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듣는 내내 남자의 자리가 혹시 비었나 싶을 정도로 왼쪽에서만 들려오는 말소리. 이상증세를 보이는 남자 덕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스물스물, 고개를 들이밀고 올라와 남자 쪽으로 기울었다. 변백현도 뭔가 꺼림칙한 모양인지 하던 말을 도중에 끊고 내 어깨 위로 눈만 스윽 내밀어 남자를 쳐다봤다.˝ 네가 생각해도 뭔가 있지? ˝˝ 응. 그런 것 같애. ˝속삭이는 내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변백현이 손가락으로 남자를 찌르려하는 모양새를 취하기에 그를 저지했다. 가뜩이나 기분 나빠서 저러고 있는 마당에 누가 치근덕대기까지하면 당장이라도 뻥, 하고 폭발해버리지 않을까싶었다. 길을 모른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밖에서 한참이나 나를 기다렸다가도 눈 떠보니 가버리고 없던것만 봐도 남자는 의외로, 뜻밖의 행동을, 예상치 못하게 해버리는 타입일테니까. 몇 개의 경우의 수를 두어 봐도 다시 남자의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모습의 미래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어색함이 친근함으로 역전되는 순간. 서로에 대한 관심이라는 새싹은 수분, 온도, 산소, 식물 생식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 즉 입담, 재치, 공감대, 친밀감 형성에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후 커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두 사람 사이의 새싹도 무럭무럭 자라나 기다란 줄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저번에 기숙사에 짐 놓으러 왔었거든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안 그랬는데, 여자들이 날 보는 시선이 약간 요상한 게 나 여기서 좀 먹히는 얼굴인가봐요. 꽃받침을 한 채로 요리조리 얼굴을 흔들어대는 변백현. 남자도 재잘재잘 말이 어지간히도 많은 스타일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내가 바보지. 강의실에서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어제의 남자로 되돌아와 있었다.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춥다며 빌려 입은 내 후드 집업을 벗어 소매까지 죽 끌어올린 변백현은 단단히 마음먹었나본지 교수 몰래 나와 자리까지 바꿨다. 퉁명스럽게 몇 번 대답을 툭툭, 던지던 남자는 변백현이 마음에 들었었나보다. 금방 경계를 풀고서 저보다 다섯 살 아래인 변백현과 손뼉을 마주치며 쎄쎄쎄까지 할 기세로 잘도 놀더라.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아까는 도대체 왜 그랬느냐,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저 둘 사이에는 내가 끼일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관계가 적절히 맞물려 들고 있다는 소리. 저만큼 쿵짝이 잘 맞는 한 쌍이 또 따로 있을까.˝ 아까부터 계속 봤는데 형 머리 색깔 진짜 예뻐요. ˝˝ 정말? ˝˝ 응. 저도 원래 이거보다 더 밝은 거 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 아이돌 될 뻔. ˝그렇다. 내 예상이 빗나갔다. 아주 보기 좋게 틀려먹은 것이다. 푸하하, 변백현이 말을 할 때마다 남자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혼자서만 삽질한 기분에 괜히 울적해져버렸다. 내가 저를 걱정한 건 아는지 모르는지. 어제는 예쁘다고 생각했던 저 웃음이 지금은 왜 이리도 얄미워 보일까. 딱밤을 콩,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새빨간 고기를 뒤집으니 노릇하게 잘 구워진 뒤태가 저의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에 맛보는 고기, 원래 같았다면 젓가락을 문 채로 다리를 달달 떨며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렸을 텐데. 내 삼겹살 너를 이렇게 비참하게 취급하는 날도 오는구나. 진심을 다해 미안하다. 맛있게 못 먹어줘서. 한숨을 내쉬자 네 개의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한다.˝ 지호야, 왜 그래요? ˝
˝ 형, 왜 그래? ˝진정으로 몰라서 묻는 거냐, 이것들아.˝ 고기가 빨리 안 익어서 그래. ˝애꿎은 고기를 찌르며 고기 타령을 하는 나도 참 어리다. 저 둘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을테지. 근데, 나도 내가 왜 이런 마음 앓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둘이서 친해지면 친해지는 거지 그게 굳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고 보니 문득 든 생각에 내 앞의 고기가 타는 줄도 모르고 연기가 폴폴 피어오를 때까지 눈만 깜빡였다. 고기 다 탄다! 변백현의 말에 테이블 위에 기대고 있던 팔꿈치를 떼어내며 정신을 붙잡았다.지호야. 나를 부르는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지호야?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내가 의아한지 손바닥을 펼쳐들어 마구 흔든다. 음료수 먹고 싶어요? 콜라? 아니면 사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얄밉다고 느껴졌던 남자의 얼굴에서 순간, 빛이 보였다면 그건 내 착각인 걸까. 혹 남자의 얼굴이 너무 하얀 탓에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 건 아닐까. 아니면 뒤에 있는 누군가가 사진을 찍느라 플래시를 터트렸다거나. 이번에는 내가 이상했다.이상한 게 틀림없다.*다시 이 길을 혼자 걸을 줄 알았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둘이다. 그 대신 목소리가 아니라 지쳐 잠든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하여튼 변백현 오지랖은 세계 최강임. 내 너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마. 점심 식사를 먹은 것도 모자라 저녁까지 챙겨주고 오는 길이다. 하도 친구가 없다고 칭얼대는 탓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려 했었다. 하지만 혼자서 밥을 먹게 될 변백현이 불쌍하고 애틋한 마음에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말했던 음식점─이하 술집─으로 갔더니, 남자도 함께였다.둘 다 참 자알 하는 짓이다. 부어라 마셔라하더니 내 앞에서 뻗은 이 두 마리의 강아지들을 어찌할꼬. 처리가 시급했다. 다행히도 가는 길에 변백현을 알아보는 남자─저가 그의 룸메이트라고 했다─에게 미안하지만 변백현을 떠넘겼다. 그리고 볼이 바알간 남자의 집을 나는 알지 못했으므로 하릴없이 기숙사로 향했다.가만히 걸어가다 유리문에 비치는 모습을 슬쩍 봤다. 나름 친해지긴 했다만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몸을 내맡겨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편안해 보인다. 조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가 금방 쪼그라든다. 유리 위로 언뜻언뜻, 잠깐씩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가로등 빛을 받아 더 하얘졌다. 하얗기만 했다. 왠지 어딘가 아파보이기도 했다. 다시 정면을 향해 보며 주욱 내려갈 것같은 남자의 몸을 제대로 붙잡았다. 충격이 있었는지 앓는 소리를 내던 남자의 얼굴이 방향을 달리 한다. 순차적으로 부풂과 가라앉음을 반복하는 남자의 가슴팍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내쉬어지는 숨이 뒷목을 간질였다.남자가 아무 말이 없으니 혼자 걷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곧,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삼겹살 집에서 순식간에 솟아올랐던 설렘과 지금 이 떨림이 평행을 이뤘다.어쩌면 조금만 굽히면 두 선이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 뒤에 뭐 달고 오냐? ˝표지훈이다. 드디어 납셨네.˝ 재밌든? ˝˝ 물론이지. ˝훤히 이를 드러내며 브이하고 웃는 표지훈이 길어졌던 생각의 꼬리를 툭, 잘라버렸다.-음 일단... 도덜이까지 봐주시는 독자 님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따로 공지를 올려야하나 싶지만 그냥 여기다가 쓰렵니다.이번 주 소소한 일상은 없습니다 유유혹시나 일주일동안 기다려주셨던 독자님들께 면목이 없네요.대신에 도덜이 들고왔으니 용서를... 구해도 되겠죠.아무튼 지호의 마음이 됴근됴근해졌네요. 이것은 러브러브의 징조군요.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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