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소꿉친구 민윤기를 기록하는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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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 일기를 쓰는 이유가 있다. 오늘은 윤기가 아팠다. 어쩐지 어제 무리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바로 티가 났다. 부모님은 회사 업무차, 영국으로 가셔서 당분간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아픈 윤기에게 달려갔었다. 이 바보 같은 민윤기는 대문도 잠가놓지 않고 있어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윤기의 집 열쇠는 나도 하나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받은 열쇠라서 우리 집이 번호키로 변해도, 이건 항상 들고 다녔다. 윤기 어머니께서 안 들어오셨는지 집은 꽤 엉망이었다. 일단 윤기 상태를 봐야 돼서 방으로 갔는데, 내가 들어온 소리에 맞춰 부스스한 상태로 일어났다. 그리고 들려오는 윤기의 잠에 취한 목소리는 방안의 온도를 뜨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안해.' 친구끼리 이게 무슨 미안한 일이냐면서 손사래를 치자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윤기의 손짓에 한 마리의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갔다. 내 어깨에 기대면서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되냐. 너한테 이런 부탁하는 거 미안한데, 혼자 있으니깐 좀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윤기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요즘 윤기가 내게 하는 행동이 미묘한 내 감정을 건드리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내게 윤기는 한 마디 더 붙였다. '오늘 미안한 거 투성인데, 다 나으면 김여주 한정 지니 해줄게. 소원 생각해둬.' 역시 남에게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다. 그런 윤기에게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약간은 어색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윤기의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많이 아픈지 내 어깨도 금세 뜨거워졌다. 깨지 않게 조심히 윤기를 침대에 눕혀놓고,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요리학과 다니는 친구를 둔 윤기는 복받은 사람이다. 집에 있는 간단한 재료로 김치죽과 계란찜을 만들었다. 많이 아픈지 음식 만드는 소리에도 나오지 않는 윤기다. 음식을 다 만들고, 거실을 반쯤 치웠을 때 윤기가 방에서 나왔다. '안 치워도 돼. 나중에 내가 치울게.' 윤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남은 물건들을 정리하려는데 내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왜 때리냐는 내 질문에 이번에는 윤기가 무시를 하고, 나를 데리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냥 나 먹는 거 쳐다봐.' 이게 무슨 황당한 대답인가. 역시 특이한 친구야. 고개를 두 번 흔들거리자 비듬 떨어진다는 윤기의 말에 숟가락을 뻇을뻔했다. 얄밉지만 맛있게 먹어주는 윤기의 모습에 꽃받침을 하고 자리를 지켜줬다. 그런 내게 시선을 한 번도 안 주고 밥을 다 먹은 윤기는 그릇을 치우고, 나를 데리고 거실에 앉혔다. 양치하고 올 테니깐 여기 물건들 하나라도 치우면 너 그대로 집에서 내쫓을 거니깐 알아서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 내쫓아도 문 열고 들어오면 되는데. 바보. 그래도 아픈 친구의 말에 대꾸를 하기 싫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윤기의 집에는 내 사진이 꽤 많이 있었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지만, 탁상 위에도 두 개가 있었다. 윤기의 어머니는 집에 자주 오시지 않아서 그런지 나와 찍은 사진이 더 많은 거겠지만. 씻고 나온 윤기는 내게 티를 하나 건넸다. 자기가 자주 입는 검은색 맨투맨이네. 이거 세탁해달라는 거냐고 묻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불편해 보이니깐 입으라는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설마 여기에 땀 흘려놓고 나 놀리려고 그러나 싶어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데, 윤기에게서 항상 나는 좋은 향이 가득했다. 집에서 바로 나온 거라 편한 옷인데 왜 갈아입으라 한 건지 몰랐지만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흰 면 티라서 속옷이 그대로 보였다. 미쳤다, 김여주. 이러고 여기까지 왔고 윤기랑 있었던 거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조금 정리된 마음이 들어 흰 티 위에 윤기가 준 맨투맨을 입었다. 내게는 조금 큰 옷이라 소매 끝에 내 손이 보이지 않았다. 윤기에게 인사를 하고 가야 되는데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조용히 나가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옷 입었으면 들어와. 친구 아픈데 그냥 가냐.' '윤기야...' '왜. 나 아프다니깐, 김여주.' 그래. 윤기는 아픈 사람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잊을 텐데. 그렇게 윤기 옆에서 삼십분 정도 간호를 해주고는 집에 가라는 말에 조금 더 있겠다고 했지만 고집불통 민윤기를 이길수가 없어서 집에 들어왔다. 오늘은 아프니깐, 절대 데려다주지 말라고 하는 내 말에 미안하다는 말과 대문을 나서자마자 걸어온 전화는 나를 충분히 감동시켰다. 이어폰은 꽂지 말고, 전화받으면서 가라는 윤기였다. 못 데려다주니깐 전화라도 해줬나 보다. 덕분에 집에는 안전하게 도착했다. 추신. 윤기의 옷은 내가 가져야지. 아, 여자만 아플 때 예쁜 게 아니라 남자도 예쁘더라. [암호닉] 받습니다. 땅위, 찡긋, 설탕물, 달밤, 윤기야메리미, 핑쿠릿, 다솜, 너만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