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물 주의)
눈 떠 보니 찬열이 없었다. 늘 현관 앞에 있던 서류가방이 없는 걸로 봐서 아마 출근한 것 같았다. 식사한 흔적은 없었고 대신 식탁 위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갑자기 지방 출장 갈 일 생겨서 일찍 나가. 오늘 못 들어올 것 같아.'
아...그러고보니 요즘 좀 바쁠 때긴 했다. 연말이라 곧 인사 발표가 날 텐데, 찬열이 잘릴 일은 없겠지만 승진 여부를 결정하려면 일종의 테스트를 거쳐야 했기에 처리할 일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물론 그것은 일개 조무래기 사원인 백현과는 거리가 먼 저 윗분들의 얘기지만 회사의 한 구성원인 이상 회사내의 이러한 생리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서운한 이 마음은 뭐지.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안 좋은 마음 가지면 안 되는데.
출근 시간이 다 되었지만 홀몸이 아니니 늦어도 밥은 꼭 먹고 가자 싶어서 홀로 식탁 앞에 앉았던 백현이 탁, 소리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젠장, 토할 것 같아. 올라오는 토기를 꾸역꾸역 억지로 삼키며 식탁을 치웠다. 터덜터덜 화장실로 들어가 이를 닦는데 왈칵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서둘러 입가를 헹구고 변기를 붙들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말간 위액까지 다 게워낸 백현이 변기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찬 데 앉으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오늘 출장을 간다던 찬열이는 어제 새벽에야 집에 들어왔다가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갔을 것이었다. 어제 자정이 넘을 때까지 기다렸는데도 결국 혼자 잠들어야 했고, 그저께도 똑같았다. 먹기 싫은 게 있고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밖에서는 입덧한다는 티를 낼 수가 없어서 되는 대로 먹었더니, 먹기만 하면 토하느라 속이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고 싶었다. 박찬열도 붙잡아 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팔자 편한 소리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거 알아, 아는데. 힘들다. 왜 하필 나야. 나도 정상적인 남자로 살 수도 있었잖아.... 괜한 서러움에 백현은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변기를 붙잡은 채로 한참을 울었다.
*
"그럼 오늘 오전 회의 마치겠습니다. 오늘도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주세요. 그리고 백현씨는 잠깐 남아요. 나 좀 봅시다."
드륵드륵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준면과 백현, 단 둘만 남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백현의 옆으로 준면이 몸소 자리를 옮겼다.
"백현씨."
"..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일이요? 있죠, 아주 엄청난 일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저한테 일어났어요. 아마 말해도 못 믿으실걸요? 하는 말들은 꿀꺽 삼키고, 백현은 살래살래 고개만 저었다.
"그럼 왜 갑자기 사표를 냈는지, 이유나 들어봅시다."
"그건....말씀 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백현씨. 미안한데, 정당한 사유 없이는 나도 백현씨 못 잘라요. 솔직하게 말해줘야 되는데."
"...."
..그걸 어떻게 말해요. 남자인 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어떻게 말해요. 말하면 그걸 이해할 수가 있어요? 내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요? 내가 힘들어서 그만둔다는데 왜 그것도 내 맘대로 못하게 하세요....
"울어요?! 아니 왜...이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묵묵부답이던 백현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자 당황한 준면이 티슈를 뭉텅이로 뽑아 건넸다. 이것 참, 울지 말아요. 꼭 내가 울린 것 같잖아요.
"저...이번만 눈 딱 감고 사표...그거 처리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진짜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게는 안 돼요. 이렇게 말한다고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렇게 타당한 설명도 없이 회사 그만두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백현씨도 알 거예요. 사람을 뽑고 자르는 것도 내 일이지만,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남아있도록 설득하는 것도 내 일이에요. 백현씨는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못 보내요. 그러니까 나한테만큼은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요즘 우울해 보여서 걱정했어요.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어요?"
백현씨는 필요한 사람이에요, 걱정했어요, 하는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준면씨 같은 사람이라면 믿지는 못할지언정 이해는 해주지 않을까. 말하고 싶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 찬열이랑 나밖에 모르는 이 비밀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해도,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축복받아야 할 새 생명인데. 백현은 눈을 한 번 꼬옥 감았다 떴다.
..앞으로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실 수 있으세요? 저 망상증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거짓말 아니니까 믿어주셔야 해요. 사실은, 제가, 아이를, 가졌어요. 임신을 했다구요, 제가. 준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아니, 이걸 지금....믿으라고?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러나 백현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준면은 백현을 잘 알았다. 불과 일 년 전에 면접관의 위치에서 백현을 보고 직접 뽑은 게 준면이었다. 그 당당한 솔직함과 패기가 마음에 들었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변백현은. 아, 머리야. 뭐가 진짜야... 임신이라니. 거짓말이 아니라니. 준면의 반응을 보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치만 살피는 백현의 모습에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믿어야지. 백현씨를 믿어야지.
"얼마나 됐어요..?"
"두 달 조금 넘었어요."
"축하...해요. 솔직히 축하해도 되는 일인가 싶기는 한데. 두 달이면 입덧도 하고 그럴텐데 힘들겠다. 아기 아빠는 알아요?"
"알아요. 원래 같이 살았어요. 저...이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기 아빠요, 준면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준면은 다시 한 번 멘붕이었다.
"누군데요..?"
둘 밖에 없는데도 할금할금 눈치를 보던 백현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박찬열이요."
"....!"
쉿, 이거 절대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안 그래도 요즘 인사 문제 때문에 찬열이 고생하는 거 다 아시잖아요. 알려지면 저는 그렇다 쳐도 찬열이까지 불이익 당하면 어떻게 해요. 저는요, 애기 가진 거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한이 있어도 찬열이 앞길 막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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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임신물을 들고와서 놀라신 분들 있나욤...☞☜
저도 임신물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급 쓰고 싶어짐ㅋㅋㅋ쓰던 건 어따 두고!ㅋㅋㅋ
리얼 돋는 임신/육아물이 쓰고 싶었는데 그저 욕심이었나봐요^^;; 이 뒤는 또 얼마나 디테일을 살려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ㅠㅠ 임산부들은 신체의 변화와 출산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이 잘 온다고 하네요. 요기서 백현이가 약간 우울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여. 사표 낸 것도 사실 우발적인 결정이라는 설정ㅋㅋㅋ 나는 힘들어죽겠는데 찬열이는 바쁘고, 아무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어서 스트레스가 쌓여서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사표를 낸 거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