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을 땐 내 방은 붉게 물들었다. 오래 잤구나. 허리가 삐그덕 거리고 엉덩이가 얼얼하긴해도 많이 힘들진 않다.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진 않지만 깨끗하다. 침대 위에 걸쳐져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니 부엌쪽에 소리가 난다.
"일어났어?"
"어."
어라는 짧은 한마디였지만 목이 갈라진게 느껴졌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흠흠, 저녁 뭐야?"
"궁금하면 와서 봐봐."
그렇게 궁금하진 않지만 간신히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모면한 지금 그냥 옆으로 갔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다.
"자, 먹어봐."
숟가락으로 살짝 떠 호호 불며 내 입 앞에 대령한다.
"괜찮네."
"이러니까 신혼부부같지?"
"뭐?"
실없는 소리에 어이없단 표정을 하니 쪽하고 뽀뽀를 한다.
"미쳤냐?"
"악!"
너무 놀라서 뒤통수를 너무 세게 쳐버렸다.
"진짜 아파."
"그러니까 누가 입술 들이밀랬냐?"
한번 더 가볍게 뒤통수를 치고 거실로 도망쳤다. 한참 볼 것도 없어서 리모컨을 돌리는데 때르르르르하는 초인종 소리가 난다.
"Who is it?"
"나, 정호."
"뭐?"
문을 여니 안녕? 하면서 손을 들어 흔드는 녀석이 보인다.
"그 짐은 뭐냐?"
"한국에서 여기 오자마자 왔는데?"
"내가 기숙사 가랬지?"
"누구야?"
뒤에는 윤석영, 앞에는 홍정호. 은근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이다.
"누구?"
"일단 들어와라."
윤석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살짝 웃더니 캐리어를 들고 들어온다.
"얜 홍정호. 여기서 알게된 친구. 얜 윤석영. 한국친구."
"동갑?"
"응."
"아... 안녕?"
"어, 응..."
이 두 녀석의 눈은 서로 이 사람이 왜 이 집에 있냐는 표정이다.
"너 이제 기숙사로 들어가랬지? 어딜 은근슬쩍 집으로 들어오려고."
"니 집이 더 좋아."
"내 집이거든? 그리고 이김에 너도 빨리 한국갈 생각해라. 눌러앉을 생각말고."
"너도 한국가면."
"나 여기서 졸업할때 까진 안 가."
"졸업하면 와?"
"봐서."
내 대답에 한숨을 푹 쉰다.
"어쨌든 왔으니까 밥은 같이 먹자. 점심 안 먹었지?"
"어? 응."
4인용식탁이지만 장정 셋이서 앉으니 꽉 찬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점심은 끝났고 홍정호는 어색하다며 기숙사로 들어갔다.
"진짜로 변했네."
"응?"
"이제 친구도 생기고."
"..."
변해야지. 도망쳤는데...
"3년이 지났으니까. 피곤하다. 난 들어가서 잔다."
"어? 나도."
"넌 니가 있는 방에서 자. 손님방."
"너무해."
"뭐가 너무하단 거냐? 아무튼 들어가 잘거니까 들어오지마. 눈 떴는데 너 있으면 진짜로 쫓아낸다."
단호한 나의 말에 알았다며 걱정말고 자란다. 걱정이 좀 되지만 괜찮은 줄 알았던 몸이 생각보다 무거워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이 살짝 깼다. 깜깜해진 방을 보고 그냥 아침까지 자야겠단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실망이다."
"뭐가?"
"내가 집에 재워달라고 했을 때는 득달같이 쫓아내면서."
학교에 와 강의를 듣고 점심을 같이 먹고있는 홍정호가 징징댄다.
"한국에서 온 친구잖아."
"솔직히 질투나."
"어?"
질투란 말에 놀라 홍정호를 쳐다봤다.
"그런 질투가 아니라. 친구로서. 아무튼."
"질투는 무슨."
"나만 친한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녀석의 일차원적인 생각에 놀라 녀석을 쳐다봤다.
"뭐?"
"너는 몰랐겠지만 하이스쿨 다닐 때 다들 너랑 친한 날 부러워했다고. 다 친한 것 같으면서도 선은 확실히 그어버리는 성격이잖아, 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게 그 정도로 티가 났다는 것에 당황했다.
"선 긋는건 아무리 티가 안나려고 해도 느껴질 수 밖에 없는거거든."
"그러냐?"
뭐, 그렇다고해서 내 성격을 바꿀만큼 나는 성격이 좋지 못하다. 심드렁한 내 반응에 입술을 삐쭉하더니 입을 뗀다.
"아무튼 그래서 섭섭했다고."
"그럼 내가 한국에 있는 18년 동안 아무하고도 소통없이 지낸게 정상이라는거냐?"
"뭐, 아닐 것도 없지."
"허."
나의 어이없다는 반응에 그냥 씩 웃고는 밥을 먹는다. 그 정도로 보이나? 홍정호는 기숙사로, 나는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윤석영이 없다. 아무도 없는 집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녀석이 있으면서 그새 적응을 해버렸나보다. 하... 윤석영을 한국으로 보내면 또 힘들어지겠네.
"어? 왔네?"
"응. 어디 갔다와?"
"장 봐왔어."
밝게 웃으며 한 손에 들고 있던 페이퍼백을 흔든다.
"주부 다 됐네."
"편하지?"
뭐... 있으면 편하지. 하고 끄덕였다.
"그럼 나랑 계속 살지. 주부습진 걸려도 약 사달라고만 할테니까."
아무래도 능글맞아진게 나한테는 좋지만은 않은 듯 싶다. 예전엔 얼굴 빨개지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는게 귀엽...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오늘 좀 나가서 산책할래?"
"어?"
"그냥 밖에 야경도 괜찮은 것 같고 그래서."
온 김에 구경이나 시켜주자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고, 밥도 나가서 먹자고 했다.
썩 맛있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저녁을 먹고 돌아다녔다. 영국의 겨울은 너무 빨리 어두워진다. 비도 자주와서 괜히 사람을 축 쳐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자자, 여기서 사진 한 번 찍자."
다리 앞에서 핸드폰을 내밀며 내 가까이로 온다.
"나도?"
"그럼 혼자 찍냐?"
사진 찍는 것도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기분좋게 찍었다. 어두웠지만 주위 가로등이 밝아 얼굴은 알아 볼 수 있게 찍혔다.
"올. 괜찮게 나왔다."
이러고 친구같이만 있으면 알파, 오메가 따위는 생각도 안 드는데 그럼 나는 윤석영에게 도망가지 않아도 될텐데 윤석영은 그 선을 넘으려고만 한다.
새삼 드는 생각에 멍 때리고 있으니 내 앞에서 손바닥을 짝하고 친다.
"뭐해. 정신 놓고. 이제 집 가자."
"아, 어."
집으로 오면서는 따로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내가 윤석영과 그런 일이 있고도 편해할 수 밖에 없는건 이런 침묵조차도 어색하지 않아서 일거다. 아닌가? 편하니까 어색하지 않은건가? 아무튼 윤석영은 여러모로 머리 아프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말이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아니면 가끔씩은 평소와 다르게 지내며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슬슬 방학 다가왔다. 학기말이 되면서 바빠진 나는 윤석영에게 신경을 점점 못 쓰게 됐고, 그것에 묘하게 삐진 윤석영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중이다.
"나 내일이면 급한 리포트랑 시험 끝나. 그러니까 내 앞에서 시위 좀 그만해라."
"내가 뭘."
뭐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굉장히 신경쓰이게 한다. 아침을 먹을 때도 밥 먹다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냥 요즘에 얼굴도 통 못보는 것 같아서.'라고 말 속에 뼈를 묻는다던가, 저녁을 먹고 난 후에 방에서 전공책을 뒤지며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나를 문틈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강아지가 주인한테 놀아달라는 듯한 눈빛을 한 체 말이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니 윤석영은 윤석영대로 신경이 쓰이고, 나는 나대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골치가 아프다.
"몰라서 묻는거면 때린다."
"됐다."
칫이라며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고 있다.
"모레는 학교도 안 가니까 너랑만 놀... 있을게. 과제도 손 안대고, 책에도 손 안대고."
"...정말이냐?"
"내가 거짓말 하냐?"
"거짓말하고 영국왔잖아."
아... 새삼 우리 서로의 관계에 대한 복잡함에 뒷목이 땡긴다. 뒷목을 주무르며 녀석에게 조금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나 모레도 학교 가?"
"아니."
대답은 빠르네.
"대신 내가 하고싶은거 할거다."
"뭘 하고 싶은데?"
"묻지말고, 하고싶은거 하게 해줄거야, 말거야?"
허, 협박조다.
"알았어. 해줄게. 해. 됐지? 그러니까 표정 풀고 밥먹자?"
"그래."
그제야 슬쩍 웃는다. 내가 애를 키우는 건지...
"진짜 다 해주기다."
"알았다고."
내가 살짝 짜증을 내고 나서야 활짝 웃으며 내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준다. 그런 이야기를 홍정호한테 하니 이 녀석은 벌써 뒤집어졌다.
"너 애완동물 키우냐?"
"차라리 애완동물이면 말이라도 못하지."
"와, 걔 웃기네."
"웃기냐?"
"웃기지. 아, 진짜. 걔 마음에 들었어."
"너 윤석영한테 질툰가 뭔가 한다며."
뾰로퉁하게 툭 던지니 장난 가득한 웃음을 짓는다.
"뭐, 친구는 나 혼자인 거 같으니까."
"무슨 소리야?"
"어른들만 아는 그런게 있어요. 오늘은 니네집 멍멍이 보러 가자."
"집에? 윤석영 완전 삐질텐데."
"그 꼴도 좀 보고. 배 아프니까."
녀석의 말은 요즘들어 반은 알아듣겠고, 반은 못 알아듣겠다.
"나 왔어."
"어? 왔...네."
"안녕? 초면은 아니지?"
내 뒤에서 홍정호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는다.
"어, 그래. 근데 니가 여기 왜 왔냐?"
"밥이나 얻어먹을까 해서. 원래 이 집에서 매일 먹었거든. 저녁."
뭔가 묘하게 윤석영을 놀리는 홍정호다.
"일단 들어가자. 춥다."
"아, 어."
끝까지 표정은 풀지 않고 집으로 들어오는 홍정호를 쳐다본다.
"저녁은?"
"아, 거의 다 됐어."
날보고 씩 웃으며 부엌으로 향한다.
"아, 진짜 코미디다."
"너 일부로 윤석영한테 그런거냐?"
"뭐. 부정은 안 해."
쇼파에 앉아 둘이서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눴다. 얼마 안 있어 밥상이 차려졌고, 세명의 장정이 밥을 먹다보니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비워졌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맛있다. 니가 한 것보다."
"말했지만 난 유학와서 처음 밥했다."
"자랑은 아닐텐데."
"돈자랑인데?"
홍정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똑똑한 것 같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홍정호와 나만 제대로된 대화를 하고, 윤석영은 옆에서 맞장구만 치고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때 그 싸웠던 애는 다시 한국갔다나 그러더라."
"아, 그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더 늦으면 기숙사 못 들어가겠다. 나 간다."
녀석은 옷을 챙겨들고 나한테 재미있었다고 귓속말을 하며 나갔다. 뒷처리는 모두 나에게만 떠넘긴채 말이다.
"야, 윤석영."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는 윤석영을 불렀다.
"윤석영."
"왜."
"화났어?"
"아니, 내가 왜?"
화났네. 아오, 저 초딩.
"왜그러냐. 홍정호랑만 놀아서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10분 후에 말하자."
그러더니 10분간 말이 없다.
"3, 2, 1 땡. 이제 니가 어제말한 모레니까 나 하고싶은데로 한다?"
"뭐?"
"밤에는 밤 일해야지."
하더니 뜯금없게 입술을 들이민다. 닿기 직전 녀석에 이마를 잡았다.
"뭐하냐?"
"내가 하고싶은 거."
"참나, 어이가 없어서. 내가 해줄 것 같냐?"
"응."
저 확고한 대답에 힘이 풀린 그 순간 입술에 뽀뽀를 한다.
"어때? 아직도 할 마음 안 생기나?"
"뭐?"
다시 되묻는 나를 보고 다시 뽀뽀를 한다.
"이정도면 넘어올 것 같은데?"
하며 다시 뽀뽀를 한다.
"그만 좀."
"넘어올 때 까지 할건데?"
라며 뽀뽀를 입이며 볼이며 눈이며 사정없이 한다. 녀석의 얼굴을 붙잡았다.
"기여이 하겠다고?"
"그럼."
당연한 듯 웃는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 한 번과 함께 입술에 내 입을 맞췄다.
"립밤 좀 바르지? 입술 까슬거려."
나의 말에 그럴게- 라며 입술을 깊게 묻는다. 이제는, 정말로 녀석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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헣허... 오랜만이지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ㅠㅠ
핑계를 대자면 좀 즉흥적으로 쓴 글이라 딱 생각해둔 부분까지는 그나마 줄줄 썼는데
그 이후에는 꽉 막혀서 다른 분들 글도 보고 하면서 뒷 스토리를 생각해내고 있습니다ㅠㅠ
길어야 10? 더 길어지면 10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결말은 8, 9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아직 완벽하게 스토리가 짜여져있는 건 아니라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제가 감당 못하면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는게 함정ㅋ
아무튼 익스에서 제 글을 알아봐주시는 몇몇 분 덕에 더욱 더 힘내서 쓰고 왔어요
또 막히면 늦어질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게 노력할게요!!
댓글 달아주는 독자님들 다 스릉흔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 달아주시는 분들은 조금 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