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너 왜 여기로 들어와?”
“너랑 같이 보고 싶어서~”두산 베어즈 팀의 팬인 다니엘은 어째서인지 반대편 통로가 아닌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런 놈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곧이어 들려오는 놈의 말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놈을 흘깃 올려다보자 오늘따라 더욱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놈에 심장박동이 빨라짐이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김여주. 잠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나를 놈이 이상하게 쳐다본 것 같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출출하지 않아? 뭐 좀 먹을래?”
“어? 그럴까, 내가 사 올게.”
“아냐, 내가 사 올게. 넌 여기 있어.”
평소라면 전광판에 뜨는 선수들 라인업을 보며 이 선수는 어떻고 저 선수는 어떻녜 하며 떠들어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좌석에 앉아 멍하니 전광판만 쳐다보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다니엘이 이내 내가 출출해서 그럴 거라는 결론을 내린 건지 뭐 좀 먹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 정신 좀 차리고 생각도 정리할 겸 좀 걷다 오자.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내 생각은 놈이 먼저 보인 행동으로 결국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다니엘이 가면서 내게 던진 남방에는 놈의 향기가 짙게 베여있었다.
잠깐 다니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생각을 정리하려던 것을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다리에 올려져 있는 놈의 남방에서 풍겨지는 냄새가 나를 자극하다 못해 내 생각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아, 진짜… 답이 없다 김여주. 하필 좋아해도 어떻게 17년 동안이나 같이 지내온 남사친을 좋아하냐는 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와 키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에 이렇게 훌쩍 커 이제는 나보다 한두 뼘은 더 커진 것이며, 학창시절 때엔 내게 틱틱거리며 허구한 날 시비를 걸어오던 놈이 이제는 어른이라는 건지 아직도 덤벙거리는 나를 항상 뒤에서 챙겨주는 것이며. 나는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그에 비해 놈은 많이 변했다. 그래, 이건 내가 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변한 놈의 모습이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것이다. 분명 그런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저기….”
“… …?”
“진짜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정리할 때 즈음 내게 말을 걸어오는 건 다니엘이 아닌 낯선 사람이었다. 전혀 낯이 익지 않은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대체 낯선 사람이 내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뒤이어 들려오는 말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 그… 죄송해요…. 죄송하단 말과 함께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무작정 핸드폰을 들이미는 사람의 태도는 금방 나를 불쾌함으로 물들였다.
“아, 뭐야. 남자친구 있으시면 말을 하셨어야죠.”
“허….”
계속 싫다고 표현해대도 무작정 핸드폰만 들이밀던 사람이 누구더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만 내뱉지 않기로 했다. 다니엘의 등장으로 도망치듯이 떠나간 그 사람으로 인해 더 이상 그에 대한 말을 내뱉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게 첫 번째 이유, 그리고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놈의 표정이 두 번째 이유였다. 흘끗 다니엘의 얼굴을 살펴보니 제 눈치를 보던 나를 알아챈 건지 금세 웃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에 근심 걱정이 묻어있는 게 뻔히 보였다.
“가는데 누가 시비 걸디? 누구야? 다 데려와, 이 누나가 혼내줄게.”
“그런 거 아냐, 괜찮아.”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다리 둘 다 너가 먹을래?”
장난스러운 내 말에 됐다며 웃어 보이는 놈의 표정이 편안히 풀어진 걸 보니 나도 따라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 역시 내가 놈을 좋아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지금도 같이 있는 게 가족같이 편안한데, 가족같은 사이끼리 좋아하는 건 정말 말이 안 된다.
*
아니다, 말 된다. 존나 된다. 저 키스타임이라 대문짝만 하게 적혀있는 전광판에 나오는 다니엘과 옆에 앉아있는 낯선 여자를 보니 내 감정을 알아차리기 더욱 쉬웠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
4회 말 경기까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진전이 나가질 않는 경기에 점점 지쳐갈 때쯤이었다. 이미 초반에 다 해치워버린 치킨과 맥주에 입도 심심해질 참에 주어진 휴식시간에 이번엔 내가 음료수 좀 사 오겠다며 경기장 밖으로 나와 자판기를 찾으려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때쯤이었다. 크게 키스타임이라 들려오는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과 마침 보이는 자판기에 역시 야구장의 묘미는 키스타임이지 라 생각하며 얼른 음료수를 뽑아 놈이 기다리고 있을 자리로 돌아갔다.
“…헐?”
“… ….”통로로 들어오며 보이는 전광판에 잡힌 커플이 입을 맞추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크게 들려왔다. 얼른 나도 자리에 앉아 구경해야지. 괜스레 신이나 계단을 폴짝폴짝 뛰다시피 내려가 자리로 향해 다니엘에게 음료수를 건네고 앉으려던 참이었다. 내가 너무 신나게 폴짝폴짝 뛰어대서 카메라 감독의 눈에 띄어서 였을까, 카메라는 나를 지나쳐 다니엘을 비추었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한 핑크 색의 하트 틀 안에 함께 찍혀있는 건 내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모습이었으니까.
나는 보았다. 다니엘 쪽으로 몸을 돌려 놈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괜히 기분이 꿀꿀해지는 것 같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시지. 라는 심정으로 죄 없는 전광판만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한껏 찌푸려진 내 미간을 긴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던 놈이 내 턱을 조심스레 잡고는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어?”
깜짝 놀란 듯 저를 쳐다보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다니엘은 아직 대답도 하지 않은 제 물음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당황스러움에 어버버거리는 내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놈이 눈을 감고 푸스스 웃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내 턱에 자리하고 있던 제 손을 목덜미으로 옮긴 놈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고개를 슬며시 들었고 이내 놈의 입술이 포근히 내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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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 남사친이랑 가도 저런 일 없읍니다...... 다녤같은 남사친은 더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