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비
남사친 김태형
02
"나는 여기다. 이제 네 자리 찾으러 가자. 데려다 줄게."
"됐어, 김태형. 나 아까 오는 길에 봐뒀으니깐 여기서 친구나 사귀고 있으시죠."
어차피 자기는 입만 열면 친구 10명은 거뜬하다며 내 어깨에 그 큰 손을 올리곤 국문과 자리를 찾아갔다. 근데 또 저 말이 맞는 말이라 얄밉다는 눈초리를 보내자 어차피 점심은 나랑 먹을 거라는 태형이다. 그 말도 또 맞는 말. 왜 김태형은 다 옳은 소리만 하는지 모르겠다. 국문과 학생은 난데. 그냥 우리 과로 오지 그랬냐는 내 말에 자기는 내가 좋지만 또 한 편으로는 사진도 사랑한다고 했다. 작은 렌즈로 담아내는 것들은 순간의 추억들이고, 아픔이라고 했다. 왜 사진들이 아픔일까. 차마 물어보지 못한 질문은 금세 머리 한 구석에 겨울 다람쥐의 비상 식량처럼 자리 잡아버렸다. 그 순간의 태형과 나에겐 이게 더 어울렸으니깐.
아까 보낸 연락의 1이 사라지지 않는다. 학과장을 따라 과 별로 나뉜 탓에 김태형의 소식은 감감무소식. 허나 무소식은 희소식이라는 옛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공 교수님들의 인사가 끝나고 전공장 오빠와 부전공장 언니들의 이야기를 끝으로 해산. 역시 국문과 답게 뒤풀이는 따로 없었다. 나랑 잘 맞네. 근데 김태형은 왜 연락도 없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태형이 과는 아까 마쳤는데 뒤풀이 안 갈 생각으로 우리 과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단다. 왜 안 갔냐는 내 말에 그냥, 술 안 좋아하잖아. 라는 말을 한다. 하긴 김태형 술 안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태형아."
내가 나오자마자 귀신처럼 핸드폰을 집어넣고 시선을 맞추는 태형이다.
"엉. 잘 들었어? 너희도 뒤풀이 가냐. 우리는 아까 갔는데."
"안 한대. 집 가도 된다고 하셨어."
"다행이네. 밥 먹고 들어갈래?"
"그러자."
어차피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도 아닌지라 집 근처에서 먹을까 했는데 학교도 둘러볼 생각으로 정문 앞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다. 다들 술을 마실 생각인지 밥 집들은 조용했다. 바로 윗 층에 있는 술 집과는 참 대조되게.
"나 아까 친구 사귀는데 이상한 사람 봤어."
"이상한 사람?"
"어. 자꾸 나한테 기대는거야. 하나도 안 웃긴데 웃고. 별로야, 진짜."
"그래서 또 정색했고?"
"아냐, 안 했어. 했나? 했었나 봐. 어쩐지 내 표정 보더니 다른 자리로 옮기더라."
"그러다가 너 친구 없어진다. 이 누나만 네 정색 참지, 어? 초면에 만난 사람한테 그러면..."
"그럼 너만 내 옆에 있어주면 되겠네."
사진과도 예체능의 한 분야라 그런지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태형이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근데 김태형의 마지막 말에 단무지를 건지려고 뻗은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김태형도 나도 모른다. 다만 '나 친구 많은 거 안 좋아하잖아.'라는 말에 색소가 없어서 식욕을 크게 돋구지 못하는 단무지가 내 입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식초를 뿌려놔서 그런지 먹을만 했다. 김태형의 말을 잊을 수 있을만큼 조금은 시큼하기도 했고.
날이 제법 추워져서 그런지 우리가 좋아하는 공원에서도 앉아있지 못하겠다. 벤치에 앉아있다가 엉덩이 마비돼서 치질걸리기 싫으면 일어나라는 내 말에 김태형은 몸을 더욱 웅크리고 눈만 내밀고 시선을 마주했다. 뭐. 입 모양으로 대꾸를 하자 싱긋 웃어보인다. 뭐라고 대답을 한 것 같은데 목도리에 가려진 입술을 볼 수 없었다. 궁금한 마음도 딱히 없고, 그저 이 추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발만 동동 구르자 제 목에 걸쳐진 조금은 얇은 목도리를 내 목에 걸쳐줬다. 목도리를 한 바퀴 돌릴때마다 김태형에게서 풍기는 바디로션이 코를 들쑤셨다. 비누향 같으면서도 체리향이 섞인 바디로션.
"집 조심히 들어가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무슨 일 생기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아주."
"말을 해도 꼭. 추워, 들어가."
"너도. 데려다 줘서 고마워."
장난을 친 건데 김태형은 내 이마를 아프게 때렸다. 큰 손으로 딱밤을 때리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냐는 말에 안다고 했다. 근데도 때리는 김태형이나 꼭 미운 말을 꺼내서 한 대 맞는 나나 우리는 어렸다. 무슨 반응이 올 지 아는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내게 김태형은 딱밤 때린 손을 활짝 피곤 흔들었다. 뒷걸음질 치면서도 내가 잘 들어가는지 보는 태형이가 점처럼 사라질때까지 문 앞에 서있었다. 나름 좋은 시력인지라 조금 오래 서있었고, 금세 눈이 시렸다. 결국 본가에 있는 우리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 떨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씻고 일찍 자야지. 날이 춥다. 그리고 보일러를 제때 틀어놓지 않아 얼음장처럼 변한 우리 집도 추웠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만이 따뜻함을 머금고 있다.
-
"완전 정신없다. 죽겠어. 나 죽을래... 나 죽으면 묘비명에 알차ㄱ... 씨, 아프잖아!"
"돌았냐. 그런 말 하면 사신이 좋다고 잡아가시겠네. 빨리 과제해. 나 잠 와."
"하기 싫다고오... 태태야, 넌 좋겠다."
"왜?"
"좋은 카메라에 뛰어난 감각까지 타고났잖아. 과탑 인정?"
"뭐래. 아니야."
내 칭찬에 입은 아니라면서 커피를 마시는 김태형의 귀는 산타할아버지의 바지 색깔 만큼이나 붉어졌다. 그게 또 웃긴 나머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보다 예쁜 손가락을 살짝 만졌다.
"손도 예뻐, 김태형. 이 손으로 카메라 잡으면 카메라가 송구하옵니다, 주인님. 이럴라나?"
"미친. 주인님이래."
"돌았다, 김태형. 너 새벽에 뭐 보다가 잤냐? 수갑? 하얀 양말?"
"뭐라는 거야..... 플러스 알파죠."
한창 성장기에 놓여있던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 덕분에 이런 이야기도 서슴지않고 하는 탓에 가끔 김태형의 노트북을 빌렸다. 아니, 어렸을 때만 빌렸었지 고3 되고는 끊었다. 곧 성인도 되는데 실전이지 라는 김태형의 말에 끊어버렸다. 윽.
그렇게 노닥거린 시간이 2시간쯤 지났을까 이제야 과제가 안겨준 압박감이 몰려왔다. 플러스 알바생의 눈치. 반 이상 녹아버린 얼음만 남은 컵 3잔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우리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태형이의 부모님이 집에 오셨고, 그러다보면 저녁을 먹게 될 텐데 분명히 과제는 내일로 미룰 것 같은 생각에 우리 집으로 갔다. 차가운 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우리를 반겨주는 건 어둠이었다. 태형은 내 손목을 잡고, 빨리 불 켜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덩치는 어른인 게 꼭 하는 행동은 아이같다. 거실이 환하게 켜지자마자 김태형은 이렇게 어두운 밤에 집 오면 안 무섭냐고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었고, 내가 어제 사다 놓은 맥주 두 캔을 흔들었다.
"무서워도 집은 가야지."
"다음에 집 들어가기 무서우면 말해. 너 들어가는 거 보고 집 갈게."
"남친인 줄."
"남친 맞지.
남사친의 줄임말 남친."
저녁을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자는 김태형을 거실에 놓고, 작은 방으로 들어와 남은 과제를 마무리했다. 왜자꾸 심장이 주책맞게 벌렁거리는지 모르겠다. 아까 아메리카노를 너무 많이 마셨나. 괜히 속도 안 좋은 것 같아서 급히 과제의 마지막 문장에 온점을 찍고, 거실로 나왔다. 솔직히 조금 지저분했던 거실에 앉을 자리가 마련되었다. 근데 치워줄거면 다 치워주지 왜 반만 치웠냐는 장난 섞인 내 말에 김태형은 사레라도 들렸는지 켁켁거리면서 빨간 귀를 감췄다. 쟤 분명 뭐 몰래 먹었다. 고개를 휙휙 저어버리고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을 건냈다. 차가울텐데 뭘 그렇게 급하게 마시는지.
물을 반쯤 들이켰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치킨 너무 오랜만에 먹는다. 핵존맛."
"그래서 이따가 남은 거 먹게?"
"우리 다 먹잖아, 이거."
"아니."
네 입에 묻은 양념 소스요. 김태형의 손 끝을 따라가니 내 입에 묻은 양념이 붉게 따라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 입으로 넣었다. 하긴 양념이 죽이긴 하지. 맥주도 거의 다 마셨겠다 우리의 치킨도 장렬하게 뼈만 남기고 우리의 뱃 속으로 사라졌다. 이따가 치운다고 놔두라는 내 말에 엄마가 빙의된 듯 너 이거 안 치울거다, 내일 오후에 와서 보면 여기에 구더기 가득할거라는 말을 자칭 랩퍼답게 쏘아붙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맞는 말 장인, 김태형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술도 잘 못하는 탓에 맥주 한 캔을 다 마셔서 그런지 조금은 나른해졌다. 티비 속에선 그다지 재미없는 개그를 과대포장해서 송출하고 있을 뿐, 내 입맛에는 그지 자극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김태형이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웃기지.
"너 엉덩이 웃겨, 태형아."
"아까 양념 묻은 네 얼굴이 더 웃겨, 여주야."
"저 엉덩이 사진만 크롭해서 동창애들 주면 난리나겠다."
"드디어 최여주 미쳤네. 하지마라. 너 신고한다."
"어차피 보낼 애들도 없는데,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마라. 재미없어."
"내가 진짜 신고하겠냐, 너를. 너야말로 노잼. 술 마셨으면 씻고 나와. 너 자면 갈게."
"알겠어. 나 먼저 씻을게."
내 말에 대답도 안 하는 김태형. 약간 술에 취해서 그런지 붉게 달아오른 양 뺨이 조금은 멍청하게 보였다. 간단히 속옷을 챙겨서 씻고, 태형이가 자취 선물로 사준 로션을 양 손에 조금 덜어서 발랐다. 따뜻하면서도 산뜻한 향이 욕실을 가득 채웠고, 습기로 가득찬 욕실 거울은 내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입고 나갈 옷을 안 걸쳤다는 사실은 명백히 보였다.
...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나갈까? 그럼 김태형 절대 우리집 안 오겠지. 눈에 다 보여. 미치겠네. 욕실에서 조용하게 있으니 김태형이 소리쳤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취하면 답도 없다면서. 욕을 하려는 순간에 옷이 먼저 떠올랐고, 태형아 나 옷 좀...
"못 찾았어? 나 춥단말이야. 빨리 줘."
"야, 부탁하는 애가... 어... 말이 많네. 이거 어디다가 놔?"
"그냥 욕실 앞에."
"최여주, 이거 놓고 갈테니깐 10초 뒤에 가져가. 알겠지? 대답해."
"네에."
속으로 10초를 세고나서 문을 빼꼼 열어 김태형이 가져다 준 맨투맨과 츄리닝을 입었다. 나 원래 잘때는 반바지 입는데 왜 긴 바지를 줬지? 쟤도 알텐데.
"태형아, 나 바지 갈아 입고 올게."
"왜?"
"왜라니? 나 잘 때는 반바지 입잖아."
"아니, 오늘은 그거 입어."
"안돼. 나 술 마셔서 더 더워."
"추워, 추워. 너 감기 걸리면 내가 더 고생해서 싫다고. 그냥 입고 자."
김태형의 말도 안 되는 부탁 아닌 강요에 의해 긴바지와 함께 잠자리로 향했다. 침대에 몸을 맡기는 걸 보곤 김태형은 불을 꺼줬다. 나긋한 목소리로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오늘은 조금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자취하고 두번째로 태형이가 꺼준 불이라서 그런가.
[?]
안녕하세여, 독자님들
체리비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의 댓글과 추천... 그리고 신알신까지 퍼펙트 퍼펙트 완벽!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조금은 당황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짧게 이야기를 하고 갈까 합니다.
태형이와 여주는 이제 새내기에 들어선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과제에 허덕이면서도 아직은 서로를 많이 찾고, 의지하고 있어여
그리 긴 내용으로 마무리 할 생각이 아니라 휙휙 바뀌는 장면들이 많은데 너그럽게 봐주세여... ^ㅁㅠ
사랑함다, 독자님들!
이제 주말인데 감기 조심하시고, 어디 놀러가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게 된다면 옷 단디 챙겨입고 나가셔요!
빠샤!
20000 ?? (흔들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