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에서의 일 이후에 묘하게 중학교 때 친구들은 주연을 자주 찾아왔다.
정확히는 민현을 보러오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매점에서의 일이 소문이 나고 민현이 더 유명해지면서 친분이 있음을, 주연으로 인해 연결고리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민현과 주연의 공통점은 뜬소문에 쉽사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소문이야 어찌 돌던 간에 그들은 개의치 않고 학교생활을 늘 같이했다.
여름이 다가와서 창 밖이 푸르게 변하던 즈음, 수학시간이었다.
주연은 수학을 어려워했다. 물론, 희망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수리를 포기할 수 없어 꾸역꾸역 수업을 들었지만 그 날의 수업은 유독 어려웠다.
결국, 창밖으로 눈을 돌리던 그 때 옆에서 나지막히 민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업시간이어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소리였지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너, 첫인상이 어땠는 줄 알아?”
난데없이 첫인상이라니. 살짝 졸음이 쏟아지려던 와중에 정신이 또렷해지며 문득 궁금해졌다.
주연이 가지고 있는 민현의 첫인상은 제비뽑기 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짝을 찾던 모습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의 첫인상에 대해 민현에게 들은 적이 없었다.
“...어땠는데?”
“음, 맨 처음에는 도도한 얼음공주.”
냉큼 얼음공주라고 대답하고 씨익 웃는 모습이 살짝 얄미울 정도였는데, 민현은 이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인줄 알았는데, 여자애들하고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완전 해빙되더라고. 그게 너무 신기했어.”
의외였다. 민현이 보았던 주연의 모습은 아마도 자리배정 제비뽑기를 하기 전- 즉, 첫 등교 2교시 이전의 그 짧은 시간인데 생각보다 오래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머리에 왕리본핀도 달아서 묶고 있길래 새침떼기인가 궁금했는데, 여자애들한테 막상 그렇게 까칠하지도 않더라고.”
민현이 이야기하는걸 듣고 보니, 첫인상이 어떠했다는건지 좀 더 구체적이고 간단하게 알고 싶어진 주연은 살짝 뽀로통하게 말을 받아쳤다.
“그래서 내 첫인상이 어땠다는거야?”
주연의 질문을 받은 민현이 한 쪽 입꼬리를 쓰윽 올렸다.
“... 너랑 친해지고 싶었다고. 너랑 짝하고 싶었어.”
예상외의 훅 들어오는 대답에 주연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고 있던 샤프를 떨어뜨렸다.
민현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태연하게 주연의 샤프를 주워주었다.
“...너...”
주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민현, 박주연. 얼마나 떠드려나 지켜보는데 참 알콩달콩 오래 떠든다. 복도에 나가있어.”
결국, 수학선생님에 의해 교실에서 복도로 쫓겨난 두 사람이었다.
“황민현, 이게 뭐야. 괜히 수업시간에 첫인상 이야기나 꺼내서는...”
복도로 나와 살짝은 후덥지근한 열기에 주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자, 민현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냥, 너 갑자기 멍때리려고 창밖을 보는 모습이 내가 처음에 봤던 니 모습이랑 비슷했어.
그래서 이 참에 이야기해줄까 싶었지.”
그날따라 민현은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으이구, 언제 키 클래. 나랑 20cm는 차이나는 것 같다.”
사실, 그 때 민현이 180cm 찍었을 때였고 주연이 160cm를 돌파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때여서 20cm 차이가 맞았기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반박도 못하고 꽁해있자 민현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머리를 쓰담쓰담 했다.
순간, 수학선생님의 매서운 눈과 마주쳐 주연이 숨을 헉하고 쉬며 눈치를 보았다.
결국 그날 두 사람은 복도에서 떠들었다며 손까지 들고 벌을 서야했다. 나름대로 성적도 좋고 모범생인 둘이었기에 이런 낯선 상황이 재미있었는지 살짝 킥킥 대다가 추가로 벌을 더 받을 뻔 한 사건은 교내에 소문이 돌 정도였다.
짝은 한 학기에 1번 바뀌어 2학기 때는 서로 다른 짝을 맞이했지만, 둘의 사이는 변하지 않고 계속 붙어다니며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2학년이 되어서 민현은 주연에게 같이 학생회장, 부회장 선거에 나가자고 제안했고, 둘은 학생회 임원 경력을 내세우고, 최고의 호흡을 보이며 압도적인 표차이로 경쟁 후보를 밀어내고 당선 되었다.
2학년 때는 제2외국어로 인해 다른 반에 배정되었지만 학생회 일을 빌미로 민현과 매일매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2학년을 보내며 친구와 연인 그 중간 어딘가의 사이를 둘은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듯 했다.
시간이 흘러 수능을 마치고, 졸업식 날이 되었다.
민현은 좋았던 성적 대비 수능을 망쳐버려서 재수가 결정되었고, 주연은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여대에 입학예정이었다.
부모님과 사진을 찍고 나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은 후 한참동안 주연은 민현을 찾아다녔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해! 그리고 입학도 미리 축하...”
“... 황민현. 어디 있었어? 많이 찾았는데.”
“나는 너 찾아다녔지.”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아하니 민현의 가족은 오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민현의 모습은 뭔가 낯설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야하나. 어쩌면 해가 바뀌면서 20살이 된 탓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 꽃다발은 뭐야...”
3년 동안을 붙어다니다가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주연의 목소리에 울음이 살짝 묻어났다.
“우리 졸업 축하 꽃다발.”
민현이 잠깐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사실 오늘의 원래 계획은 따로 있었는데.”
“...원래 계획?”
“1학년 때 세워놨었던 나만의 계획.”
왜인지 모르게 뒷말이 더 나올 것 같은 마음에 주연은 잠시 민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
“그런데, 내가 그때 바보같이 계산 못한 부분이 있었어.”
“응...?”
“내가 수능을 망할 줄 몰랐지.”
민현의 눈이 가늘어지며,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얼굴을 가득 채웠다.
그렇지만 주연은 그 미소의 부자연스러움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다야...?”
결국 주연이 입을 열었다.
“...응. 지금 현재 내 상황에서는 이렇게 꽃다발 주는게 다야.”
갑자기 민현이 주연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대뜸 손을 내밀길래 악수라도 하자는 것인가 싶어 주연은 자연스럽게 꽃다발을 안고있지 않던 왼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민현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당기고, 주연은 중심을 잃고 민현의 품으로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졸업 축하해. 내 짝꿍... 혹시 내가... 아니다. 이건 나중에.”
민현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때 당시 민현이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1학년 때부터 민현이 생각해왔던 졸업식 계획이 무엇인지.
그 모든 건 결국 듣지 못한 채 주연은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민현이 기숙사형 재수학원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단절되다시피 했고, 주연의 학교 근처 명문대에 재수 후 입학했단 소리와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단 소식만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2017년 [뉴-더블유 그룹] 회의실-
졸업식 이후에 민현을 만날 수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겼다.
잠시 후 인턴 배치 때 정확하게 그녀가 기다린 사람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주연은 마치 본인이 인턴이 된 것처럼 초조해졌다.
어느덧 권팀장의 멘트가 주연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려주었다.
“황민현씨. 기획마케팅팀입니다. 최대리님, 팀으로 안내해가시면 됩니다.”
적당한 슬림핏에 스탠다드 디자인에서 라인만 살짝 들어간 수트에 남색 도트 넥타이를 맨 남자가 걸어 나왔다.
살짝은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가졌지만 이내 긴장했는지 입술을 음파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상이 확 바뀌는 것이 여전했다.
확실히, 그는 주연이 알던 황민현이 맞았다.
그녀가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도 눈치 못챈채 민현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옆에 서있던 기획마케팅팀 최민기 대리가 아니었으면 한참동안을 멍청한 표정으로 서있을뻔 했다.
“박대리, 저 인턴이 우리팀에 배치된 인턴이야? 와 잘생겼네.”
“... 여자친구는 있을까요?”
바보같이.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와버렸다.
아직까지 17살 소녀처럼 첫사랑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건 아니었는데, 눈 앞에 마주하고 나니 여러 가지가 궁금해졌다.
입사동기인 최대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 지금 박대리 그런 표정이랑 말투 처음 봐요. 저 인턴 우리부서 배치받은거 외에도 대단한 능력이 있는 능력자였네. 내가 박대리 생각해서 열심히 굴려줘야겠다.”
최대리의 장난끼가 엉뚱하게도 발동한 모양이었다. 입사동기인 주연은 그의 장난끼가 어느정도로 심해질 수 있는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내내 붙어다닌 정이 있는데, 그런 곤란에 민현을 빠뜨릴수는 없었다.
“최대리, 그렇게 하기만 해봐요. 잘 지켜보고 있으니... 나도 이전무님도.”
“아니... 이전무님이 여기서 왜 나와요?”
후... 임원픽은 보안유지사항인데.
민현의 무사인턴종료를 위해 잠깐 업무상 비밀을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주연이었다.
“황민현씨.. 이전무님 픽이니까 최대리님 회사 그만둘 각오 있으시면 괴롭히세요.”
최대리의 충격을 받은 표정을 보니 이정도면 꽤나 효과가 있을 듯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끊긴 민현의 소식이 많이 궁금했는데, 고맙게도 눈 앞에 나타나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앞으로 동창의 정으로,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기억에 대한 보답으로 민현의 회사생활 수호천사가 되어줄 결심을 한 주연이었다.
조만간, 민현에게 회사 맛집에서 점심이나 같이 하며 추억을 나눌 시간이나 마련해야겠다는 결심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