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석식 시간에 서점에 갈 거라는 내 말에 윤기는 별말 없이 졸졸 따라와 줬다. 그냥 두면 길 잃고 학교로 못 돌아올 것 같다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결과 윤기는 김미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냥 '전정국에 미친 같은 반 친구' 정도의 인식이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김미주는 친구가 없다. 복도를 거닐다 보면 먼저 아는 척하는 애들이 있긴 한데 그냥 안면만 튼 느낌? 제대로 대화를 나눴던 애는 윤기를 빼면 두세 명이 다였다. 그마저도 본인 말만 늘어놓다가 내가 화제에 따라가지 못하자 휙 가버리더라. 분명 악녀인데, 아주 동네북이 따로 없다.
"이건 별로야?"
"답지를 보니까 설명이 부실해."
"그럼 저건?"
"문제 수준이 중구난방이야."
윤기는 내 설명을 듣더니 나를 따라 몇 권을 집어 들고 뒤적거렸다. 서점까지 따라와 준 게 나름대로 고마워서 나도 윤기가 문제집을 고르는 데 도움을 줬다.
"꼭 유명하고 인기 있는 걸 고를 필요는 없어. 일단 나한테 맞는 게 중요하니까. 보통 문제부분을 펼쳤을 때 적어도 40% 이상은 척 보고 풀이과정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해. 그래도 우린 아직 1학년이니까 좀 더 개념 위주의 문제집도 괜찮고."
수험생활 간의 팁을 방출하며 괜찮았던 문제집 몇 권을 추려주니 제법 열심히 본다.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성실하다니까. 차근차근 책들을 훑어 보던 윤기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너 되게 잘 안다? 문제집도 하나 없으면서."
"...인강...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얼마 전에 공부한다고 인강을 새로 끊었거든… 하하. 시원치 않은 대답에 윤기가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어깨를 으쓱인다.
"네가 그렇다면 뭐. 됐어."
기시감에 윤기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려고 했지만, 윤기는 어느새 문제집 몇 권을 챙겨 들고 계산대로 가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이라니. 묘한 뉘앙스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김미주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민윤기도 이상하게 느낄 정도면 내가 너무 내 맘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원래 김미주가 했던 대로 하기는 싫은 걸.
내가 굳이 왜. 전정국과 여주인공을 이어주기 위해서, 의심을 안 받기 위해서, 내가 막장 인생을 살아야 해? 난 걔네한테 관심도 없고, 둘이 사귈 인연이면 사귀겠지. 그리고 달라져서 의심받더라도 이제라도 정신 차렸다는 걸 보여주면 주위에서도 나쁘게 여길 것 같진 않았다.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대충 갈무리하고 윤기를 따라 계산대로 향했다. 조명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5
기껏 펜을 사 왔지만 학교에 남준이 없었다. 학원에 다녀서 야자를 하지 않고 저녁 먹고 바로 돌아 간다고 한다. 나름 비싼 걸로 사 왔는데... 하는 수 없이 다음날이 되서야 남준이에게 새 펜을 건네 줄 수 있었다.
"굳이 새 걸 사줄 필요까진 없는데."
당당하게 볼펜을 내밀자 남준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거절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여기 친구에게 주는 첫 선물이니까. 남준이는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난 남준이를 내 친구라고 생각했다.
"나 손 떨어질 것 같아."
좀처럼 받으려고 하지 않기에 우는소리를 하며 너스레를 놓자 그제서야 받아 든다. 그래도 여전히 멋쩍은지건네받으면서도 머뭇거렸다.
"부담스러워?"
"부담은 아닌데... 볼펜 하루 빌려준 거로는 과분한 것 같아서."
그런가? 내가 보기엔 절대 과분하지 않은데. 그래도 괜히 마음의 짐을 느끼게 하기는 싫었다.
"음... 그럼 이건 어때. 보답 겸 과외비."
"과외비?"
"모르는 문제 물어 보면 알려줄 수 있어? 너 안 귀찮게 정말 이해 안되는 문제만 물어 볼게."
사실 언젠가 슬쩍 물어보려고 했던 거였다. 어제 수학 시간에 살짝 봤는데, 나는 얘가 무슨 천잰 줄 알았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 푸는 건지, 몇 자 적지도 않더니 금방 답을 도출해냈다. 게다가 답도 다 맞았어. 뭐, 1학년 문제집이니 쉬웠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심화 문제들 중에서도 기출에서 나왔던 조금 난이도 있는 문제였다. 고등학교 수학을 3년 배운 나로서는 1학년인 남준이에게 배운다는 게 조금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지금 1학년인데 이 정도면 나중에는 아주 날아다닐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난 원래 문과였지만 이제 이과로 옮길 예정이었다. '김여주'였을 때 대학 원서 접수하려고 전공들을 조사해봤는데, 문과 취업률...
문과 수학은 나름 풀만 했지만, 이과 수학은 차원이 다르다.
"귀찮게 해도 돼. 난 좋아."
"진짜?"
"꼭 볼펜 때문은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물어봐."
아. 근데 남준이가 이과 안가면 어떡하지? 남준이 같은 인재는 이과에 가서 나라의 발전에 힘을 보태줘야 하는데. 그래도 남준이라면 문과가도 되게 잘할 것 같긴 하다. 혼자서 끙끙거리면서 (남준의) 진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남준이 나를 불렀다.
“미주야.”
“어?”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
다정하게 웃는 남준을 보니 지금까지 하던 걱정들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래… 남준이라면 어딜 가든 잘할 거야.
6
김여주였을 때, 아침을 못 먹고 다녔던 터라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는 게 필수 코스였다. 아마 매점에 등급 제도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VVIP였을 거다. 거의 안방 드나들 듯이 다녔지. 추억이다, 추억. 고작 몇 달 전인 데도 괜히 아련하게 느껴진다. 여기 매점도 비슷하려나. 저번에 펜 사러 갔을 때 얼핏 보니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매점이랑 파는 건 비슷비슷해 보이던데.
“한번 가볼까.”
옥수수 크림빵이랑 초코 우유는 당연히 팔겠지? 옥수수 크림빵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서 먹고 싶다. 녹은 크림이 빵에 살짝 배어들어 촉촉하고 따뜻할 때 한입 크게 베어 먹은 다음에 목 막힐 때까지 우걱우걱 먹다가 초코 우유로 막힌 목구멍 개통하고 싶다.
안그래도 항상 붐비던 매점은 오늘 급식이 코다리 강정이었던 바람에 더욱 바글거렸다. 크림빵은 다 나가버렸고 옥수수 크림빵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아주머니, 옥수수 크림빵이요!"
낑낑거리며 인파를 뚫고 맨 앞에 다다르자마자 급히 외쳤다. 아득바득 버티고 있는 나를 본 아주머니가 알았다며 옥수수 크림빵에 손을 뻗으시는데,
“계산이요.”
웬 분홍 후드 티가 홱 빵을 낚아채더니 돈을 내밀었다. 아니, 저거 내 건데…! 후드티남에게 가까이 가 빵을 잡은 손목을 잡았다. 동작 그만.
“저기요.”
“저기 말고 여기 있는 데요.”
같잖은 말장난에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니 후드티가 넉살 좋게 웃는다. 농담- 발랄할 말투에도 무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 친구가 농담을 모르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젓는 모습이 연극 장면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왜 저렇게 어색하담.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생겨서는 말투나 행동은 완전 아저씨였다. 뭐 그건 됐고,
“이 빵,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요?”
“근데 내가 먼저 잡았잖아요?”
“말은 내가 먼저 했잖아요.”
“손은 내가 더 빨랐는데.”
"그쪽 손 보다 내 입이 빨랐잖아요."
"그럼 내가 먼저 봤으니 그쪽 입보다 제 눈이 빠른거네요?"
후드티는 말 한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받아쳤다. 탁구처럼 오가는 설전에 아주머니가 재촉을 한다. 학생들 그래서 누가 살거야?
"저요."
후드티가 잽싸게 돈을 건네자 돈을 확인한 아주머니는 매정히 다른 학생 쪽으로 가버리셨다. 분명 내가 먼저 말했는데… 황망하게 아주머니 쪽을 보고 있으니 후드 티가 혀를 찬다.
“옥수수 크림빵 친구. 인생이 이렇게 쉽지 않아요. 순발력이 없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란 말이야.”
머래… 진짜 ㅡㅡ
“좋은 교훈도 줬으니 이건 내 거로 할게. 그럼 민첩한 하루 보내도록.”
약 3초간 빵긋 웃으며 손인사를 한 분홍 후드 티는 홱 돌아서 유유히 학생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뻔뻔함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실험실은 윤기의 전담 마크 덕에 헤매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책을 내려 두고 딱딱한 나무의자를 빼 앉으면서 윤기에 아까 본 매점 또라이 이야기를 해줬다.
“아까 매점에서 또라이 봤어.”
“또라이?”
“내 옥수수 크림빵 쌔벼가 놓고 민첩한 하루 보내라는 둥 개소리를 하는 거 있지? 소시지 같았던 분홍 후드 티가 아직도 눈에 선해. 미친놈.”
“…혹시 그 사람…”
골똘히 생각하던 윤기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가로막혔다. 안녕, 애들아. 안녕하세요- 바구니들을 한가득 들고 오신 과학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신다. 곧바로 수업을 시작하시자 윤기가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말해 줄게.
“오늘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실험을 해볼 거야. 실험 설명하기 전에 일단 실험 짝부터 정하고 시작할게. 2인 1조로 진행할 거고, 조는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정할테니 불평하지 말도록.”
선생님이 바구니 하나를 들어 보이셨다. 안에는 미리 준비하신 건지 반듯반듯하게 접은 번호표들이 한가득하였다.
"차례대로 나와서 뽑아가."
번호 순서대로 애들이 나와 하나씩 집어 들었다. 제 짝을 찾는 소리로 교실이 웅성거렸다. 제 번호를 확인한 윤기가 내게 걸어온다.
“너 몇 번이야?”
“나 7번.”
윤기 종이는 10이라고 적혀 있었다. 7번은 누구려나. 주위 애들한테 묻고 있으니 뒤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김미주도 7번이래.”
전정국 존나 불쌍하다. 전정국의 친구가 낄낄거리며 전정국의 어깨를 툭 친다. …전정국이 7번인가 보구나. 전정국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실험 짝이 전정국인 걸 알았으니 더 묻고 다닐 필요가 없어므로 자리에 앉아 시선을 앞으로 했다. 여전히 뒤에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 한번 딱 감고 같이 해줘. 봉사활동이라 생각하고.”
"봉사활동도 봉사활동 나름이지."
김미주 동네북 맞네, 맞아. 처음엔 철없고 무례한 말들이 마냥 한심했다가, 나중엔 이런 취급을 받으며 전정국을 꾸역꾸역 좋아한 김미주가 불쌍했다. 전정국한테 아무 감정 없는 내가 봐도 상처인데, 당사자인 김미주도 어지간히 힘들었겠지. 짝사랑을 놓지 못했던 김미주가 불쌍한 동시에 이해가 안갔다.
뭐, 이제 남의 이야기도 아니지. 내가 곧 김미주니까. 반에 다 들리게 전정국을 놀리(는 척하며 나를 비꼬)던 탓에 옆에 있던 윤기까지 덩달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이제 맘 없다며. 그냥 신경 쓰지 마.”
“응. 신경 안 쓰여.”
나보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해놓고선 윤기는 자꾸만 내 눈치를 봤다.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쟤네 재수 없어서 짜증 나는 것만 빼면.
“…”
예상했던 대로 전정국은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단순히 용액을 붓는 일만 맡겼는데도 전정국은 성의 없이 양 확인도 안하고 대충 부어버리거나 툭툭 내던졌다. 덜그럭거리며 유리 부딪히는 소리에 덩달아 나도 예민해졌다. 더럽게 성질 돋구네, 진짜.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전정국을 불렀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해서 낼 테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뭐?”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나도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붙잡아가면서 하기 싫어.”
그리고 어차피 전정국 없어도 별 차이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넣어버려서 결과도 제대로 안 나올 게 뻔했으니까.
전정국이 인상을 찌푸렸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허공을 배회하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탁, 소리가 나게 책상 위에 패트리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래. 너 혼자 잘 해봐.”
어 너 얄미워서라도 존나 잘해버릴 거야. 제 보고서를 내게 떠넘긴 전정국은 깔보듯이 내려 보고선 미련 없이 자기 친구네 조로 가버렸다. 저 싸가지… 김미주가 전정국 좋아한 건 분명 자기와 같은 싸가지 없음에 끌려서 가 아닐까.
아무래도 내 두번째 학교생활은 순탄치가 않을 것 같았다. 소설 속이라 그런가? 왜 은근히 우여곡절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 애초에 디폴트값도 버거워 죽겠는데 말이야. 아까 실험실에서 있었던 기 싸움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한숨 쉬면 복 나간다."
책상에 눈을 고정한 윤기가 내 한숨에 짧게 응했다. 남준의 자리가 비었다는 걸 안 민윤기는 곧바로 앞자리로 옮겨왔다가, 이젠 내 옆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아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다. 무언가를 적을 때마다 민트색 머리카락들이 살짝살짝 흔들리는데, 와. 진짜 공부랑 안 어울린다. 역시 얘가 선도부장인 게 제일 신기해.
"...뭘 봐."
아예 대놓고 구경을 하자, 윤기가 눈을 흘기며 째려본다.
요즘 친해지면서 민윤기에 대해 알게 된 점들 몇 가지.
1. 친해지면 말을 편하게 한다.(다소 거칠어진다)
2.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사실 부끄럽거나 민망해서다.
봐봐. 지금도 투덜거리는 말투랑 다르게 귀가 붉잖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라니까. 그래도 내가 얘보다 2-3살은 많으니까 너그럽게 넘어가 줘야지.
우쭈쭈도 좀 해줄까. 노트 귀퉁이를 찢어서 대충 몇 글자 적어 내려갔다.
[생각보다 잘 푼다?]
어색하게 쪽지를 집어 든 민윤기가 잠시 고민하더니 그 옆에 답장을 썼다.
[다른 과목은 토 나오는데, 수학은 토까지는 아니고 헛구역질 정도거든]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입을 틀어막아가며 참았다. 신경 꺼. 정도의 답을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구구절절한 답장도, 헛구역질이라는 단어도 웃겼다. 사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그럴 것 같은데, 윤기라서 웃겼다. 한참을 끅끅거리자 창피한지 윤기가 어깨를 툭, 부딪혀 왔다. 짜식. 귀엽긴. 겨우 진정한 뒤에야 너무 산만했나 주위를 둘러보는데,
"..."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뭐지?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시끄러워서? 아니. 잠깐만. 근데 쟤는 왜 야자를 하는데? 인소 남주인공이 야자 하는 경우는 들어 보지를 못했다.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도 한 번 얽힌 시선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내가 당황한 사이에 결국 전정국이 먼저 고개를 돌렸지만, 기묘한 느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7
"윤기 너 삐졌어?"
"내가 왜 삐져."
누가 봐도 삐졌다. 스카이 다이빙하면서 봐도 삐졌어. 케이티엑스 타고 가면서 봐도 민윤기 넌 삐졌다. 인정하면 쪼잔해 보이니까 괜히 부정하기는.
남준이가 수학 공부를 도와주기로 한 뒤, 바로 다음 쉬는 시간에 모의고사 문제를 하나 물어봤다. 풀이를 모르는 건 아닌데, 좀 더 쉽게 푸는 법이 있을 듯해서 다른 방식이 있나 확인용으로. 내 풀이를 본 남준이가 턱을 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길래, 풀이가 틀렸나 고민했지만 분명 틀린 건 아니었다. 아니면 난이도가 좀 있었나.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다는 걸 들킬까 봐 일부러 적당한 거로 고른 건데.
"이 문제는 그래프로 푸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래?"
"음. 그니까, 여기서 질문이..."
다행히 그냥 잠시 고민한 거였는지, 별말 없이 넘어갔다. 연필을 집어 든 남준이 질문 속에서 어떻게 단서를 찾아 풀이 방향을 정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만약 내가 유형을 익혀 관성으로 푸는 타입이면, 남준이는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를 찾아 푸는 타입이었다. 아무리 꼬아가며 응용 문제를 내놓아도,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 지를 알고 있으니 수학을 잘할 수밖에 없지.
"어... 그러면 여기서 변곡점이 생기는 거네."
"응. 그렇지."
보기 편하라고 문제지를 내 쪽으로 돌려놓고 설명하는데, 신기하게 글씨도 거꾸로 잘 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데, 이쯤 되면 얼마나 큰 결점이 있을지 무서운걸...? 그렇게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불쑥 민트색 머리가 튀어나왔다. 밖에서 운동이라도 하다 왔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뭐해."
"어... 잠깐만."
힐끔 보니 딱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진 않길래, 대충 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설명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앞에서 같이 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건 남준이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조금 오래 세워두긴 했다. 근데 다 풀고 나서 민윤기가 토라져서 뚱해 있을 줄은 몰랐지.
"삐진 거 아니라고?"
"응."
"그래. 그럼 말고."
"...삐진 게 아니라,"
괜히 골려주고 싶어져 눈치 없이 수긍하는 척하자 윤기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그냥 좀... 그랬다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남준이 작게 웃으니, 곧바로 윤기가 불퉁하게 쳐다봤다.
"뭘 쪼개."
"미안. 비웃는 건 아니었어. 둘이 사이 좋아 보이길래."
시비 거는 말투에 발끈할 만도 한데, 남준은 예의 그 친절함으로 노련하게 답했다. 펜을 돌리던 남준이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우리 아예 스터디 모임을 하나 만들까? 윤기도 같이해서."
예상치 못한 남준의 제안에, 그렇게 이상한 조합의 스터디 모임이 결성되었다.
8
교무실로 오라는 담임의 호출을 듣고 깜짝 놀랐었다. 얼마 전에 본 쪽지 시험 때문인가? 성적이 너무 오르면 의심받을 것 같아서 적당히 틀리고 적당히 맞춘 건데. 설마 그것도 너무 많이 맞았나. 속으로 걱정이란 걱정은 다하면서 갔더니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다. 그냥 수업 태도가 좋아졌다고 칭찬하려고 부른 거였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좋은 분인 것 같았다. 내가 개과천선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온갖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무거워..."
그리고 이렇게 교사용 문제집까지 잔뜩 챙겨 주셨다. 조금 버거울 정도로 많이.
한참을 끙끙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에서 전정국이 내려오는 게 얼핏 보였다. 그 길로 바로 뒤돌아서 황급히 내려갔다. 그 알 수 없던 전정국의 시선을 본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전정국을 피해 다녔다. 나는 전정국이 불편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안해해야 하는 것도, 또 전정국이 나를 보는 그 이상한 시선도.
다시 한 번 그 눈빛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답답해져서 걸음이 빨라졌다. 바로 앞에 턱이 있는 것도 못 볼 정도로.
"조심."
넘어지려는 내 몸을 잡아준 건 윤기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날 일으켜 세우면서 윤기가 자연스럽게 책들을 가져갔다.
"너 뒤통수 뚫리겠다."
"어?"
민윤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윤기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뒤쪽을 향해 있었다. 아... 전정국 말이구나. 시선은 느껴졌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지금 뒤돌아봤다가 전정국과 마주칠까 봐. 정적이 세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가자."
한참 뒤에 윤기가 나를 보며 말했고, 그제야 뒤돌아본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