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빨리. 이거 선생님이 인원 수 3명 이상 돼야지 승인 해준다고 그랬다고.”
어디서 동아리 신청 종이를 가지고 와서는 박지민과 내 앞에서 징징거리며 종이를 내밀고 있는 너였다. 솔직히 말해 머릿수만 채워주는 거라 네가 만들겠다는 미술 동아리에 들면 동아리 시간이든 아직 적응 되지 않은 야자 시간에 동아리를 핑계로 농땡이도 칠 수 있었다. 담당 선생님이라고 해봤자 미술 선생님은 매번 음악 선생님과 뭐가 그리 떠들 게 많은지 일이 있어 미술실로 찾아 갈 때마다 미술실이 아닌 음악실에 계실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래도 반 친구들 몇몇과 같이 들자고 운운했던 축구 동아리며 탁구 동아리며 눈앞에 아른 거려 네가 쥐어 준 종이를 팔랑거리며 물었다.
“하면 뭐 해 줄 건데?”
“놀고 있네.”
내 말에 너는 나를 흘겨보고서 박지민에게 시선을 돌렸고 나는 네가 가지고 온 펜을 빼앗아 학년 반 번호며 칸 하나하나 채우고 있었다. 뭐 축구랑 탁구는 체육시간에 하면 되는 거니까.
초등학교 3학년 쯤 나는 지금 동네로 이사 왔고 동네 친구들이 곧 학교 친구들이었다. 딱히 전학 와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거나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조그만 초등학생이었고 누구든 그냥 말을 걸고 투닥거리다 보면 친구가 돼있었다. 그러다 박지민과 투닥거리며 동네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박지민과는 심심찮게 놀아대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게다가 같은 반이었던지라 유희왕 카드며 자잘한 놀이거리를 가지고 내기를 하기도 했었다.
너를 처음 본 날도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내기에서 진 탓에 박지민에게 떡꼬치를 쥐어주러 분식집에 가는 중이었다. 이번엔 내가 봐준 거라며 옹졸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데 뒤에서 박지민의 이름을 부르는 앙칼진 소리가 들렸다.
“너 왜 나 두고 갔어?”
“내가 쉬는 시간에 말했잖아, 바보야.”
“… ….”
빽 소리를 지르며 불러 세운 여자아이가 너였다. 뭐가 그렇게 서운했는지 툴툴거리는 너에게 박지민은 달래듯 말했고 조금 먼발치에 서서 멀뚱히 쳐다보던 나는 그저 얼른 분식집에 들렀다 집에 가서 여동생이 오기 전에 리모컨을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멍청이. 야, 태형아! 얘도 같이 꼬치 먹으러 가도 돼?”
“난 좋아.”
박지민은 나를 불러서는 물었고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대답했다. 곧 너는 박지민과 함께 걸어왔고 멀지 않은 분식집까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야, 너 이름 뭐야?”
늘 그랬듯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박지민을 사이에 두고 있는 너에게 이름을 물었고 너는 아까 전 나처럼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는 박지민을 쳐다보았다.
“얘 김탄소. 2반.”
박지민은 네 대변인이라도 된 듯 대신 답했고 내가 보고 있는 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의 나는 오늘은 여동생한테 리모컨을 양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고선 같이 놀자며 헤실 웃었었다.
그 후로 어렸을 적 나는 너와 박지민과 셋이 붙어 등하교를 하는 것도 재밌었고 태권도 학원이며 피아노 학원이며 가겠다고 나와서는 원장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가 올 때까지 놀러 다니는 것도 재밌었다. 내 기억으론 그냥 셋이 함께일 때 그렇게 신이 났었던 것 같다.
결국 학교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들려주는 네 행동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지원서를 다 작성해 거의 뺏기듯 네게 건네주었다. 처음 내가 적어 놓은 김탄소가 빠삐코를 사줘서 라는 지원 동기를 질색팔색하며 쭉쭉 그어 지우고선 미술에 흥미가 생겨서 라고 적어 놓은 네 탓도 있다.
그리고서는 네가 여기 저기 신청서를 내밀고 다녔는지 아님 미술 동아리에 관심이 있어 온 사람들인지 동아리 부원은 꽤 늘어갔다. 그래도 제대로 그림을 그리는 애는 손에 꼽았지만 그림을 그리겠다는 목적으로 들어 온 게 아니어선지 나는 별 대수롭지 않았다.
가끔 네가 이젤 앞에 앉아서 뭘 그려대고 있으면 네 그림과 비교되는 낙서 수준의 그림을 끄적대다 본 네 얼굴이 꽤나 우스꽝스럽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는 앙 다물고 있는 입을 보고 괜히 네 뒤로 가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집어 리본 묶듯 묶어버리기도 했고 옆에서 자꾸 바람을 불어대다 네가 짜증을 내며 깍지 낀 연필을 휘두르기도 했다. 네가 휘두르기 전에 뭐라고 타박하는 박지민이 먼저일 때도 있었지만.
“얌마, 열심히 하는 애를 왜 건들고 그러냐.”
“아, 심심하잖아.”
“심심하면 나랑 빠삐코나 먹으러 가자.”
“네가 쏘는 거냐.”
“무슨.”
박지민은 네가 입을 앙 다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저도 너를 꽤 귀엽다고 생각하는지 무슨 흔히들 말하는 아빠미소로 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너를 건드리는 나를 데리고 나가곤 했다. 뭐 어찌됐건 아이스크림을 얻어먹는 셈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네게 장난을 거는 건 충분히 어느 때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으니 말이다. 아니 마음을 먹지 않아도 나는 자꾸 너를 건드려 대고 있었다.
박지민은 항상 너를 웃는 얼굴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너를 보는 것도 아니고 박지민과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너를 보곤 하지만 그냥 좀 다른 것 같았다.
빠삐코를 쥐고서 미술실로 들어갔을 때 박지민은 네 손에 들린 물통과 빠삐코를 바꿔 주고는 물통을 들고서 미술실을 나갔다. 항상 너를 챙겨 주던 쪽은 박지민이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나는 다시 습관처럼 네게 장난을 걸기 위해 의자를 끌어가져다 앉았다.
너는 벌써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등졌고 그에 굴하지 않고 나는 또 네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 당겼다. 부들부들한 느낌에 계속 만져대니 솔솔 샴푸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가 좋아 나는 얼굴을 쭉 내밀고는 더 머리카락을 손으로 톡톡 쳐댔고 짜증이 극에 달했는지 너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뒤에 있는 나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결국 나는 그 손사래에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히듯 맞아버렸고 너는 홱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와, 이젠 때리고.”
“…, 뭐!”
네 표정은 티가 다 났다. 분명 저건 저도 예상치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계속 화난 척을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또 초등학교 3학년 때 봤던 얼굴 같아 웃음이 나오려해 그런 너를 두고 장난스럽게 우는 척을 해대며 미술실을 나왔다. 미술실 밖으로 나오자 샐쭉 나오는 웃음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화장실로 향하는데 네 손이 맵긴 매운지 얻어맞은 이마가 살짝 아린 거 같기도 했다.
화장실에 들어서니 무슨 영문인지 박지민은 하복 와이셔츠가 쫄딱 젖어 있었고 허둥대며 물이 그득 든 물통을 들고 나갔다. 빠삐코를 쥐고 있느라 끈적끈적해졌던 손을 씻고는 괜히 네게 얻어맞은 부분을 만지작거리고는 세수까지 해버렸다.
나 역시 박지민을 따라 다시 미술실로 들어갔고 네 후드집업을 입고 있는 박지민이 보였다. 에어컨 바람에 추워 입지 않겠다고 잠깐 덮고만 있겠다고 애원을 해도 그렇게 안 된다고 난리를 쳐대던 후드집업을 박지민에게는 턱하니 내어준 걸 보고서 괜히 서운해졌다. 거기다 헤실 거리며 웃고 있는 박지민을 보니 기분이 떨떠름했다. 맨날 저런 표정으로 너를 보고 있더라.
내가 들어 온 줄도 몰랐는지 쿵쾅거리며 제게 뛰어가자 그제야 그 표정을 지우는 박지민이었다. 네가 나에게는 후드집업을 빌려주지 않아 심통이 났는지 박지민에게 트집을 잡으며 말했다.
“야. 아까 왜 변태처럼 웃고 있었냐.”
“뭐래.”
박지민은 나를 힐끗 보고 말았고 나는 저쪽에 있는 너를 한 번 쳐다보고서 박지민에게 장난을 걸 듯 덧붙였다.
“너 아까 완전 문학 같았는데. 웃는 게.”
“이 새끼가, 싸우자고?”
내 말에 박지민은 헛주먹질을 하며 말했고 곧 내 목 언저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고 평소처럼 방정스럽게 박지민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아, 장난. 장난이라고!”
네 손이 맵긴 매웠나 이마가 지끈지끈 하는 것 같았다. 감기는 아니고 좀 신경 쓰이는 이상한 지끈거림.
얼마 전부터 네가 어디서 유화 물감을 가지고 와서는 동아리시간에 기름 냄새를 풍겨가며 캔버스에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었다. 유화 물감 냄새며 기름 냄새며 썩 좋게 느끼지 않았던 나는 매번 네게 징징거리듯 유화 냄새를 타박하고 있었고 너는 처음엔 왜 그러냐며 너도 따라 징징거리더니 몇 번 반복되자 어쩌라는 거냐며 무시하고 있었다.
“아, 기름 냄새, 와, 진짜.”
“어쩔.”
“뭐, 별로 심하지도 않구만.”
“박지민은 저거 지금 돌려서 말하는 거야.”
툴툴거리다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노곤노곤 잠이 쏟아진 나와 박지민은 엎드려 잠이 들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불편한 자세에 잠이 깬 나는 아예 의자를 붙여 누워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주위 의자를 끌어다 오고 있었다.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쪽에서 곧 징징거리는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채로 고개를 돌리자 유화 물감이 그득 묻은 양 손바닥을 내밀고 울상을 짓고 있는 네가 보였다. 팔레트를 놓고 일어나려다 잘못 발을 딛었는지 제가 그렇게 두껍게 물감을 올렸던 그림을 손으로 붙잡아 버린 듯 했다.
그리 크게 소리가 나지 않아서인지 조금 소란스러운 틈에 다들 제 할 일 하기 바빴고 박지민 역시 엎드린 채로 미동이 없었다. 나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가만히 너를 보고 있었고 두 손을 내민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왔다. 멀뚱히 저를 쳐다보자 내 앞에 선 너는 제 두 손을 내 앞에 내밀고서는 여전히 울상을 하고서 말했다.
“야, 나 소온.”
아직 잠이 덜 깨 뿌연 시야에 물감에 더러워진 네 손을 한 번 보고 네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라는 거지 싶어 계속 저를 쳐다보자 닦아 달라는 건지 계속 내 앞으로 손을 들이밀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서 손을 씻으라며 턱짓했다. 그러자 울상 짓던 너는 나를 흘겨보더니 내 손을 확 낚아챘고 제 손에 묻은 물감을 내 양 손에 그대로 묻혀대고 있었다.
“야, 뭐 해!”
나는 기겁을 하며 손을 빼내려 했고 너는 헤실헤실 웃어대며 내 손에 계속 제 손에 묻은 물감을 옮겨 묻혀댔다. 계속 손을 빼내려다 망연자실하고는 네가 하는 양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 네가 원래 이렇게 귀여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네가 잡고 조물락대는 내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손 씻자, 이제.”
아직 잠이 덜 깼구나 싶었던 나는 어서 손을 씻어야 겠다 싶어 간질거리는 손을 얼른 빼내어 무작정 미술실을 화장실로 향했고 나를 따라 뒤쫓아 나오는지 탁탁거리는 슬리퍼 소리가 뒤따랐다.
몇 번을 빡빡 손을 씻어도 얼룩덜룩 자국이 남은 손을 하고서 화장실에서 손을 털고 나오자 반대편 여자 화장실에서 저도 손을 털며 나오는 네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복수랍시고 헤드락이라도 걸었을 텐데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손바닥에 그냥 너를 쳐다보았다. 너는 손을 몇 번 털다 나를 보고는 또 장난을 치듯 나에게 제 물기를 툭 털어냈고 나는 움찔했다.
“아, 이거 다 안 지워져.”
나는 이상한 기분에 손을 네 앞에 들이밀고 괜히 투정을 부렸고 너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했다.
“뭐, 핸드크림 발라줘?”
“당연한 거 아니야?”
“야, 내가 특별히 발라준다.”
너는 네 교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조그만 동물모양 핸드크림을 꺼냈고 저도 얼룩덜룩한 손을 하고서 핸드크림을 푹 퍼서는 내 손에 발라주었다. 달큰한 냄새가 나는 핸드크림을 내 손등에 대충 쓱쓱 발라주는 네 손에 이번에는 손등이 간질 간질거렸다. 그리고는 휙 돌아 미술실로 향하는 네 뒷모습을 보며 손등을 문질거리고 있자니 이제는 목구멍도 간질 간질거렸다. 네가 들어간 미술실 문 앞에 따라가 서자 미닫이 문 손잡이에 얼룩덜룩 묻어있는 물감 자국이 보였다.
미술실로 들어서자 네 손바닥을 잡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있는 박지민과 그 앞에 울상을 짓고서 아까처럼 징징거리는 너를 보고서는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내가 얼룩덜룩해진 기분이었다.
“야, 저거 불쌍한 척 하는 거야, 박지민.”
그래서 나는 더 큰 목소리로 장난을 걸어대며 둘에게 다가섰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열여덟의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학이라고 별 다를 건 없었다. 보충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에 나갔으며 저녁을 먹을 즈음까지 자습이랍시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었다. 오후엔 미술실로 도망을 와 네 옆에 앉아있으면 그만이었지만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힘이 빠졌다. 그래도 방학이라 허술해진 선도부며 늦춰진 등교시간에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다들 남녀 분반에서 선택형 보충 수업이라 여자 남자 섞여 수업을 받는 것에 많이 들뜬 것 같았다.
그에 맞춰 나도 아침부터 너와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에 조금 들떴다. 여전히 너를 볼 때마다 손바닥은 간지러웠고 목구멍도 간질 간질거렸다. 항상 붙어 있는 것이 당연했으니 여름방학 보충 시간표를 어떻게 짤 것이냐 묻는 게 당연했지만 괜히 고맙기까지 했다. 가끔 네 보호자처럼 붙어있는 박지민에 신경이 쓰이다 결국엔 너와 같이 앉겠다고 교실에 달려 들어가 자리에 앉아서는 네게 옆에 앉으라며 생떼를 쓰기도 했다.
“아, 여기 앉아. 어제 박지민이랑 앉았잖아.”
“김태형 애새끼냐? 김탄소 이리와.”
“너네 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진짜 피곤하게.”
항상 우리는 장난스러웠고 박지민은 우겨넣듯이 나를 안으로 밀어 넣고서 제가 내 옆에 앉곤 했다. 너는 항상 우리의 앞자리에 끌려오듯 앉았고 가끔은 제 반 친구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어렸을 적이나 저번 보충 수업 때만 해도 꽤 자주 졸아대는 네 모습을 보고 놀려먹어야지 하고 생각하며 웃어댔던 나는 왠지 지금은 꾸벅거리는 네가 그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러다 실없이 웃고서 끄적끄적 낙서를 해대다 본 옆자리의 박지민 얼굴이 방금 전 내가 짓고있었겠거니 한 얼굴이라 괜스레 입 안이 텁텁했다. 텁텁한 입 안에 뭐라도 달큰한 걸 우겨 넣어야 할 것 같아 쉬는 시간에 너를 데리고 매점에나 가야겠다 생각했다.
웬일로 박지민이 늦잠을 잤다. 매번 아침에 눈도 잘 못 뜬 채로 사거리 신호등에 서 있으면 각각 제 아파트 단지에서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 너와 박지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쪽에서 네가 걸어오더니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걸어가 길래 나는 또 강아지라도 된 마냥 너를 졸졸 따라갔다.
“지민이 방금 일어났대. 아픈가 봐.”
“그럼 오늘 우리 둘이 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네 옆에 서서 걸음을 맞추고 있자 어제 미술실에서 또 한바탕 유화를 그리더니 교복치마에 냄새가 배어버린 것인지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그렇게 맡기 싫었던 기름 냄새가 왜 갑자기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코가 익숙해져버린 건지 네게서 나는 냄새라 좋아진 건지. 후자가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냥 요즘은 네가 간질거리고 좋은 거 같으니까.
박지민은 보충 수업 1교시 시작 5분 전까지 오지 않았다. 너와 나도 간신히 지각을 면했기 때문에 박지민은 1교시 수업이 시작하고 한참 후에 올 듯싶었다. 오늘은 너를 옆자리에 앉혀두고 신나서는 계속 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는 하지 말라며 제 손등으로 내 손을 밀어냈지만 그렇게 툭툭 손짓하는 것도 좋아 계속 네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아, 하지 마, 쫌.”
그냥 흐 웃어버리고는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작거렸고 너는 기름 냄새와 묘하게 섞인 네 샴푸 냄새를 풍겨오고 있었다. 그 냄새에 이상하게 쿵쾅거리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네 앞에 놓인 책을 뺏어 들어 책상 서랍에 우겨넣고는 네 팔목을 잡고 말했다.
“우리 서점 가자.”
“뭔 서점.”
너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나에게 물었고 나는 매번 셋이었던 우리가 이제 둘이 된 것 같아 설레서는 뒷자리에 앉아있는 반 친구에게 홱 고개를 돌려서는 통보하듯 툭 내뱉었다.
“출석 부르면 우리 교재 사러 서점 다녀온다고 말해주라.”
“뭐, 교재. 나 책 있어.”
“아이, 아니, 나 사야 돼. 가자.”
자꾸 책이 있다며 내가 넣어버린 교재를 꺼내려는 네 다른 팔을 잡고는 네게 확 고개를 내밀었다. 너는 놀라 움찔거렸고 나는 씩 웃으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땡땡이 좀 치자.”
솔직히 네게 얼굴을 들이댔을 때 네가 놀란 것 보다 내가 백배 천배는 놀랐을 거 같다. 내가 얼굴을 들이대 놓고 순간 숨이 턱 막혀서는 말을 더듬을 뻔 했다. 훅 끼쳐오는 네 냄새에 나도 기름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곧 울릴 시작종과 선생님에 나는 얼른 너를 일으켜 교실을 나왔다. 너는 어리둥절해서는 나를 따라오다 제가 더 신이 나서는 경비 아저씨를 마주치기 전에 얼른 나가자며 종종거렸다. 네 말대로 경비 아저씨를 마주치기 전에 얼른 나가야겠다. 아니, 박지민을 마주쳐 붙잡혀 버리기 전에 얼른 셋에서 벗어나야겠다.
땡땡이래도 뭐 그리 대단하진 않았다. 교문 밖을 나왔다 한들 딱히 그렇게 갈 곳은 없었다. 박지민과 나왔더라면 당연 피시방이니 오락실이니 단번에 발걸음을 옮겼을 테지만 게임만 했다하면 제가 매일 진다며 재미가 없다고 싫어하던 너기에 근처 아파트단지 놀이터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너는 덥다고 징징대기에 바빴고 너만큼 더위를 타던 나는 내 더위를 집어넣어두고 네가 더울까 손바닥을 펴서는 네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주며 달래고 있었다.
“아, 그냥 있을걸. 더워 죽겠다.”
“아, 왜 그러냐, 내가 그래서 그늘 만들어 주잖아.”
“부채질도 좀 해봐.”
징징거리는 어르고 달래서 놀이터에 간신히 도착했다. 덥다고 짜증을 내던 너는 어딜 가고 오랜만이라며 또 종종거리며 달려가 그네에 털썩 주저앉는 너였다. 나는 너를 따라 그리로 쪼르르 갔고 살랑거리며 그네를 타고 있는 네 옆 그네에 앉았다.
“야, 야, 그거 기억나?”
그네에 앉아 넋 놓고 너를 쳐다보다 급하게 그네를 멈추고는 내게로 홱 고개를 돌려 말하는 너에 움찔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너는 탁하고 발을 구른 바람에 실내화 슬리퍼 안으로 모래가 들어갔는지 발을 들어 제 분홍색 실내화 슬리퍼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그때 초등학교 때 너네가 타임머신 태워준다고 나 그네에 앉혀서 막 돌렸던 거?”
“야, 그때 나만 그런 거 아닌데 너는 나한테 뭐라고 그러고 박지민은 자기도 같이 해놓고 너랑 같이 나한테 저기 서 있으라고 모래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그랬잖아.”
“어쩔, 그래서 뭐 억울해?”
“아, 진짜!”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던 너는 또 입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밉지 않은 너를 흘겨보고서 그냥 또 웃어버렸고 너는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라도 난 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 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리둥절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자 저를 잘 보라는 듯 나를 한 번 보고서 무작정 그네 줄을 잡고서 그네 위에 올라서는 너였다.
“야, 나 이거 진짜 잘 탔는데, 그치?”
어렸을 적처럼 서서 그네를 타려는 건지 너는 그네 위에 서서는 제 몸을 왔다 갔다 하며 살살 그네를 움직였다. 아까부터 미끄러운 그네 안장이며 네 실내화 슬리퍼며 신경이 쓰인 나는 그 옆에 서서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삐끗했고 나는 순간 놀라 휘청하는 그네 줄을 세게 움켜쥐어 멈춰 세웠다.
“아, 대박.”
나만치 너 또한 놀란 것인지 너는 얼이 빠진 채 말했고 내가 잡고 있는 그네 줄을 놓고 그네에서 내려왔다. 그제야 나도 그네 줄을 놓았고 너무 세게 쥐어 쓸렸던 건지 손바닥은 새빨갛게 생채기가 나있었다. 갑자기 몰려온 쓰라림에 나는 손을 탈탈 털었고 너는 그런 내 손을 붙잡고는 제가 더 아픈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헐, 너 손.”
또 훅하고 들어온 네 손에 나는 한 순간 쓰라리던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간질거림에 나는 손을 빼내려했고 너는 내 손목을 잡고서 놀이터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간질거림을 달고서 멍청하게 네게 끌려가고 있었고 너는 근처 슈퍼로 들어가서는 빠삐코 두 개를 집어냈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가 주머니에서 꾸깃거리며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는 계산을 마쳤다. 항상 그렇듯 안녕히 계세요 하며 인사를 빼놓지 않는 너를 보고 혼자 또 피식 웃음이 나오다 내 앞에서 제 손으로 빠삐코 겉포장을 벗겨내고 있는 너를 쳐다보았다.
“손.”
“손?”
“이거 대고 있어.”
너는 내 손을 잡아 펼쳐서는 손 위에 겉포장을 벗긴 차가운 빠삐코를 올려주웠다. 그리고는 제 몫의 빠삐코 겉포장을 벗겨서는 제 입에 물고는 턱짓했다.
“더어 주게따, 하겨 가다.”
입에 문 아이스크림 때문에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는 너를 보고 빠삐코를 쥐고 있는 손을 제외하고는 네가 더워하는 날씨만큼 뜨거워진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뜨거워서 옆에서 걷고 있는 네가 더워하면 어떡하지. 빨리 열이 식었으면 좋겠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교문에 다다르자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지 학교가 시끌시끌했다. 날씨가 덥다 더워서 밥맛이 없다느니 거짓말을 잘도 한다느니 하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물론 모든 대화의 끝은 웃어대는 걸로 끝이 났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면 교문이 보일 즈음 너는 미간을 찌푸려가며 저쪽을 쳐다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서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빠르게 교문을 향해갔다. 원체 걸음이 느린 너라 네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고 내가 따라 잡지 못할 게 아니었기에 태연하게 네 걸음에 맞춰 따라가자 불편한 기색을 한 박지민이 보였다.
“박지민?”
“어, 왔냐.”
박지민을 보고 이름을 부르는 너를 따라 나는 그저 툭 말했고 우리 둘을 번갈아 본 박지민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아침에 흘리듯 네가 아프다고 했던 박지민은 꽤나 멀쩡해 보였다. 아프다기보단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게 분명했다. 박지민은 초등학교 3학년인 10살 처음 봤을 때부터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꼭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너도 알고 있었을 일이었다. 근데 지금 박지민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아?”
분명 아침에 나에게 박지민이 아프다는 사실을 전할 땐 별 감흥도 없어 보이더니 너는 지금 울상을 짓고서 박지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히 또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네가 생채기가 난 손바닥에 쥐어주었던 빠삐코를 옮겨 쥐었다. 눈이 마주친 박지민은 저를 나에게 뺏겨버린 듯 보였고 나는 그에 내가 정말 너를 뺏은 것처럼 우쭐해졌다.
“나 아파서 먼저 간다.”
가방까지 다 챙겨 메고서 교문 앞에 서 있었던 박지민은 처음부터 정말 집에 갈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즉흥적이었던 것인지 네게서 눈을 떼더니 툭 내뱉고 나와 너를 지나쳐갔다. 확실히 말하면 너를 지나쳐갔다. 너는 저를 지나치는 박지민을 따라 네 몸을 돌렸고 토라진 듯 보이는 박지민에 허둥대며 박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야, 지민아!”
박지민의 이름을 부르는 너를 보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너는 내 헛웃음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랑곳 않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 버린 박지민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했고 순간 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 나왔다.
“나도.”
“어?”
너는 또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았고 나는 네 앞에 대뜸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벌갰던 손바닥은 가라앉아 이제 작은 생채기만 남아있었다. 손바닥을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너는 또 고개를 돌려 박지민이 가버린 쪽을 쳐다보았고 그 뒤통수가 싫어 나는 말했다.
“쓰리다. 양호실 가자.”
저 때문에 다친 곳이라 미안한 마음이 컸는지 너는 박지민이 가버린 쪽을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앞으로 왔다. 네가 박지민에게 가지 않은 건 정말 마음에 드는 일이었지만 지금 교문에서 학교 중앙현관으로 들어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몇 번을 뒤돌아보는 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꽤나 박지민을 신경 쓰고 있었다. 아프다며 집으로 가겠다는 박지민에 왜 내 손바닥을 내밀어 나도 아프다며 충동적으로 유치한 질투를 해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렇게 너를 붙잡은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냥 박지민과 너와 나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박지민은 그렇게 곧장 제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버렸고 나와 학교로 돌아온 너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하다 미술실에서도 의미 없는 붓질을 하고선 집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만난 우리 셋은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셋 중 누구든 저 혼자 먼저 가버리진 않았다. 오전 보충 수업 시간에도 그랬고 점심을 먹고 난 후 미술실에서도 그랬다. 어떻게 보면 너와 나 둘 과 박지민 하나의 냉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술실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셋이었지만 여름답지 않게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너는 박지민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은 걸지 못했고 대신 나에게 가금씩 툭툭 말을 걸어댔다.
“야, 그, 나 저것 좀.”
“이거?”
맞은편에 앉아있는 박지민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제 옆에 앉아있는 나에게 대각선에 있는 기름병을 달라 말했다. 덩달아 나도 박지민을 한 번 쳐다보고선 기름병을 집어 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훅 끼쳐온 기름 냄새에 네게 얼른 기름병을 주고서 내 하복 와이셔츠를 당겨 코를 묻었다. 분명 지금 미미하게 기름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나는 잡아당겼던 내 와이셔츠를 놓고 네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킁킁거리며 네 기름 냄새를 맡았다. 너는 왜 이러냐며 네 몸을 뒤로 뺐고 너와 같은 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나는 들떠서 네게 말했다.
“나한테서 기름 냄새나.”
“뭐?”
“너랑 같은 냄새나.”
무슨 소리냐며 표정을 찡그리는 너였고 나는 다시 한 번 내 하복 와이셔츠 냄새를 킁킁거리고는 너에게 헤실 거렸다. 기름 냄새를 기겁하던 내가 헤실 대며 말하자 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나는 그저 너와 같은 냄새가 나는 게 좋았다. 박지민은 그런 나와 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너와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만으로 괜히 우쭐해진 나는 입 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너 기름 냄새 싫다며?”
실없이 웃어대는 나를 보고 너는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너랑 같은 냄새 나는 거잖아. 좋네.”
같은 냄새가 나서 좋아 웃는 나완 달리 어딘가 뒤틀린 표정으로 나와 너를 쳐다보는 박지민의 얼굴은 상반되어 있었다. 너는 그런 박지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 기름 냄새 싫어하잖아, 그, 지민아, 나 그때 그 탈취제 좀.”
내게 말을 하는 듯 하던 너는 박지민에게 뜬금없이 탈취제를 달라며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박지민의 눈치를 보던 너는 지금 상황에 생뚱맞게 탈취제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드디어 너와 같은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하는 네가 미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너는 박지민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박지민도 나에게 뿌려주려는 탈취제를 네게 쥐어주기 싫은 것 같았고 나 역시 기름 냄새를 지우고 싶지 않은데 너는 왜 자꾸 모나고 있는지 모서리가 나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빡찌, 너 왜 안 와.”
“아파, 먼저 가.”
다음날 박지민은 학교에 나오지 못할 만큼 아팠다. 사거리 신호등에서 너와 함께 박지민을 기다리다 너에게 등 떠밀려 전화를 걸었을 때 박지민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더니 박지민은 개만도 못하구나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박지민의 눈치를 여전히 보고 있는 너나 아무렇지 않은 척 박지민을 대하면서 삐뚤어지는 나나 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하는 것 같지만 모든 티가 나는 박지민이나 아직도 우리 사이는 차가웠다. 겉보기에 멀쩡한 틈 사이로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박지민이 없는 둘 만의 등굣길에 마냥 신나지는 않았다. 옆에서 무슨 말을 걸어도 결국 박지민 걱정을 하고 있는 너였고 나는 자꾸 쪼그라들고 있었다.
“2교시 땡땡이칠까? 영어 요즘 출석 안 하던데.”
“요즘 안 하지, 오늘 안 한다디?”
“아, 오늘도 안 하겠지.”
“그런 날 출석 체크 한다. 야, 이모 오늘 몇 시에 퇴근 하시지? 저녁까지 지민이 혼자 있으려나?”
“몰라, 혼자 있겠지, 뭐.”
너는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에 아픈 박지민이 혼자 끙끙댈까 걱정이었다. 박지민이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항상 제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참다 참다 크게 앓았던 박지민이었기에 지금 이 시점 박지민이 아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못마땅했다. 지금 신경 쓰여 하는 일이 우리 셋에 관한 일이라는 게 불편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불편했다. 이건 분명 박지민이 너를 아주 크게 생각한다는, 그러니까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오전 보충 수업 시간 내내 박지민 걱정을 하던 너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곧장 가던 미술실을 뒤로 하고는 나를 우리 반 교실로 밀어 넣고 저는 제 반 교실로 종종거리며 사라졌다. 가방을 챙겨 나오라는 네 말에 순간 나는 오후 자습을 빼고 어디 놀러라도 가자는 소리인 줄 알고 들떠서는 무작정 필통이며 책이며 가방에 우겨넣었다.
신발까지 양 손에 들고 중앙 복도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자 너는 제 가방을 메고서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는 제 손을 까딱거리며 따라오라며 제 손에도 나처럼 제 신발을 들고 까치발을 한 맨발로 계단을 폭폭 밟아 내려갔다.
얼른 너를 따라잡아 걸음을 맞춰 나도 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들뜬 마음에 발음까지 뭉개져서는 네게 물었다.
“어디 가게?”
“어디 가긴, 박지민네 가야지.”
“어?”
너는 나를 힐끗 보고 말했고 나는 순간 내려오던 계단을 우뚝 멈췄다. 몇 계단 더 내려갔던 너는 나를 따라 멈춰서는 뒤를 돌아 올려다보았고 나는 어딘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신나하던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박지민이 너를 좋아한다 확신을 한 상태에서 본 지금 네 모습은 배알이 꼴리기 충분했다. 무슨 영문이냐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너에게 무슨 말을 물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리 되지 않은 채 나는 실없는 물음을 던졌다.
“박지민한테 그렇게 가고 싶어?”
내 물음에 너는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고 눈을 한 번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끄덕거림에 나는 힘이 쭉 빠졌고 곧이어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가 아프다는데 너는 걱정도 안 되냐?”
그래, 내가 박지민에게 질투라는 것을 느끼기 전에 박지민은 내 친구였다.
맛있는 걸 사가겠다며 근처 마트에 들른 너는 과자며 잡다한 먹거리를 사고서 빠삐코 세 개까지 집어 들었다. 아파 골골 댈 박지민이 과자며 아이스크림이며 먹을 수 있을리 만무했지만 네게 작은 핀잔도 하지 않았다. 네가 박지민을 걱정해 호들갑을 떨며 과자를 내려놓고 나를 죽 집으로 끌고 가는 게 더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고른 과자로 가득 한 비닐봉투를 들고 걷자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박지민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너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갑자기 우뚝 멈췄고 나는 잘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이때다 싶어 멈췄다.
“아.”
“지민이 아프니까 죽 먹어야 되는데.”
곧 이어 붙여진 네 말은 힘이 쭉 빠지기 충분했고 입술을 두어 번 축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가서 제가 만들면 그만이라며 다시 발걸음은 뗐고 이번에 너를 따라 옮기는 발걸음은 더 무거웠다.
현관문을 퉁퉁 두어 번 친 너는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박지민 이름을 부르며 얼른 문을 열라 난리였고 곧 누가 봐도 물을 먹어 축 쳐진 솜 같아 보이는 박지민이 문을 열었다. 박지민은 네 얼굴을 한 번 보고 그 뒤에 있는 내 얼굴을 한 번 보았고 또 반쪽이 된 박지민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인 나는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보였다.
“까까 사왔다, 까까.”
너는 내가 들고 있는 봉투를 가리키며 박지민에게 말했고 나는 그냥 샐쭉 웃어버렸다. 내 웃는 낯을 본 박지민은 저도 피식 웃어버렸고 뒤를 돌아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제 방으로 향했다. 너와 나는 익숙한 듯 신발을 벗고 들어가 가방을 아무 곳에나 팽겨 치고는 박지민을 따라 들어갔다.
꽤 아픈 건지 박지민은 제 침대 안으로 뭉기적 들어가 이불에 파묻혀 눈을 감고 있었고 너는 소란스럽게 부엌으로 향해서는 달그락거리며 소리쳤다.
“야, 빡찌, 너 밥 안 먹었지?”
박지민은 대답할 힘도 없는지 가만히 눈을 떴다 다시 감았고 나는 그 앞에 서서는 네게 대신 소리쳤다.
“안 먹었대!”
너는 흰 쌀죽이라도 만드는지 혼자 분주했고 나는 네 침대 밑에 벌러덩 앉아서는 과자를 뒤적거렸다. 가스레인지를 켜두고 탕탕탕 소리를 내며 방으로 돌아 온 너는 내 앞에 섰고 괜히 민망한지 눈을 감고 있는 박지민에게 타이르듯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뭘 아프고 그래, 또. 여름인데 무슨 감기야, 어?”
박지민은 잠이 든 건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고 너는 내 옆에 앉아 역시 과자를 뒤적거렸다. 그러고 앉아서 잠이 들어버린 듯 한 박지민을 두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툭툭 내뱉다 치익거리는 가스레인지 소리에 너는 나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야, 가서 저거 불 좀 줄이고 몇 번 휘젓고 와라, 태형아.”
나는 귀찮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대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고 너는 나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는 활짝 열린 방문을 닫고 부엌으로 나갔다.
네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고 머리를 두어 번 털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박지민을 쳐다보았다. 누워있는 박지민을 쳐다보다 여러 가지 이상한 기분에 그냥 반쯤 내려와있는 이불을 끌어 목까지 덮어주고 말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과자를 집어먹으려다 웅얼거리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나는 박지민을 쳐다보았고 박지민은 한껏 열이 올랐는지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 좋아하는데.”
박지민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꼬대인지 무엇인지 눈을 감고서 웅얼거리는 게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 너 좋아하는데, 탄소야.”
쿵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나는 박지민이 널 좋아한다 확신을 해놓고 확인사살을 당하니 부정하고 싶어졌다. 박지민은 지금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거라고. 박지민의 꿈속에서는 너와 박지민이 뭐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그런 잠꼬대를 하는 거라고. 그것도 딱히 안심이 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랬다.
“좋아하는데 왜 자꾸 김태형이랑 그래.”
잠꼬대든 뭐든 지금 네가 아닌 내가 대신 듣고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피한 거니까. 네가 박지민에게 이 말을 고스란히 들어버리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꽉 잠긴 박지민의 목소리는 끝이 났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지금 내가 긴장을 한 건지 아님 네가 다가오는지 쿵쿵쿵 발소리가 들렸다. 네가 다가오고 있는 게 맞았는지 벌컥 하고 방문이 열렸고 끝난 줄 알았던 박지민의 꽉 잠긴 목소리가 대답을 재촉하는 듯 들렸다.
“…어? 듣고 있어?”
“뭘? 왜?”
너는 문 앞에 서서는 나와 박지민을 번갈아 보며 물었고 나는 너를 쳐다보았다. 박지민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것 같았고 너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왜, 지민이가 뭐래? 머리 아프대?”
“아니.”
아직도 박지민 걱정뿐인 너를 보고 나는 고개를 짧게 내저었고 너는 그럼 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고 입술을 한 번 핥고는 너에게 말했다.
“박지민이 너 좋아한대.”
내 말에 너는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지금 이 대화를 듣고 있을 듯 한 박지민을 한 번 떠올리고는 이어 붙였다.
“근데 나도 너 좋아하는데.”
네 표정을 예상하진 않았다. 내 말을 듣고 네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예상하진 않았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네 얼굴은 인상을 찌푸린 표정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변해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네 얼굴을 보고 있었고 너는 헛손질을 하고선 말했다.
“아주 둘 다 놀고 있네.”
너는 내 말이며 그 안에 있는 박지민의 말이며 가벼운 장난으로 넘겨버리고 있었다.
“야, 지금 내가 병수발 드는 거랑 너는 손 까딱도 안하고 앉아있는 거랑 그렇게 퉁 치려고 하지 마라.”
허탈감은 컸다. 네가 장난으로 넘겨버린 허탈감도 컸고 박지민이 너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확인 사살 당했다는 것 또한 허탈감이 컸다. 나는 아마 확신하고 있었다지만 0.1 퍼센트라도 아닐 거라는 설마 하는 생각에 알게 모르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떠한 쪽이든 허탈감은 엄청났고 그 허탈감을 이겨낼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 미묘했다. 무슨 일이 결정이 난 것도 아니면서 내가 밀리는 기분이 컸다. 그냥 자신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뭘 어떻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꽉 매우고 있었다. 날씨는 더웠고 나는 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숨이 막힌다.
“밖에 비 온다.”
덩그러니 미술실에 혼자 앉아 만화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저쪽에 앉아있던 미술 동아리 친구 중 하나가 창문을 보더니 하는 소리였다. 창밖을 보자 장마가 오려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너는 얼마 전부터 말하던 실기대회에 나간다며 아침 일찍 대회장으로 향했다. 시에서 주관하는 대회라며 들떠있던 네 모습이 놀려먹기에는 딱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너를 놀려먹다 순간순간 스치는 박지민의 웅얼거림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만 그냥 당장은 너를 그렇게 놀려대는 게 좋았다. 그만큼 틱틱대는 네가 귀여웠으니까.
박지민은 내가 저의 말을 들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네가 제게 죽을 들이밀었을 때도 멍청했다.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건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건지. 그런 박지민을 보며 그 상황 속에서 머리가 복잡한 건 나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박지민은 여전히 너를 애매모호한 그런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박지민과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지 아님 오래 전부터 그렇게 봐와서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아무렇지 않아 하는 너였다.
그래서 나는 너희 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했다. 박지민의 웅얼거림을 듣고 나서 인지 더 이상했다. 이상하게 내가 작아지는 기분. 네가 내 앞에서 박지민의 걱정만 하고 있을 때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과연 너는 내가 아프더라도 그때처럼 박지민 걱정을 하듯 말끝마다 김태형을 맺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너와 박지민의 연결고리는 두터웠고 그 만큼 나와 박지민의 연결고리도 두터웠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좋은 것도 좋은 것이지만 박지민은 내 친구였다.
오늘 아침 실기 대회에 간다는 너를 만나기 위해 평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네 집 앞으로 향했다. 박지민은 그 후로도 더 골골대더니 어제 네 으름장을 듣고 병원에 갈 생각인 듯싶었다. 아침에 걸어 본 전화에서 들린 박지민의 목소리는 정말 병원에 가야겠다 싶었다. 셋이 아니라 둘이라는 들뜸은 전보다 덜했다. 네 집 앞으로 향하면서 자꾸 박지민이 발에 치였고 왜 걸음마다 너와 박지민이 번갈아 떠오르는지 짜증까지 날판이었다.
“가서 꼴등만 하지 말고 와라. 학교 망신이다.”
“진짜 죽고 싶냐? 떨려 죽겠구만.”
꽤 긴장을 했는지 너는 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또 어젯밤 늦게 잠든 것인지 하품을 해대는 게 그림 그리다 잠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떨린다며 제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내리는 네가 잔망스러워서는 머리를 한 번 헝클어주었다. 너는 신경질적으로 엉망이 된 네 머리를 정리했고 다시 손을 뻗어 나도 동참했다. 자꾸 왜 이렇게 너와 박지민이 겹쳐 보이는지 불편했다.
미술실에 너와 박지민이 없는데도 그냥 습관처럼 오후 자습을 빼고 미술실에 혼자 앉아있었다. 두루두루 다 친하게 지낸다지만 동아리 내에 딱히 너와 박지민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마음 편히 웃고 떠들만한 친구는 없었다.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친다면야 하겠지만 우리 셋과는 달랐다. 박지민도 학교에 나오질 않았고 너도 나오질 않았으니 하루가 무기력했다. 날씨도 닮아 가는지 꾸물꾸물 거리더니 기어코 비가 오는 구나 싶어 멍하니 내다보던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옆에 쌓아두었던 만화책을 밀어버리고 엎드렸다. 오전 보충 수업 내내 그렇게 잠을 자놓고도 다시 엎드리니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타닥거리며 창문을 쳐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귀가 먹먹해졌다. 점심도 먹었고 대회 시작하고 시간이 좀 지났으니 너도 곧 끝났겠다 생각이 들었다. 네 생각을 하자 또 구름이 몰려오듯 박지민이 몰려왔다. 신경이 쓰인다. 구름을 걷어내야 하나 아니면 구름에 가린 시야를 돌려버려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구름을 걷어버리기도 싫고 시야를 돌려버리는 것도 싫은데.
먹먹해진 귀가 익숙해질 즈음 오늘은 네게 연락을 하려 내지 않았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울렸다. 얼마나 엎드려 있었다고 찌뿌둥한 몸에 미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교복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비 오는데 우산 없어서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불쌍한 탄소 데리러 와 줄 사람?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나기라서 그런지 너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봤던 너는 물통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 틈에 우산은 없었다. 어떡하지, 나도 우산 없는데.
나는 미술실을 나와 자습 중일 교실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빼꼼 내밀어 본 창문으로 자습 감독 선생님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얼른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걸어 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저쪽에 엎드려 자고 있는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흔들어 깨워서는 내가 빌려주었던 체육복 상의를 뺏어 들어 곧장 교실을 나왔다.
비를 맞으면 넌 감기가 걸릴 게 뻔했고 나는 체육복 상의를 네게 씌워주려는 생각이었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체육복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맞아대니 그래도 다행히 냄새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몰라 한 손으로 팡팡 쳐대며 계단을 밟아 내려온 나는 중앙 현관에서 신발을 툭 바닥에 놓고 발을 구겨 넣으려다 멈칫했다. 구름이 너무 많이 낀 것 같다.
한참을 구겨 신은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체육복을 꽉 쥐었다 놨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구름은 생각보다 진했고 구름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항상 셋이었다. 그래서 요 근래 잠깐 둘이 되었을 때도 나는 많이 설레 있었다. 그러다 다시 셋으로 돌아왔을 때 박지민을 불청객인양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 나야 당연히 구름이 걷혀야 너를 볼 수 있으니까. 그 잠깐 둘이었다고 박지민을 불청객 취급하던 나는 몇 년을 앞 서 너를 보았던 박지민에게 큰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둘로 시작해 셋이 돼버린 박지민이 처음부터 셋으로 시작해 잠깐 둘이었던 나만치 억울할까 생각했다. 박지민은 아마 나보다 곱절은 억울할 셈이었다.
아직 비는 내리고 있었고 박지민의 억울함과 나의 억울함을 저울질 하던 나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억울함을 저울질하기엔 일단은 네가 좋았다. 그리고 비를 맞을까 네가 걱정되는 마음이 헤집어놓았다. 나는 네게 펼쳐 씌워주려는 체육복을 젖지 않게 품에 보듬어 안고서는 달려 나갔다. 툭툭 빗방울이 자꾸 떨어졌고 체육복을 적시지 않으려 몸은 계속 굽고 있었다. 꽤 오는 비에 네가 있는 정류장까지 달려가는데도 벌써 와이셔츠가 젖어 안에 받쳐 입은 흰 티까지 젖고 있었다. 교복 바지 역시 젖어서는 걸리적거리게 다리에 붙어왔다. 신발은 젖어버린지 오래였고 축축해 웅덩이를 세차게 밟아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다만 체육복이 젖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제 코너를 꺾어 가면 네가 서 있는 정류장 건너편이었다. 근처 신호등이 내가 코너를 꺾었을 때 파란불이길 바라며 코너를 돌아갔고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흐르는 빗물에 눈을 찡그려 본 나는 우뚝 멈춰버렸다. 버스 정류장에 비를 피해 서 있는 네 옆에서는 바지가 반쯤 젖은 박지민이 한 손엔 우산을 들고서 제 머리의 물기를 털고 있었다.
체육복이 젖을 새라 꽉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체육복은 반점이 생겨나더니 곧 푹 젖어버렸고 나는 자꾸 시야를 가리는 빗방울에 눈을 깜빡였다. 내 머리카락은 박지민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푹 젖어버렸는데 너는 머리카락이 축축해진 박지민이 걱정이 되는지 까치발까지 해서는 박지민의 머리를 제 손을 툭툭 털어주고 있었다. 내 머리 위에는 네 손 대신 빗방울 툭툭 쳐대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는 너와 박지민이 우산을 펼쳐 저쪽으로 점이 될 때까지 쳐다만 보고 있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체육복을 내려다 본 나는 우산을 빌려 올 걸 왜 멍청하게 체육복을 들고 왔을까 생각했다. 물을 먹어버린 체육복을 펼쳐 비를 막아 봐도 묵직하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마가 시작 된 빗방울은 아렸고 구름은 시야를 가려버릴만큼 짙었다. 나는 구름을 걷을 수가 없어 시야를 돌려버려야겠다 다짐했다. 다짐이라기 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와 박지민은 오늘 결혼 한다. 주위에선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태반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매일 진절머리가 난다며 고개를 태연하게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몇 십분 전까지만 해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저 둘과 함께였음에 대한 장난스러운 위로를 던졌고 나는 그 장난스러움에 걸맞게 능청스러운 반응을 내비쳐주었다. 누구든 나의 열여덟 여름을 알아서 툭 던지는 말로 나를 위로한다면 그 아련함에 숨을 쉬지 못 할 지도 모른다.
열여덟의 여름 나는 치기 어린 첫사랑을 선택하는 대신 셋을 선택했다. 미숙했던 나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채 깨닫기 전에 친구라는 것에 발목이 잡혔고 지금 와서 그렇게 발목이 잡혔다는 것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조금은 원망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 작은 원망은 내가 너와 박지민을 계속해서 눈에 담아야하는 씁쓸함 같은 것이다.
너와 박지민을 보고 흠뻑 비를 맞고 돌아온 나는 한동안 앓아누워 혼자 생각했다.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둘을 선택하지 않고 외로운 셋을 선택했다는 걸 잘한 일이라 그때의 나를 칭찬할 거라고. 그렇게 하면 나는 친구 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오늘 그때의 내가 왜 신발을 얼른 고쳐 신지 않았는지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고 왜 시야를 돌려버렸는지 후회했다. 너와 박지민을 지켜냈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친구인 너를 잃었다. 나에겐 너와 친구 박지민이었다.
네가 박지민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멍청히 지켜보다 얼른 네가 아닌 친구인 너를 되찾아야겠다 속으로 백번은 다짐했다. 아직도 지금 내 곁에 머물러있는 그 해 여름의 잔해들을 어서 그 해 여름이 오기 전으로 완벽히 돌려놓아야 한다.
나에게 그 해 여름은 치기 어린 열여덟의 물장구였다.
키치키치의 말 |
이 글을 기억하고 계실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여름에 한 작가님과 같이 계획했던 콜라보 글입니다. 저는 열 여덟 태형이의 여름을 그 작가님께서는 열 여덟 지민이의 여름을 그리기로 했었는데 작가님께서 개인 사정이 있으신지 저는 모르겠지만 연락이 두절이 되버려서요...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보려고 했고 그러다 작가님이 연재글 업로드 하신 걸 보고 연락 기다리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시는 걸 보면 제가 이렇게 글을 올려도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진 않겠죠? 저는 작년 여름에 이 글을 되게 재밌게 적었는데 그냥 그렇게 묵혀두기 제가 너무 아쉬워서 혐생 중에 업로드를 합니다 ;ㅅ;
원래는 동창회 부분이랑 겹쳐서 응답하라 시리즈 처럼 남편을 찾는 그런 스토리였는데 지민이의 여름은 제 분량이 아니니 태형이의 여름으로만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버렸네요 !
제 (혐)오스러운 인(생)을 이해해주십사... 과제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씻기 전에 짬 내서 얼른 후딱 수정해서 올려요 !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다시 만날 날을 기리며...! 독자님덜 안녕 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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