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난 어둠 속을 헤맸다.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오히려 깊은 어둠을 만들어 날 방황하게 했다. 어둠은 나의 기억을 앗아 갔고 나의 머릿속은 하얀 기억으로 차 버렸다. 잃어 버린 기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우지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우지호는 날 구속할 뿐 내가 기억을 찾는 데 아무런 의의를 두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이 하얀 방과 먼지 쌓인 TV와 하얀 침대 위 부질없는 내 몸둥아리 뿐이다. 창문으로 비치는 달빛의 수를 세다 보면 어느새 죽음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할 땐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드디어 죽는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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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어요. "
우지호가 새하얀 죽을 끓여 와 나에게 건넸다. 말없이 거절하자 우지호는 침대 난간에 묶인 내 손을 풀더니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선 등을 받쳐 내 몸을 일으켰다.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며 우지호에게 증오스런 눈빛을 보냈다. 우지호가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세면대로 가 숟가락을 씻었다.
" 밥은 먹어야죠. 안 그럼 형 죽어. "
" 죽을 거야. 그러니까 내버려둬. "
우지호가 깨끗이 씻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 숟갈 떠서 내 입으로 가져다 댔다. 고개를 저었다. 우지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선 그릇을 챙겼다. 그러다 갑자기 할 말이 생긴 듯 내 쪽을 바라보더니 TV 위 놓여 있는 리모컨을 가져다 건넸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우지호가 틀어 보라며 손짓했다.
" 왜...? "
" 심심할까 봐요. 어쩌면 형이 조금이나마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질까 싶어서기도 하고. "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갖게 한다는 건 내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갑자기 변해 버린 우지호의 태도에 의아심부터 들었지만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지호는 안심한 내색을 보이더니 가 보겠다며 하얀 방을 나갔다. 우지호가 건네준 리모컨을 바라보며 TV 속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두어 명의 정치인들이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경제 발전에 대한 내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몇 년 동안 단절해 있던 세상과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채널을 넘기니 삼성이 세계 대기업 순위에서 5위를 차지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음악 프로그램.. 맛집 프로그램.. 계속 채널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인터뷰 프로그램 같았다. 네 명의 남자들이 나오더니 자신들을 블락비라고 소개했다.
' 안녕하세요! 블락비에서 귀요미를 맡고 있는 박경입니다~ '
' 안녕하세요. 블락비에서 미소를 맡고 있는 유권입니다. '
' 안녕하세요. 블락비에서 쎈캐를.. 흐흐... 맡고 있는 태일입니다. '
' 안녕하세요!! 블락비에서 잘생김을!! 맡고 있는 피오, 지훈입니다! '
' 아 뭐야... 그냥 김이겠지. 잘생김은 나고. '
' 박경 시끄러. '
초반부터 정신없는 인터뷰에 뭐 저런 애들이 다 있나 싶어 호기심이 들었다. 아시아 차트를 석권하고 있다니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임에는 틀림없었다. 해외에서의 활동과 전국투어에 관한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늘여 놓았다. 웃기면서도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 이들을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다음 질문에서 인터뷰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 요즘 지코 씨는.. 괜찮은가요? '
' 아, 지호야 뭐 잘 지내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지.. '
지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온 신경이 경직되었다. 내가 아는 우지호를 말하는 건가, 아님 동명이인인가 잠시 혼란이 왔지만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우지호는 내 기억을 되찾아 주려고 리모컨을 건넸다.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고 인터뷰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다음 질문에서 또다시 뜸을 들였다. 이어진 인터뷰어의 질문은 내 숨통을 더 조이게 했다.
' 아... 그럼 재효 씨는.. 아직...? '
' .......네.. 못 찾았어요... '
온몸이 떨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헛웃음도 났다.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친숙함은 당연한 거였다. 못 찾았다는 말은 내가 어디론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사라진 나는 이 하얀 방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고. 그것도 같은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우지호에 의해서.
" 허..... "
우지호...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날 이 방에 가둔 건데. 내가 그렇게 싫으면.. 그냥 죽여... 죽이라고 씨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리 잘못했어..
" ...흐윽.. "
우지호에 대한 증오심과 서러움에 악에 받친 듯 울었다. 힘없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TV 가까이로 갔다. 너희들 나 알지...? 그럼 여기로 와서 나 좀 구해줘.. 제발 구해줘... 얘들아.. 애써 웃어 보이는 멤버들을 보며 넋두리를 늘여 놓았다. 계속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끝이 나지 않는 나의 오열을 그치게 한 것은 이어진 지훈의 대답이었다.
' 재효 형은 하늘에 있는 민혁이 형이 지켜 주고 있을 거예요. 언젠간 돌아오겠죠, 저희한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