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어떡해 |
숨이 막혀왔다. 뜨거운 불길에 대인 손등이 쓰라리게 아파왔다. 꽉 막힌 공간에서 살려 달라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치솟아오르는 불길 사이로 마주한 얼굴들은 모두 고통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두려웠다. 내 다리를 부여잡는 손길들도, 여기서 빼어내 달라 말하는 눈동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 칠 수 없다. 머리가 새하얀 백지장처럼 비워져버렸다.
" 울지마, 울지마. 우현아. "
나는 금세 촉촉하게 젖어버린 너의 손을 만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너의 환한 웃음이었다.
어제의 오늘 written by. 라우
김성규는 배려심이 깊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었다. 그건 사랑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 녀석이 유일하게 고집을 부리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건 바로 '텔레비전' 이었다. 김성규는 드라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는 그런 김성규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인물도, 엉킨 가족 관계도, 뻔하디 뻔한 전개 방법도.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이 드라마를 볼 때면, 나는 방에 들어가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김성규는 원래 드라마는 그런 맛으로 보는 거라고 내게 누누이 이야기 하며 기어이 나를 자신의 옆 자리에 앉히고는 했다. 비현실적인 요소에 공감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적인 소재의 신파극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성규는 흔히 '막장' 이라고 불리는 드라마를 유난히 더 좋아했다. 뚱해진 내가 괜히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어.' 라고 투덜거릴 때면, 김성규는 낄낄 웃어댔다.
' 아, 남우현 진짜 웃겨. ' ' 내가 왜? ' ' 왜 그렇게 삐뚤게 보냐, 드라마를! 그냥 재미로 보는 건데. ' ' 충격적이니까 그렇지. ' ' 드라마니까 가능한 거야. 허구잖아. ' ' 몰라. 마음에 안 들어. ' '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
실제로 일어날지도. 사람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이런 거라도 보면서 미리 예행연습도 하고 그런 거지 뭐. 나는 김성규가 말을 끝내자마자 비웃었다. 어쭈, 웃냐? 그래. 비웃는다. 나는 믿었다. 헤드락이라면서 내 목을 감아오는 녀석이, 녀석을 보며 웃는 내가, 김성규와 내가 함께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 신파극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문득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 그날은 유난히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다를 보러 가자며 김성규를 보챘다. 보고서 때문에 밤을 꼬박 샜다며 피곤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화장실로 떠밀었다.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며 툴툴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 아, 진짜 남우현. 완전 나빠. " " 내가 뭘? " " 어떻게 남자친구가 피곤하다는데, 봐주지를 않냐. " " 놀러가고 싶은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
그게 왜 하필 지금인데. 팔자로 휘어진 녀석의 눈썹을 만지작거리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 아쉬웠다. 김성규는 못잔 잠을 버스 안에서라도 자야겠다 싶었는지 내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버스는 조용했다. 바깥이 어두운 탓에 몸이 저절로 나른해지는 것만 같았다. 원래 잠귀가 밝던 김성규는 깊이 잠이 들어버린 것인지 내가 아무리 옆에서 뒤척여 보아도 움직임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아저씨, 속초까지 몇 시간 정도 남았어요? ” “ 한 삼십 분 뒤면 도착할거여. ”
나는 겨울 바다를 볼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마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잔잔히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음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김성규를 깨울 때 즈음이었다. 커다란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버스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느 새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 …규야. 성규야. ”
김성규는 여전히 단잠에 빠진 상태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녀석은 그제서 깨어났다. 김성규는 몸을 심하게 떨고 있는 나를 품에 안고선 상황파악을 하려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성규야, 뭔가 이상해.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때였다. 김성규가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조용하던 평화가 깨진 건, 한순간이었다.
지옥, 그곳은 지옥이었다. 나는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믿고 싶었다. 눈을 뜨고 나서 한참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온 몸이 굳어버린 탓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힘도, 그럴 겨를조차도 없었다. 김성규는 없었다. 소리내어 울었지만 달려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나는 오열했다.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
“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 ……. ” “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세요? ” “ …그냥요. 어제처럼, 그렇게. ” “ ……. ”
어제의 오늘을 살아가겠죠. 앞으로도.
호원은 자신의 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우현은 웃었다. 하늘은 어두웠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이만 가볼게요. 아직, 비는 무섭거든요. 호원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꾸만 우현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제의 오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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