해 본다.
어색하게 웃었다가, 라디오는 안 되고, 노래는 더더욱 안 되니 입술을 꾹 깨물고 너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운전 중만 아니라면 귀마개를 빼고 싶었다.
그러면 네 얼굴쯤은 색에 묻혀 사라질 테니.
"심 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너도 잘 들어가고."
"네. 내일 뵈요."
너는 맑게 웃으며 아파트 안으로 사라졌고, 나는 오늘도 불이 꺼지기까지 나는 네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진짜로 사귀는 사이 같잖아. 이런 거.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몽실몽실한 마음을 꾹꾹 눌렀다.
이런 건 사랑인 줄 모를 때 지나쳐야 한다.
더 아플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