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이 싫어하던 애랑 사귀게 된 썰
꿈은 교사였다. 기왕이면 초등학교, 애들을 좋아해서 교욱 봉사랍시고 봉사도 꾸준히 다녔고-양로원,유치원 가리지 않았다- 일남이녀 중 둘째였지만 갖고 싶은 거 다 갖고 서럽지 않게 자랐다. 가족사도 괜찮았고 교대를 준비하는 만큼 성적도 괜찮고 친구 관계도 지극히 정상인, 그러니까 내가 뜬금없게 자기 피알을 하는 이유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애를 싫어하게 된 계기에는 온전히 내 꼬인 성향만이 이유가 아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 얘기는 약 육개월을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3월
2학년이 되고 난 직후, 난 괜한 부담감에 학기 초부터 문제집을 붙들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이 괜히 어색했고 어제 본 모의고사 가채점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에 더욱, 이상하리 만큼 예민한 날이었다. 아마 3교시 쉬는 시간이었던가, 그때 걔를 처음 봤다. 우리 반에 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골려주려 온 것인지 손에 딸기 우유를 들고 곧장 내 앞으로 뛰어와 잔뜩 까불거리더니, 그만 내 문제집 위로 잔뜩 쏟아버리곤 멀뚱멀뚱, 머저리 같이 나를 쳐다보는데 그 꼴이 그렇게 기분 나쁘더라.
"아 배진영 미친, 야 빨리 사과해."
"아... 그... 미안."
"...아."
"진짜, 미안."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날이었으면 그냥 알겠다며 넘겼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날은 유독 화가 나더라. 사람이 화가 나면 오히려 입을 꾹 다물게 되는데. 나 또한 젖은 문제집을 들고 말 없이 화장실로 걸어갔다.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딸기 냄새가 잔뜩 배인 문제집을 그냥 화장실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리곤 엉엉 울며 주저앉았다. 그게 첫번째 이유였다.
3월 말
그 뒤로 그 아이는 눈에 띄게 내 눈치를 보며 주변을 맴돌았다. 약 이 주를 꾸준히. 짜증이 났다. 사과를 매번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맴돌기만. 눈치를 보는 건지 원래 성격이 그리 찌질해 빠진 건지는 몰라도 영 거슬리는 게 매번 심기를 건들였다.
"야."
"어? 나?"
"너 왜 자꾸 이래? 재밌니?"
"..."
또 말이 없었다. 그저 멀뚱멀뚱, 뭘 계속 쳐다보냐며 쏘아댄 뒤에야 시선을 돌리고 다시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분명 삼 월 초에 야자를 안 했던 것 같은데, 나 때문인 건지 매번 야자를 끝마치고 독서실 가는 길까지 따라오더라. 그리고 다시 학교 쪽으로 돌아갈 거면서, 미련하게.
"내일부턴 따라오지 마. 부담스러워."
"그냥 따라가는 것도 안 돼?"
"왜 이러는 건데?"
"...난 그냥 미안해서."
"그만해, 그럼. 됐으니까."
"너 아직 나 싫어하잖아."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거든. 난 걔가 싫었다. 그것도 무지. 한숨을 쉬며 그 아이를 쏘아 봤다. 정갈하게 적힌 배진영이라는 글자, 그때 처음 알았다. 이름도 모르는 애가 왜 그리도 싫어지는 건지, 졸졸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매정하게 시선 한 번 안 두고 그 뒤로 쭉 독서실에 도착하면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다. 어쩌면 괜한 죄책감에 이젠 그냥 날 따라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4월
봄이 오면 늘 잠이 늘었다. 그 날도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문제집을 풀다 어느 순간 고개가 떨어졌는데, 이마에 확 따뜻한 게 닿았다. 몽롱한 정신에 미처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손을 꽉 잡아내리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그때 확인만 했어도 민망할 일 없었을 텐데. 어렴풋이 이름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으나 잔잔한 노래 소리에 한참 졸음에 취해 있었을까, 몸이 흔들렸다.
"야 김여주 언제 배진영이랑 이렇게 친해졌냐."
"...뭐야."
"뭐긴 뭐야"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박지훈을 올려다 보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고갯짓을 하기에 따라 고개를 돌리니 배진영이 가득 찼다. 잠결에 잡은 손이 배진영 손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민망함 때문이었다, 분명히.
"너무 곤히 자길래, 못 깨웠어."
"아, 어... 미안."
"더 자."
왜 여기 네가 있었던 건지, 언제부터 날 본 건지, 묻고 싶었다. 다만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만 내쉬었을까, 배진영이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장난스럽게 우릴 흘겨보던 박지훈을 툭 치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쟤는 뭔데 사람 민망하게, 괜히 배진영을 원망하며 박지훈을 무시하고자 이어폰을 꽂았다. 본 애들 많을 텐데, 그냥 손 놓지. 당분간 배진영의 얼굴을 보지 못 할 것 같았다.
4월 말
그 날은 봄비가 내렸다. 아 나 우산 없는데, 야자 시간에 턱을 괴며 비가 내리던 밖을 바라보다 그렇게 네 생각이 났다. 오늘도 기다리려나. 생각이 났다는 괜한 불쾌감 때문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지문을 읽었다. 지우고 싶었다. 네게 익숙해 지는 나도, 늘 불쾌하게 느껴지는 너도, 이상한 사이인 우리도 전부.
"우산 있어?"
"없는데."
"너 쓰고 가."
우산을 쥐고 한참을 망설이던 배진영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같이 쓰자고 하면 뻔히 싫다고 할 나를 알아서 그랬는지, 입술을 꽉 깨물다 우산을 내미는데, 한 번 이용해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받아들었다. 손을 흔드는 배진영을 무시하고 운동장으로 향하는데, 이렇게 집에 가버리면 괜히 너를 용서해야 될 것 같아서, 아마 이 우산이 없으면 미련하게 비를 맞을 네가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정말 단지 네게 빚을 지는 게 자존심 상해서, 다시 되돌아왔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는 네게 우산을 내밀고 빗 속을 무작정 뛰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너를 무시한 채. 이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5월
비를 맞은 뒤 꼬박 일주일을 앓고 나니 드디어 감기가 떨어질 기미를 보였다. 배진영은 감기에 걸린 게 본인 탓이라 생각한 건지 더욱 지극히 나를 챙기기 시작했었는데, 그 꼴이 그렇게 거슬렸다.
"여주야, 약."
"내가 알아서 먹어."
"너 밥 먹은 지 삼십 분 지났는데"
"어쩌라고, 좀 가 주라."
"안 먹으면 큰일나는데."
"배진영, 너 때문에 머리 아파."
어디서 구해온 건지 지를 빼다 박은 발챙이 물병을 손에 쥐고 나를 보채던 배진영이 일순 조용해지며 실실 웃었다. 나는 단순히 내게 감기가 옮아 애가 미쳤나, 싶어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너나 먹으라며 던졌다. 배진영은 받은 약을 정성스럽게 까서 내 손 위에 올리더니 기분 나쁜 말을 뱉었다.
"내 이름 불러준 거 처음이야."
"내가 실수했네, 다신 안 부를게."
그렇게 쳐다보면 뭐, 네가 어쩔 수나 있어? 불쌍하게 쳐다보는 배진영을 무시하고 물병을 빼앗아 반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배진영은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해서 문제다. 배진영을 닮은 물병을 툭 치고 약을 삼켰다. 아마 그 다음날인가, 감기가 완전히 떨어졌었지.
| ||||||
감춰둘 내용을 여기에 입력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