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W. 골든 딜리셔스
늦었다. 또 늦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면 그냥 학교에 사는 게 효율적일 지경이다.
어제 늦게까지 과제를 한 게 화근임이 분명하다. 이번 학기 시간표 누가 이렇게 짰니. 나야 나. 죽자 그냥.
급한 마음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눌렀다. 아씨. 왜 안 내려오는 거야. 제발 내려와 주세요. 한 번만 더 지각하면 F 각이란 말이에요 제발 제발.
“으허악!”
오른쪽 귀 옆으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파닥거렸다.
고개를 돌리니 불쑥 하고 앳된 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씩 웃고는 본인도 버튼을 마구 누르기 시작한다.
“오, 진짜 달려와쏘. 먼저 타요.”
띵- 소리를 내며 도착한 엘리베이터. 남자는 저 혼자 신기해하며 내게 손짓한다.
아니 근데 누구길래 우리 층에서 타는 거지. 내가 706호니까… 707호로 이사 온 사람인가?
요 며칠 집에 늦게 들어왔더니 그사이 이웃집 사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혹시,”
“안뇽하세요. 707호에 이사 온 라이콴린임니다. 3일 전부터 살아요.”
이사 오셨냐고 물으려 했는데. 남자는 내 쪽으로 그 큰 몸을 돌려 꾸벅 90도로 인사를 한다.
라이관린. 이제 보니 교복을 입고 있다. 정갈하게 맨 넥타이와 검은 컨버스 운동화, 그리고 이름표.
분명 교복인데 그보다 훨씬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아, 네. 저는 706호,”
“알아요. 김여주. 맨날 집 앞에소 노래 불러짜나요. 이름만 백번 들어쏘.”
“하하… 잊어주시면 참 좋을 텐데.”
“못 이져. 시끄러워쏘요. 난 원래 잠 안 자지만 횽들 잠 못자쏘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머리를 박자. 아니면 이 기회에 이사를 갈까? 어?
갓 이사 온 이웃집 사람들 잠이나 깨우고 멜로디 붙여서 자기소개를 하다니. 내가 한 번만 더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진짜.
부끄러운 기억에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라 볼을 꾹꾹 눌렀다.
“여주, 얼굴 빨개요. 아파요?”
불쑥, 그의 손이 볼에 닿았다. 차갑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 반해 관린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큼, 어, 그런데 혹시 관린씨는 외국에서 오셨어요?”
애써 공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한국말이 조금 서툰 걸 보면 외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 걸 거야.
“아뇨. 죠기에서 와쏘요.”
“저기…?”
“네. 죠기.”
관린씨의 쭉 뻗은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천장? 하늘?
미련한 앞집 여자를 상대로 놀리는가 싶어 얼굴을 보니 온통 진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뭐지.
“그고 알아요?”
“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관린씨는 머리를 넘기며 다음번엔 관린이- 라고 불러달란 말만 남기고 문밖으로 달려나간다.
무슨 소리지. 요즘 학생들이 공부하느라 많이 힘든가.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달에 토끼라니.
특이해.
* * *
“헉, 헉, 흐아. 죄송합니다.”
“방금 들어온 학생은 옆에 검은 옷 입은 남학생과 같은 조 하면 되겠네요.”
“흐아, 네?”
“발표는 3주 뒤 이 시간에 할 수 있도록 조율하겠습니다. 그럼 수업 시작하죠.”
결국 10분이나 늦었다. 20명 정도만 듣는 교양 수업이라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조심조심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교수님이랑 눈이 딱 마주쳐버린걸.
심지어 오자마자 강제 조 배정이라니. 뭐 어차피 독강이라 같이 조 할 사람도 없긴 하지만.
교수님의 말씀에 숨을 고르며 옆을 보았다. 검은 자켓에 검은 슬랙스, 그리고 검은 머리를 한 남자.
왠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이상,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각사각. 옆자리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필기를 하는 남자 덕에 덩달아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교수님도 놀라셨을거야. 내가 웬일로 고개를 들고 있어서.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빠르게 일어나려던 순간,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처음으로 남자의 입이 열렸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백 번도 넘게 무릎을 꿇었다. 기선제압이라는 게 이런 건가.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꿀꺽.
20분.
학교 앞 카페에서 남자와 20분째 말없이 마주 앉아 있다. 아니 무슨 벌을 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눈치를 보고 있는 거지?
아까 그 무섭던 표정에 내가 겁먹은 게 분명하다. 왠지 모르게 입을 열기가 두렵다.
쭈구리처럼 애꿎은 아이스 바닐라라떼만 휘적거리다가 무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크으…”
헙. 망했다. 여주야 제발 닥쳐주라. 잘생긴 얼굴에 감탄하는 건 속으로 하라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재빨리 눈을 내리 깔았지만, 따가운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탁-
“경영학과 4학년, 황민현입니다.”
크고 하얀 손이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진다.
“아, 크흠, 저는 사회학과 3학년, 김여주입니다!”
당황한 나머지 남자의 손을 두 손으로 덥썩 붙잡고 위아래로 세게 흔들었다.
더불어 입에서는 관등성명 뺨치는 각진 말투가 흘러나왔다. 아씨. 쫀 거 티 내지 말라고 김여주.
“발표 주제는 프랑스 영화 속의 미장센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민현이라는 남자는 나의 그런 행동이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 공책과 연필을 꺼내 주제를 적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아, 네 뭐 좋아요. 그럼 제가 자료 정리랑,”
“괜찮습니다.”
“네? 뭐가요?”
“여주씨는 영상자료 몇 개만 서치해서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
“잠깐만요. 도대체 왜요?”
“……”
“저도 자료정리 할 줄 알고, 피피티도 만들 줄 알아요. 발표할 때 실수한 적도 거의 없고요. 그런데 왜 민현씨가 전부 다 해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내 존재 자체가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제 마음대로 재단하고 결론짓는건지.
잘생긴 얼굴엔 좋은 정신이 깃든다는 신념은 그만 갖다버려야겠다. 남자는 왠지 모르게 벙 찐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본다.
뭐! 어쩌라고! 나도 화났다 이거야. 왜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는 건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제가 조금 바빠서요. 여기로 연락 주세요. 과제 회의는 다음에 다시 하시죠.”
남자의 공책과 연필을 박력 넘치게 가져다가 그 위에 내 전화번호를 휘갈겨 내밀었다.
그럼에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 처음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카페를 나섰다.
뒤통수 뚫리겠네.
* * *
[EPILOGUE 01]
여주가 카페를 나가자, 민현은 웃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긴장이 풀린듯한 여주가 주저앉는 모습이 보인다.
민현은 그런 여주의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간다.
“아, 왜 귀엽지.”
“어때?”
민현은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옮긴다.
의자 밑,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방으로 뻗어있는 민현의 검은 그림자들.
잠시 그것들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메리카노를 들이킨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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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골든 딜리셔스의 메세지 |
안녕하세요, 골든 딜리셔스 입니다. 첫 연재라 걱정이 앞섰는데, 이렇게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속 <이웃집에 신이 산다?>를 통해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지적, 궁금한 점 언제나 환영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