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우리 학교 사대천왕
슬프게도 전학은 내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내가 외고나 과고, 자사고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명문고라 불리는 학교에 진학한 걸 기적으로 여기는 부모님을 설득할 수 없기도 했고, 입학하자마자 전학 가는 건 멀리 이사하는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니까 그냥 조용히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결심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흔들렸다. 입학식 다음날 교실에 모인 여자애들이 나눈 대화가,
‘민윤기 그 어깨 제일 넓던 애! 걔 평소에는 무기력한데 농구할 때 엄청 날아다닌데. 그리고 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이었다더라. 마지막 기말고사는 올백이었다던데?’
‘하아..쩐다. 농구 한데... 걘 왜 이름도 민윤기야?’
‘근데 잘 때 건드리면 안된대. 걔랑 같이 중학교 나온 애가 그러는데 잘 때 건드리면 남녀 상관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데. 그리고 여자애랑은 세 마디 이상 말 안 한데. 단답도 쩔고.’
‘완벽하다. 자기 여자한테는 다정할 거 아냐!’
‘아! 이건 확실하지 않은데, 엄청 유명한 로펌 아들이래!’
‘로펌?’ ‘변호사들 모여있는 회사 아냐?’ ‘아, 됐고! 그럼 걘?!’ ‘누구?’
‘아! 왜! 그 눈 초롱초롱하고 약간 토끼같이 생긴!’
‘전정국? 걔도 중학교 때 유명했다더라. 학교 왕자님이었다던데.’
‘그럴 것 같았어. 그 사슴 같은 눈!’
‘호불호가 안 갈리는 외모긴 하지. 근데 낯 엄청 가린데. 그리고 본인은 왕자님이란 별명 무지 싫어한다니까 앞에서 그러지 마.’
‘야, 당연하지! 뭐 또 없어?’
‘그.. 못하는 게 없다던데. 그래서 별명이 황금 막내? 막 그렇다고.’
‘막내는 뭐야?’ ‘집에서 막내래.’
‘음. 그럼 걔는 그 약간 까맣고 조각상처럼 생긴 애!’
‘김태형? 걘 원래도 유명했지. 중학교 때도 막 페북에 뜨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친화력이 장난이 아니래. 별명이 김 스치면 인연?이라고 할 정도라고’
‘헐. 나랑도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다.’
‘근데 약간 화나면 무섭다고 하던데. 친해졌다고 해서 막대했다가 진짜 큰일 난다고. 막 조폭 아들이란 소문부터 건설회사 회장님 아들이란 소문까지 정말 다양해. 그리고 박지민이랑 제일 친하다고 하더라.’
‘박지민이 걔지? 하얗고 따뜻하게 생긴 애!’
‘야, 따뜻하게 생긴 애가 어딨어. 다 완전 차갑게 생겼는데.’
‘뭔 소리야! 걔 대박 차갑게..’
‘야야. 진정해. 너희 맘 다 알아. 중학교 때도 박지민이 차갑게 생긴 건지 따뜻하게 생긴 건지 애들 사이에서 엄청 갈렸데. 얘는 별로 알려진 게 없어. 남자애들이랑은 친하게 잘 지내는데, 여자애들이랑은 민윤기 급으로 안 친하고, 아! 무슨 무슨 종합병원 외동아들이라던데.’
저런 것 밖에 없었다. 심지어 우리 반만 그런 게 아니라 호연이와 마리(중학교 친구)네 반도 그랬다고 한다. 그때 알았다. 단순히 사대천왕이라고 부른다고 인소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모티콘으로 치면 -_-^ ^_^ >_<-_- 쯤 되는 포지션을 모두 정해져야 한다는 걸.
결국 여자애들의 뜨거운 대화를 통해 우리 학교에는 포지션까지 정해진 사대천왕이 탄생하고 말았고 나는 정말로 전학이 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