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레벌떡 당근 심부름을 다녀온 윤호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싸늘한 날씨 속에 제가 조금 늦기라도 하면 기다리는 재중이 추울까 봐 눈길을 부지런히 달려 돌아온 윤호는 곧 제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중은 다시 눈사람 앞에 앉아 가지로 팔을 만드느라 정신없었다. 고작 눈사람 하나 만드는데 마치 밤 새며 졸업작품이라도 만드는 것 같은 분위기야…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재중의 태도에 윤호는 그만 살짝 주눅이 들어 버렸다. 옆에 서서 어색하게 비닐봉지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재중이 돌아보지도 않고 윤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호는 흠칫 놀랐다. 뭐지? 잡으라는 건가? 일으켜 달라고? 초면인데 이렇게 남의 손을... 부끄럽게... 약 2초 동안 고민한 후 윤호는 재중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긴장한 것이 팍 티나게. 뻣뻣한 동작으로 손을 잡은 후-잡았다고 쓰고 얹었다고 읽는다-윤호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다... 눈을 많이 만져서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적당한 온도의 손을 마음껏 느끼던(?) 윤호는 곧 어리둥절한 재중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저기..."
"...네?"
"손 말고... 당근이요."
.......? 윤호의 사고회로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아 당근 달라고.....? 내 손이 아니라....? 와 창피해!!!!! 삽질로 계곡을 팠겠다!!!! 윤호의 얼굴이 진짜로 붉어졌다. 서둘러 손을 거둬 비닐봉지 안에서 당근을 꺼내 쥐어준 윤호의 얼굴에 실망 40%와 절망 30%, 그리고 민망함 400%가 담겼다. 윤호가 혼자 삽질을 하고 구멍을 메우거나 말거나 재중은 당근의 상태를 요리조리 살피고 눈사람의 얼굴에 실리콘... 이 아닌 당근으로 콧대 세우기 작업을 시작했다. 윤호는 다시 그 옆에서 삽질을 계속했다. 젠장할 당근! 망할 당근! 세상의 모든 당근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근데 그럼 재중씨가 눈사람을 못 만드네? 그건 안되는데... 오이나 가지는 안 되려나... 그 와중에 재중이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코가 없는 올라프 같은 형태의 눈사람이 예쁜 주황색 당근을 달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 윤호가 숨을 들이쉬었다. 너무 가까운데... 어... 실제로는 일 미터도 넘는 거리에 서 있었지만 윤호의 눈에는 재중이 마치 3cm 앞으로 다가온 것 같이 느껴졌다.
"눈사람 예쁘죠?"
"네? 어, 예쁘네요! 정말 예뻐요. 그 빈 말이 아니라, 진짜 예쁜데.. 재중씨가 만들었으니까, 이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네?"
"눈, 눈사람계의 한가인이네요."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는지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한 재중을 보며 윤호가 얼굴을 감쌌다. 난 망했어... 다정하고 상냥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눈사람계의 한가인이 뭐야... 재중이 아예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윤호를 쳐다보고 다시 빵 터졌다. 아침 일곱 시, 슬슬 사람이 오가기 시작한 윤호네 집 앞 골목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근데 제 이름 어떻게 아셨어요?"
"네, 네?"
"아까 재중씨, 이랬잖아요."
"그게... 저한테 당근 부탁하실 때,"
"맞다! 맞다 그랬구나. 그럼 그쪽 이름은 뭐에요?"
"저는 정윤호에요. 정, 윤, 호요."
"윤호? 이름 예쁘네요~ 몇 살?"
몇 살? 하는 말투가 마치 아기들에게 우쭈쭈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헤벌쭉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윤호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전 스물여덟인데."
"정말요? 형이네? 전 스물넷!"
스물넷?! 기껏해야 스물둘 정도로 보이는데...
"어... 동안이시네요."
"미남이시네요도 아니고 동안이시네요가 뭐에요? 재밌으신 분이네 진짜~ 우리 친하게 지내요!"
내미는 손을 덥석 잡아버린 윤호가 살짝 찡그려지는 재중의 미간을 보며 화들짝 손을 놓았다. 금세 다시 웃으며 손을 잡아오는 재중의 얼굴에 다시 바보같이 웃어 버렸지만. 1월의 어느 날 오전 일곱 시, 슬슬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윤호네 집 앞 골목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