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it easy.
그냥 황민현이야.
남사친과 이상형의 경계_03
그렇게 몇 주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
황민현이 조금 다르게 보였던 그 날 저녁은 날씨 탓이었던 것처럼.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정신을 못 차린 나였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2주가 지났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더니 완벽히 여름을 향한 6월이 되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함께 학교를 갔고, 버스를 탔고.
학교 가기 싫다고 아침마다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리는 황민현도 똑같았고, 그런 새끼를 질질 끌고 학교로 데려가는 나도 똑같았다.
“너는 진짜 어떻게 매일 아침마다 그렇게 잠을 못 깨냐? 하루라도 너가 먼저 나와서 나를 좀 기다려봐. 요즘 들어 더 못 일어나는 거 같아.”
“몰라아.. 요즘은 잠을 자도 계속 자고 싶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너 진짜 내가 이렇게 안 끌고 가면 학교 어떻게 다니려고 그래.”
“야 그럼 안돼. 나 진짜 학교 못 다닌다니까? 오빠는 영채없 으면 학교 못 다녀.”
“아 붙지 좀 마! 덥다고!”
“헤헤 너 말고 네 가방에 붙었는뎁.”
잠이 덜 깬 황민현은 정말 최악이었다. 애교를 부리지 않나, 달라붙질 않나. 더워 죽겠는데 아침부터 요즘 들어 더 짜증나게 구는 애새끼가 따로 없었다.
사실 그날 저녁 이후로, 내가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내 말은, 아주 가끔씩은, 아아-주우- 가끔씩은, 그때처럼 황민현이 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가령 녀석이 유일하게 가끔 하는 농구를 하고 음료수 사달라고 우리 반을 찾아왔을 때나, 정수정이 이상한 말을 했던 그 날처럼 우리 반 뒷문에 가만히 기대 서 있을 때나, 아니면 그냥 갑자기 아무 순간에.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고, 더운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나는.
그냥 가끔 얘가 달라 보이기는 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결코 매번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고.
3. 갑자기, 어디선가, 뜻밖의
어릴 때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체육이 싫다. 움직이면서 땀 흘리는 건 정말 쓸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6월 중반을 달려가는 최근의 땡볕 아래서 하는 체육이라면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스탠드에 제발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는데, 역시나 그런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체육 선생님께서는 학업에 지친 우리들에게, 애들아- 체육 시간이라도 우리 재미있게 운동하자~ 다들 피구 좋지? 라며 선심 쓰시는 듯이 제안을 하셨다.
귀찮아요, 싫어요, 더워요, 라는 우리의 대답은 깡그리 무시하신 채 우리는 그 땡볕 아래서 선생님만 즐거운 피구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 수비할래.”
도저히 코트 안에서 날아오는 공을 피할 여력은 없어서 수비로 나가겠다고 선수를 쳤다. 선 밖에서 공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손 부채질만 열심히 해댔다.
그리고 늘 최악은 더 최악인 것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10분 쯤 거의 피구경기를 관전하다시피 서 있다 보니,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땀을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으, 너무 더워. 더워 죽을 것 같아. 라는 말만 내 옆에 서 있는 수정이와 주고받고 있었다. 말할 기운도 없는 그런 더운 날이었다.
“헐 영채야피 해!” 피구를 하던 애 중 한 명이 갑자기 나에게 소리쳤다.
잉? 뭘 피하라는 거지? 하면서 뒤를 도는 순간 빠르게 날아오던 축구공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거짓말 안 하고 엄청 큰 손을 가진 배구 선수가 내 이마에 스매싱을 날린 것 같았다.
짝? 퍽? 척? 무슨 소리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눈 감을 시간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던 축구공이었고, 그 공이랑 내 이마는 파이팅 넘치게 하이파이브를 했고, 너무 아파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는 거다.
“영채야괜 찮아?”
얼마 전 문득 들추어냈던 옛날의 그 이어달리기 시합. 그 장면처럼, 마치 데자부처럼, 피구를 하던 아이들은 모든 내가 모여들었다.
괜찮아? 뭐야. 누가 공을 우리 쪽으로 찬 거임? 미친 거 아니야? 그 때처럼 주변은 시끄러웠다.
아 시발 존나 아파. 시끄러운 애들 사이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어 죄송합니다. 제가 찬 공이 잘못해서 이쪽으로 날아간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누가 맞았는지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여기요. 영채야, 회장 오빠가 찬 공이래.”
우르르 몰려 있던 아이들 사이로 얼굴 하나가 쑥 나타났다.
“정말 죄송해요. 공이 그 쪽으로 갈 줄 몰랐어요, 정말로요. 괜찮아요?”
정수정이 그렇게 뽑으라고 했던 김동현? 김종현? 무튼 이름이 대충 김뭐시기현이었던 3학년 선배였다. 정수정의 강요에 내가 행사한 한 표를 받고 당선된 인간의 공에 쳐맞은 거였다.
하, 젠장 선배면 뭐라 하지도 못하겠네. 후. 빡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네, 아 괜찮아요. 일부로 그러신 것도 아닌데요.”
또 그때처럼, 다시 초딩 이영채로 돌아간 것처럼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제가 조금 까진 것 같아서 보건실이나 가볼게요, 그럼.
모여 있는 무리를 뒤에 두고 체육 선생님에게 걸어갔다, “선생님, 제가 방금 넘어져서 보건실을 좀 가야할 거 같은데요.”
아프긴 했지만, 보건실을 향하다 보니 곧 도착할 보건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생각하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기도 했다. 넘어지면서 손과 팔꿈치가 조금 까져 있었다. 이마도 빨개진 것 같았고. 체육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보건실로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어느새 나름 가벼워져 있었다. 남은 40분 동안 보건실에서 시원하게 있는 것이 오히려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
“쌤, 제가 좀 넘어...”
보건선생님은 안 계셨다. 책상에는 〈보건 수업중>이라는 명패만 올라와 있었다. 아무래도 반을 돌아다니시며 하는 보건 수업을 진행하고 계신 것 같았다.
구급상자를 열어 혼자 치료를 해보려고 했다. 빨간약을 솜에 묻혀 바르려고 보니 상처가 나름 짙었다.
“저기요-. 어 선생님 안 계시네요?”
“아 네, 수업하러 가셨나봐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여서 제가 좀 따라왔네요. 하핳.”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넘어진 거 가지고요, 뭐. 안 미안해하셔도 돼요.”
“에이, 안 괜찮아 보이는데엥. 아 저 놀리는 건 아니구여. 그냥 안 괜찮아도 된다구요. 아 제 말은 그러니까.. 음 괜찮으면 좋겠는데, 아 뭐라고 해야 되징.”
“네?”
이 선배 대체 뭐라고 하는 거지. 갑자기 나를 따라와서는 건네는 말이 좀 당황스러웠다.
“아프면 그냥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구요. 저한테 화났으면 화내도 되구. 제가 진짜 미안해여.”
황민현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안 괜찮다는 걸 제대로 안 사람은. 아프고 충분히 화나는데 아닌 척 하고 있는 걸 눈치 챈 사람은.
그래서 나를 달래러 온 사람은 황민현을 빼고 처음이었다.
“아...”
나를 찾아온 것도, 내가 안 괜찮다는 걸 알아차린 것도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음, 제가 빨간 약 발라 드릴까요? 혼자 바르기 힘들잖아여.”
“아니에요, 제가 혼자 할 수 있어...”
“또 그러시네요, 후배님. 제가 도와드릴께여. 이리 주세여.”
회장 선배는 의자를 어디선가 가지고 와 내 앞에 앉아서는 내 손에 들린 빨간약이 묻은 솜을 뺏어갔다.
이크. 힝. 흐어. 온갖 이상한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구, 아파여? 좀 더 살살해볼게요오.”
아픈 건 난데, 자기가 더 아픈 표정으로 내 팔꿈치를 살살 소독했다.
“아, 제가 엄살이 좀 있어... 흐어, 아파아... 아 제가 엄살이 좀 심해서요, 별로 안 아파요. 진짜로.”
“하하하하핳 아픈데 왜 안 아프다고 해요. 그냥 솔찌키 말해두 된다니까여.”
“아니 진짜 안 아파여.. 힉 윽..”
“아 귀여워. 아파하는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후배님 진짜 지금 귀여운 거 알아요?”
“네?”
지금 이 선배가 나한테 귀엽다고 한 건가. 대체 뭐가 귀엽다는 거지?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넘 귀여워서요. 제가 살살해줄게요오, 좀만 참읍시다 후배님.”
호오-. 선배는 바람까지 불어가면서 팔꿈치를 꽤나 열심히 소독했다.
손!
갑자기 선배가 너무 당차게 손이라고 외쳐서 나도 모르게 얌전히 선배의 손을 잡았다.
“하하핳하핳 저랑 손 잡고 싶었어요?”
“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손도 아까 보니까 쓸린 것 같던데. 손바닥을 주셔야지요, 후배님.”
악수하듯이 잡은 손을 황급히 빼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도 살살해줄게요, 좀만 참아여어. 또 호호 불면서 소독약을 열심히 바르는 내 앞에 선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리고 왜 저한테 존댓말 쓰세요?”
선배는 내 손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또 하핳 하고 살짝 웃었다.
“우리 후배님께서 저한테 궁금한 게 많았네요. 그런데 내 이름도 몰라요? 좀 섭섭한데에. 나한테 투표 안 했었나부다, 그쵸?”
“아니에요! 저 선배한테 투표했었는데! 진짜에요.”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잡혀 있던 손까지 빼내어서 좌우로 열심히 흔들었다.
“하핳하하. 알겠어요, 고맙네 그러엄? 이름은 김종현이구요, 우리 초면이니까 존댓말 썼지요오. 미안하기두 하구우. 이제 손바닥 다시 줄래요?”
“아 여기. 말 놓으셔도 돼요. 선배시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
“그래두 돼요?”
치료하던 손에서 갑자기 눈을 떼더니 눈을 맞춰오며 물었다.
“네, 그럼요.”
“그럼 나 말 놓을게, 영채야. 너도 말 편하게 해. 아니다, 내가 편해지면 편하게 해. 너 그러고 싶을 때. 하핳”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뜻밖의 순간에서, 뜻밖의 사람이 부른 내 이름이었다.
“오빠 내 이름 어떻게 알아요?”
“오, 영채가바 로 나 편하게 대해 주는거야아-? 오빠가 선배보다 친해보인다. 히힣. 아까 애들이 너 이름 부르는 거 듣기도 했고, 수정이가 학생회잖아? 나 수정이랑 친하거든. 수정이가 너랑 제일 친하다고 얘기 많이 했었어.”
“아... 그렇구나. 다 됐네요? 선배 감사해요.”
“왜 또 다시 선배야... 오빠가 더 친해보인다니까. 근데 잠시만. 밴드만 붙이자 우리.”
소독을 마친 팔꿈치와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밴드를 붙여주었다.
“쨘! 다 됐다. 내가 밴드도 붙여줬으니까 우리 친해지쟈. 자, 안 다친 손으로 악쑤.”
선배가, 아니 오빠가 내민 손을 어색하게 잡았다.
위로, 아래로, 종현 오빠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잘도 흔들어대면서 내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보건실 냉장고에서 비타오백을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아 그리고 이건 비타오백. 이거 마시고, 영채야빨 리 낫자. 알았찌? 에구 어떡해 이마가 아직 빨개... 이거 시원하니까 딱 대구 있자, 응?”
“이거 막 꺼내서 마셔도 돼요?”
“으응.. 사실은 아니. 내가 보건쌤한테 말해볼게. 일단은 비밀로 해줘야됗ㅎㅎ 권력 남용이라고 치자, 우리.”
오빠가 건넨 비타오백은 분명 차가웠는데, 그걸 받은 나는 어딘지 모르게 좀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이 오빠야말로 진짜 내 이상형이 아닌데, 키도 178보다는 조금 작은 거 같고. 쌍꺼풀도 있고. 피부도 막 하얀 편은 아니고.
근데 진짜 예뻤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씨익 웃을 때 그 입꼬리랑, 그 입이 진짜 예뻤다.
비타오백을 받은 나를 보며 또 웃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그 손이 싫지 않았다. 그냥 오빠가 웃는 것만 보였다.
날이 더워서인지, 왠지 모르게 자꾸만 열이 오르는 듯했다. 이마에 대고 있는 비타오백 빼고.
읽어주세용!! 작가의 말+암호닉 |
갑자기 종현이가 등장해서 좀 놀라셨죠..! 원래 제 2의 인물을 생각해왔는데, 제일 잘 맞는게 종현이인 것 같아서 이렇게 등장하게 되었어요ㅎㅎ 제가 종현이를..또..매우..좋아하기도 하고...글에 잘 어울리기도 하고...그래서.. 민현이랑 빨리 이어지길 바라는 독자님들 많으셨는데 원래 이렇게 딱!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야되는 거 아닐까요..? 하핳 (전 그렇게 생각해요....) 암호닉 신청해주신 : 오레오 / 뿜뿜이 / 짱요 / 돼지바 / 센터 / 황제펭귄 / 시릿 / 포카리 / 다녜리 / 아몬드 / 마이쮸 님 너무너무 감사해용!! 그 밖에 예쁜 댓글 남겨주시는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ㅠ.ㅠ 댓글 달린 거 보면 정말 힘이 됩니다!! 아 그리고...브금 고르는게.....너무 힘들어요......뭔가 가사가 안 맞는거 같고...뭔가 느낌이 다른거 같고...오늘도 30분 정도 고민하다가 그냥 쓸 때 들은 노래 넣었네요.. 브금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ㅎㅎ 그럼 다음 편도 빨리 가지고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