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설정) 링크입니당~ http://www.instiz.net/name_enter/43311259 +) 져난이 초록글..! (동공지진) (비명) (난리법석) (정신줄) - 입술에 와닿는 이건 무엇인가. 어슴푸레하고 몽롱한 잠이 데운 우유의 엷은 단백질 막처럼 걷히지 않은 와중에 촉각이 먼저 기지개를 켰다. 뽁뽁, 기포가 터졌다. 희멀건한 책 냄새. 정수리를 간지럽히는 종이 모서리. 한쪽 귀에서 빠져나온 이어폰. 다시 가라앉는 의식. . "나 진짜 오늘은 밤샌다." "난리났고." "진짜다. 누나 진지하다." "어련하실라고." 윤정한이 머리 위에 먹던 바나나 껍질을 얹고 갔다. "뒤질래?!" 중앙 열람실로 들어가는 후드 차림의 겅중한 남자애 하나가 엿을 날린다. 조금 남은 카페라떼를 비우고 바나나 껍질을 담아 쓰레기통에 가뿐하게 떨어트린다. 중간고사 3일차, 전공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내일이, 현대 물리 2랑 양자 역학..' 어제까지만도 꼬임에 넘어가 술로 이 밤을 지새웠지만 오늘은 다르다.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화장도 생략했다. 놀러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는 얼굴인 것이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걸 동기들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오늘부로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특히 윤정한. 뒤졌다, 진짜. "니가 공부를 한다고? 중간고사 시험 대비? 스터디 메이트 구한다고? 나를? 나 뭐 잘못 들었냐?" "왜 이래, 너도 공부 하고 좋잖아. 내가 이래뵈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내 말이. 좀 한다면 해라. 한번도 안 했잖아, 한대놓고." 귀를 파며 한심하단듯 눈을 흘기는 윤정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슬펐다. 새내기 시절, 기본 중의 기본 기초 중의 기초인 물리학 개론부터 대차게 말아먹고 전공 필수 과목을 재수강하니까. 애꿏은 열역학책 모서리로 정수리를 찍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동안 내가 네 학점 배려해준거야, 왜 이래." "배려를 할게 따로 있다. 반박도 못하겠지? 팩트 전치 60주 떴냐?" 왜 사냐건, 그저 웃지요.. 가히 아무말 장인답다. 정신을 못차리게 팩트로 두들겨 패는 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 넌 개새끼야." "응, 내가 좀 강아지상~" "심보 곱게 쓰자, 천벌 받는다, 진짜." "응, 하늘의 간택~ 사스가 하느님! 보시는 안목이 어우 야," "으아아!! 너 가. 너 니 집 가." "웃기시네. 내가 왜 가. 도서관 전세 냈냐?"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세상에서 단 한 명만 씹새끼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윤정한일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왜 내 동기해서 내 속 뒤집고 지랄이야, 윤정한.." "넌 왜 내 동기해서 내 속 뒤집고 지랄이야?" "아오 씨, 내가 뭐!!" 목소리가 커졌더니 중앙광장이 쩌렁쩌렁 울린다. 시선이 쏠린다. 씨발. 윤정한은 급하게 입을 틀어막은 날 보며 웃겨죽는다. "미친 놈아, 내가 너한테 뭐 그렇게 잘못했어!" "곰곰이 생각해보시든가. 공부는 또 이렇게 망하는구나. 니가 그럼 그렇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박수를 보낸다." 이게 어제였다. 그러던 저 새끼가 날 술자리로 꾀어놓고 이제와서 공부를 하니마니 하는 것이다. 지가 방해하던건 생각도 안 나시는듯. 화가 나서 볼펜을 패기넘치게 붙잡고 앉았는데, 술로 달린 뱃속에 커피까지 들어갔으니 과연 멀쩡할 리가 없다. 첫 두시간 가량은 괜찮나 싶더니, 뒤늦게 하늘이 갈라지는 복통이 찾아왔다. 눈 앞이 하얘지는데 테이블 건너편에서 손 하나가 쓱 뻗어온다. 겔포스? 포스트잇에는 정갈한 글씨로 비아냥이 쓰여있다. [어째 잘 달리더라 말인줄] 아, 안봐도 윤정한인데 일단 살고부터 보자. 복통 가라앉기만 해라. 한국의 제약산업은 위대하다.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라디오 광고를 그렇게 하던 약물은 빠르고 간편하게 지옥의 문을 닫아주었다. 시야가 트이고 나자 이 아이가 효능을 다 할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본디 옛적부터 술은 국밥으로 풀라 했다. 속을 채워놓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언제 다시 반복될지 모르기에 나는 패기 넘치게 숟가락, 아니 지갑을 들고 일어났다. 금강산도 식후경, 따라서 양자 역학도 당연히 식후경. 퍼펙트 로지칼 팩트다. 완벽해서 눈물이 난다. 요 앞 선지 국밥을 그렇게 잘하는 집이 있다던데 드디어 시식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나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밥부터 먹고 온다 오면 너 이승이랑 작별인사 해라] [에바쎄바쿠바초코바 떤다 또] 사실 윤정한의 잔소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내 선지!! 내 해장국!! 공부 그까짓거 갔다와서 하면 그만이지. 이제 정오인데. 만족스런, 너무도 만족스런 식사였다. 잠시 부드러운 국물과 밥의 조화를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동안 1시간이 흘렀다. 좆됐다. 입가에 흐른 침을 닦기도 전에 이마에 무언가가 붙어 바스락거렸다. [잘 자네 ^_^] 후.. 참을 인을 간판만하게 쓰며 짐을 챙겼다. 건너편 테이블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은 윤정한을 째려보면 이어폰을 끼고 못 들은 척 필기나 한다. 좋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햇볕이 정면에서 들어 졸래야 졸 수가 없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벽 하나가 전부 창이라 얼굴이 뜨겁긴 하겠지만, 잠자지 않는 것이 더 급하다. 자리를 옮긴 김에 양치질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왔다. 이제 졸면 나는 금수새끼다. 금수새끼다. 2시간이나 지났나 싶은데 얼굴부터 뜨거워져 목덜미를 데운 볕은 기어코 뇌까지도 따끈따끈하게 익힌 모양이었다. 수식이 날아가고.. 잠이 쏟아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버틸 수가 없다.. 힘드네.. 좀만 잘까.. 제일 두꺼워서 안정감 있는 열역학 책을 베개 삼아 엎드렸다. 담쟁이 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오후 4시의 볕이 이렇게 따뜻한데 안 자고 있는건 햇살에 대한 배신이다. 나는 의리있는 녀석이니까, 등에 칼 꽂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그게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또 자냐." 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잠귀 밝은건 이럴때 유용하다. 윤정한 이 새끼 이거 쪽 좀 팔려보라고 계속 자는척 눈을 감고 있었다. 놀래켰을때 심장 부여잡고 주저앉으면 꼴이 예쁘겠구나. 리얼함을 위해서 입도 우물거려주었다. 옆자리를 빼고 앉는다. 책과 필통을 올려놓는 소리가 난다. "그러게 왜 내 동기해서 속을 뒤집고 지랄이세요." 혼잣말을 구체적이게도 한다. 듣는 내가 너무 뻘쭘해서 일어나고 싶지만 그럼 계획을 조진다. 참을 인을 한번 더 쓰며 엎드린 팔이 움직이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데, "겔포스 안 사놨음 어쩔뻔 했어, 어휴." 방금 쟤가 '사놨' 다고 한것인가.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었단 말이지. 술을 그렇게 마실때, 아침에 라떼를 시킬때 말리지도 않고. 내 속이 끓기 시작했다. "속도 안 좋다면서, 말 더럽게 안 들어요." 실눈을 뜬다. 가방에서 무엇인가 주섬주섬 꺼내 정리를 하는게, 겔포스다. 아까부터 쟤 자꾸 이상한 말 하는데, 나는 너무 일어나고 싶다. 계획이고 나발이고 쟤 헛소리하는거 좀 멈추라고. 가로 세로를 세번씩 탁탁 쳐 정리한 겔포스 5봉을 내 필통에 고이 넣어 머리맡에 둔다. 뻘쭘한 이 상황에서 누가 지금 일어나면 된다고 신호라도 줬으면 좋겠다. 다시 턱을 괴고 나를 본다. 아, 이것이 가시방석이구나. 5분 정도 나를 보나 싶던 네가 손가락을 뻗어 내 앞머리를 정돈한다. 씹새끼야, 누가 내 앞머리 만지래 하고 싶지만 일단 참는다. 서로 얼마나 보기 불편해질까 싶어 엄두도 안 난다. 정한아, 나 못 본척 해줄게 제발 자리 옮겨라. 정한이가 엎드리고 나를 마주본다. 미칠 지경이다. 제발 가라. 식은땀도 좀 나는 것 같은데 쟤는 오늘따라 눈치도 빨라서 나 잠 깬거 다 아는 것 같고. 햇살은 여전히 좋다. 속도 없다. "체흐흐." 혀를 차더니 웃음으로 이어진다. 왜 웃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비어간다. 그냥 곱게 일어날걸. 어쩌자고 내가 이걸 놀래키겠다고 기다려서. 마음 속에는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잠자는 연기를 한다. 손끝이 저린다. 다리도 아픈데, 나 경련할거 같은데. 덜커덩. 그렇게. 책을 펴 내 머리맡에 세운다. 그늘이 져 감은 눈 속 어둠이 좀 더 짙어진다. 뱀이 몸을 꼬듯 스스슥하는 소리가 나더니 앞머리가 쓸려내려가 드러난 내 이마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 스친다. 아 설마. 설마 아니겠지. 깨끗한 향이 어른거린다. 맞구나. 머리가 더 비어간다. 얜 갑자기 왜 이러는걸까. 눈꺼풀이 사시나무마냥 떨리기 시작했다. 0.1초만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지금이라도 눈을 뜰까. 계속 감고 있어야 하나. 이렇게까지 된 이상 계획이고 나발이고 다 망한 것 같은데 수습할 방안이 없었다. 내 생각에 따르면 정한이도 지금 나처럼 엎드려서 날 보고 있는데, 아주 가까이. 아주 많이 가까이. 망설이다 결국 눈을 떴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 손목 시계 초침은 귓가에 아롱거리고 나와 눈을 맞부딪힌 네 동자는 다갈색. 놀라지 않은 동공이 축소하지 않고, 거기에 비친 나는 당황한 기색 그 자체. 입조차 달싹이지 않고 팔에 고개를 파묻은 너는 무슨 말을 하려는건지 알 수 없다. 내가 배운 수식엔 이런게 없었다. 금발 앞머리를 발처럼 드리운 사이사이로 볕을 받은 네 홍채가 아름다운 빛을 띈다. 나는 잠시 멍해진다. 눈에 잔상이 심한 탓이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거기, 아까보다 좀 더 가까운 거리에 너의 고동색 눈동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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