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다시, 그 남자의 사정
정승환 - 너였다면
(옹성우 시점)
".....차인건가, 나."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어보였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들은 이상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저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맞췄다.
슬픈 건 난데 네가 왜 이렇게 나를 슬프게 보는 거야. 다가가서 맺힌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다.
미안해 하는 얼굴을 앞에 두고 있기가 힘들었다. 어떤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을 뱉었다.
"두 달만."
"....."
"좋아했던 날들의 딱 절반 만큼만."
"......"
"정리할 시간은 줘요, 나한테."
"......."
"그 안에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구차해지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구차해지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다. 먼저 사랑하기 시작한 쪽이 지는 거다. 이쯤 되니 그건 너무나 당연한 진리라는 걸 알고 있어서, 굳이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걸 인정하기에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하고 이어지는 대답이 처연했다. 슬퍼해야 할 건 난데 표정으로는 네가 더 슬픈 것 같아서 나는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다.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으려니 어색한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이제 들어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짧은 대답 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다.
나 또한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혹여라도 또다른 부담을 주면 안 되니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과장님."
"......"
"저한테는... 과장님 정말 좋은 분이셔서,"
"......"
"계속 좋은 과장님으로 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과분하게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치만, 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너를 보면서 나는 아주 잠깐, 너를 원망했다.
내가 네게 좋은 과장님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는지. 내가 네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걸 네가 생각해봤더라면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그러나, 이내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목소리가 너를 변호하고 들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인 거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혹시나, 혹시나 하는 헛된 기대를 걸어보았던 내가 잘못한 거라고. 그렇게 내 속의 목소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네 대답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것으로 이 감정이 끝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게,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인정은 하면서도 수용할 수는 없는. '미련'이지, 미련 때문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너를 좋아하면서 내가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내 끌리는대로 생각하고, 사는 놈이었나 내가.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됐다.
".....저, 과장님."
"...네."
"....죄송합,"
"죄송하다고 하지 말아요."
"......"
".....고맙다고만 해요.
죄송하다는 말은... 내가 너무 불쌍해지는 느낌이라."
간단히 입꼬리를 올려 웃는 건 이제 내게 습관이 되어버린 것마냥 쉬운 일이라,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이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보다 조금이나마 나아진 건,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제법 티나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렀음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어찌 되었든 네 앞에서 나를 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네가 울어버리면 나는 너를 안아주고 싶을 텐데,
그런 건 네 감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나는 그저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말았다. 너를 등지고 원래 내가 있던 자리로 와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일들 중 어떤 걸 해야 하고, 어떤 걸 하지 말아야 하는지. 나는 이제부터 그걸 생각해야 한다.
"......."
끊었던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바싹 말라오는 입에 술이라도 털어넣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그렇게 웃는 척을 하며 밤을 보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마음이 어떻게 문드러지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
"저희 이제 가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같이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 가서 연락 드릴게요."
"네, 성우 과장님. 저희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모쪼록 이번 일 끝까지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펜션에서 클라이언트 회사의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제주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나마 지부 직원들이 차에 같이 타기도 했고, 공항까지는 같이 갈 거고, 또 비행기 안에서도 같이 있을 거니까 다행인데,
공항에서 ○○를 집에 데려다 주는 시간까지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통 감이 오지 않았다.
긍정의 답을 들을 거란 예상은 한 적도 없는데, 막상 부정의 확답을 받고 나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쏟아지는 위기에는 닳고 닳아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아직도 한참 덜 큰 모양이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굳이 가리려 들지는 않았다. 이마저도 없으면 내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온통 파란색이 가득찬 하늘을 보다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잠들었다 깨면 집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서 마음껏 울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
"...강다니엘. 맘에 안 들면 말로 해.
애처럼 비겁하게 딴지 걸지 말고."
그런 때가 있다. 또 그런 날이 있다. 상대방이 잘못했든, 내가 잘못했든 한 대 줘패야 기분이 풀릴 것 같은 때, 또는 그런 날. 그 날이 그런 날이었다.
낮에 과장급 회의에서 강다니엘과의 신경전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있기 싫은 분위기와 보기 싫은 얼굴을 몇 시간 내내 보고 있으려니 정신적으로 버거웠던 듯하다.
빤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치기 어린 마음에 그런 거라는 걸 알면서도, 두 눈 딱 감고 주먹을 휘두르게 되는 날. 그 날이 내게 그런 날이었다.
"자신 없냐, 너.
너는 너가 버려졌다고 생각하잖아.
왜, 또 버려질까봐 무서워?"
오해는 풀지 않으면 독이 되어 썩어버린다. 썩은 뿌리는 썩은 꽃과 썩은 열매를 맺는다. 풀리지 않은 오해는 독이 되어 그렇게 나와 강다니엘을 망쳐놓았다.
내 말은 명백한 시비였고, 녀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무시하는 녀석의 뒷모습. 그 뒷모습이 되려 나를 자극했다.
이성적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이성적이기 싫었던 거다. 주먹을 휘둘러야만 했던 게 아니라, 주먹을 휘둘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던 거다.
내가 질 거란 걸 알면서도. 결국 져서 못 볼 꼴을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덤볐던 거다. 그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언제까지 피할 건데.
언제까지 할 거냐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주는 데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참아온 거 다 쏟아내면 너 감당 못해."
"......"
"눈독 들이지 말라고 했을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지. 너가.
...내가 참아주고 눈 감아줬을 때 그만 했어야 했어. 넌."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난 바닥에 눕혀져 맨얼굴로 녀석의 주먹을 받아냈다. 얼굴 위로 주먹이 꽂히는 게 아픔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 피하지 못했던 것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보같았다. 어른이 되었으면 어른스럽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곧 죽어도 나를 피하고, 나를 등지고, 그렇게 무시하는 녀석을 앞에 두고는 대화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그 뿌리가 '오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걸 해결하려 들 수 없었다. 무던한 노력이 실패로, 수포로 돌아가버린 이상 내게 그걸 다시 해낼 힘은 남아있지 않았던 거다.
"......."
입 안이 찢어졌는지 피맛이 났다. 그렇게 몇 번 얼굴에 주먹을 꽂던 강다니엘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나와 눈을 맞췄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하는 김재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했어. 낮게 읊조리는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나를 깔고 앉아있던 몸을 세워 일어났다.
나는 진득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맞은 얼굴에는 통증을 기반으로 한 뻐근함이 감돌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꼴이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뭐에요. 다 큰 어른이 주먹질이라니."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줘 떴다. 황민현과 ○○○가 보였다. 사무실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나온 모양이다.
눈 앞엔 황민현이 있었지만 정작 내 시선이 가있던 건 강다니엘과 ○○○에게였다. 제 몸보다 훨씬 큰 강다니엘을 부축하는 자그마한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민현이가 내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나를 끌고 가듯 가는 동안 내 시선은 계속 그들을 향해 있었다.
반쯤 감겨버린 시야 사이로 그들은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택시가 나와 민현이를 추월에 한참을 앞서 갈 동안 그 차체를, 그 번호판을, 그 노란 형체를 계속 눈으로 좇았다.
".......못났다."
술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나조차 내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에 놀라며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들면서 눈이 제대로 떠졌고, 민현이는 형 차 어딨어요. 했다.
회사 지하주차장. 나는 민현이를 향해 대답했고, 민현이는 나를 길가에 잠시 세워두곤 차를 빼러 갔다.
손을 들어 아까 맞은 곳 언저리를 슬쩍 눌러보았다. 새끼... 아프게도 때렸다. 그런데 거기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샜다.
텅 빈 눈에는 택시 안으로 사라지던 그 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쉬이 잊혀지지 않을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횡재를 바라자고, 무슨 반전을 꿈꾸자고 그렇게 시비를 걸고 주먹질까지 했는지.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이지만 후회는 아니었다.
후회야 ○○를 좋아하게 된 내 마음에 대한 후회였지, 다니엘과 싸우게 된 데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었고.
끊은 지 한참 된 담배가 말렸다. 너는 자꾸만 내게 담배를 피우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너는 핑계일 뿐이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건 그냥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못난 내게도 원망할 수 있는 자유는 있는 거 아닌가.
너를 좋아한 게 내 자유이듯, 너를 원망하는 것도 내 자유이고 싶었다.
"타요, 형."
운전석에 앉은 황민현이 조수석 창을 내리곤 내게 소리쳤다. 휘청대는 걸음으로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
우리는 김포에 떨구어졌다. 지부 직원들은 좋은 시간이었다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곤 저들끼리 가버렸다.
공항에는 나와 ○○○ 둘이 남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데려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데려다 준다면 차 안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런 실없는 고민이 이어졌다.
게이트에서 나와 캐리어를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잔뜩 주저하다 말을 꺼낸 기색이 역력했다.
"저, 과장님.
...저 버스 타고 갈게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하는 모습에 내가 더 이상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라고 말하려 달싹인 입에서는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얼추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낸 너가 나를 등지고 사라진다. 잔뜩 처진 어깨가, 그에 이어진 가녀린 팔과 손으로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간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나 자신을 향해 되뇌인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가 생에 대한 욕심을 내는 것마냥 부질없는 짓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어본다. 답답한 마음이 뚫리려면 술을 부어내야 할 것 같다. 휴대폰을 들어 황민현의 번호를 찾았다.
-
"청승맞게 혼자 술을 마셔요."
"...왔냐."
쫙 빼입은 수트에 빼꼼 내민 얼굴이 잘났다. 부른다고 황민현이 같이 술을 마셔주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앞을 빈 채로 두려니 안 되겠어서 녀석을 불렀다.
퇴근하고 잠깐 만나자 했더니 마침 오늘 야근 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저녁시간 뺏을 수 있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제 여자친구가 형 안티에요, 안티. 그럴 거면 형이랑 사귀라고 어찌나 뭐라고 하는지 지난 번에도 달래느라 혼났다고요. 하길래 그럼 됐다고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그래도 혼자서 어떻게 술을 먹여요. 그냥 한 말이에요. 갈게요. 했다.
"뭐 이렇게 처연해요. 누가 보면 차인 줄 알겠네."
"...차였어."
소주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황민현의 눈이 커진다. 좌우로 길게 찢어졌을 뿐이지 작은 눈은 아니다. 꽤 놀란 모양이다.
○○○에 대한 나의 마음을 유일하게 알았던 사람이 황민현이었다. 얘 말고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건 내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도 최소한 누군가 한 명쯤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그게 민현이었다.
"......."
커진 눈을 다시 원래대로 뜨더니 고개를 떨궜다.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쉬어낸 녀석이 소주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웠다.
뭐 안주도 안 시키고 있냐.. 오늘 컨셉 청승이에요? 먹을 거라도 좀 시키지, 빈 속에 소주를 부어요 왜. 핀잔이 이어졌다.
뭘 먹기도 싫었던 모양이다. 그저 알콜만 부어내면 그걸로 아픔이 좀 씻길 것 같았나 보다. 이런 내 모습이 웃겨서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니까 돌아버리겠네."
"...뭐가."
"2년 동안 말 한마디 안 했던 놈이랑 주먹질을 해대지를 않나. 여자한테 차여서 빈 속에 술을 쏟아붓지를 않나.
제가 모르는 형 모습을 자꾸 보니까 미치겠다고요."
"......."
그것 뿐이겠냐. 애가 아프다는데 어디가 아픈 줄 몰라서 약국에 가서 종류별로 약까지 사다 바치기까지 했는데.
내가 황민현한테 그날 일을 이야기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이것까지 이야기하면 아무리 내가 형이라고 해도 황민현이 나를 한 대 치지 않고서야 못 배길 것 같았다.
정신차리라고, 그만 좀 하라고, 화를 내는 황민현을 봐버리면 정말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극에 달할 것 같았다.
이미 한심한데, 이미 충분히 못나고 바보같은데 거기에서 또 황민현이 못을 박아버리면 왠지... 너무 아플 것 같았다.
"애초에 형이랑 다니엘은 왜 같은 부서로 만나서."
"......."
"아니 왜 같은 회사에 들어와가지고."
"......"
"아이고... 말해야 뭐 해. 백 번 말해야 뭐 하냐고."
속이 탄다는듯 흰 셔츠를 펄럭이더니 컵에 냉수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킨다. 모든 역사를 아는 황민현의 입장에서는 속이 안 터질래야 안 터질 수가 없을 거다.
어쩌면 지금은 나만큼이나 민현이도 괴로운 마음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부를 사람은 민현이밖에 없었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결국 원흉은 박과장님 아닙니까. 저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
"그 분만 아니었어도 둘 사이가, 아니 부서 전체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나와 다니엘이 대리였던 시절, 내 위로 박과장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박과장님은 우리처럼 공채로 들어온 분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일을 하다 과장급으로 채용된 분이었다.
아무래도 공채로 들어온 게 아니다 보니 조직에 적응하는 게 약간은 힘들었던 모양인데, 문제는 그게 윗분들과의 갈등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공채로 들어오지 않은 게 문제라면 공채로 들어오지 않은 모든 사람이 그런 문제를 겪는 게 맞겠지만, 박과장님은 유독 좀 특이한 경우였다.
윗분들과 성격적으로 잘 맞지 않았던 게 갈등의 원인이었으나 당시의 과장님은 그걸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입사한지 1년 가까이 되었을 때 갑작스런 퇴사 의사를 밝혔는데, 그렇게 되면 당장 과장급이 공석이었다.
다른 팀은 과장이 진급하면서 대리가 과장이 되는 수순이었지만, 우리 팀은 좀 달랐다. 졸지에 비어버린 자리에 누구 하나를 집어넣어야 했다.
그게 나와 다니엘의 차이였다. 과장이 될 때가 되어서 승진을 눈 앞에 둔 자와, 위에 있던 과장이 관둬서 졸지에 승진을 하게 된 자의 차이.
그러던 중 다니엘이 부모님의 상 때문에 부산에 내려가게 되었고, 나는 서울에 남아 승진을 확정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팀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우리 팀장님은 박과장의 갑작스러운 퇴사가 본인의 잘못에 의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른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단지 성격이 좀 안 맞았을 뿐이라며 팀원들은 팀장님을 위로했지만 그런 말로는 전혀 위로가 안 되었다.
영업마케팅부서에서 쪽팔리게 우리만, 마케팅팀만 이런 일을 겪었다며 한탄 아닌 한탄을 계속하시던 게 결국 팀 간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그러던 중 영업2팀의 다니엘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승진 PT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습지만 팀장님께는 위안이 되었다.
그 상황에서 다니엘의 부모님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연차를 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일 하나하나가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진 때였고,
박과장의 갑작스런 퇴사에 조직에 대한 배신은 절대 악으로 간주될 만한 상황이었다.
미안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니엘에게 건넸던 그 인사가 내게는 최선이었다.
내가 다니엘과 가깝다고 해서, 친한 동생이라고 해서 이 상황을 공론화해서 팀의 치부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다니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그 미안함과 팀에 대한 충성도는 별개였다. 아마 지금 또 그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느덧 팀 간 자존심 싸움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사내 모든 부서 중에 영업마케팅부서가 유독 경쟁과 견제가 심하다는 게 비공식적이지만 공식적인, 사내 분위기였다.
그 상황에서 다시 다니엘과 말을 트고 예전의 그 사이를 유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원이나 대리라면 모를까. 과장까지 된 상황에서 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친하다는 것은 윗분들의 지적사항이 되기에 마땅했다.
"저는 강과장님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의 그 살벌한 분위기랑 그런 거? 그리고 그때 마케팅팀 팀장님 얼마나 예민했는지도요."
"......"
"근데 보니깐 저 말고 다 모르는 거예요.
솔직히 마케팅팀 내에서도 쉬쉬했잖아요. 자존심 싸움이니까.
저는... 형이 말해줘서 알았던 거죠."
이제 와서 말해봤자 달라질 건 없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민현이는 식탁 위에 올려진 안주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별 생각 없었는데. 민현이의 말을 들으니 이런저런 상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채워진 소주잔을 또 한 번 비워냈다.
황민현은 연달아 원샷을 하는 내게 살살하세요, 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튼, 말이 좀 딴 길로 샜는데.
그래서 어떡할 생각이에요? 계속 봐야 되잖아요."
한참 안주를 집어먹던 황민현이 나를 향해 물었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민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두 달만 달라고 했어."
"....."
"그 안에 내가 어떻게든 정리해보겠다고."
민현이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듯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 있어요, 형? 하고 물어오는데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있냐 없냐를 물어보면 자신이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그만큼의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었을까, 하고 후회하던 차였다.
"어쩔 생각이에요. 어떻게 하려고요."
걱정스럽게 묻는 황민현이다. 작전이 없는 대장에게 작전을 묻는 것 같은 느낌이라 피식 웃음이 샜다.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닌데 왜 웃냐는듯한 눈빛이 따라왔다. 나는 이번 만큼은 술이 아닌 물 한 컵을 한 번에 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형님의 빅픽쳐가 있다."
"......있는 거 맞아요?"
"사실 없어. 그렇게 정확하게 뭐 할 생각으로 한 말 아니야."
내 말을 들은 황민현이 절망스럽다는듯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아 진짜, 내가 울고 싶다. 내가 울고 싶어. 하는 말이 귀를 때린다.
울고 싶은 건 난데 네가 왜 우냐. 민현이를 향해 물었다. 황민현은 형이 불쌍해서요. 그리고 진짜 미쳐버리겠어요. 대체 왜 그래요, 왜. 했다.
그러게.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알면 덜 답답할 텐데.
손을 내어 소주병을 기울였다. 조금 취한 건지 술잔 밖으로 소주가 좀 흘렀다.
쓴웃음이 나왔다. 두 달, 자신 있냐. 내가 나 자신을 향해 물었다. 아닐 걸. 내가 나 자신을 향해 대답했다.
툭, 하고 또 입 안에 소주를 털어넣었다. 비어버린 소주잔이 내 눈처럼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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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편 암호닉(0~3차 암호닉 신청자에 한함. 24편 업로드 전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에 한함.) [수 지] [이스트팩] [12100809] [체리] [우주] [옹성우] [어피치] [피치씌] [녜리] [강심장] [춘쟝] [쿠쿠] [쫑쫑] [요니] [일개사원] [동태] [여지] [차차] [몽글] [SRJ] [0302] [회사워니즘] [녤옐♡] [요거팅팅] [밍밍이] [슬] [은하수] [녤꽃] [늘봄] [사용불가] [파리링] [호다닥] [덧깨비] [퍼지네이빌] [댕댕이강다니엘] [어어] [국국] [디눈디눈] [송송아] [데헷] [DMR] [다정] [징징이] [새벽] [녜리] [만두] [짠따라] [분홍색솜사탕] [응] [리베0511] [마이관린] [카르스트] [댕댕과장] [B06B] [물만두] [댕댕이] [파요] [방구뿡] [121027] [리베르떼] [1122] [키싱구라미] [다녤의 만두] [너부리] [뚠뚠] [다녜링] [일오] [비버] [뉄뉄] [빨간머리] [칸타타] [로지] [츄얼] [마카롱] [아마수빈] [넌내희망] [히릿] [체크남방] [졔졍] [켘케] [갓의건] [도앵도] [다녤이랑워니랑] [진이진] [알바생] [포로리] [뉸뉴냔냐] [우럭] [뀨쓰] [불꽃] [수저] [1210] [딸기시럽] [피치수플레] [무네큥] [비비빅] [아이셔] [영단즈] [애벌레] *****4차 암호닉 신청: 90명 [뿌랑] [이부르] [다다] [크뽀] [과자] [박우진라면] [맥주톡톡] [누나] [현] [윙지훈] [강옹량] [3536] [에이드] [하늘연달] [오예스] [빠뺘뽀뾰쀼] [녤림캐쳐] [달달한복숭아] [굥아] [쌈장] [새우] [호뿌] [장뚜] [솜사탕] [입학하자] [녤부] [메론바] [모히또] [다람쥐] [바밤바] [배고파] [숨] [암요] [박참새] [구원자] [갱대녤] [황금알] [녤리리아] [짚고긴한커피] [녤루] [강단이엘] [뚜띠따띠] [합니다] [뮹묭] [엘제이] [한윤] [환타] [미뇽미뇽@@] [극성갑독자] [강낭콩] [@불가사리] [슝왈이] [커밋] [째짼] [무리] [과장님나이스샷] [다댕이] [수박바라밤] [녤볼루션] [재뀨] [다녤미뿜뿜] [강멍뭉] [호두] [옹오로옹] [zi존다녤] [안돼] [구르미] [비눗방울] [쫑쫑(수정요청중)] [다녤잉] [앤지] [에비츄] [호어니] [몽구리] [설] [수자] [유우] [재환콩] [mj] [020716] [0909] [XXX] [둡돌고래] [눈눈] [딸기맛초코파이] [■계란말이■] [라온하제] [수특] [이히] [간장계란밥] 4차 암호닉 신청도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박수)(함성) 죄송하게도 선댓만 달고 가신 분들은 명단에 못 넣었는데요.. 다음부터는 급하시더라도 짧게라도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편에 한사원 잠깐 나왔는데 독자님들 질색팔색 하면서 싫어하시는 거 보고 혼자 몰래 웃었어요ㅋㅋㅋ 이제 가급적 안 나오게 할 것 같긴 한데.. 아마 사이사이에 얼굴 비추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아요... 보기 싫겠지만 현실에서도 보기 싫은 사람 계속 봐야 하는 것처럼(.....하.....) 넓은 마음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 오늘 댓글로 매우 맞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남자의 사정' 에피에서 다니엘이 말한 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었거든여.. 여기까지가 그 둘 사이에 얽힌 이야기의 전체적 과정?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과정에 대한 인물 간의 심리는 다르겟지만요.. 여주와 다니엘 쪽에 씬스틸러 조연으로 지훈이가 있다면, 성우 쪽에는 민현이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민현이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런 분들이 갈증을 해소하셨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24편에 굉장히 애착이 가네요... 열심히 쓰기도 했고, 또 성우의 절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기도 한 것 같아서.. 여러분들도 그래주셨기를 바라봅니다.ㅎㅎㅎ 이번주에 제가 생각해도 너무 폭풍연재를 하는 바람에.. 꾸준히 댓글 다셨던 분들도 뭔가 지치신 건지 살짝 줄어든 느낌도 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체력이 떨어져가지고 헤롱헤롱한 게 역시 한 주에 4편 연재는 무리였나 봅니다..ㅠㅠ 그치만 함께해주시는 독자님들 있어서 너무 좋았고요.. 그래도 완결까지 꾸준히 가야 하니까 이제 좀 페이스 조절을 할게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연재하겠다는 말씀입니당..ㅎㅎ 아 그리고 여담으로 이번 편은 위너의 FOOL 들으면서 썼기 때문에 그 노래 들으면서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너였다면을 꼭 한 번 넣고 싶었어서 넣었거든여.. 뭔가 다니엘 입장에서의 '안아줘' 같은 존재랄까..? 여튼 오늘 사담이 좀 길어졌는데,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주간 폭풍연재 했는데도 성의있는 댓글 달아주신 사랑스러운 독자님들 다들 감사해여.. 우리 독자님들 댓글달기 안 힘들게 제가 작작 올게여..(웃음) 약속!! 얼마 남지 않은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시원하게 주무시고요~ 늘 사랑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