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시리즈 (부제 : 녹음실의 그 남자, 스튜디오 그 남자)
세훈x준면
w.BM
episode.4 겨울바다의 추억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같이 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식사라도 하자며 이야기가 오갔지만 세훈은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날이 많이 추워진 것에 비해 사진전에는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시관 밖으로 나온 세훈은 휴대폰을 꺼내 준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렸을 즈음, 단정한 준면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넘어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세훈은, 무엇 때문에 전화했는지조차 잊고서 준면의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해서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작업 중이었다는 준면의 말에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원래 전화를 했던 목적이 생각나 급하게 전화를 끊으려는 준면을 다시 불렀다.
“참, 이번 주말에 겨울바다 갈래요?”
“-아, 맞다. 같이 가자고 했었죠. 음, 그래요. 마침 시간도 비고.”
“그럼 늦은 오후 즈음에 연락 할게요. 토요일에 봐요.”
“-네, 그때 봐요.”
세훈이 준면과의 통화를 끝내자, 전시회를 같이 열었던 동료 한 명이 전시회 밖으로 나와 세훈을 불렀다. 동료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세훈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귓가에 잔잔히 남은 준면의 목소리가 참, 좋았다.
토요일 오후, 세훈의 차가 준면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준면은, 도착했다는 세훈의 연락을 받자마자 백팩을 메고 밖으로 나와 세훈의 차에 올라탔다. 인디밴드의 은은한 기타선율이 흐르는 차 안에서, 준면은 처음 가보는 겨울바다에 대한 생각으로 설레고 있었다. 차가 이동하는 내내, 서로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울에서 한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도착하는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 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준면이 몸을 웅크리며 옷을 여미니, 세훈이 목도리를 꺼내 준면에게 꼼꼼히 둘러주었다. 고마워요. 준면이 작게 말하자 세훈은 미소로 답했다.
세훈은 카메라를 챙기고 나와 주변을 찍더니, 준면에게로 초점을 맞추고 몰래 한 장 찍었다. 세훈이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준면은, 해변 가 근처에 즐비한 식당들을 가리키며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준면이 마냥 귀여워, 세훈은 해사하게 웃으며 준면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식당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찾아오는 이가 적은 식당에 손님이 들어오자 육십 대 정도의 주인이 반갑게 세훈과 준면을 맞이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날이 춥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난로가 근처로 앉게 했다. 푸근한 모습에 준면 역시 넉살좋게 이모라고 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회를 주문하고 식사 후에 맑은 탕을 먹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잘생긴 총각들이 왔다며 주문하지 않았던 것들을 주며, 서비스라고 마음껏 먹으라며 웃었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인심에 세훈과 준면은 싱긋,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어 온통 어둡게 변해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도심의 하늘에서는 보지 못했던 별들이 촘촘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준면이 입을 살짝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세훈은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찍었다. 이번에는 세훈이 사진을 찍은 것을 알아챈 준면이 깜짝 놀라며 멍하니 세훈을 보았다.
“뭐, 뭐예요, 말도 없이!”
“준면씨 안 찍었어요, 하늘 찍었는데.”
“거짓말하지 마요. 빨리, 카메라 줘 봐요.”
“진짜로, 하늘 예쁘잖아요. 어, 봐요. 보름달 떴다.”
“진짜요? 우와. 아, 이거 보름달 아니에요. 아직 보름도 아닌데, …아, 말 돌리지 말구요!”
“어라, 보름달 아니에요? 동그란데?”
“얼핏 보기엔 동그랗게 보여도 보름달 아니, …세훈씨 자꾸!”
카메라를 달라고 하면 말을 돌리는 세훈으로 인해 준면이 결국 빽, 소리를 지르며 세훈을 부르자, 세훈은 킥킥, 웃으며 준면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바닷가로 이끌었다. 준면은, 세훈을 흘겨보면서도 세훈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세훈은 바닷가에 가기 전에 차에서 무언가 잔뜩 담긴 봉투를 꺼냈다. 그게 뭐에요? 준면의 물음에, 세훈은 바닷가 도착하면 알려준다고 답하고는 웃어보였다. 아까 전 세훈에게 농락당한 앙금이 남아있던 것인지 준면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군말 없이 바닷가로 향했다.
온통 까맣다. 겨울 밤 바다를 본 준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지만 늘 보던 파란색이 아닌 검은색의 바다가 새롭게 느껴졌다. 검은 물결이 모래사장 근처로 쏴아아,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나는 모습이 꽤 경이로웠다. 모든 것을 휩쓸어갈 것 같은 물결이 신비롭게만 보여 한동안 말없이 바다를 쳐다보았다. 준면은, 끝이 안 보이는 수평선 너머를 어림잡아보며, 추위마저 잊어버린 채 겨울바다를 눈에 담았다.
“불꽃놀이 할래요?”
“네?”
“이거, 불꽃놀이에요. 할래요?”
“어… 좋아요, 해요!”
그세 아까의 일은 싹 다 잊은 듯, 준면이 아이마냥 환하게 웃으며 세훈이 건네는 가느다란 쇠막대를 받았다. 양 손에 꼭 쥐고서 세훈이 불을 붙여주길 기다리니, 세훈이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타는 냄새와 함께 불꽃이 막대 끝에서 타올랐다. 준면은, 모든 것이 새로운 듯 불꽃을 마냥 보기만 했다. 세훈은 그런 준면을 불러서, 불꽃이 타는 막대를 들고 살짝 흔들었다. 준면은 눈앞에서 어지럽게 타오르는 불꽃과 세훈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자신이 들고 있는 막대도 좌우로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을 더하는 불꽃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 타오르고 생명을 다한 쇠막대가 차게 식었다. 아쉬움이 드러나는 준면의 표정에, 세훈은 봉투에서 쇠막대를 또 꺼내 준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번에는 이거로 공중에 그림 그려요.”
“그림이요?”
“네, 하트모양이나 별모양으로 계속 그리고 있어요. 그럼 제가 그걸 찍을게요.”
“음, 네 알았어요.”
준면은 세훈이 불을 붙여주자, 공중에 세훈이 예시로 들었던 하트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노출시켜 사진을 다 찍으니, 타오르던 불꽃이 꺼졌다. 준면은 곧장 세훈에게로 다가가 어떤 사진을 찍었냐고 물었다. 세훈은, 카메라를 준면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0초가량 노출을 준 사진은 붉은 빛이 선으로 연결되어 하트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불꽃 하나만 찍혀있을 줄 알았던 사진에 선으로 연결되어 완전한 모양을 이루고 있자, 신기함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우와, 세훈씨 대단한데요?”
“별의 일주운동 사진 같은 거 찍을 때도 이런 식으로 찍어요. 노출을 오랫동안 주면 연결된 사진이 완성되죠.”
“아, 알아요. 그런 사진도 이런 식으로 찍어요? 우와. 진짜 예뻐요.”
“또 할까요?”
“네! 이번엔 다른 모양으로.”
준면의 얼굴에 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는 준면이 직접 불을 붙이고 별 모양으로 만드는 모습에, 세훈은 또 다시 같은 방법으로 사진을 찍었다. 불꽃이 다 타오르고, 사진을 확인하러 온 준면은 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 손을 마주 모으고 신기해하며 좋아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불꽃놀이를 끝내고, 세훈은 불빛이 적은 곳에 삼각대를 설치하고서 조리개를 최소로 줄인 뒤에 초점을 밤하늘로 맞췄다. 준면은 모래사장에 앉아, 조금은 춥지만 마냥 좋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 설치를 마친 세훈은 준면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까만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고, 오직 세훈과 준면만이 모래사장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로지 파도소리만이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사실은, 겨울바다 처음 와 봤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어, 어떻게 알았는데요?”
“그냥요, 다 신기해했잖아요.”
“아아… 조금 민망하네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겨울바다 처음 와 본 소감은 어때요?”
“음, 좋았어요. 신비롭기도 하고, 또 세훈씨가 좋은 경험 많이 하게 해줬잖아요. 그래서 더 좋았어요.”
세훈은, 줄곧 이야기하는 준면을 보았다. 추위로 인해 코끝이 발갛게 물들은 하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조금 다른 심장의 떨림에, 세훈은 멍하니 준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준면의 옆얼굴을 보고 있을 동안에, 준면이 세훈을 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세훈은 화들짝 놀랬으나 준면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세훈씨는 겨울바다에 관한 추억 없어요?”
“음… 썩 좋은 기억은 아닌데 있긴 있네요.”
“물어봐도 되요?”
“좀 부끄러운 건데, 대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서 MT를 왔는데 제가 좋아하던 여자 선배가 있었어요. 그 선배한테 고백했었다가 차인 기억이 있어요.”
“푸하, 그 여자 선배 분은 보는 눈이 없나 봐요. 세훈씨처럼 멋있는 사람을 차버리고.”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밤하늘 찍으러 올 때 빼고는 바닷가 잘 안 와요.”
“으음, 안 좋은 기억 생각나서요?”
“네. 그런데 이번엔 좋은 기억 만들고 싶어서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었던 준면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세훈을 보았다. 세훈은, 준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 뜬금없을 수도 있어요.”
“뭔데요?”
“연애 할래요?”
세훈의 말에 준면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준면에게 세훈은 굉장히 편안한 사람이었고, 멋진 사람이었고, 짧은 순간 동안 좋은 경험을 많이 안겨준 사람이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속에서, 준면은 꽤 곰곰이 세훈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세훈에게 애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서운했던 감정이, 질투는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원래의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세훈에게 받은 좋은 경험, 세훈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제 겨울바다를 떠올리면, 여자 선배와의 나쁜 기억이 아닌, 좋은 기억이 떠올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면은, 세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J,
겨울바다하면 여자 선배 말고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S,
이미 같이 겨울바다 온 순간부터 기억 속엔 준면씨만 떠오르네요.
BM |
낭만시리즈! 참 오랜만입니다. :) 사실 ... 달달한게 제일 어려워요... 끙끙. 정말 어렵습니다. ...연애 안한지 오래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하하... ;0; 여하튼 드디어 세준 연애합니다! 뜬근포 같지만요(...) 계속해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인지 드러내려고 했지만 제 필력의 한계로 인해 많이 드러나진 않은 것 같아요.☞☜ 이제 진짜 낭만, 달달의 끝을 달릴 예정입니다... 제 손발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쓸게요. 여하튼 부족한 글 봐주시는 분들 모두모두 감사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