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을 걷다
w. 공 백
내 마음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너만 그려내더라.
[ 10 ]
진심
/
데여서 한없이 붉어진 손을 감싸 쥐고 무작정 식당을 벗어났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하루였다. 손이 데였어도 나오지 않던 울음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터져나왔다. 항상, 왜 이럴 때에만. 우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얄궂어 매일 나를 괴롭힌다. 식당에서까지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보여준 기분은, 그야말로 참담하기만 했다. 붉게 부어오른 손이 이제는 따갑게 쓰려왔다. 아프다. 데인 손 만큼이나 마음도 쓰리게 아파왔다. 내 모습을 본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동정을 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멍청하다고 생각했을까. 네가 무슨 생각을 했던 간에,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느껴져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 … 아직 춥네. ”
거의 봄에 젖어든 날씨는 밤이어서 그런지 아직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얇은 긴 소매의 티셔츠에, 걸치고 나온 것이라고는 앞치마 한 장 뿐이었기에 찬 바람을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앞치마를 벗어 한 손에 쥐고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대여서 그런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쉬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으려 일부러 인적이 드문 벤치로 가서 앉았다. 퉁퉁 부은 손에서 이제는 진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화끈거리는 통증에, 괜히 서러워져 눈물이 비죽비죽 흘러 나왔다. 소리를 내어 울지도 못하고, 화상을 입지 않은 손으로 눈물을 서투르게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따뜻한 온기를 지닌 무언가가 어깨 위를 덮는다. 그리고, 내 옆에 누군가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 … 여기서 뭐 해. ”
“ … 또 너야? 나한테 왜 그래, 너. ”
“ … …. ”
“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
“ … 힘들게 하려는 거 아니야. 손 줘, 아까 데인 것 같던데. ”
“ … 네가 무슨 상관인데. ”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김태형이 데인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는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에 미간을 약하게 찌푸렸다. 벌겋게 부은 상처를 들여다 본 그가 표정을 굳히고는 나를 일으켜 곧장 개수대로 향했다. 놓으라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김태형은 막무가내로 내 손을 차가운 물로 닦아 내었다. 굳은 표정과는 다르게 닦아내는 손길은 부드럽기만 했다. 뿌리치려고 애를 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움직이면 상처가 더 덧난다며 가만히 있으라는 그의 나직한 말 한마디 뿐이었다. 빼내려고 할수록 더 심해지는 통증에 결국 그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내 앞의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제 사온 것인지, 화상 전용 연고와 붕대를 봉지에서 꺼낸 김태형이 내 손에 조심스레 연고를 발라주었다. 쓰라리는 느낌에 움찔거리자, 조용히 아프냐고 물어오는 그였다.
“ 아파? ”
“ … 조금. ”
“ 조금만 참아, 다 했으니까. ”
“ … 붕대는 내가 감으면 안 돼? ”
“ 안 돼. ”
단호한 그 대답에, 입을 꾹 다물고는 내 손에 붕대를 감는 그의 큰 손을 쳐다보았다. 단호한 손길과는 다르게 붕대를 감는 따뜻한 손길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와 내 사이가 그에 의해 일방적으로 끊긴 것뿐이었다. 망각하고 있었던 현실이 다시 뼈저리게 느껴진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나한테 이러는 거니. 목구멍을 넘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질문을 애써 다시 마음 깊은 곳으로 눌러내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은 빠르게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붕대가 풀어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 김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크고 쌍커풀이 없는 두 눈동자를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던지라,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눈을 마주했더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 보던 그가 입을 연다.
“ … 공백아. ”
“ …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
“ 나, 너 떠난 것도, 버린 것도 아니야. ”
“ … 뭐? ”
“ 말 그대로. ”
꽤나 진지한 표정을 한 그가 내게 나직하게 말하곤 벤치에서 일어났다. 데려다 주고 싶은데, 내가 지금 급하게 나온 거라서. 대본 리딩 때 보자. 손을 들어 한참을 머뭇거리다, 부드럽게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그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본 그가 내 옆을 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연고랑 붕대 가지고 가, 라며 입모양으로 말해온다. 그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삐딱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다시 앞을 본 그가 저만치 공원 밖으로 사라졌다. 이 상황이 꿈같이 느껴져 붕대가 깔끔하게 감긴 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김태형이 한 말의 의미는 뭘까.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을까. 그의 말을 곱씹으며 옆에 얌전히 놓인, 약과 새 붕대가 든 봉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뭔가 싶어 돌아본 벤치 위에는 김태형의 것으로 보이는 자켓이 있었더랬다. … 못 돌려줬네. 그의 겉옷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은 팔에 걸치고 공원을 벗어났다. 팔 위에 걸쳐진 겉옷에서 미약하게 그의 향기가 난다.
네가 한 말의 의미는 뭘까.
내가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까.
널, 이제는 용서해야 하는 걸까.
/
새벽 7시.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의 액정이 켜지며 알람이 울린다. 봄이어서 그런지, 요즘들어 해가 예전보다 빨리 뜨는 듯했다. 웅웅대며 진동을 울리는 알람을 끄고는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대본 리딩이 아침 9시에 잡히는 바람에 하연이를 어린이집에 못 데려다 주게 되었다. 대본 리딩이 끝난 뒤에는 주연 배우 및 감독과의 식사가 예정되어 있어 데리러 가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앞집 아주머니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미리 아주머니께 언질을 해놓았던 탓에, 곤히 자고 있던 하연이를 깨워 억지로 씻기곤 옷을 갈아입혔다. 연신 조그마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 하연이의 손을 꼭 붙들고 앞집으로 향했다. 앞집에는 하연이 또래의 친구가 살고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집 초인종을 누르고, 아주머니가 나오시기 전에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고는 말을 꺼내었다.
“ 하연아. ”
“ 웅. ”
“ 엄마 올 때까지, 아주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알겠지? ”
“ 아라써. 빤니 와야대? ”
“ 응. 친구랑 싸우지 말고. 엄마 갔다 올게. ”
우리 하연이 착하다.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때마침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신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하연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주머니의 손을 꾹 붙든 채로,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에 나도 웃어보이고는, 아주머니께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앞에 서 있었더랬다. 잘 있어야 할텐데. 괜한 걱정을 하며 준비를 하러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 말리지 않은 머리를 마저 말리고, 간단하게 흰 블라우스에 옅은 파스텔톤의 치마를 입고 소지품을 챙길 때였다.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는 김태형의 검정색 자켓이 눈에 들어온다. … 돌려줘야겠지. 잠깐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자켓을 팔에 걸치고 집을 나섰다. 화상을 입었던 손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바깥으로 발을 내딛자, 아파트 단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 공백씨, 일찍 왔네요. ”
“ 아, 정국씨. ”
“ 옷 잘 어울려요. 예쁘다. ”
“ … 아니에요. ”
예쁘다는 칭찬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정국씨의 칭찬에 그저 얼굴을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문 쪽에서 낮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어, 왔냐.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정국씨가 손을 들어 인사를 해보였다. 정국씨를 따라 고개를 돌린 그 곳에서는, 김태형이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삐딱한 눈빛을 하고선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인사를 해야 할까.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김태형은 이미 회의실 저 깊숙한 곳으로 가서 의자에 앉은 뒤였다. 인사를 무시당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붉어져 있던 얼굴이 더욱 발개졌다.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을 들어 부채질을 해댔다. 그 때, 정국씨가 내 손을 뚫어져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어온다.
“ 손, 다쳤어요? “
“ … 아, 저 아르바이트 할 때 화상을 좀 입어서. “
“ 아팠겠다. 지금은, 괜찮아요? “
정국씨가 걱정스러운 낯을 한 채 붕대가 감긴 내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내 말에 그가 다치지 말라며 붕대를 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싱긋 웃었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것이지만, 참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웃음에 나도 덩달아 옅게 웃고는, 무심결에 김태형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바로 그 때, 나와 그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물리고 싸늘한 눈빛이 나를 감싼다. 몇 초가 지나고, 굳은 표정을 한 채로 김태형이 먼저 눈을 피했다. 갑자기, 왜 …. 며칠 전과는 180도 달라진 그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나였다. 그의 싸늘한 눈은 내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당연했다. 늘 다정한 눈빛과, 말투를 한 채 나를 대하던 김태형이었기에. 봄을 닮은 그 다정함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희망고문을 못 멈추는 이유였다. 나를 싸늘한 태도로 대했더라면. 나는 너를 억지로라도 내 마음에서 지워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프던 간에. 하지만 다정했다가, 갑작스레 돌변한 네 태도는 날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엔 … 또 나 혼자 의미를 부여했던 건가. 씁쓸함이 입 안에 가득 퍼진다.
“ 늦어서 죄송해요, 차가 막히는 바람에. “
“ 괜찮아요. 세하씨는 태형씨 옆에 앉으시면 돼요. “
여주인공을 맡은 여배우가 10분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대본 리딩은 자연스레 9시 15분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평소에 시간 관리에 철저하다고 소문난 김태형이었기에, 지연된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곤 그에게로 힐끗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아까전의 그 싸늘한 표정을 지워낸 채,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여배우에게 제 옆자리의 의자를 빼주고 있었다. 여배우는 그에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 뭐지, 이게.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숨기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나와 멀리 떨어져 앉은 김태형을 쳐다보았다. 여배우에게 웃는 얼굴로 말을 끊임없이 건네는 김태형의 모습에 마음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 왔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김태형에, 매번 착각을 하고 희망고문을 당하는 것은 나였다. 다정히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니 머리가 아파와서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옆에서 정국씨가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다는 말을 해온다.
“ 어쩔 수 없었어. 나한테는 그게,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나라고 너 싫어서 떠난 거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떡해.
나 때문에 네가 상처받는 게 싫었어, 난. 알아? “
김태형의 낮지만 격앙된 목소리가 조용한 회의실 안에 크게 울렸다. 그 뒤, 몇 초간 침묵이 회의실 안을 감돌았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계속해서 대사를 이어간다. 그러니까, 제발…. 그가 마지막 대사를 치기 전, 숨을 잠깐 멈춘다.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을 참는 듯한 목소리. 그에 들여다보고 있던 대본에서 눈을 떼어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나를 보고 있었던 그와 두 눈이 마주친다. 나와 여전히 눈을 맞춘 채로, 그가 천천히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떼었다.
“… 내 손, 잡아줘.”
그의 마지막 대사에 여운이 진다. 흐느끼기 직전의 단계에 멈춘 그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내가 먼저 눈을 피했다. 그와 눈을 더 마주했다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눈에 힘을 주고는 눈물이 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왜 … 그가 나에게 하는 말 같은지. 참고 참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볼새라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내었다. 책상 아래 꽉 쥔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려온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따끔거린다. 옆에서 불현듯, 책상 밑으로 휴지가 내밀어진다. 파랗게 핏줄이 돋아난 손의 주인공은 안 봐도 정국씨였다. 그가 내민 휴지를 받아 볼에 묻은 눈물을 문질러내었다. 숙인 고개 위로, 누군가의 눈빛이 따끔거리며 느껴진다.
/
“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너무 잘해주셨어요. “
배우들의 모든 대사가 끝이 나고, 대본의 마지막 장을 넘긴 정국씨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함으로써 대본 리딩이 끝났다. 박수 소리가 회의실 안에 한동안 멈추질 않는다. 중간중간에 꽤나 많이 쉬어서 그런지, 어느새 시간은 여섯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연이는 앞집에 잘 있으려나. 짐을 챙기다 말고, 머릿속에 떠오른 하연이의 생각에 휴대폰 액정에 앞집 아주머니의 번호를 눌러내었다. 잠시 회의실을 빠져나와 회의실 앞의 벽에 기대어 섰다. 여보세요? 몇 초간 통화 수신음이 흐르고, 앞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 들려왔다. 하연 엄마? 하연이 잘 있어요, 우리 지원이랑도 잘 놀고. 걱정하지 말고 올 때 연락 줘요.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 너머로, 하연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잘 놀고 있나 보네, 라고 생각하고는 아주머니께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있다가 집에 올 때쯤에 전화를 하라는 그녀의 말에,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연출로 보이는 남자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끝낸 정국씨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다.
“ 하연이는요? “
“ 앞집 아주머니께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드렸어요. “
“ 아, 진짜요? 공백씨, 우리 지금 밥 먹으러 갈 건데. 짐 들고 와요. “
싱긋 웃어보인 그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고생했다는 둥의 인삿말을 건네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내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기에, 나 또한 짧게 목례를 해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화상을 입지 않은 손에 소지품이 든 핸드백을 들고, 한 팔에는 김태형의 자켓을 걸친 채로 회의실 밖을 향했다. 어느새 사람들이 다 간 것인지, 복도는 나와 정국씨를 비롯해 4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도 가죠. 내게로 눈짓을 해보인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주인공을 맡은 여배우, 그러니까 세하씨는 김태형의 옆에서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 그녀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세하씨의 옆에서 그녀와 발을 맞추며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하는 김태형이었다.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듯한 느낌에, 괜스레 또 기분이 울적해졌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그 둘 뒤에서 좀 떨어져서 걸으며, 둘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정국씨가 맨 뒤에서 따라오는 나를 보더니, 장난스레 제 옆으로 오라며 손짓을 해보인다. 그의 손짓에, 나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선 그의 옆에 다가가 섰다.
“ 안 추워요? 자켓은 왜 들고만 있어요. ”
“ 아, 이게 제 게 아니라서 …. ”
“ 그럼 내 거 입고 있어요. 저는 좀 더워서. ”
덥다며 너스레를 떨던 정국씨가, 제 겉옷을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주고는 눈을 찡긋거렸다. 집 갈 때 줘요. 알겠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때마침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람이 꽤나 있었던 탓에, 나와 김태형은 거의 붙어있다싶이 해서 엘리베이터에 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말도 안 걸고, 딱딱한 표정을 한 김태형과 같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체기가 올라온다. [ 1층입니다. ] 1층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엘리베이터에 타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도 그 틈에 휩쓸려 정신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이리저리 치이고만 있자 큰 손이 내 손목을 잡아 부드럽게 이끈다. 놀라서 얼굴을 쳐다보니, 김태형이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로 내 손목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이리 와. 나지막하게 말한 그가 인파 속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인파를 헤치고 나가자 마자 매정하게 손목을 놓는 그의 모습이 또다시 마음이 콕콕 아려온다.
“ 공백씨, 뭐 좋아해요? ”
“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해요. ”
“ 그럼 이거, 괜찮아요? ”
정국씨가 우리 셋을 데리고 온 곳은, 꽤나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방송국 근처의 한 레스토랑이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데다가, 무슨 음식이 있는지도 잘 몰랐기에 머뭇거리며 메뉴판을 뒤적였다. 그런 날 보더니 정국씨가 메뉴판을 가져가서, 여러 음식들을 추천해준다. 그가 괜찮냐고 한 음식에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내 건너편에 앉은 김태형을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이 먹을 음식을 정한 것인지, 심드렁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김태형이 제 옆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 세하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아까전의 무표정은 지워내고 웃음기를 띄운 김태형이 그녀에게 메뉴를 이것저것 추천해주는 것이 보였다. 아까 나한테는 … 그렇게 차갑게 대하더니.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다가, 정국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와인 시켜도 돼요? 내 물음에 놀랐는지, 가만히 있던 정국씨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 7시 반. 네 사람이 앉은 테이블 위로 한참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평소에 하는 것, 연예계의 일들, 그리고 드라마. 대화는 주로 공백을 제외한 세 명만이 이끌어 나갔다. 평소에 세하를 거들떠도 안 보던 태형은 오늘따라 그녀에게 자주 말을 붙이곤 했다. 그것을 보면서, 공백이는 그저 제 앞에 놓인 와인을 말없이 들이킬 뿐이었다. 술이 센 편은 아니었던 그녀였지만 맨정신으로는 태형이 세하를 다정히 대하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지금은 술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태형은 세하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제 건너편에 앉은 공백을 곁눈질을 할 뿐, 별달리 말을 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공백이의 흰 볼이 점점 핑크빛으로 물들어 간다. 30분이 지났을까, 그녀의 동그란 머리통이 힘없이 테이블로 떨궈진다. 접시에 머리를 박기 직전, 태형의 손이 가까스로 그녀의 머리 밑을 받쳤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의 촉감이 제 손에 오롯이 느껴진다. 미간을 약하게 찌푸린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 공백씨, 네가 데려다 주게? ”
“ 응. 나 먼저 간다.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
“ 가라. 공백씨 잘 데려다 주고. ”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공백이의 작은 몸뚱이를 안아 올렸다. 몸이 축 늘어져서 무거울 법도 한데, 태형은 힘든 기색 없이 근처에 주차해 두었던 제 차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보다 가벼워진 듯한 공백이의 무게에 태형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마른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 … 밥 좀 잘 먹고 다니지. 제 차 조수석에 공백을 앉힌 태형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가로등의 미약한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정한 손길로 정돈해준 태형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금 어중간한 공백이의 치마 길이에 태형이 뒷자석에 놓아 두었던, 공백이 들고온 겉옷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덮어주었다. 깨지도 않고 잘 자는 공백이의 모습에, 5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태형이 미약하게 웃음을 지었다.
“ 으음, 태형 … 태형아. ”
조수석에서 곤히 자고 있던 공백이 뒤척거리며 웅얼대었다. 작게 들려오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빨간불에 차를 멈춘 태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괴로운지,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또다시 제 이름을 불러내자 태형이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을 쥐었다. 찌푸린 미간을 펴주려 손을 놓고, 그녀의 이마로 손을 가져갈 때쯤이었다. 빵빵거리며 뒷차가 클락션을 울린다. 눈길을 돌린 신호등은 어느새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 …. 이마의 손길을 거둔 태형이 차를 출발시켰다. 옆에서 또다시 제 이름을 웅얼거리는 공백에 태형이 익숙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주었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켜려던 태형의 손이 일순 멈춘다. 라디오를 틀면, 곤히 잠든 공백이 깰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의 손이 라디오를 배회하다 다시 공백이의 손을 잡아내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린다. 어느새, 공백이의 집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아파트 앞의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댄 태형이 공백이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낼 때였다.
“ … 태형아. “
공백이 태형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그에 돌아본 태형의 동공이 크게 팽창된다.
공백이의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 가지, 마 …. “
울먹거리는 공백이의 목소리에, 태형이 다시 그녀의 손을 힘주어 꼭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볼에 묻은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내고 입을 연다.
“ 앞으로는 너 안 떠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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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공 백입니당 ?
푸른밤 엄청 오랜만이네요 허허
암호닉은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할게요.
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해요
투표 다들 요따빠띠 )(
제가 고삼이라 다음 편은 되도록이면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푸른 밤을 걷다는 제가 많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스토리 구상을 굉장히 오래 했었던 작품인 만큼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중에서 자주 모습 보이시는 분들께만 텍파 메일링 해드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