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
전지적 남 시점
Written by. WOOZAI
툭하면 아프고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장한 외모에 새하얗다기 보다는 창백한 피부.
나에게는 남인 쌍둥이 동생이 한 명 있다.
07 - 남보다 못한 사이
오늘 하루의 절반을 배진영과 함께 보냈다. 뒹굴 거리며 귤 한 박스를 끌어안고 까먹다가 대뜸 나오라는 배진영에게 답장하는 것도 귀찮으니 연락도 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었지만, 나름 고마운 티를 냈다. 그의 연락도 없었더라면 평생을 나가서 보내던 크리스마스를 2년 내내 집 안에서 박지훈과 함께 맞는 을씨년도 그런 을씨년스러울 크리스마스가 따로 없을 거다. 이곳저곳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덕에 당장 그들 사이로 끼어 틈을 갈라내고 예수의 탄생기념일에 왜 너희들이 난리냐며 난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저들은 쌍이고 나는 하나기에 말이다. 영화 관람을 하러 가도, 옷 구경을 하러 가도,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해도, 하다못해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수많은 커플에게 이리저리 치였다. 그럴 때마다 배진영이 더 붙으라며 나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배진영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끝으로 나를 정류장에 두고 떠났다. 멀찍이 떨어지는 뒤통수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대로 가는 거야? 이게 다야?
전화 한 통화에 반응하며 이만 가보겠다고 발걸음을 돌린 배진영이 야속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데려다줄 줄도 알아야지.
그래도 없었으면 쓸쓸했을 오늘을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하며 미련을 접었다.
* * *
추운 몸을 이끄느라 모두 써버린 에너지에 힘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추운 날씨에 한시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려 현관 도어락에 손을 올리려던 참이었다.
"아―!"
갑작스레 열린 문이 곧장 내 이마에 쿵, 소리 나게 박았다. 박지훈이 답지 않은 놀란 표정을 짓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봐봐.”
“아, 진짜 아파….”
“피 안 났으면 된 거야. 들어가, 얼른.”
“아니, 무슨…. 너 어디 가려고.”
“앞에 좀. 누가 불러서.”
“꼴에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웃기지도 않아, 정말.
달랑달랑 흔들리는 상자가 현관문과의 충동으로 내용물이 상처가 났을까 비닐 사이로 흘긋 시선을 옮겼다. 따끔한 이마를 둥글게 문지르며 집안으로 들어와 식탁 위로 케이크를 슬쩍 올려 두었다. 어느 누구에게 눈길 하나 받지 못하는 케이크가 안쓰러웠다. 겉옷을 술술 벗으려던 참에 엄마는 찌개에 넣을 대파가 없다며 나를 내보냈다. 가기 싫다며 있는 대로 반항을 했다가 진탕 욕만 먹었다. 결국, 벗었던 신발을 다시 구겨 신고 옷도 못 갈아입은 채 마트로 향해야 했다.
* * *
나는 절대로 무서운 게 아니다. 그냥 날이 추워서 몸을 움츠린 것뿐이다. 겁을 먹어서 인상을 구긴 게 아니라 단지 풍겨오는 담배 냄새가 역해서 그런 것이다. 비닐 봉투도 없이 대파 한 묶음을 꼭 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괜히 이 길로 왔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뒤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갖가지 집으로 가는 경로와 또 저 담배 연기를 내게 뿜어냈을 때의 대처법을 생각해냈다.
파로 머리를 후려갈길까? 냅다 소리 지르고 달려가? 아니지, 애초에 이런 길이 생기는 게 잘못된 거야. 확 불 질러 버릴까?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질끈 눈을 감았다.
“야, 너 거기.”
좋은 생각만 하자. 집에 가면 포장도 뜯지 않은 케이크가 나를 반기고 있을 거야. 박지훈도 와 있을까? 물론, 주지는 않을 거지만.
“야, 너 이리 와 보라고.”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귓가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을 치고 들어와 식탁 위에 대파를 올렸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찌개의 간을 좀 보라며 내밀은 숟가락을 억지로 한 입 받아먹었다. 박지훈이 아직도 안 들어 왔다며 한탄을 하는 엄마를 뒤로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풀썩 내려앉은 침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했다.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런 양아치 새끼들은 대체 뭐가 되려고,
속으로 생각하던 걸 우뚝 그쳐 세웠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인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박지훈이 잠자코 주절주절하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저기 마트 옆에 골목길 알지?”
“…….”
“이 앞 마트 갔다가 집에 못 올 뻔했어. 웬 남자들이 담배 연기 뿜으면서 이리 오라는 거야.”
“너한테?”
“어, 나한테.”
“…….”
오늘따라 말이 없는 박지훈이 답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너는 입을 열면 못난 소리만 나오니 제발 그 입 좀 다물으라며 입술을 아프지 않게 때렸었지만, 오늘은 ‘잠자코’의 정석대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박지훈에게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무서웠다고, 그래서.”
말 한마디에 힘을 주고 강조했다. 한숨을 쉰 박지훈은 니트를 벗다 말고 가까이 다가와 내 두 어깨를 아릴 정도로 붙잡았다. 힘은 또 왜 이렇게 주는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런 것들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어?”
마주친 두 눈을 피할 새도 없었다. 이를 바득바득 간 박지훈이 머지않아 욕을 읊조리고 방을 나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에 코를 막았다. 담배 냄새가 난다, 박지훈에게서.
* * *
“어, 진영아.”
―네, 지훈이 형.
“아까 나 먼저 빠졌잖아. 그리고 누구 그 옆으로 안 지나갔어?”
―어…. 글쎄요. 저도 얼마 안 있어서 금방 갔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겁대가리 상실한 새끼들이 좀 많은 것 같아서.”
* * *
20XX년의 새해가 밝은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 엄마와 아저씨는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밥을 먹고 난 후로 더욱 자주 만났다. 그럴 때마다 제일 신난 건 두 사람이고 마냥 어색할 줄로만 알았던 나와 박지훈, 박우진은 어느 정도 말문을 틀 수 있었다. 작년의 시간은 거북이처럼 마냥 느리게만 흘러가 타임 워프라는 게 있다면 당장 해보고만 싶다고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새 교실, 새 책상과 새 사람들을 만났다. 옆 반의 박지훈이 반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지훈과 같은 반이 된 박우진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우리 반은 언제 하나 나름 기다렸던 반장 선거가 드디어 오늘 열렸다. 아무도 반장이 되려고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겨우 1년이라는 시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까지 하며 좋은 인식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매년 이런 식으로 나오는 자세들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시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터에 숨을 꾹 참았다.
“그럼 임시 반장은 저 누구냐…. 박이름으로 하자. 일 잘하면 네가 쭉 하는 거고.”
제발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 * *
박지훈은 공부도 물론, 잘했지만, 예능 계열로도 뛰어났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악기 연주를 취미로 두었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꼭 배운다는 피아노를 나 또한 배운 기억이 있고 얼마 안 가, 나는 피아노에 영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상처를 받아 학원을 그만둔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할머니께서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사주신 피아노는 내 손이 아닌 박지훈의 손에 길들여졌다. 음악뿐만 아니라, 박지훈은 춤도 잘 추었다. 저번에 지역에서 열린 댄스 대회에서 자랑스럽게 트로피도 받아 왔었다. 또 연기 쪽으로도 특출났다. 박지훈은 그냥 모든 방면에서 다재다능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훈은 나보다도 뛰어난 존재였다. 나에게만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박지훈은 피아노에 관심을 가졌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자연스럽게 내 피아노를 차지하고 방문을 닫으며 제 공간으로 채워나갔다. 악보는 볼 수 있는 건지 저기서 딩동 거리는 게 제대로 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렇게 오선 공책에 콩나물 대가리를 하나씩 그려나가는 걸 보면 곡을 쓰고 있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너는 왜 공부하냐?”
“……?”
눈에 힘을 주고 건반을 내려다보던 박지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온순해진 눈이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그 뭐야, 노래 돼. 춤 돼. 연기… 괜찮고, 보니까 작곡인가, 그것도 하면서.”
괜한 민망함에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손톱을 가지고 장난 치기도 했고, 헛기침도 몇 번 했다. 가만 듣던 박지훈은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예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뭐야?”
“아, 그냥… 그렇잖아. 왜 머리 터지게 공부를 하냐고. 가서 연예인이나 해.”
“나 이런 식으로 숨 돌리는 거.”
“…….”
“네 앞에서밖에 안 해. 왜인 줄 알아?”
“왜… 인데?”
“그건 네 알아서 천천히 생각해 봐.”
“아, 박지훈-!”
그러고 보면 박지훈은 늘, 집안에 저를 포함해 단둘이 남겨져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들어와 제 나름의 자유를 택했다.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익숙하게 넘겼지만, 그에게 있어 이 모든 행위는 다 소소한 그의 일탈이었다.
“찌질하게….”
그까짓 기대가 뭐라고 이렇게 너를 희생해야 하는 거야.
* * *
나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자, 부모님의 기대였고, 어깨를 펼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는 표정들이 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갑이고, 나는 을, 아니, 어쩌면 병ㆍ정, 그 이후였으니까. 유일하게 나를 봐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눈빛이 나는 좋았다. 온갖 기대들로 둘러싸인 내가 잡을 수 있는 끈은 바로 너였다.
나는 너에게 기댄다.
Fin.
더킹갓제너럴어쩌구암호닉충성충성충성
[강낭] [김수석] [꽁냥] [낭낭] [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