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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30 >
‘나와.’
석진이었다. 눈앞에 여주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나가. 정국이 저의 손을 마주잡고 품 안에서 얌전히 자고 있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여주가 좀 더 깊이 잠들면.’
초인종을 눌러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여주가 자고 있을 것을 생각해 일부러 집 바로 앞에서 생각으로 정국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석진이었다. 이 정도까지 배려했으면 나와야하는 것 아닌가. 밖으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정국에 결국 석진이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금기어를 꺼냈다.
‘폭풍전야.’
그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국이 여주에게 조심스레 입을 맞춘 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네 글자가 주는 압박감은 강력했다. 정국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가기 전 정국은 옅은 미소를 띠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편히 잠든 여주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소중한 미소였다. 저 미소를 잃을 수는 없다.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따라와.’
발소리를 죽인 채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석진을 따라갔다. 밖은 굵은 빗줄기가 땅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일정하지 않은 방향으로 불어대는 강한 바람은 기분을 더 언짢게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폭풍우의 의미는 반갑지 않았다. 인간들이 흔히 태풍이라고 부르는 재해가 닥치는 날은 인간 세상에 악마가 내려오는 날이었다. 정국이 올 때도 비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던 것처럼 오늘도 그러했다.
‘어디로 가는데.’
‘와보면 알아.’
결국 말없이 석진을 따라가는 정국이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우산에 꽤나 힘을 주어야했다. 비에 젖지 않는 두 사람에게 우산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둘은 검은색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다. 새벽인데다 태풍이 오는 날씨라 거기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석진과 정국의 발소리만이 거리를 유일하게 채웠다. 그들의 앞에 우산을 쓴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뭐야.’
‘도와달라고 했어. 필요하잖아.’
정국이 눈앞의 윤기를 향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국이 달갑지 않은 건 윤기도 마찬가지였다. 누군 좋은 줄 아나. 윤기가 담배를 꺼내들었다. 우산을 쓴 채로 불을 붙이려니 여간 불편했다.
“냄새 섞이잖아.”
석진이 윤기의 하얀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바닥으로 튕겼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보며 윤기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윤기가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가 악마 놈들의 냄새를 덮기 위해서였다. 유쾌하지 않은 그들의 냄새보다는 몸에 해롭긴 해도 담배 냄새가 백배는 나았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강한 향을 지닌 석진과 정국과 함께 있으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둘이 내뿜는 향은 악취는 아니었지만 계속 맡고 싶을 만큼 좋은 향기도 아니었다.
오늘같이 태풍이 찾아오면 악마새끼가 더 늘어난다는 징조인 것은 윤기도 알고 있었다. 정국을 마주한 이후부터 기분이 바닥을 쳤는데 악마새끼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생각에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었던 기분은 한없이 추락했다. 태풍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잠이나 자려 했는데 전화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 핸드폰을 꺼버리고 잠을 청하려하자 이번에는 초인종이 미친 듯이 울렸다. 현관문을 두드려대는 소리와 초인종의 콜라보는 윤기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그런 상식 밖의 행동을 한 장본인은 석진이었다. 윤기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충 말했다.
“왜.”
“나 좀 도와줘.”
자세한 설명도 없이 도와달라는 석진의 부탁을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이 날씨에 밖에 나가면 젖기 밖에 더 하겠어.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다른 데 알아봐.”
시니컬하게 말을 내뱉은 윤기가 문을 닫으려할 때였다.
“거기 경찰서죠?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신고 좀 하려고요.”
“아 씨.”
윤기가 인상을 팍 쓰며 석진의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저 미친 천사새끼가 진짜 전화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찰의 음성이 들렸다.
“아닙니다. 오해가 있어서.”
윤기가 얼굴을 구긴 채로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도청장치 설치한 걸 이런 식으로 써 먹을 줄이야. 석진의 뒤를 캔 건 오래 전부터였지만 직접적으로 석진이 경찰에 신고를 한 적은 처음이었다. 윤기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뭔데.”
“오늘 오는 악마놈 어디로 오는지 좀 찾아줘.”
“귀찮게.”
“벌금 때려줘?”
“시발.”
간만에 받은 오프인데 오늘도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겠네. 윤기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집을 나섰다. 나오긴 해도 무턱대고 악마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석진이나 정국처럼 독한 냄새를 풍기는 놈들이 아닌 보통의 놈들이라면 눈으로 보일 정도의 거리는 되어야 맡을 수 있었다.
“아는 거 없어? 무작정 찾으라면 찾아져?”
“너 아는 데 있을 거 아냐. 악마 놈들 자주 오는 장소.”
알아서 잘 찾아보라는 말을 남긴 석진은 정국을 데리러 나섰다. 점점 멀어지는 석진의 뒤통수에 욕을 몇 번 지껄인 윤기가 터벅터벅 걸었다. 석진의 말대로 확률이 높은 장소는 알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기분 나쁜 공기가 감도는 으슥한 건물의 옥상.
세 사람은 옥상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견디며 서있었다. 윤기의 감이 맞는다면 오늘 오는 악마 놈도 여간 독한 놈이 아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처음 맡는 향이 강하게 풍겼다.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고 장소를 찾았으니 더 이상 귀찮아지지 않아서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찝찝했다. 잠을 자려던 차림 그대로 브랜드 로고가 작게 박힌 흰색 반팔 티에 회색 반바지를 입고 나온 터라 여름이었지만 태풍이 몰아치는 날씨에선 추위를 느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는 세 사람은 조금씩 지쳐갔다. 윤기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졸았다. 정국과 석진도 궂은 날씨와 오랜 기다림으로 결국 인간인 척 들고 있던 우산을 내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언제까지 기다려.’
‘낸들 아냐.’
둘의 소리 없는 대화는 별 다른 성과도 없을 뿐더러 오래가지 못했다. 정국이 입 안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렸다. 짜증의 표시였다. 석진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더럽게도 어두운 하늘은 몇 시간 째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졸고 있던 윤기가 자신의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에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들이쉰 숨에서 비릿한 비냄새가 훅 들어왔다. 윤기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숨을 들이셨다. 또 한 번. 코를 채우는 냄새는 비냄새 뿐이었다. 윤기가 잠에서 깨어 잠긴 목소리로 작게 욕을 읊조렸다. 들려오는 욕설에 정국과 석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냄새가 사라졌어.”
“뭐?”
“독한 놈이었는데 이제 냄새가 안 난다고.”
아직까지도 거세게 부는 바람 소리와 우산에 부딪히는 굵은 빗방울 소리,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져 도시의 탁한 공기에 섞여든 비냄새만이 어두운 낯빛으로 동시에 침묵한 세 사람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
바람에 의해 창문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창문이 내는 소리는 작았지만 계속해서 나는 소리는 상당히 거슬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밖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집 안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옆을 보니 정국은 또 어딜 간 모양인지 보이질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아까 그가 있었던 침대 옆을 툭툭 건드렸다.
창문 앞에 쳐진 커튼 사이로 이른 새벽의 푸른 어스름이 존재를 드러냈다. 아주 해가 뜬 것도 아니지만 해가 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빛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직은 어두운 것에 가까웠다. 창문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좀 전보다 크게 들렸다. 문을 더 세게 잠그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창문에 손을 뻗으려는 그 순간 내 앞을 막아선 어떤 존재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앞의 낯선 존재에게서 기시감을 느끼는 사이 그것은 순식간에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워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은 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인사했다.
“하이.”
디데이가 팍팍 줄어드는 건 기분 탓입니다... 하핫(변명1)
갈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느끼는 여주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변명2)
초반 전개를 빨리할 걸 그랬어여ㅠㅠ(이실직고)
암호닉은 곧 답댓 달겠습니다!
함께해주시는 독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