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사귄 양아치 남친과 끝난 (게 아닌) 이야기
03
새벽만 되면 쓸데없이 슬픈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어이없어 했거나,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것이다. 슬픈 기억이라기엔 지나치게 밝다. 단지 그 위에 쌓아올려진 좋지 못한 기억들이 어느새 맨 밑바닥에 깔려버린 어떤 기억에 그림자를 드리웠을 뿐이었다. 그게 그 애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차라리 그 순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까.***
201x년 8월 말 가장 걱정했던 중학교 3학년의 한 해도 벌써 반 이상 흘러가 버렸고, 눈 깜빡했더니 2학다.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인문계가 아닌 고등학교로 가고 싶진 않다. 그러려면 공부를 존나 열심히... 아, 결국 또 공부. 왜 맨날 이런 식인지. 정말이지 모든 것에 현실을 대입하면 해피가 있을 수 없다. 한 손에는 2반 선생님이 심부름 시킨 파일이 한가득, 다른 한 손에는 교과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니... 고등학교 가면 더 심해지겠지... 별 잡 생각을 다 하면서도 발걸음은 교무실로 향한다. 내가 무슨 기계인간이야 뭐야, 자동으로 움직이네. “어, OO아.” “이거 2반 선생님이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아, 그래. 고마워.” “네, 안녕히 계세요.” 잠깐, OO아. 뒤돌아 나가는 내 걸음을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돌려세웠다. 예기치 못한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내가 그쪽을 쳐다보자,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남자애가 선생님 옆에 서 있다. 분명 교복은 우리 교복인데... 명찰도 없고, 뭔가 어색하다. 아, 전학생이구나.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얘가 보건실이 어딘지 모른다고 해서...” “아......” “OO이가 좀 데려다 줄 수 있겠지?” 답정너다. 그런 상냥한 말투에 내가 ‘아니요, 싫은데요.’ 라고 대답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이 학교 안에서는 그랬다. 남자애가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일단 오자마자 보건실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좀...... 가만 보니 얼굴 이곳저곳 상처 투성이다. 오, 솔직히 말하면 좀 겁났다. 누가 봐도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한 싸움 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저 애한테서 풍겼다.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OO아?” “아, 네! 당연하죠! 친구야, 가자!” 물론, 내 생각 따위가 중요할 리 없다. 곧바로 뭐에 홀린 듯 남자애의 등을 살짝 밀어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뭐 어때, 그냥 보건실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데. 불만 가득한 내 표정을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애가 이내 고개를 돌려 앞장서 걸어간다. 어, 근데 그쪽 아닌데.***
“저, 전학생 맞지?” “.......” “어디서 왔어?” 어색하다. 그것도 존나 어색하다. 내가 배고픈 것 다음으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이런 어색한 공기인데. 분명 아직 여름이건만 왜 이렇게 춥지... 내가 무슨 말을 걸어도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남자애 때문에 더 춥다. 아 추워...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온 속마음. 그제야 남자애가 입을 열었는데, 아니, 난 뭐 이쯤 되면 왜 춥냐느니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입 좀 다물어, 존나 시끄럽네.” ......우와, 개쎄다. 초면에 말을 참 예쁘게... 하는 구나. 어이가 없어 남자애를 올려다보며 한 마디 하려다가 곧바로 돌아오는 냉한 시선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어우, 진짜 일진이야 뭐야. 눈에 살기가... 아무래도 얘랑은 더 안 엮이는 게 내 안전에 좋을 것 같아서 난 입을 다물었다. 근데 이상하게 아까처럼 어색했던 공기는 싹 사라졌다. 걷다 보니 어느덧 보건실 앞이다. 드디어 도착했어, 난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그럼 난 이만 갈게!” 라고 말하고선 뒤돌았자만 남자애는 무슨 일인지 아직 나를 돌아가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대체 왜...? “야, 어디 가.” “......? 나 반 가야지?” “같이 들어가, 나 우리 반 어딘지 몰라서 또 네가 데려다 줘야 해.” 뭔......? 뭐 저렇냐 애가. 내가 자기 시다라도 되나? 어떤지 그냥 선생님 심부름 한 번 들었다가 완전히 코 꿰여버란 것 같다는 느낌이 어렴풋 들었다.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곧장 내 팔을 잡아당겨 먼저 보건실로 밀어넣고는 자기도 따라 들어오는 남자애다. “응, 어디가 아파서?” “...... 얼굴에 상처요.” “아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 난 저 남자애가 저런 냉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정말 무섭다. 근데도 조금 불쌍해 보이는 건 왜인지. 보건 선생님의 손길을 받아내는 자세가 뭔가 어색한 게, 보건실을 그리 자주 들락거리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할 것 같다. 그냥 잠자코 가만히 서 있어야지. “학번 이름.” “2학년 8반 34번.” “전학생이네? 이름은?” “......배진영.” 딩-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내 머리를 스쳤다. 쟤 뭐야... 2학년이면 나보다 한 살 아래잖아. 쟤 나 몇 학년인 줄 알고 계속 반말 찍찍 해댔대? 순간 기분이 확 나빠져서 먼저 보건실 바깥으로 나와 버렸다. 뒤에서 여유롭게 보건실 문을 닫으며 나오는 배진영이란 애가 날 불렀다. 야, 사람 말 귓등으로 쳐 듣냐? ......저걸 그냥. “너 2학년이지?” “근데.” “중2병이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네, 너 나 몇 학년인 줄 알고 야야거리냐?” “3학년.” ...뭐야, 알고 있었어? 그러면 더 이상한 새끼네 저거. 내가 기가 차다는 듯 쳐다보자 배진영이 픽 웃는다. 네가 그런 반응 보이는 거 보니까 3학년 맞네. 유유한 멘트까지. 분명 선수는 내가 쳤는데 왜 내가 말리는 느낌이냐 씨발... 나도 어디 가서 무시만 당하는 성격은 아니거든. 갑자기 기분 확 잡쳤다. “나 교실 간다, 니네 반은 너 알아서 찾아가던가 말던가.” “여기 매점 어디냐.” “몰라, 네가 알아서...” “너 뭐 좋아하는데.” 아, 좆같아. 또 말렸어.***
“어우, 오늘 처음 본 애가... 막 이런 것도 사주고, 너 되게 괜찮은 애구낭?” “닥치고 먹어.” 내가 생각해도 난 참 단순한 것 같다. 그리고 무식하지. 나도 내가 병신 같은데 얘는 날 얼마나 호구로 보겠냐. 뜻밖의 자아성찰... 츤데렌지 뭔지 매점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카크림빵을 선뜻 계산해주는 배진영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얘 진짜 이거 왜 사주냐... 나 진짜 코 꿰인 건가. 어쩐지 이걸 먹으면 앞으로도 얘랑 쭉 엮일 것 같은 직감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그딴 게 뭐가 중요하냐, 내 앞에는 지금 사랑스러운 비주얼의 빵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배진영이 피식 웃는다. 맛있냐? “응, 존나.” “아, 개웃기네 진짜.”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날 보며 연신 웃어대는 게 영 거슬린다.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웃긴가, 짜증을 가득 담아 그 애를 째려보자 꽤나 예쁜 미소로 날 내려다보며 한다는 말이, “아니, 전학 오자마자 제일 처음 말 터게 된 게 3학년일 줄 누가 알았겠어. 게다가 여자야.” “......?” “이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 누나.” 난 간다.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듯 건드리고는 뒤돌아 계단을 올라가는 배진영에 난 빵도 먹다 말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누나라고 부르는 게 더 어색하네. 그나저나 쟤 자기 교실 어딘지 알면서 나한테 구라친 거였어? 정말 알면 알 수록 이상한 애다. 나 오늘 처음 만난 애한테 하루에 몇 번이나 놀림 당하는 거야. 그 애의 손길이 지나간 머리가 뜨거웠다. 처음 말 턴 게 나라니, 오전 시간 내내 같은 반 애들하고 뭘 한 거냐 대체. 엄청 철벽 세웠나 보네. 잠깐, 그렇다면 나는 그 철벽을 뚫은 개척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나는 웃었다. 아,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 날 보며 웃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배진영, 생긴 것처럼 이름도 예쁘네.***
“그냥, 처음 봤을 때부터 되게 놀리고 싶게 생겼던데.” 저때까지만 해도 얘가 내 앞에서만 그렇게 웃는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 그냥 내가 웃겼단다. 얘가 존나 무서운 애였다는 걸 안 건 한- 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뭐, 내가 알 리 있었나. 처음엔 아주 강아지처럼 내 앞에선 싱글싱글 웃기만 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모카크림빵 사 준다며.” “야, 네가 나 사준댔지 언제 내가 사준댔냐?” “네 껀 내 꺼고 내 꺼도 내 꺼지.” “꺼져, 치사해서 내가 사 먹는다.” “아아, 미안 누나. 사 줄게 삐지지 마.” 그렇게 쭉 행복하게, 변함없이. 잘 지낼 줄 알았지.***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냥 무작정, 그 애가 있다는 병원 쪽으로 달렸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겉옷도 못 입고, 운동화는 제대로 신은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딴 게 중요할까. 단지 배진영을 당장 만나야 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숨을 고르며 도착한 불 꺼진 응급실 복도엔 그 애의 친구들만 앉아 있었다. 그 중 날 본 한 녀석이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묻는다. 선배, 여기 어떻게 온 거에요? 그렇게 묻는 녀석의 얼굴에도 상처들이 심각하다. 그새 또 싸우고 왔나. “배진영 어딨어.” “......네? 선배가 배진영ㅇ...” “할 얘기 있어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 “아니, 걔 지금.” “너 왜 왔어.” 아, 익숙한 목소리다. 누구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목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가뜩이나 늦은 새벽이라 조용한 복도에 더한 정적이 치고 들어온다. 그 애가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본다. 저보다 한참 작은 키인 나를 내려다봤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무작정 그 애의 팔을 잡고 병원 바깥으로 끌었다. 그 애가 힘없이 내 손길에 끌려 나왔다.***
“.......” “.......”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생각했던 모든 말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요즘... 네 얼굴만 보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전에는 목소리만 들려도 온갖 행복한 것들이 떠오르더니, 참 웃기다. 몇 달 사이에 이렇게나. 그저 가만히 서로 눈만 마주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울컥 터져나오는 내 감정을 숨기는 게 힘들었다. 나를 보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너 진짜 막 나간다?” 결국엔 날선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내 말에 인상을 팍 구겨버리는 네 모습에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왜? 난 이정도 말도 못 해?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돼. 그래, 사실은 내 사소한 애증일 뿐. 그저 어린 심술일 뿐. “어쩌라고.” “......뭐?” “내가 뭘 하면서 살든.” “.......” “그게 누나랑 무슨 상관인데.”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오는 네 말엔 틀린 것 하나 없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살든 그건 더 이상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막 나가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걸 내가 알아버린 이상, 그건 더 이상 너 혼자만의 상황은 아닌 거잖아. 나는, 왜 자꾸 그 제멋대로인 네 일상에 나를 끼워넣느냐고 묻고 싶었을 뿐인데. 네게 아까 남자애를 때린 것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하려 고개를 든 순간 내 팔을 잡아당겨 오는 네 손길에 말이 막혀 버렸다. 얼굴이 그 가슴팍에 닿기가 무섭게, 익숙한 향이 오랜만에 코끝을 적셔온다. 나를 제 품에 가득 안은 네 턱이 내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진 순간, 나는 처음 너와 안았던 그날 마냥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 “......그냥 안아줘, 제발.”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핑계가 아니다. 단지 내가 여기서 밀어내 버리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너일 게 뻔해서,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것 뿐이다. 그게 내가 아닌, 네가 아닌 다른 누구였을 지라도. 넌 이렇게 이기적인데. 난 어째서 미워할 수가 없을까. 한 손을 들어 네 등을 가만 쓸어 주었다. 끝내 꽉 안아주지는 못했다. 미련한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더보기 |
여러분...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2편이 올라온 지 한 3달 가까이 지났나요...? 전 설마 아직도 이 글을 기다리는 분이 계실까 생각했는데, 공지글 댓글을 보면서 혼자 머리를 박았습니다... 저는 죄인이에요. 음, 일단 이번 글까지 보면 아시겠지만, 여주는 자존심이 굉장히 세요. 그런데 그 대부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진영이죠. 진영이에게 여주가 모든 면에서 유일한 약점인 것처럼요. (2화 참고) 둘은 서로에게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해요. 아마 둘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러브러브가 시작될... 네 그렇습니다. 진영이는 보시다시피 이미 그걸 반쯤 깨달은 후에요. 여러분...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눈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