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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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3월에 접어들고 있었고, 날은 따뜻해졌으며 남아있던 눈도 녹은지 오래. 나도 조금 안정되가고 있었다. 해탈했다고 해야 하나. 구질구질 추억만들기에 목 메려하지 않았고, 그냥 흐르는데로 두었다. 이것이 제일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지금은 한달도 남지 않은 검정고시 때문에 공부에 죽어라 메달리고 있다. 아르바이트, 독서실, 아르바이트, 독서실. 주말엔 가끔 오피스텔. 이 정도의 일상이었다.
"거기 학생." "……아저씨?"
아, 중요한 건 아저씨가 일주일에 일곱번은 독서실 앞으로 찾아온다는 거. 그냥 오면 뭐라고 안 하겠는데, 올 때마다 뭘 바리바리 사가지고 오니까 미칠 노릇이다. 샤프에 색색 볼펜, 형광펜, 잉크펜에 쓰지도 않는 모양자까지 꾸역꾸역 든 필통이 첫 시작이었다. 그땐 필기구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추우면 공부 안된다고 코트를 사다주질 않나, 발 시리면 공부가 안된다고 신발을 사다주질 않나. 대체 그건 무슨 논린지. 이제 날이 풀리니 그런 건 안 사오겠지, 했는데 이젠 먹을거리다. 안 그래도 그냥 서서 일하고 앉아서 공부하고 집 왔다 갔다 하는 거 뺴면 움직이지도 않는데 자꾸 먹여대니 살만 붙고 있었다.
"아, 왜 그 신발 안 신었어."
"코트는?"
"말 죽어라 안 듣지?" "그러니까 그런거 그만 좀 사와요. 괜찮다니까 자꾸 그래."
"어? 어디 가. 안타?"
"그러니까 태워다줄게." "거짓말."
"음, 뽀뽀만 세번할게."
"진짜?"
진짜야. 응? 응? 하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곤 울상을 지어보이는게 귀여워서 속는 셈치고 조수석에 올랐다. 문이 닫기자마자 닿는 입술. 딱 세번이랬어요─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아저씨가 입을 삐쭉거린다.
"약속한다며, 거짓말쟁이."
"그땐 그냥 뽀뽀만 하고 싶었지." "지금은?"
"아우, 진짜."
"어? 어. 그렇지……." "그날 뭐해요?"
쉽사리 대답 못하는 걸 보니 만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젠 표정만 봐도 알 것 같다. 뭐가 거짓말이고 진심인지. 나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진심이 더 많으니까. 지금이 예외일 뿐. 봐, 방금 보고싶다고 할 때도 진심이었어. 어쨌든, 일주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 기념일같은 것에 연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생일 때도 케익에 초키고 소원빈게 다였다. 내가 불안한건 공부한답시고 아저씨에게 소홀해진 사이 나보다 그 여자에게 더 가까워지는 거. 전의 회사 앞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걸 보았을 때로 짐작해보면 그리 사이가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그날도 회사에 있을 것 같아."
"흐음. 그렇구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사람이 시시때때 이렇게 독서실 앞에 올리가 없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 말에 이제는 짜증은 커녕 그저 우스웠다. 그래, 나 하나 속여먹으려고 집까지 마련한 사람인데 뭐. 아저씨의 거짓말은 빈틈투성이다. 근데 그게 또 귀엽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날 속여먹으면서 옆에 두고 싶다는 뜻이니까 굳이 짜증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공부하다가 때때로는 시간도 얼마없는데, 괜히 시험을 보겠다고 해서 추억만들 시간을 뺏기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저씨가 독서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식의 추억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그런 생각은 눈녹듯 사라져 버리지만. 공부한다고 밥 안 챙기는 거 안다며 내 손에 고급 비타민제를 쥐어주는 아저씨를 보며 그냥 웃고 말았다. 진짜, 오늘은 왜 아무것도 없나 했네.
"남자친구 생겼니?"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없는 주말, 아침 일찍부터 독서실에 갈 채비를 하던 나에게 할머니가 물어왔다.
"응? 왜?"
"요즘 이것저것 받아오구 있잖어. 그러지 말어." "내가 달란거 아니에요! 싫대두 자꾸 가져오는 거야. 할머니는 내가 그런거 달라구 할 사람같애?"
"그래서 남자친구가 생긴건 맞구?" "……있긴 있지."
"아이구─ 우리 손녀 다 컸네. 뭐하는 놈이여?"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허당인걸요.
이제껏 어찌 참으신건지 어떻게 생겼고 어디 살고 부모님은 뭐하시냐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할머니의 질문공세에 대강 둘러대다 집을 나섰다. 나이는 나보다 열살 많고 결혼도 한 남잔데 애는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둘러대느라 혼났다. 끝끝내 할머니는 학생이 뭔 돈이 있겠냐며 이런건 그만 받아오라고 훈계했다. 자꾸 그러시길래 어제 받은 비타민제 드리면서, 이거 할머니 갖다드리랬다고 하니까 단번에 표정이 밝아지셨다. 우리가 목메다는 돈 백만원쯤은 우습게 버는 사람인데 몇십만원 코트 하나 받는다고 그 집 안 거덜나, 할머니. 공부를 하다가도 그 생각이나 자꾸 웃음이 입술새를 비집고 나왔다. 말이 좋아 기분좋은거지, 영 집중이 안 되서 커피 한잔 뽑아먹으려 복도로 나왔다.
공부를 하는 책이나 쓰는 샤프와 지우개. 하다못해 요점에 밑줄을 긋는 형광펜에 그것이 들어있는 필통과, 할머니가 내 신발을 빨아버리는 바람에 신고 나온 아저씨가 사준 신발까지. 온통 아저씨가 떠오르는 것들 뿐인 걸 보면 아저씨가 영 바보는 아닌가보다. 지능적으로 자기 생각만 하게 만들어.
이제 완연한 봄인 듯 날이 따뜻하다. 난 봄이 좋다. 낡아빠진 점퍼는 입지 않아도 되니까. 봄이 올때가 되면 아직 쌀쌀하다고들 말해도 티셔츠 바람으로 나다니고는 했다. 할머니 마음 아프실까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나도 여느 여자애들과 다를 것 없이 그런 옷이 창피했다. 이젠 그렇지 않지만.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예쁜 것 같았다. 그게 내 외모에 대한 자만이라기보단, 나는 겨우 이 정도지만 아저씨가 예쁘다고 해주니까 그걸로 됐다 싶은 거.
그 여자 앞에 서면, 다시 열등감에 사로잡힐 것 같지만.
무심결에 홀짝인 커피가 써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블랙을 뽑았었나보다. 속쓰려.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미친 짓인가, 생각하면서도 자수를 놓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선물을 주긴 줘야할 것 같은데 사정이 변변찮아서 손수건을 선물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잠도 못자고. 그러다보니 아르바이트는 실수 연발이고, 독서실에서도 졸고. 때려칠까 했지만 공방에서 자재사온 돈이 아까워서라도 꼭 다 완성해서 선물하고 말겠다고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완성해냈다. 꼬박 사흘걸렸다. 오늘은 10일. 아저씨 생일 당일인데, 문제는 아저씨가 연락이 없다는 것. 며칠동안 아저씨가 보이지 않길래 정말 바쁜 건가, 했는데 연락도 없었다. 이러면 회사로 찾아가는 수 밖에 없는데─ 전에 그 여자와 있는 걸 본 뒤로 그 근처로는 가고 싶지도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가 간다. 가기만 한다. 결국 아저씨는 받지 않았고, 일단 회사 앞으로 가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놈의 망할 오피스텔 생각도 났는데, 진짜 집도 아닌데 거기 붙어있을리가 없잖아.
회사 앞까지 왔는데, 봄이라 해가 길어져서인지 아직 꽤 밝았다. 또 그 여자를 만나는 게 무서워서,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회사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그 여자가 나타났다. 나처럼 아저씨를 기다리는 듯, 짜증나는 표정을 하고 건물 기둥에 기대 팔짱을 끼고는 주욱 입구를 노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더 뒤에 있기에 망정이지, 맞닥뜨렸으면 큰일날 뻔 했다. 여자는 오늘도 대단한 차림이다.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흰 잔꽃이 만발한 분홍색 쉬폰 원피스와 흰 자켓, 높은 하이힐. 이런 생각 잘 안하는데, 저 여자 것은 자꾸 탐난다. 매끈한 다리도, 아무 생각없이 거리에서 마주쳤으면 세명에 한명은 돌아봄직한 예쁜 얼굴도.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아저씨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 짜증이나 표정으로 아저씨에게 다가간다. 아저씨도 만만찮게 짜증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나와 있을 때처럼 웃지 않아서.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그래서 다행이다. 여자가 아저씨에게 뭔가를 건넸다. 생일선물인 모양인지, 정성스러운 건 몰라도 예쁘게는 포장되어 있었다. '이게 뭔데?'아저씨가 포장을 뜯는다. 서류 가방. 아저씨가 들고 다니는 브랜드의. 큼지막히 로고가 박혀있어서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었다. 아저씨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여자가 웃는다. 끔찍하다…….
내 손에 들린건 그냥 손수건인데. 어젯밤 수십번 묶었다 풀었다 반복하다 끈에 주름이 져서 두번은 바꿔 매었던 리본. 1000원 차이로 엄청 고민 했던 종이 상자. 천쪼가리 하나 고를 때도 500원이 아쉬워 500원 비싸고 더 좋은 천을 살지 말지 20분을 망설였는데. 대단한 여자다. 손가락 까딱 안하고 또 날 이렇게 만든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이 울렸다. 아저씨? 미친거 아냐? 고개를 돌려보니 아저씨가 그 여자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고, 아저씨와 그 여자에게서 좀더 멀어졌다.
"여보세요."
─응. 전화했었네?
"아, 아직 바쁜가 해서. 선물 주려구요."
─아……. 근데 오늘은 안되겠다.
"그래요?"
─오고 있는 건 아니지?
그리 말하며 아저씨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모습에 옆에 세워져있던 차 뒤로 몸을 감추었다. '아니에요. 그럼 다음에 봐요.' 건성건성 대답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몸을 일으켜 아저씨를 바라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여자와 주차장으로 가고, 그대로 같은 차에 올라타서 출발했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짜증이 나는 것도, 화나는 것도, 슬픈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부인데 생일을 같이 보낼 수도 있고 그런거지.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이런건……. 줘봤자겠지?"
간신히 맸던 리본을 풀었다. 행여 흐트러질까 가지런히 접어 넣었던 검은 손수건. 어떤 색의 천에 어떤 색의 실로 어떤 말을 새겨넣을까 수없이 고민했던 시간들. 검은 천에 은색실로 영어 대신 새겨넣었던 鍾佑. 아저씨의 한자 이름. 아무래도 좋았던 거지, 이런건. 요즘은 손수건도 브랜드에서 나오는 비싼게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한거지. 아저씨 회사 앞 쓰레기통에 상자채로 선물을 구겨넣었다. 후회, 좀 하긴 했다. 1년도 넘게 보고 지냈으면서 어줍짢은 선물을 건네려던 것에 대한 후회. 정성같은 걸로 돈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것에 대한 후회.
며칠 후 독서실 앞에 나타난 아저씨는 선물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무척이나 기대하는 얼굴로.
"응? 무슨 선물?"
"아, 그때 선물 준다며."
"아─ 그냥 보고 싶어서 한 말이지. 내가 돈이 어딨어요."
"뭐야. 기대하고 왔더니."
"기대했으면 그때 왔어야죠."
"에이─ 바빴다니까. 삐졌어? 삐졌구나? 표정 봐라. 화 풀어. 응?"
"아저씨 생일인데 제가 삐질게 뭐 있어요. 괜찮아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 생일도 아니었고 내 마음대로 준비한 거 내 마음대로 찾아가서 마음 상한 건데. 아저씨를 책망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 아니네. 애초부터 속여온 것. 거기서부터 다 비롯된 거니까. 근본적인 원인제공은 아저씨로부터였다. 아저씨는 쌀쌀맞은 태도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운전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정도는 하길 바란다. 순탄치는 않아도 멀쩡하긴 했던 내 인생을 진흙탕으로 갈아엎은 주제에 그 정도도 안 하면 내가 억울하잖아요. 아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나도 굳이 전처럼 귀여움 떨진 않았다. 좀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봄의 문턱에서, 그렇게 처음 다툼 아닌 다툼을 해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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