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Signal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안경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오랜 시간 동안 거의 혼연일체 수준으로 내 얼굴에 착 붙어있던 것이라, 무의식중 자연스럽게 나오는 습관이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눈에 힘을 줘도, 눈을 부벼도 흐릿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 굳이 안경을 쓰지 않은 이유가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담배 피울 때 빼고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잘 가지 않는 어두침침한 골목길로 꼬박꼬박 출석체크를 한 것도, 그 불순한 행동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는 것도, 익숙지 않았다.
공연히 그 남자에게 지는 느낌이 들어서.
우산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들이 밉다. 내 발밑을 축축하게 적셔오는 물웅덩이도 밉다.
그리고 오늘도 보이지 않는 그 남자도 밉다.
평소보다 늦어진 귀가 시간이었다.
도어락 번호를 누를 때마다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들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마침내 도어락은 내 기분을 무시하듯 경쾌하게 울리며 풀렸고 그에 우산을 두 어번 탁탁 턴 후, 문고리를 잡았다.
"......."
젖은 신발으로부터 해방하고 나서야, 소파에 앉아 조용히 숨죽여 우는 선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인기척이 느껴진 건지 서둘러 고개를 숙여버리는 그에 나는 재빨리 핸드폰 홀드키를 눌러 날짜를 확인했다.
.....오셨구나.
파르르 떠는 그를 주시하곤 핸드폰 타자를 몇 번 두드렸다. 발신자는 선호의 친구 대휘. 지금 선호를 급히 보내도 되냐는 식의 문자를 보냈고 얼마 되지 않아 진동이 세 번 정도 끊겨 울렸다.
[네네, 당연하죠.]
[누나는 안 오세요?]
[저번에 유선호, 누나 기다린다고 잠도 안 자던데.]
......나중에 고맙다고 문자라도 남겨야지.
"유선호, 대휘네 집으로 가 있어."
"안 가."
"되지도 않는 억지 부리지 말고 빨리 가. 누나가 나중에 연락할 테,"
"안 할 거잖아."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선호를 줄곧 대휘의 집에 보내곤 했다. 나중에 누나도 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또한 항상 빼놓지 않았었다.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아버지와 대화 후, 거의 8할은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문제를 풀었고 아니면, 집이라는 가시방석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무리 대휘가 자취를 한다 하더라도, 같이 신세를 지는 것은 너무나 민폐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선호라면 몰라도 나랑은 딱히 각별한 사이도 아니어서.
"나도 이제 눈치껏 다 알아."
"......"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도 다 이해했어."
"....."
"....연락 안 하기만 해봐."
옅게 웃어 보인 그는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곤 귀여운 선전포고의 한마디를 던지며 현관문을 열었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버지, 오셨어요."
"......"
서재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시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의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는 나에게 물었다.
"안경은 어디에다 두고."
"아, 발을 헛디뎌 넘어졌더니 부서졌어요."
"......멍청하긴."
걱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차마 '어떤 남자 때문에 쓰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째, 거짓말만 더 늘어가는 것 같다니깐.
"토요일에 회사 창립 기념 파티가 있을 거다."
"......"
"개회식에 후계자 소개도 있을 터이니 보내준 옷 입고,"
"아버지, 선호 회사 물려받기 싫어하시는 거 아시잖아요."
"......"
"하고 싶은 일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깟, 악기 뚱땅거리면 뭐 달라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 그 이상이었다. 애초에 아버지는 선호 이해하려 하시지도 않았고 후계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유일하게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는 선호를 아버지는 온통 검게 물들일 작정이셨다.
"도를 넘어서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렇게 키우신 게 누군데요."
"선호는 네 친동생이 아니야."
"......"
"내 회사를 위해 만들어낸 자식, 그뿐이다."
".....도를 넘어선 건 아버지겠죠."
일에 눈이 먼 아버지에게 나와 선호는 항상 뒷전이었다. 남매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스스럼없이 지내왔기도, 사랑 없는 환경 속에서 묵묵히 자라왔기도 하다. 비록 친동생은 아니지만 아이는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동생이고, 처음으로 진심을 준 사람이었다.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이의 덕이었다.
이렇듯 내가 무척이나 아껴 온 선호를 부모라는 사람이 무참히 짓밟았다. 어릴 줄만 알았던 아이는 어느새 키도 훌쩍 커 나를 훨씬 뛰어넘었고 제법 남자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성격 또한 한 층 성숙해져 아버지에게 미치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을 적엔 차라리 선호가 아직 철이 안 든 어린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선호야,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지?
집에서 벗어나 무작정 뛰었다. 비가 오던, 말던. 최대치 선을 넘어서 격해진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더욱 힘들어졌다. 지금 내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달리기만 했다. 순간 울컥하는 느낌이 물밀듯 몰려왔고 눈물이 저절로 쏟아져 내렸다. 그 와중에 뚝심 있는 성격은 어디 안 가는지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참아낸 나 자신이 갑작스럽게 미련해 보였다.
나의 감정은 메마르지 않았는데.
내 발걸음이 느려졌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그 골목길이었다.
눈물은 멈출새도 없이 흘러내렸고 급기야 그 남자 생각이 나기도 했다. 유일하게 나를 진심 어린 태도로 바라봐 주던 그 남자가.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을 수도.
그리고 그 대상이 그 남자,
김재환이길 바랐다.
벽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스타킹의 무릎 쪽에 눈물 자국이 날 만큼 아주 많이.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간간이 남자도 곱씹으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계속 자동적으로 생각이 나는 걸 어째.
".....운명은 무슨."
"운명 무시하냐."
"......"
".....야, 너 울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 쪽으로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어깨 한 쪽에만 걸친 기타 가방, 손에 들고 있는 악보.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남자일 줄이야.
"왜, 왜 울어."
"저, 좀....."
"야, 울지 마, 울지 마."
"재워주시면 안돼요....?"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Heart Signal
"야가 가가?"
"어...."
"그래서, 어쩔 건데."
"어쩌긴... 하루만 재워야지."
남자는 어렸을 적부터 붙어 자라 온 친구와 함께 동거를 한다고 했다. 선홍빛 머리에 표준어와 지방 방언을 섞어 구사하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의 친구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민폐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됐다, 마 치아라."
"......"
"근데 니 치마 입고 잘 건 아니지?"
사투리를 쓸 거면 사투리를 쓰고 표준어를 쓸 거면 표준어를 쓰던가. 자신을 다니엘이라 지칭하는 사람의 화법이 도무지 적응이 될 리가 없었다. 그도 잠시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을 해버렸고 생각했다. 그러게, 나 치마 입고 자야하나?
"내 옷 입어."
"......"
"이거 입고 나와"
재환이 건네준 것은 축구복 반바지였다. 고개를 숙여 간단히 고마움을 표현한 후 옷을 입었다. 조금 큰 사이즈이긴 했지만 흘러내리는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재환과 나. 둘은 어색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까, 왜 울고 있었어?"
"....."
"곤란하면 굳이 말 안 해줘도 돼."
"....."
나의 아픔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긴 싫은 이유는, 분명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동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게 눈에 훤했다. 나는 아직 그 비참함을 느낄 준비가 되지 않으니.
"내일 쉬는 날이니까 푹 자."
".....네."
"......"
"저기요."
"......"
".....감사합니다."
나의 한마디에 남자는 발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 보았다.
"저기요 말고, 김재환."
"....."
"잘 자."
그날 밤, 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재환의 손의 온기가 계속 떠올라
결국,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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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온다고 분명 약속했습니다! 자정이 넘긴 했지만..... 오늘은 제가 도대체 뭘 쓴 건지 모르겠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 댓글로 마저 달립시다! 쨌든 여러분 사랑합니다❤❤❤
+ 사담을 빌려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저는 예체능을 전공으로 입시 준비 중인 학생이라ㅠㅠㅠㅠㅠㅠㅠ하루하루 연습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항상 늦게 와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는 독자님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