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대뜸 내쉬는 한숨에서 단내가 풍겼다. 다니엘은 그 대목에서 적잖이 어이를 잃어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덥다고 덥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대기에 기껏 아이스크림을 물려 달래 놨더니 이번엔 또 무어냔 말이다. 한 손에는 넙다란 아이스크림 컵을, 다른 손에는 핑크색 스푼을 꼭 쥔 채 청승을 떨어대는 꼴이 영 달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를 잃은 듯 우중충한 무드와는 안 어울리게 분주한 입술이 온통 파랗고 노랗고 하얗게 얼룩덜룩했다. 하여간 입맛도 꼭 저 같이 유치해서는. 총 천연색의 다양함을 자랑하는 서른 한가지 맛 중에서도 다니엘의 성가신 문하생 A는 오직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만을 고집했다. 설탕에 갖가지 색소를 입혀 얼린 게 뭐 그리 맛있을까 싶다가도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A를 떠올리면 마음이 약해져서 군말없이 쿼터 사이즈 컵을 한 가지 맛으로만 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 사려깊은 씀씀이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30초 간격으로 푹푹 한숨만 내리꽂는 저 괘씸한 녀석을 대체 어쩌면 좋으냐고. 누가봐도 제 사정을 궁금해 해달라는 눈치를 팍팍 풍기는 A에 다니엘은 못이기는 척 물었다.
"왜."
쉴 새 없이 우물거리던 A의 입술이 이윽고 멈추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 위로 핑크색 스푼을 내려놓는다. 가볍게 플라스틱 튕구는 소리가 났다. 컵 안에 다 녹아 흐물거리는 아이스크림의 비주얼이 꼭 아름다운 토사물 같았다. 웩. 평소 다니엘은 극사실적이고 신랄한 묘사로 탐미적 낭만주의자 A를 못살게 구는 일을 즐겼으나 이번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잠자코 있기로 했다. 명실상부 대세 추리소설가의 직감이었다. 어느 별의 파편이 튀어 만들어졌는지 모를 작은 머리통이 몇 번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툭, 한숨섞인 투정을 했다.
"저 아무래도 소설 그만 쓸까봐요."
그래. 그 때 까진 다니엘도 애새끼 잔투정인 줄 알았다. 스물이 된 지 두 해도 채 지나지 않은 A는 나잇값을 하는 건지 유독 어리게 굴었다. 덥고 춥고 배고프고 졸리면 말투부터 칭얼칭얼 꼬리가 늘어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A가 아니었다면 다니엘은 진즉에 표정을 썩히며 학을 떼고도 남았을 테다. -물론 A라고 해서 다니엘이 표정을 썩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A는 다니엘의 협소한 인간관계 내에 발을 들인 사람 중 가장 어렸다. 물론 100세 시대에 이십 대 후반은 체감 나이 청소년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강다니엘은 서른을 목전에 둔 어엿한 어른이었고, A는 까마득히 어렸으니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당혹스러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쨋거나 이번에도 예의 그 대수롭지 않은 어리광이라 간과한 다니엘은 방금과 같은 톤으로 왜, 했다.
"그냥...솔직히 제 글 쫌 구리잖아요. 이 나이에 하는 일 없이 글만 쓰는데 늘지도 않구, 작가님한테 도움도 안 되구, 맨날 작가님 귀찮게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무미건조한 대꾸에 톡 쏘아보는 시선이 따라붙을 법도 한데 A는 왠일인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글쎄, A의 글이 구린 것도 맞고 늘지 않는 것도 맞고 저를 매일 귀찮게 하는 것도 맞지만, 이 뜬금없는 자기객관화는 또 뭔가. 다니엘은 이런 게 요즘 애들 트렌드인가 싶었다. 아침 저녁으로 널을 뛰는 감정의 주파수라던가.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는 화법이나 텐션같은 것. 아무래도 좋았다. 다니엘은 A를 살살 달래고 말 생각이었다. 대충 희망의 말 몇마디로 A의 초긍정 세포를 북돋으면 그만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A가 뒤이어 선언한 폭탄발언에 다니엘은 모든 의지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작가님 문하생도 그만 하려구요. 힝."
아이스크림 잘 먹었습니다. 주섬주섬 가방을 꾸려맨 A가 넋이 나간 다니엘을 두고 온통 핑크색인 매장을 씩씩하게 빠져나갔다. 팔랑팔랑. A가 나간 뒤로도 한참을 얼 빠져있던 다니엘이 한 순간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옆 테이블의 코찔찔이가 그 소리에 놀라 두 스쿱을 위로 쌓은 콘 아이스크림을 손에서 놓쳤다. 으와앙- 어린애 울음 소리가 볼륨을 키움과 동시에 다니엘이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제 작가님 문하생도 그만 하려구요...작가님 문하생 그만 하려구요...그만 하려구요... 젠장. 그건 안된다. 그럴 수는 없다. 세상에 A를 대신할 수 있는 문하생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비록 A의 글이 구리고 글실력이 전혀 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이 다니엘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헤집었다. 이 상황을 소설의 첫장이라 친다면 지금 쯤이 발단을 정리하는 메인 문구가 등장할 타이밍이다. 운이 좋으면 소설 뒷표지에 멋들어진 서체로 새겨질 지도 모를 흥미로운 문구 말이다.
탐미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극사실주의 추리소설가 강다니엘은 근래에 성가신 문하생 A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있다. 강작가와 로맨스라니,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놀라 뒤로 나자빠질 일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뒤로 나자빠져도 좋다. 그 강작가가 현재 잘 못 찾아온 장르에 코가 꿰어 추리는 커녕 한 치 앞의 제 운명도 내다보지 못 하고 있으므로.
강작가도 가끔은 로맨스가 하고싶어
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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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A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