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제주도의 푸른 밤
샤이니 - 방백
[10시에 대회의실에서 부서 전체 회의 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니 급한 일 있더라도 반드시 참석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안건: 클라이언트 회의 차 제주 출장 및 워크숍, 여름휴가 일정 등]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날아왔다. 화면을 너무 집중해서 본 탓인지 눈이 피곤했다. 부서 전체 회의라면 커피를 좀 사와야 했다.
회의 시작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과장님께 가서 커피 사러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과장님은 같이 가자며 일어섰다.
자리에 앉아계시던 영업1팀의 김재환 과장님을 툭툭 쳐서 일으켜 세우고는 같이 데리고 나오셨다. 스무 잔은 족히 사와야 하니 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과장님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허리를 툭툭 치셨고 옹과장님은 빙긋 웃으며 김과장님께 말을 건넸다.
"요즘도 비 오면 허리 아파?"
"그렇죠 뭐.. 축구하는 애들은 다 그래요."
"신기하다. 허리가 아파질 때까지 하는 거야?"
"뭐... 하다 보니까 허리가 아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멍을 때렸더니 어느덧 1층에 도착해 있었다.
걸음을 서둘러 건물을 나가시는 김과장님과 옹과장님의 뒤를 따라갔다. 주머니를 뒤져 법인카드의 존재를 확인했다.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카페로 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뜻한 카페라떼와 시원한 카페라떼를 종류별로 주문했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까 하나로 통일하면 마시는 사람이 있고, 안 마시는 사람이 있게 된다. 한 번 종류별로 사갔더니 센스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때 이후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한 사람이 한 손에 네 잔씩, 총 여덟 잔을 들고 카페에서 나왔다.
"무거워, 무거워."
"....."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얼른, 얼른!"
김과장님은 모든 말을 두 번씩 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쨌든 부서 통틀어서는 아니지만 팀에서는 홀로 막내인 내가 회의실에 제일 먼저 들어가 세팅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한 사람 앞에 음료 한 잔과 회의자료 한 세트씩을 세팅했다. 55분이었나, 거의 세팅이 다 되었을 때 쯤에야 회의실에 들어온 한사원이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예, 안녕하세요. 하고 대충 대답해낸 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사람도 막내인데 일은 나만 하냐... 괜히 좀 억울해졌다가 이런 걸로 억울하면 나만 스트레스 받겠다 싶어 생각을 관뒀다.
한사원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강과장도 회의실로 들어왔다. 나는 강과장과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도 모르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가 떼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사원은 언제나처럼 강과장 옆자리에 제 자리를 잡았다. 늘 그래왔고 또 몰랐던 건 아니지만 참, 저렇게 한결같이 마음에 안 들기도 쉽지 않은데.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사원을 쳐다보니 옆에 있던 강과장이 내 눈치를 본다. 아마 강과장 눈에 비친 나는 질투에 못이겨 불을 뿜는 모습이 아닐까.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팀장님도 안녕하십니까-"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싹싹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하시는 분은 옹과장님이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나를 찾아냈고, 옹과장님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자리를 잡으셨다.
공교롭게도 세 팀이 다 모였는데 그 중에 나는 한사원을 마주보고 앉아있고, 내 옆에 옹과장님은 또 강과장을 마주보고 앉아있다.
예전 같았으면 화가 나야 분명한 상황인데, 체육대회로 인해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라 그런지 약간은 면역이 된 것 같다.
영업2팀 팀장님의 진행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부서 전체가 모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마케팅팀의 신규 프로젝트였다.
팀장님의 간단한 소개 후에 옹과장님이 발표를 위해 앞으로 나가셨고, 나는 두 손을 턱에 괴고 옹과장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일전에 과장급 회의에서 언급했던 일정이 잘 준수되어서, 현재는 도출된 액션플랜을 클라이언트와 공유한 상태입니다.
다음주 중 이 액션플랜을 들고 클라이언트의 본사가 있는 제주도로 가서 기획 단계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제주 출장은 저와 ○사원이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본사와의 업무회의 및 간단한 워크숍과 네트워킹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말은 '간단한 워크숍과 네트워킹'이지만 사실 회의 외에는 놀고 먹고, 마시고 할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느꼈지만 이번 클라이언트의 회사 분위기 자체가 놀고 즐기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회의 결과도 사실상 회의 시간보다 회식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더 잘 나왔다.
그런데 이게 무서운 게, 논다고 정신을 놓을 게 아니라 그럴수록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다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주고받은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고 기획에 넣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제주도에서는 조금 덜할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들고 가서 확인만 하는 거니까.
그래도 어쨌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기를 바랐는데... 결국 1박2일이었다. 벌써부터 피곤이 쌓이는 듯해서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액션플랜의 실행은 8월 중순부터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마케팅팀보다 영업팀에서 더 많은 힘을 써주셔야겠지만,
언제든 협업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옹과장님의 간단한 발표가 끝났다. 적당한 박수가 이어졌고, 곧이어 과장님은 자리로 돌아오셨다.
다음은 영업2팀 팀장님께서 진행을 이어가셨다. 어쩌면 오늘 회의의 가장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인 '전직원 워크숍'과 '여름휴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귀를 쫑긋 세웠다.
있는대로 집중을 해서 영업2팀 팀장님을 쳐다보는데, 건너편에서 뭔가 시선이 붙어오는 게 느껴졌다. 뭐야, 했더니 강과장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마케팅팀 옹과장과 ○사원이 다음주 수요일에서 목요일 일정으로 제주도 다녀온 후에,
주말에 전직원 워크숍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1박2일 일정으로 금요일에서 토요일에 걸쳐 진행됩니다.
워크숍 공지가 상대적으로 늦게 된 이유는 이번에는 워크숍보다는 포상의 의미가 커서 급하게 기획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감아오는 강과장이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래도 몸이 살짝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옆에 앉은 옹과장님이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보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몸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에 가져가 빨대를 물었고, 옹과장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셨다.
나는 흘끔 강과장 쪽을 쳐다봤다. 누가 날 보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슬쩍 눈치를 보다가, 나도 한 쪽 눈을 슬며시 감았다.
웃음이 터진 강과장이 손을 올려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한사원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과장님을 쳐다봤는데, 다행히도 1초만에 포커페이스에 성공해서 걸리지는 않았다.
"이번 프로젝트 잘 따낸 마케팅팀을 포상하는 의미에서 저희 대표님이 시간과 예산을 제공하셨고,
타이밍 좋게 휴가철을 맞아 전직원 워크숍으로 기획했습니다."
그나저나 전직원 워크숍이라니. 그건 또 처음이었어서 내심 기대가 되었다. 전직원 워크숍이라면... 생각나는 건 하나였다. 강과장님이 춤 춰서 엄청난 시선을 끄셨다는... 그거.
장기자랑이 그렇게 재밌다고 하길래, 과연 어떻게 진행될까 궁금했는데 막상 간다고 하니 막 심장이 뛰는 게 엄청 설레는 기분이다.
당장 제주도 가는 것보다 워크숍이 훨씬 기대되는데...? 과장님한테 이번에도 춤 출 거냐고 물어봐야지. 안 춘다고 해도 무조건 졸라볼 거다.
"워크숍 이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는 여름휴가 장려기간입니다.
가급적 이 기간 안에, 팀 내 논의 통해서 각자 타이밍 맞춰 다녀오는 걸로 할게요.
옹과장도 언급했지만 8월 중순부터는 영업팀이 많이 바빠집니다. 가능한 한 8월 말로 잡지 마시고 중순 안에 다녀오세요."
다행히 사이판으로 가고 오는 비행기는 7월 마지막주로 예약되어 있었다. 예약된 기간까지 완벽하다 싶어 괜시리 웃음이 샜다.
그래도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를 내어 입술을 물고 웃음을 참았다. 제주도에, 워크숍에, 사이판까지. 7월은 이래저래 왔다갔다 하는 일정이 많았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여름을 제대로 즐기게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뭐 여튼 좋았다.
주요 안건 공유는 끝났고, 다음은 영업1팀과 2팀에서 보고할 내용을 간단히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 팀의 과장님들은 순서대로 나와서 보고할 내용을 발표했다. 여러 사람 앞에 선 강과장이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여 엄마미소를 짓게 된 건 안 비밀이다.
아마 내 눈에 띄워진 하트도 보였겠지? 부끄러운 마음보다는 좋은 마음이 더 컸다. 별로 쑥쓰러울 것도 없었다.
빨리 퇴근하고 얼른 품에 안기고 싶어서 금방 퇴근하고 싶어진 것도 하나도 안 비밀이었다.
-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1박2일로 가기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으니 솔직히 좀 설렜다. 날씨가 더워진 것도 한 몫 했고... 그래도 장소가 제주도잖아?
그리고 1박2일로 가기 싫다고 했던 날보다는 몸 상태가 훨씬 좋아져서 그런지 싫은 마음보다는 기대되는 마음이 컸다.
더군다나 이걸 빨리 다녀오면 또 워크숍도 갈 거고.. 워크숍 빨리 다녀오면 사이판도 갈 거고... 흐흐흐. 끓어오르는 내적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좋은 회사다, 좋은 회사야.
제주도도 보내주고... 좋네."
"도쿄도 보내줬는디?"
"이야아- ○○○ 잘 나가네- 멋있네-"
먹다 남은 배스킨라빈스 패밀리 통을 끌어안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를 지켜보던 박지훈이 입을 열었다.
나는 가만가만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겼고, 박지훈은 TV와 나를 이따금씩 번갈아 가며 추임새처럼 말을 뱉었다.
"누구랑 가?"
"....옹과장님."
"와- 기회네, 기회야. 간 김에 확실히 맺으시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말씀하시죠?"
예... 왠일로 쉽게 입을 닫는 박지훈이다. 그도 그럴 것이 TV에는 또 프로듀스 뭐시기가 하고 있다.
저걸로는 박지훈의 모든 시선과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심지어 내게 잔소리를 하거나 무슨 핀잔을 할 때에도, 저것만 있으면 피할 수 있다.
그래도 박지훈 사촌누나로서 살아가는 내 인생에 저런 구제책 하나는 있어주는구나 싶어서 다행이었다. 넋을 놓고 TV를 보는 박지훈을 보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파트 담벼락 보다는- 바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
질색팔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박지훈이다. 어, 미안.. 속으로 되뇌이며 스르르 입을 닫았다. 한참을 TV에 시선을 고정하던 박지훈이 나를 향해 물었다.
"맞다. 누나 가있는 동안 진영이 데리고 와도 되나?"
"진영이? 배진영?"
"어."
"자고 간다고?"
"응."
"....방 어지럽히고 누나 물건에 손대지만 마라."
"예쓰굳."
"먹은 거 잘 치워놓고. 설거지 이런 거."
"예쓰굳."
"게임은 피씨방 가서 하고 집에서는 잠만 자라."
"피씨방 적극활용 예쓰굳."
까부는 박지훈이 조금 못 미덥긴 했지만, 진영이라면 워낙 나랑도 잘 알고 지낸 박지훈의 친구 중 한 명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스애끼... 친구 재운다고 누나한테 곧이곧대로 이실직고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마음만 먹으면 몰래라도 재우고 보낼 수 있는 건데.
그래도 양심적이니까 누나가 봐줄게.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담쓰담했더니 세상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앙칼지게 나를 본다.
"뭐냐?"
"...언제 컸나 싶어서 그런다. 왜."
"뭐.. 새삼스럽게."
아이스크림 통에 수저를 묻는 박지훈이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걷어내고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제주도라... 가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꼭 아무 일도 안 생기기를 바라면 무슨 일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 좀 생기기를 바라야 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반팔 셔츠를 동그랗게 말아 넣었다.
-
아침 9시 비행기를 타서 제주도에 도착했다. 습한 바다바람이 피부에 닿아오는 게 과연 한여름의 제주도다 싶었다.
날씨도 마냥 맑기보다는 사알짝 꾸리꾸리한 게, 비가 올듯말듯 해보였다. 조금은 안타까워진 마음에 흐음... 하면서 렌트한 차에 캐리어를 실었다.
클라이언트의 회사에서는 서울에 지부가 있고, 제주도에 본사가 있었다. 그러니 서울에서 모든 동의와 합의가 이루어져도 제주도에서 그게 안 되면 소용이 없었다.
물론 서울에서 이야기가 잘 되면 거의 다 제주도에서도 이야기가 잘 되었지만. 여튼 그게 우리가 제주도까지 오게 된 이유였다.
"먼 길 오셨어요-
더우시죠-?"
클라이언트 회사의 젠틀하고 젊은 대표가 우리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우리도 고개숙여 예의를 차리고 인사했다.
프로젝트와 관계된 본부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와 과장님, 그리고 서울 지부에서 온 몇몇 직원들은 본부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는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이미 액션플랜은 다 나와있는 상태라, 어떻게 해서 그런 액션플랜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옹과장님은 여느 때보다 차분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내용을 전달하셨다. 이럴 때마다 정말 전문가 느낌 뿜뿜하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본인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어른. 무언가 딱 그런 이미지라서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게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원활한 협업 아래 액션플랜이 도출될 수 있었던 것처럼,
저희 영업팀과 함께 일하실 때에도 지금까지와 같은 팀웍을 기대해도,"
"......"
"괜찮겠지요? 하하."
옹과장님이 말을 잠시 멈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옹과장님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얼굴에 온 여직원들의 눈빛이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과장님은 살짝 머쓱해 하면서 말을 멈추셨고, 이내 괜찮겠지요? 라는 말을 이으면서 나와 눈을 맞추며 웃으셨다.
약간의 박수가 이어졌다. 멘트가 다분히 감동적이긴 했지만 내 생각엔 멘트보다도 얼굴이 감동적이어서 박수가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회의 후 나와 옹과장님, 본부와 지부 직원까지 한 열다섯 명 정도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부 측에서는 본부 내에 직원 레저용 펜션이 있다며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이 우리가 오늘 점심부터 내일 아침까지 머물 곳이었다.
"우와....."
와... 진짜 좋은 회사였다. 으리으리한 크기의 본부 건물만 해도 충분히 감탄할만 했는데, 회사 안에 직원 레저용 펜션이 있다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펜션은 엄청 크지는 않았지만 있을 게 다 있었다. 바베큐장도 있었고, 널찍한 수영장도 있었다. 세상에... 둘러보면 볼수록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정말 대단했다.
새삼 이런 회사를 클라이언트로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런 기회를 주신 과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마구 솟아올랐다.
"......."
과장님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펜션을 둘러보던 나를 빤히 보고 계셨고, 나는 과장님. 대박이에요. 하면서 감탄을 늘어놓았다.
과장님은 웃음 띈 얼굴로 나를 보시더니 손을 뻗어 볼을 톡톡 두드리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또 너무 벽 없이 굴었던 모양이다.
한 발자국 정도 뒷걸음질 친 나를 발견한 과장님이다. 내 발에 눈길을 두던 과장님은 저쪽으로 갈까요? 하면서 먼저 앞장 서셨다.
아.... 너무 티나게 한 건가.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고개만 갸우뚱하게 됐다.
-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려는 사람들은 물놀이를 했고, 야외 당구대에서 당구를 치려는 사람들은 당구를 쳤다.
나는 당구를 좀 치다가 금방 더워져서 수영장에 들어갔다. 본부의 여직원 분들은 굉장히 유쾌한 분들이셨다.
처음 본 사람들과 물놀이를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전혀 어색한 게 없었다. 오히려 몇 개월은 본 친구들인 것처럼 편했다.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몸이 흠뻑 젖은 채로 밖에 나와 땡볕에 몸을 말렸다.
흐리고 꾸리꾸리해서 아쉽다는 말은 취소다. 언제 구름이 꼈냐는듯 내리쬐는 햇살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엄청 타겠다 싶으면서도 선크림은 바르기가 또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그냥 좀 타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 분명 서울 가서 후회할 거면서.
"재밌어요, ○사원?"
당구로 본부 직원들을 싹 발라버린(.....진짜 잘하셨다...) 옹과장님이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 내게로 와서 물으셨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옹과장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져 있다. 더우시죠? 하고 물었더니 응, 진짜 덥다. 하면서 손으로 땀을 슥 훔쳐내신다.
나는 들고 있던 수건을 물이 묻지 않은 쪽으로 돌려서 옹과장님께 건넸다. 과장님은 땡큐, 라고 하시면서 수건으로 톡톡, 얼굴을 찍어냈다.
"과장님도 물 좀 들어오세요-"
어느샌가 같이 물놀이를 하던 여직원들이 우리 주변으로 와서 과장님도 수영장으로 들어오시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장님은 손사레를 치며 거절하는 듯 보이셨으나.... 본부 여직원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 순식간에 물바가지를 맞는 바람에 물에 안 들어오고야 못 배겼던 것이다.
그렇게 과장님과 몇몇 남자 직원 분들까지 껴서 한층 더 과격해진 물놀이를 했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기분은 좋아서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이다.
"식사합시다-!"
"와아- 네!"
시간은 금방 흘렀다. 어둑어둑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상으로는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본부 직원 분들은 준비해왔던 고기를 꺼내 바베큐를 시작하셨다.
나와 과장님에게는 씻고 나오라고 하시길래 괜찮다고, 우리도 돕겠다고 했더니 한사코 거절하셨다. 그래서 나와 옹과장님은 각자 씻고 바베큐장으로 다시 나왔다.
탈탈탈,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과장님의 모습이 뭐랄까, 대학시절 선망의 대상인 남자 선배와 같은 느낌이었다.
여직원들이 죄다 옹과장님의 얼굴에 넋이 팔려 말을 멈춰야 했던 아까 상황이 생각나면서 웃음이 나왔다.
"와, 진짜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제주도까지 오셨는데-"
한참 수영을 해서 그런지 배가 무지 고팠다. 갓 익은 고기를 입에 넣었더니 불맛이 나면서도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게 황홀할 정도였다.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쌈까지 싸서 입에 넣었는데 과장님이랑 눈이 마주쳤다. 함박웃음이 따라왔다. 민망한 마음에 웃어보인 나는 우물우물, 입 안에 든 쌈을 씹었다.
한 번은 본부 직원 분들이 싹 구워주시고, 또 한 번은 지부 직원 분들이 싹 구워주시고, 그 다음 한 번은 나와 옹과장님이 열심히 구워드렸다.
만난지 겨우 하루인데 심리적으로는 엄청나게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에, 또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도 해서, 붕붕 뜨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쭉!!"
술 인트로를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하도 오래 되어 기억도 안 나는데 여기에 와서 들으니 내가 MT를 와있는 건가, 싶었다.
다들 한껏 상기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나 또한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지는 않아서 온 김에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잔, 두 잔, 들어가는 술이 늘어나는데 오늘따라 헤롱헤롱한 상태가 금방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럴 만했다. 몸이 피곤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항으로 갔다가, 비행기도 타고, 물놀이까지 하고...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활동량이 많았다.
배도 부르고, 술도 적당한 것보다는 조금 더 많이 들어가서 알딸딸 하기도 하고... 그래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펜션 뒷마당으로 갔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강과장에게서 전화가 와 있었다. 잘 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으응. 잘 놀고 있어?"
"네, 과장님. 엄청 재밌어요- 사람들도 너무 좋으시구.."
"다행이다. 불편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니까요. 저도 걱정했는데, 진짜 다들 너무 좋으세요."
"밥은?"
"지금 고기 구워먹고 술도 마시고 그러고 있어요-
과장님은요?"
"나도 먹었어. 김과장이랑 둘이 먹었어."
야근하는 모양이다. 괜시리 제주도에 있는 게 잘못인 것처럼 느껴져서 풀이 죽었는데, 그런 나를 빠른 눈치로 캐치한 과장님의 말이 따라붙는다.
괜찮아. 너도 일하고 있잖아. 하는 말과 함께 가볍게 웃는데 그냥 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흐흥, 하며 낮게 웃었더니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라고 하신다.
"알겠어요. 미리 잘 자요."
"그래, 너도."
"어... 그...."
"......"
"사랑해요."
내 목소리가 들어가는 부분에 입을 대고 쪽, 소리를 냈다. 그는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진짜 잘 자요. 하고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쿵, 쿵, 제멋대로 뛰어대는 가슴이 뭔가 낭만적이었다.
펜션 뒷마당은 조용했다. 어둡기도 했고, 그런 만큼 별이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이는 별을 본 적이 언제였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풍경에 와... 하고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귓가에 인기척이 들렸다.
"....과장님?"
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나와 함께 별을 보고 있던 사람은 옹과장님이었다. 나는 과장님을 향해 웃어 보였다. 과장님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걸어오셨다.
과장님, 별이 엄청 많아요. 라고 말했더니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보았다.
하나를 찾으면 다른 게 더 보인다. 그게 보이면 그 주변에 있는 별들이 또 보인다. 그게 신기해서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
"..........."
허리춤에 과장님의 팔이 닿아왔다. 조심스럽고 천천히 닿아오는 느낌이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올라왔던 취기에, 별이 주는 낭만에, 배까지 불러서 급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이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장님은 조금 더 손을 뻗어 품에 나를 안으려고 하셨다. 어느샌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고, 나는 그의 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히 그의 품에 안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생각 좀 해봤어요?"
그날 밤, 내게 했던 과장님의 고백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냐는 질문이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이 오갔다.
그날 이후 둘의 관계에서 그걸 꺼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른척 했던 적도 없다. 늘 마음에 담아두고, 늘 생각이 나 고민하고, 그랬던 시간이었다.
물론 과장님께 직접적으로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얼굴로 짝사랑하는 거는 국가적 손실이라고 본다. 박지훈의 말이 다시금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이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걸.
그 '해결'이라는 것의 최선은 잘라내는 것이었으며, 잘라내는 것은 최대한 아프고 쓰리지 않게, 깔끔하게 도려내야 했다.
그게 잘라내는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과장님은 품에 안고 있던 나를 떼어내곤 나와 눈을 맞추셨다. 손은 여전히 내 팔을 잡은 상태였다.
밝은 빛이 없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과장님의 볼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여 옹과장님의 시선을 잠시 피하다가 이내 다시 눈을 맞추었다.
"......."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공연히 혀만 내어 입술을 축였다. 깊은 한숨이 한 번 흘러나왔다. 과장님은 내 눈에 두던 시선을 떨구셨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
"저한테는... 과장님 정말 좋은 분이셔서,"
"......."
"계속 좋은 과장님으로 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과분하게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치만, 저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실은 머릿속에 떠오른 백마디 말 중에 고르고 골라 힘들게 쏟아낸 말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그게 과장님께는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야기하기가 싫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팔을 붙잡고 있던 과장님의 손이 힘없이 풀썩 떨어졌다.
".....차인건가, 나."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은 과장님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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