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DDY BEAR
Episode 07
"경수야, 오늘은 이거야?"
"응. 거기 있는 단어 공부해."
거실에 작은 상을 펴고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과제를 바쁘게 하고 있는 경수의 옆으로 곰인형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영어단어가 잔뜩 적혀있는 A4용지를 펄럭이며 백현이 묻자 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필통을 건넸다. 요즘 셋은 영어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경수가 함께 놀아주지 못할 때면 옆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A, B, C를 쓰는 등 꽤 오랫동안 꾸준하게 공부를 해오고 있다. 인간의 몸이 활동하기는 훨씬 편하지만 성인 남자 넷이 사용하기엔 턱 없이 작은 상의 크기를 고려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곰인형인 채로 펜을 쥐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경수는 엄마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D-O-C-T-O-R. 닥터, 의사선생님. 선생님? T-E-A-C-H-E-R, 티처. 다들 나름대로 배운 것을 써먹겠다는 의지인지 소소하게 영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눈다. 나는 티처가 좋아. 똑똑하잖아, 경수처럼. 종인이 경수를 쳐다보며 눈을 찡긋 거렸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틈만 나면 사랑고백이라니, 종인을 나무라려던 경수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찬열과 백현 옆에 홀로 있는 종인이 측은해지려했다. I-Love-You. 베이비, 달링! 허니! 난 이런 단어 가르쳐준 적 없는데, 찬열과 백현이 좋다고 서로의 공책에 낯간지러운 단어들을 써내려간다. 저런 단어를 어디서 배웠을까 하는 의혹이 들려던 찰나 제 정면에 있는 티비를 보고 경수가 짧게 감탄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정말로 열을 배우는구나.
"눌스."
"눌스가 아니라 널스야, 멍청한 찬열아."
크흠, 어눌한 발음을 백현이 잽싸게 지적하자 머쓱해진 찬열이 헛기침을 했다. 널스나 눌스나 알아듣기만 하면 됐지, 뭐. 좀 전의 실수를 만회하고자-백현의 앞에서 있어 보이려고-펜을 꼭 붙들고 제 공책에 정성 들여 알파벳을 하나하나 써내려간다. 종인은 일찌감치 경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자신의 성실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번에 경수가 알려줬던 영어단어를 구구절절 외우며 영어 별 거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이 퍽이나 우습다. 종인의 말에 진지하게 타이핑을 하다가 웃음보가 터진 경수가 한참을 엎드려서 웃다가 고개를 들고 옆을 바라봤다.
"다들 열심히 하네, 재미있어?"
"응. 영어 좋아!"
"이 정돈 기본이지."
이제는 신기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귀여울 뿐이다. 곰인형 셋이 나란히 앉아서 펜까지 들고 각자 개인 공책에 영어 단어를 쓰는 모습은 마치, 동화에서 나올 법한 유치원 풍경이다. 아예 턱까지 괴고 그 모습을 관람하던 경수에게 백현이 공책을 들고 쪼르르 달려왔다.
"프로게이머는 어떻게 써?"
"프로게이머? 그거 저번에 티비 보면서 알려준 것 같은데? 잘 생각해봐. 기억날거야."
치, 알았어. 경수가 쉽게 답을 알려주지 않자 백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찬열의 옆자리로 갔다. 경수가 항상 이렇게 정답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알려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저런 모습 때문이다. 한 번 더 물어보면 그 때 알려줘야지, 삐딱하지만 꼼꼼하게 한 자 한 자 공들여 쓴 흔적이 보이는 공책의 글자들을 보면서 살풋 웃을 때 즈음 백현이 찬열과 함께 신나서 달려왔다.
"이것 봐, 이거 맞지?"
"우리가 맞췄어, 프로게이머."
어, 잘했어. 기특하…응? 찬열이 눈 앞에 펼쳐준 공책을 보며 철자를 훑어 본 경수가 그대로 경직되었다. 공책에서 시선을 들어 둘을 바라보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제 칭찬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시선을 떨어뜨려 공책을 보니 그들의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프로그래머도 아니고, 프로'게이'머라니…, 심지어 요 근래 보았던 글씨 중에 가장 정갈해서 더 마음이 아파오는 경수였다.
[progaymer]
사실을 말해줘야할지, 독음은 틀리지 않았으니 맞았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할지 경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난 게이라는 단어도 안알려줬는데…,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때면 항상 이렇듯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답을 내놓고는 하는데, 지금이 딱 그 상황이다. 경수는 결국, 자라나는 영어 꿈나무들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선택했다.
"맞았어! 완벽해, 훌륭해. 대단하다, 너희…."
거짓말을 했다는-틀린 답을 가르쳐줬다는-죄책감도 잠시, 해맑게 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경수가 웃었다. 거실 가운데 놓여져 있는 상을 빙 돌아서 자리로 돌아가던 찬열이 노트북 전원 선에 걸려 넘어졌다. 한 바퀴 구르며 착지한 찬열이 괜찮다며 씩 웃었지만 정작 괜찮냐고 물어야 될 상대는 경수였다.
"헐…내 과제…내 레포트!!!! 박찬열 어쩔거야!!!!"
경수가 뒷목을 붙잡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장난해!! 거의 다 했는데 다 날아갔어!! 어쩔거야!!! 분개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날뛰는 경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백현이 경수의 다리에 매달렸다. 경수야, 화내지마. 진정해! 평소 같았으면 작게 한숨 쉬고 넘어갈 경수지만 두, 세 줄을 남기고 증발해버린 레포트가 떠오르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종인도 끙끙 대며 상에 올라가 서더니 경수의 가슴팍으로 뛰어올라 매달렸다. 혼자 남은 찬열도 냅다 경수의 한 쪽 다리에 매달려버렸다. 순식간에 곰인형으로 도배된 경수가 힘 없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경수야아-"
"몰라, 난 망했어…."
"힘내, 우리가, 우리가…음…너 다 완성할 때까지 안자고 기다릴게!"
힘 없이 축 늘어진 제 몸을 살짝씩 건드리는 손길이 밉기보다는, 금새 저 손길에 화가 풀어지며 미소가 지어지는 자신이 미워지는 경수였다. 일단 밥이나 먹자. 고개를 든 경수의 얼굴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종인이 안도했다.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는 찬열을 보곤 경수가 짧게 말했다. 미안하면 나 대신에 거실 좀 치워줘, 깨끗하게. 경수를 한 번 올려다본 백현이 찬열의 손을 붙잡고 어질러져 있는 공책, 펜, 프린트물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엌으로 들어선 경수가 부지런히 요리를 시작해 어느 덧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자 청소를 끝마친 찬열과 백현도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 문득 처음 이들과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
D.O.DDY BEAR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먹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경수가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로 가득한 봉지를 슥 밀어 종인에게 건네곤 자신도 식탁에 앉았다. 양푼에 대충 나물과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을 입 안에 꾸역꾸역 집어 넣으면서도 쉴 새 없이 두 눈을 굴리며 찬열과 백현을 스캔하기 바빴다.
"뭐야, 이걸 어떻게 먹냐?"
"곰이잖아, 못 먹어?"
"곰이 아니라 곰인형. 그리고 곰이라고 해도 누가 곰한테 개 사료를 주냐?"
고양이 사료도 있잖아, 엄청 까탈스럽네 진짜. 찬열의 말에 경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하자 백현이 말했다. 나 이거 먹을거야! 경수의 손에서 숟가락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양푼까지 손에서 뺏어간 백현이 아까 경수가 그랬 듯 입안 가득 비빔밥을 쑤셔넣고 맛있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내 거야, 먹지마! 양푼을 다시 뺏어오려는 경수의 손을 종인이 제지하고 대신에 경수의 입에 비빔밥 한 숟갈을 먹여줬다. 맛있게 먹어, 다정한 목소리에 누그러진 경수가 군말없이 비빔밥을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내 껀데 왜 니가 맛있게 먹으라 마라야.
애시당초에 비빔밥은 경수가 먹을 1인분 정도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경수는 대식가도 아니었다. 결론은 비빔밥 한 그릇을 넷이서 나눠 먹어 넷 다 배에 별로 남는 게 없다는 것. 고픈 배를 부여잡고 경수가 원망스런 눈빛을 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게 왜 이렇게 조금만 만드냐'고 대꾸한다. 참다 못한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어디 나가?"
"당연하지, 굶어 죽으라고?"
"나도 갈래, 나도!"
안돼, 절대 안돼. 단호하게 거절하는 경수의 반응에 셋 다 침울한 표정을 짓는다. 왜 안되는데? 짐 들어줄게. 꽤나 혹하는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경수는 끝내 거절했다. 경수가 혼자 산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 뻔히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 셋 데리고 돌아다닌다면 이상하게 볼게 뻔했다. 평소 친구랑 자주 다녔더라면 고민해 볼만도 하지만 늘 혼자, 홀로 조용히 생활하는 경수에겐 먼 이야기였다.
"그럼 이렇게 하자."
종인의 말에 경수가 고민하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
D.O.DDY BEAR
"내가 맛있는 거 시켜줄게, 그냥 집에 가자…."
"뭐? 말이 되는 소릴 해. 마트가 코 앞인데!"
"그냥 들어가. 우리가 창피해? 어?"
너네말고 내 꼴이 창피해…. 경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왜 그 말에 넘어갔지? 굳이 따지자면 종인의 말에 넘어갔다기보다는 애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경수는 그런 눈빛에 약했다. 그래서 축 처진 눈을 하고 제게 부탁을 해오는 친구들에게 쓴 말 한 마디 내뱉어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늘 결말은 스스로에 대한 후회, 내가 왜 저 부탁을 들어준걸까 하는 끝 없는 자책.
졸지에 경수는 세 아기의 아빠가 되버렸다. 경수의 허리춤에 둘러진 아기띠에 매달린 세 아가들은 다름 아닌 곰인형 셋. 종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에 굴러다니는 담요를 몇 개씩 챙겨왔다. 그리곤 순식간에 곰인형으로 변하더니 몸에 칭칭 감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갓난 아기를 안은 것만 같았다. 인형이라 아기처럼 무겁진 않았지만 완벽하게 속아넘어갈 듯한 겉모습에 경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여자친구는 커녕 조카도 아직 없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경수를 재촉하는 목소리에 결국 마트로 들어섰다. 누구 만나면, 조카들이라고 뻥쳐야겠지.
*
D.O.DDY BEAR
"아기한테 라면은 안좋은데-…."
"네, 네? 하하…아기들 말고 제가 먹을 거에요."
"나이도 젊은 총각이 건강관리 해야지. 아기들도 있는데 이렇게 몸에 안좋은 것만 먹을거야, 응?"
꼭, 꼭 이러는 사람들 있다. 내가 라면을 먹든 김밥을 먹든 제발 신경 좀 안써주면 좋으련만. 오지랖은 한국 사람들의 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며 눈쌀 찌푸려지는 오지랖도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던 경수였다. 하지만 오늘은 제게 잔소리 하는 마트 아줌마가 너무 밉다. 안그래도 아기를 셋이나 매단 비주얼 덕택에 눈길을 끄는데 안그래도 목청 좋은 아주머니 덕에 경수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5대 영양소가 어쩌니 저쩌니 제게 충고하는 아주머니의 말을 끝마치기 위해 경수가 바구니에 담았던 라면을 도로 꺼내 진열대에 놓았다.
"네, 아주머니 말씀이 옳아요. 건강 관리 해야죠. 감사합니…"
"뭐야. 라면 먹을래, 라면."
갑작스러운 찬열의 목소리에 경수가 경악했다. 백현이라면 모를까, 저 낮은 목소리로…! 경수가 놀라서 아줌마를 바라보자 아줌마 또한 놀란 눈치였다. 티나지 않게 찬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죄송해요,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배에 힘을 준 채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민망한 기색을 보이며 마트 아줌마가 경수의 곁을 떠났다.
"죽을래, 들킬 뻔 했잖아."
"미안…근데 라면 살거지?"
넌 입 절대 열지마, 입 열면 라면이고 뭐고 다 굶길거니까. 경수의 말에 백현이 놀라 그대로 찬열을 발로 걷어찼다.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는 찬열을 보며 콧방구를 뀐 경수가 재빨리 마트를 순회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담았다. 라면, 햇반, 통조림, 채소, 과일….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정신을 차리니 계산대였다. 안도감에 경수가 몸에 긴장을 풀고 웃었다. 장만 봤는데 마라톤한 기분이네.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 밖을 나서려는 찰나에 침묵을 지키던 종인이 경수의 등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경수야, 나 화장실."
"화장실? 급해?"
응, 급할지도? 씩 웃는 종인의 속도 모른 채 경수가 마트를 두리번 거렸다. 오른쪽에 있어. 경수가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아무도 없이 텅 빈 것을 확인한 종인이 경수의 품에서 꿈틀대며 빠져나왔다. 야, 너 뭐해! 빨리 들어와.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경수가 다시 종인을 등에 업으려고 했을 땐 이미 종인이 사람으로 변한 후였다. 집에서 본 차림 그대로, 종인은 곰인형에서 건장한 남자가 되었다.
"잘생겼지. 곰인형이 사람으로 변하면 이렇게 될 지 누가 알겠어."
"그렇네…근데 아직도 좀 어색해, 이렇게 변하는 거."
종인을 멀뚱멀뚱 올려다보며 당황해하기도 잠시 경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경수의 미소를 보자 자신 또한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종인이었다.
"야, 잘됐다! 이거 받아!"
경수가 웃으며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장바구니였다.
꾸준히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정말 감사드려요 일단 이번편까지는 암호닉 신청 받구요..음 자세한 건 나중에 공지로 올릴게요! 신청하실 분들 해주세요^0^초록글 감사합니다 +암호닉 신청 계속 받아요
초록글 첫 페이지라니 제가 감히 이런 자리에 올라도 되는건지..ㅜ.ㅜ..
다른 작가님들 뵙기 부끄러워지네요.. 이렇게 유치하기 그지 없는 글을..ㅎㅎ;
그래도 항상 독자님들 생각하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글 쓰고 있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남겨주시는 분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죠?
이제 점점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게 될거에요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려요 항상 감사합니다 정말로! 하트♡
암호닉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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