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너, 평범하지 않은 나
글, 잎련
열한시가 다 되어서야 느리게 눈을 떴다. 바닥에 닿을랑 말랑하게 내려놓은 블라인드 틈새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래 잤는데도 피곤한 기운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몸만 이리저리 굴릴 뿐 일어날 의지가 생겨나질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머리를 높게 묶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기적 어기적 걸어간 화장실에서 치약을 묻힌 칫솔을 들고 나오니, 핸드폰이 어서 전화를 받아달라는 듯 열심히 벨소리를 울린다. 아직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고 화면을 확인하니, 내새끼♥ 하고 반가운 글자가 뜬다.
"응 강단아."
'누나 일어났나?'
"방금 일어났지요."
'나랑 밥먹자!'
"나야 좋지. 근데 안바빠?"
일 때문에 점심을 같이 먹기가 힘든데, 먼저 연락까지 와 내심 반가웠다. 집에서 먹기 싫었는데 잘됐다. 내 물음에 강단이가 안 바빠, 하나도. 하고 대답하는데 전화 너머로 황민현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야, 치사하다 너! 하는.
"황민현이랑 있어?"
'응. 형이랑 내기했다.'
"뭐? 무슨 내기."
'동시에 연락하면 누나가 누구랑 밥 먹을지.'
시커먼 양복 입고 피보는 일 하는 남정네 둘이 이런 내기를 했다는 게 어이없어 실소가 빠져나왔다. 뭘 걸었던건지 조금 신나보이는 동생의 목소리다. 한 시간 뒤에 어디에서 만날지 정하고, 전화를 끊으니 그제서야 황민현에게 온 메세지가 보였다. 무음으로 해 놓아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이름아. 오늘 나랑 점심 먹자.] 참 황민현 다운 문자였다. 말투가 텍스트로도 드러나는 게 신기했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 게 느껴져 장롱 깊숙히 개어 놓았던 하얀색 목폴라 니트를 꺼내입었다. 오늘은 작업도 따로 없었다. 밝은색 옷은 잘 입지 않는데, 새하얀 색의 니트라니. 검은 머리와 대비되어 더 밝아 보였다. 자주 입는 청바지도 꺼내 입고, 외투도 고르고 나서야 화장을 시작했다.
"..."
오늘은 머리를 묶고 싶어. 막연히 든 생각에 서랍에서 새 머리끈을 하나 꺼내 옷 입느라 풀었던 머리를 다시 높게 묶었다. 머리를 이리 저리 만지다 보니 결국은 똥머리였다. 오늘따라 잘 묶인 머리에 기분좋게 립스틱을 바르는데, 강단이가 또 전화를 울렸다.
"응."
'누나, 나 좀 늦을 거 같은데..'
"얼마나?"
'한..30분?'
"알겠어. 나 그 앞에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원체 규칙적인 일이 아닌지라, 이렇게 갑자기 약속을 늦춰야 하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대로 나갈 채비를 했다. 외투를 집어드는데, 책상에서 하얀 종이조각이 떨어진다. 뭔가 하고 주워보니 옹성우, 그 남자의 명함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연락을 해야 할 이유가 아직은 없었다. 다시 책상 위에 명함을 내려놓고서 집을 나섰다.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한잔이요."
역시나 바람이 꽤 매섭게 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버스는 아니다 라는 생각에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 근처의 카페로 서둘러 들어갔다. 밖과 확연히 다른 온도에 잠시 코를 훌쩍였고, 금방 나온 커피를 마시자 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횡단보도 반대편에서 뭔가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옹성우?"
어제 황민현과 기싸움을 하며 나에게 관심을 표한, 그 남자였다. 검은 정장과 검은 장갑, 외투도 어두운 남색 계열이었다. 참 경호원다운 복장이었다. 고위 정치인들께서 어딘가 행차하시면, 간간히 볼 수 있는. 어제 나를 보며 싱긋 웃던 얼굴은 어디가고, 웃음이 하나 없는 얼굴로 피곤한 듯 터덜터덜 걷는다. 어제도 생각했던 것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니 새삼 잘난 얼굴이다 싶었다. 머리도 작아서 비율이 꽤 좋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별안간 눈이 마주쳐버려 내 눈이 당황스런 깜빡임을 반복했다.
"안녕하세요!"
나를 발견한 옹성우는 빠른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와 방금 그 딱딱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어제처럼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아,네..안녕하세요. 내 인사를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보며 싱글벙글 웃는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내가 다니엘은 언제오나 하고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머리 묶었네요?"
"아,네."
"잘 어울려요."
이럴 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건지. 원래 작은 변화에도 하나하나 신경써주는 성격인가 싶었다. 괜히 머쓱해져 내 머리위의 똥이 잘 버티고 있나 톡톡 만져보았다.
"어제는 많이 바빴어요?"
"네?"
"연락이 없길래."
"아.."
연락 할 생각도 안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하나. 모호하게 반응한 나를 신경쓰지도 않고 옹성우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 오늘 일이 일찍 끝나서 퇴근 중이었거든요. 이렇게 마주칠 지 몰랐어요."
"..."
"기분 되게 좋네요. 오늘 일 좀 힘들었는데."
다짜고짜 내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을 이어가는 이유가 뭘까. 내가 어제 연락을 하지 않아서? 내가 그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자,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나를 보던 옹성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한번 들어올렸다 내린다.
"나한테 이런 말 하는 이유가 뭐에요?"
"가까워지고 싶어서요."
"..."
"말했잖아요, 호감 있다고."
무슨 사람이 말할 때 깜빡이를 켜는 법이 없다. 훅 들어온 진심에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웠다. 자기 감정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저렇게 쉽게 표현하다니. 나로써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절대 하지도 않을 일이었다. 조금 식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어 목을 축였다.
"원래 그렇게 모르는 사람한테 말 다 해요?"
"사장님이 모르는 사람이에요?"
"내 이름도, 나이도 모르잖아요."
"이제 알아가면 되죠. 이름이 뭐예요?"
한 마디 지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가 않은게, 나긋나긋한 말투 때문인가 싶다. 물론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표정도 한 몫 했다. 약간은 날이 선 내 말에도 어디 하나 작은 생채기도 나지 않는 것 같다.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들이대는걸까, 이 사람은. 그리고,
"..성이름이요."
거기다 대고 순순히 대답하고 있는 나는 또 뭐야.
*
강단이를 기다리며 옹성우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대화를 했다. 물론 옹성우만 적극적이었지만. 대화를 하며 알게 된 것인데, 옹성우가 나보다 두 살이 어렸다. 즉, 황민현과 동갑이란 소리다. 사장님은요? 서른이요.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누나네요?
분명 맞는 호칭임에도 친동생 말고는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단어라 소름이 돋는 팔을 비비며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옹성우는 금세 누나- 하며 장난을 쳐왔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쓸데없는 관계를 싫어하고, 낯도 많이 가리는 나에게는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이게 옹성우의 능력인가, 싶기도 했다.
"누나. 안 먹어?"
"어? 아, 먹어야지."
잠시 아까의 생각을 하느라 밥을 앞에 두고도 먹질 않았다. 내 앞에서 열심히 오물대던 강단이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을 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도 겨우 두번 본 남자 생각에. 오늘따라 나 답지 않다. 뭐, 신기해서 잠깐 그랬겠지. 그냥 단순해 지기로 했다.
*
오늘도 어김없이 바를 정리하고 집에 오니 두시 반에 가까워져 있다. 옷을 갈아입고 별 생각 없이 핸드폰 화면을 켰는데, 생각 외의 메세지가 도착해 있다. 친구 등록이 되지 않은 이용자라는 친절한 안내창 밑으로, 옹성우라는 정갈한 세 글자가 보인다.
[집에 잘 들어갔어요?]
아까 옹성우를 낮에 마주쳤을 때, 저는 저번에 명함 줬는데, 왜 사장님은 안 줘요. 해서 잠시 고민하다 내 명함도 건넸다. 번호가 문제가 아니라, 저번에 교환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이렇게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다. 시계는 2시 35분을 가리켰고, 이게 무슨 기분인가 느낄 새도 없이 벨이 울렸다.
'이름아. 잘 들어갔어?'
"..응."
'오늘은 너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났다.'
"..."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끊을게."
카톡 목록 가장 위의 옹성우와, 최근 통화목록 가장 위의 황민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감정이 다가올 것만 같아 핸드폰을 꾹 눌러 꺼버렸다. 검은 화면을 띈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다.
내 몸이 물에 씻기듯, 조금씩 피어나는 불안함도 함께 흘러 내려가기를.
-----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성우 분량이 좀 많았네요..!
여주의 마음은 어디로 향할까요?
추운데 감기 꼭! 조심하세요!
그럼 저는 발카라던 마마를 보러..총총
초록글 + 댓글 + 신알신 + 추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암호닉 신청은 [이렇게!]
☆★
녤뭉/사용불가/포로링/기림/꾸까/마이옹/참새랑/고막남친/개안하다/박쏠로/황쁘/만두/딥러블리/쑤쑤/우짹/숮어/녤피치/월이/하구름/정태풍/라온하제/윙꾸/용콩벌콩/보리/군밤/하핫종현/뿜뿜이/댄싱쥬스/기화/뷔밀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