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비
남사친 김태형
01
어느덧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단풍이 수채화 물감으로 옷을 입은 가을이 지나고 하얀 눈을 입은 겨울이 왔다. 어린 시절에는 겨울이 싫었다. 항상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뭐가 좋을까. 그런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쁜 기념일이고, 그날에 받는 작은 만남은 앞으로의 나를 변화시킨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김태형, 내 남사친이 될 줄은 몰랐다.
하얀 피부의 나와는 달리 남성스럽게 잘 탄 피부, 쌍커풀이 없는데도 커다란 눈망울은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었다. 나도 한 번은 김태형을 보고 그 생각을 했다. 내가 쟤 눈이었으면 손으로 눈 잡지도 않은 상태로 렌즈 넣을 수 있겠지? 역시나 사람은 다 똑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처음 만난 날인데 자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게 그 아이는 커다란 왼 손으로 턱을 받치곤 추운 겨울을 봄으로 바꿀 만큼 따수운 미소를 보여줬다. 너도 렌즈 쉽게 낄 수 있는지 상상했지? 라면서. 내 속마음을 읽어버린 게 창피해서 헛기침을 하는데, 그 아이가 큰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줬다. 그때 알았다. 속마음을 들켜서 놀란 게 아니라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줘서 놀랐고, 그 전율은 헛기침과 동시에 우리를 옭아매는 실로 변했다.
"여주, 오늘 여기 갈래? 날도 추운데 바로 옆에 카페도 있대. 거기서 음료 사서 가자."
"그래, 그러자."
나만 좋은 게 아닌데, 태형이는 항상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 태형에게 나는 항상 그러자고 했다. 사실 내가 먼저 어딜 가자고 하지는 않았다. 못한 거겠지? 그런 나를 아는 태형이는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곳만 찾아와서 물어본다. 어차피 오케이를 외치는 나를 알면서도 일단 물어본다. 그리고 마지막은 고맙다는 말.
이런 이유에서 난 김태형과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운 좋게 잘 풀려서 이사를 가자는 부모님의 제안에 이 집이 좋다고 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김태형과 보낸 고등학교 3년의 추억이 좋아서. 그리고 매일 볼 수 있는 남사친이 좋아서. 부모님은 내 성격을 아시는 탓에 대학 들어가면 자취방을 마련해주신다고 했다. 부모님은 아버지의 직장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가셨다. 만약 김태형이 없었다면 내게 자취방이란 꿈도 꿀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겠지. 자취방을 보러 가는 그날도 엄마와 태형이와 함께 했다. 내 자취방이지만 친한 친구인 태형이의 의견도 조금은 들어간 집으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태형이가 우리 집에 자주 들어오라는 의미는 아니다. 3년을 봐온 김태형은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부모님도 알고 계신다. 나도 알고, 김태형도 안다. 우리에겐 친구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취해서 좋겠다, 최여주."
"뭐가 좋아. 밥도 내가 하고, 빨래도 내가 하고, 그리고 새벽에는 얼마나 무서운데."
"어차피 내가 새벽에 있어줄 거고, 밥이야 우리 집에서 먹잖아. 근데 어머님이랑 아버님 따라갔으면 됐잖아. 왜 안 갔는데? 아, 김태형이랑 조금 더 오래 보려고? 맞지."
"뭐래. 나한테 이 동네는 소중해, 멍청아. 너 때문에 안 간 거 아니거든. 김칫국도 자주 마시면 살찐다."
아직 우리는 어렸다. 어쩌면 어린 그 시절의 청춘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던 걸까. 너랑 보낸 이 동네가 소중하고, 김태형 너라는 친구랑 더 오래 보려고 안 떠난 거라고 말을 못했다. 내 말에 김태형은 입술만 삐쭉 내밀곤 엄지를 세웠다. 역시 최여주 답다면서. 그래서 좋다고. 나도 이런 김태형이 좋다.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앞으로 남은 계절을 김태형이라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고3을 끝내고, 합격 발표가 나기 전까지 우리는 미친 듯이 놀았다.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김태형도 나도 그건 안 좋아한다. 생긴 건 꼭 부모님 몰래 소주 몇 병은 깔 것처럼 생겨선 나랑 어울리는 것만 봐도 그렇지. 기관지가 안 좋은 나때문에 담배도 끊었다. 아, 담배는 피웠었네. 김태형 착한 놈이라는 건 취소다. 근데 좋은 사람인 건 인정. 대학 들어가서도 담배는 피우지 말라는 내 약속을 지켜줄 건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먼 일인 것처럼 느껴진 대학 입학이 다가왔다.
첫 날부터 무슨 옷을 입을 지 골라달라는 김태형의 부탁에 화장도 제대로 못하고 태형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들어오라고 소리치는 태형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김태형의 얼굴은 아기 호랑이같았다. 개새끼... 어디 다친 줄 알고 급하게 들어왔더니 오늘의 멋짐을 봐달라는 사람.
내 남사친 김태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