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비
남사친 김태형
03
대학의 꽃은 바로 '미팅' '과팅' 그리고 cc라는 말을 대학 입학하기 전부터 자주 들었다. 내가 들으려고 반 아이들의 대화에 무식하게 끼어들었던 건 아니다. 맹세코 애인이 뭐하러 필요한가... 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내게 대학은 그저 학문을 배우는 곳은 무슨, 연애도 하려고 왔지.
"여주야, 저 사람 누구야?"
김태형은 교수님께 여쭤볼 게 산더미라면서 점심시간에 우리 과방 앞까지 데려다주곤 앞머리 정리 할 시간도 없이 뛰어갔다. 덕분에 과방 문 앞은 선배, 동기들로 가득했다. 친하지 않은 내게 먼저 운을 띄운 건 부과대이자 성격 좋다고 소문난 수영이였다.
"친구야, 친구. 사진과 김태형."
"헐. 둘이 친구야???"
대답할 시간도 안 주고 질문을 쏟아내는 과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대답만 하고 있었다. 이런 관심은 또 오랜만이네. 근데 관심의 주 목적은 내가 아닌 김태형이지만. 아... 나가고 싶다. 애꿎은 과방 문만 힐끔 쳐다보는데 이 질문들의 물꼬를 튼 수영이가 언니들 틈으로 파고 들어와 손목을 잡아챘다. 언니들, 지금 여주 눈빛 안 보이냐고 둘이 썸이라고 눈독들이지 말자는 어이없는 말을 하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수영이 손에 잡혔던 손목이 빠져나왔다. 동시에 수영이의 눈은 사막 속에서 밤하늘을 보면 가장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다.
"그래서 과팅을 나간다고? 너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안 좋아하는 건 아닌데... 불편하지."
교수님께 질문을 하곤 들은 답변을 토대로 사진 수정을 하는 태형이의 손이 멈췄다. 시선은 내가 아닌 컴퓨터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김태형은 이런 거 안 나가는데 내가 나가서 싫은가 싶어서 태형이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한 번쯤은 나가봐. 안 좋아하는 거 아니라며."
"... 그건 그렇지. 넌? 맞다. 아까 과 언니들이랑 동기들이 네 이야기 엄청 물어봤어."
"나? 나를 왜 물어봐? 너 또 내 욕했지."
"아니야. 네 욕은 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 장난이고, 우리 둘이 친구냐고."
내 시선과 맞닿았던 김태형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고, 얼음이 담긴 아메리카노는 따뜻한 카페 공기와 밀당이라도 하는 듯 투명한 물방울을 탁상 위로 떨궜다. 이래서 카페 탁자는 나무로 된 걸 주문하면 안 되는데... 여기 카페 주인이 처음 창업을 해봤나.
"친구라고 했더니 과팅 나가래?"
"어? 어, 그러더라. 알겠다고 그랬지. 거기서 뜸들이면 너만 골치 아프잖아."
김태형 과제 구경도 할겸 과팅 나갈 때 입을 옷을 고르고 있었다. 중간중간 이 옷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전부 퇴짜를 놓는다. 저거 자기 과제 안 된다고 나한테 승질부리고 있네. 결국 내 입에서 '아, 안 살거야!!!' 라는 말이 나오니깐 과제가 끝났다면서 저녁을 먹자는 태형이다. 이렇게 얄미운 애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냥 과팅 보내기 싫으면 말 하라고, 나 취소한다고 하니깐 노트북 정리를 하는 김태형은 기괴한 표정으로 내게 무슨 상상을 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럼 네가 하는 행동이 지금 정상이라는 건지.
"추워. 추워. 태형아, 나 추워."
"응, 나도 추워."
"목도리 벗어주라."
"뭘 벗어?"
"... 됐다. 됐어. 너도 이제 집 가. 다 왔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이런 친구가 어디 있겠냐."
저번주의 김태형은 이번주의 김태형과 똑같다. 약속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키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야 돌아간다는 김태형 덕분에 오늘은 조금 따뜻한 것 같다. 아깐 내가 너무 오버했었나 보다. 그래. 김태형이 왜 내 과팅에 신경을 쓰겠어. 또 술 마시고 자기 부를까봐 그래서 신경쓰고 그랬겠지.
'지이잉'
보일러를 틀고, 옷을 대충 챙겨서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문자가 왔다.
어느 과, 몇 명, 동기들만 참여하는지, 어디서 마시는지, 몇 시에 모이는지 다 알아서 와.
-김 태태
짜식. 그래도 내 걱정은 됐구나?
-
"너 그러고 가면 안 춥냐? 어디 패션쇼 가?"
"왜 그러셔. 동기가 예쁘다고 해줬는데... 너 이거 동기까지 욕하는거다?"
"아니, 춥잖아. 목도리라도 해."
"아~ 안돼. 어차피 몇 시간만 참으면 되는데 패션을 망칠 순 없지."
내 말을 왼쪽 귀로 다시 흘려보내는지 내 목에 제 목도리를 칭칭 감아준다. 옷은 화사한데 목도리는 칙칙했다. 김태형 표정처럼. 그러게 이렇게 추운 날 왜 자기 목도리를 내 목에 감아주곤 혼자 추위를 다 느끼는지 참. 김태형도 어리긴 어리다. 난 별로 안 추운데,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2교시 수업이 있는 터라 1교시 공강은 제 과방에서 과제를 하겠다는 태형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자연스럽게 왼 쪽 벽에 붙은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여기서도 교수님 글씨는 다 보이니깐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자리에 앉았는데, 동기 언니가 슬금 다가와 옆자리에 가방을 올렸다. 아직 수업 시작하려면 15분 정도 남았는데 칙칙한 자리에 앉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방에서 동그란 귤 두 개를 꺼내서 내 손에 쥐어줬다.
"어... 감사합니다. 근데 이거 뭐에요? 과에서 나눠줬어요?"
"아니, 자취방에서 너 주려고 가져 왔지. 귤 좋아하지?"
"네, 좋아해요."
"태형이도 귤 좋아해?"
"네? 태형이요?"
"응. 네 친구 김태형말이야. 태형이도 귤 좋아해?"
언니가 준 귤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언니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김태형 이름이 거론됐다. 태형이가 우리 동기 언니랑 친했었나? 우리보다 한살 많은데, 재수해서 온 탓에 편하게 언니 누나라고 불러달라고 했었다. 그만큼 태형이랑 부딪힐 일도 없었을 텐데. 김태형 역시 인싸네.
"좋아해요, 걔도. 신 귤 좋아해요."
"그래? 이거 좀 단 귤인데... 내가 내일 가져올게. 태형이랑 같이 강의실 들어와."
"알겠어요, 언니."
"약속해. 근데 너 오늘 예쁘다. 과팅 꼭 성공해."
악의없이 내게 웃어보이는 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너만 믿을게, 여주야. 고마워.'라는 말과 함께 언니 손에 들린 귤 3개를 책상에 남겨 놓고 무리로 떠났다. 덕분에 단 귤을 안 먹는 태형이 껀 하나만 남기고 가방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이따 점심 시간에 만나면 줘야지. 아, 윤지 언니도 아냐고 물어봐야겠다. 책상에 올려놓은 태형이 귤을 보느라 수업에 집중도 제대로 못했다. 가방에 있던 검정 네임펜으로 김태형 웃음을 살짝 그렸다.
'^ㅁ^'
김태형이랑 똑같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웃음을 교수님께서 보셨는지 탁상을 두번 내리치셨다. 집중하자, 집중.
그렇게 반 강제로 앉아서 들은 전공 수업이 끝나니 벌써 점심 시간이다. 김태형도 2,3 교시 교양은 잘 들었나 모르겠네. 아침에 내게 둘러준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고 핸드폰을 꺼내 익숙하게 번호를 누르려는데 어깨 위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언니가 귤 다시 가져가려고 그러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우리 과 사람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액정 화면에 태형이의 전화가 울렸지만 시선을 올려 동기에게 물었다.
"저기, 여주야. 다름이 아니라 네 번호..."
"최여주, 너 왜 내 전화 무시해."
아니, 김태형은 내 주변에 있었으면서 전화를 했는지 동기와 내 사이에서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누구 하나 잡히면 계속 괴롭히겠다는 표정으로.
"동기가 뭐 물어보려고 하길래. 지민아, 지민이 맞지?"
"어... 내 이름 알았어? 모를줄 알았는데."
"내가 왜 몰라. 말은 안 해도 동기 이름은 알지. 근데 왜 불렀어?"
"다름이 아니라...어, 그니깐 점심 같이 먹을래?"
"동기님, 미안한데 점심 나랑 먹어. 최여주."
지민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남들이 보면 꼭 김태형에게 안겨있는 것처럼 자세가 취해졌다. 두꺼운 김태형의 옷 사이로 익숙한 향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응, 지민아. 나 태형이랑 점심 먹는데... 다음에 같이 먹자."
"태형아."
"..."
"김태혀엉."
"왜 불러."
"이거 손 언제까지 잡고 있을거야?"
"미친. 미안해."
내 말을 듣고나서 제 손과 맞닿은 내 손을 뿌리쳤다. 그렇게까지 세게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째려보는데 내 시선도 안 맞췄다. 누가보면 바람이라도 피우는 줄 알았을 만큼 김태형 표정이 안 좋았다. 가끔보면 김태형이 이해가 안 가는 순간들이 종종 보였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당연히 남녀공학인 탓에 저와 짝이 안 되고 다른 남학생과 짝이 되어서 짝 피구를 하면 나랑 짝이 된 남자애만 노렸다. 처음엔 단순히 내 착각인가? 싶었다. 그만큼 김태형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나 이상한 감정들이 싹트지 않았으니깐.
...
고1 짝 피구 시간-
"김태형, 왜 자꾸 바닥으로 치냐. 정신 차려."
"손이 미끄러워서 그래, 주장."
"저새끼 눈빛을 봐라. 미끄러워서 구석으로 보낸 애가 맞나."
"야, 너 오늘 왜이렇게 못했어?"
"뭘 못해."
"아까 너희 편 주장이 욕하던데."
"손이 미끄러웠다니깐."
"그래? 근데 내 쪽으로 던지지마... 무서워."
"... 미안."
김태형은 반 친구들과 점심을 포기하고 바로 축구를 하러 나갔고, 난 여자들 무리 사이에서 조용히 교실로 향했다. 김태형의 의도는 아니지만 자꾸 우리 쪽으로 날아온 피구공을 피하려다가 짝이 내 발을 밟은 탓에 조금 욱신거렸다. 아깐 아픈지도 몰랐는데 이제야 아픔이 몰려오는 기분에 속도를 늦춰서 걸었다.
"여주야, 발 괜찮아?"
"응? 괜찮아. 긴장했다가 풀려서 더 그런가. 넌 축구 하러 안 가?"
"못 가. 너 양호실 데려다 줄게. 같이 가자."
"혼자 가도 되는데... 근데 왜 축구 안 해? 너 좋아하잖아."
"지금 가서 축구 한 판 뛰면 축구가 아니라 김태형 피하기 한 판이라서."
-
"나 오늘 떡볶이 못 먹어, 김태형."
"왜? 속 안 좋아?"
"아니... 냄새 베잖아."
"존나 얄미워, 최여주. 됐다~ 너 이따가 과팅가서 열심히 놀아라. 난 집에서 엽떡 시켜서 먹을테니깐."
"헐... 남겨놔, 알겠지?"
"다 먹어야지."
어차피 매운 거 잘 먹지도 못하면서 나 약올린다고 저 말을 하는 게 왜 아까의 모습이랑 다르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역시 사람은 1년을 봐도 3년을 봐도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결국 타협점으로 간단한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항상 먹던 걸로 태형이가 대신 주문하곤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긴장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입에서 샌드위치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목구멍으로 넘기지를 못하는 걸 본 김태형이 내 쪽으로 음료를 밀었다. '억지로 먹지마. 이따 술 마시니깐 배라도 채울 겸 데려왔으니깐.' 태형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자 내 손에 들린 많은 양의 샌드위치를 가져가 예쁘게 포장했다. 집가서 떡볶이도 먹고, 샌드위치도 먹는다는 태형이의 표정이 엄청 웃겼다. 꼭 소풍가는 아이같았다. 내 웃음에 김태형은 또 바보같이 웃어보였다. 이제야 사춘기 시절의 김태형같네.
"맞다, 김태형. 너 민윤지 언니 알아?"
"민... 뭐? 다시 말해봐."
"민윤지 언니. 우리 과 동기인데 재수해서 오신 바람에 한 살 많아."
"처음 듣는데. 왜? 너 괴롭혀?"
"뭐래... 누가 날 괴롭힌다고 그래. 그냥 그 언니가 너 알길래 궁금해서. 아까 귤도 줬어."
모른다는 김태형의 말과 눈빛에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온 게 웃겼다.
이게 뭐라고 안도의 한숨까지 뱉어내는 걸까.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와는 사뭇 다른 건 성인이라는 타이틀 뿐만이 아니었다. 3년을 내내 붙어있던 우리에게 대학은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줬고, 많은 장애물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김태형과 친구일 뿐인데, 서로에게 자꾸만 이상한 요구가 생기고 소유욕이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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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여, 독자님들
체리비입니다.
초록글 이게 무슨 일이지요...?
추천과 댓글은 다 무슨 일이지요...?
저한테 지금 미리 크리스마스 선물 주신 거 맞지요....?
^ㅁ^
사랑함다, 돗짜님들!
그래서 그런지 분량 조절에 실패해부렸습니다... 하하...
원래 오늘 과팅 이야기도 슬쩍 넣으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 편에 넣겠습니다!
자꾸 들려드리고 싶은 태형이 이야기가 많네여
이번주 내내 황사와 추위가 심하다고 해요.
우리 독자님들 몸 건강하게 지내셔야 됩니다!
아프시고 그러면... 저 울어여. 슬퍼. ^ㅁㅠ
[암호닉 ?]
슈링, 사용불가, 0207, 빙구, 오빠아니자나여, 뿌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