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탭댄스를
w. 문달
36
아침부터 잘 떠지지도 않는, 눈곱까지 낀 추레한 몰골을 보고도 치타폰은 잘도 귀엽다는 소리가 나왔다. 한 단락을 통째로 생략하고 전개되는 흐름에 나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아침이라 진해진 쌍꺼풀로 내 앞에 엎드려서는 턱에 양손을 받치고 좌우로 까딱거리며 애교를 부리는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못 말리는 사람이다 정말.
“여기에 다른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심심해 그런가 본데 적당히 해요.”
“노오, 그런거 아닌데.”
“정말 저돌적, 아니에요.”
마음의 소리가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치타폰은 못 들은 건지 뭔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기만 했다.
37
과일을 따온다던 치타폰은 그새를 못 참고 오는 길에 까 먹으며 왔나보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서는 얼굴 근육을 격하게 쓰고 있었다.
“우리 사귑시다.”
삼키자마자 급하게 입 벌려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또 그 소리예요? 됐어요.”
거짓말도 자꾸 하면 언젠가 꺼내야 할 진실은 가볍게 묵살 돼 버리는 것처럼.
나는 질색하며 그를 쳐다보지 않고 칼로 나무껍질을 깎아내기를 계속했다.
“그럼 여기서부터 뚱이한테 달리기 해서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해요.”
“치타폰씨 그거 알아요? 나 학교 다닐 때 육상부였어요.”
“그거 엄청난 거예요?"
“아마요?”
“그럼 나 어떡해요?”
“뭘 어떡해요.”
지는거지.
신발끈을 다시 묶어 단단히 매듭지었다. 뛸 준비하는 모양새를 보던 그가 앙탈을 부렸다.
“에이, 한번만 봐줘요.”
“하하, 치타폰씨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랍니다. 뭘 봐, 야. 야! 치타폰!”
샐샐 웃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부들부들. 봐달라더니 냅다 뛰기 시작하는 치타폰에 나는 늦게 전력으로 뒤쫓기 시작했다.
“아오오! 잡았다!”
“안돼! 진짜 채리씨 한번만.”
“뭘 한번만이에요. 내가 이겼다. 내가 이긴 거예요.”
뒷목을 잡힌 치타폰이 다급히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와중에 자기 예쁜 거는 어필하면서, 저 예쁜데 좀 모자라서 그러니까 다시 해요. 따위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날 회유하려 했다.
“됐어요. 제 소원은,”
“아아! 아아아! 사실 채리씨 한 바퀴 돌아서 찍고 다시 원점 가기!”
내 손을 확 내치더니 자기 혼자 또 후다닥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기가 차고 숨도 차서 인상을 쓰며 치타폰을 불렀지만 듣지도 않았다.
“와, 진짜 반칙 쩔어. 대단하십니다.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당신 의지!”
어지간히도 맡기고 싶은 소원 이었나보다. 포기하고 기뻐 날뛰는 치타폰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서 소원이 뭔데요.
“뽀뽀.”
“야. 나 안 해.”
“아! 내가 이겼잖아요!”
“말은 똑바로 합시다, 치타폰 씨. 반칙 썼잖아요! 우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채애리이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어허? 씁! 그런 눈 하지 말라고!”
내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까 시무룩해하더니 내게서 등을 돌렸다. 한껏 축 처진 어깨가 한숨을 쉴 때마다 들썩였다.
“...애야, 애. 치타폰 씨. 나 봐요.”
“넹.”
“대답만 하지 말고 나 보라고요.”
“넹...”
앞은 더 가관이었다. 불만 많은 입을 보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래도 장난감 안 사준다고 바닥에 누워서 울지는 않는 적당히 착한 어린이였다.
자.
치타폰의 눈앞에 가지런히 핀 손바닥을 흔들어보였다. 그가 물끄러미 손가락 끝에 입술을 갖다 댔다가 다시 제게 내미는 걸 쳐다보았다. 슬금슬금 치타폰의 입 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요?”
내민 손을 잡아 입술을 꾹 누르는 치타폰에 물었다. 신기한 사람이야.
“네. 좋아요.”
“이런 취향이에요? 이런, 꼬질꼬질한, 이런 거 좋아해요?”
“채리씨, 외면은 아무것도 중요 안 해요. 중요한 건, 마음.”
그가 여전히 잡고 있는 내 손을 자기 가슴으로 가져갔다. 모래 바닥에 또박또박 한글을 쓰던 치타폰의 글씨를 닮아 심장 박동도 곧았다.
“나는 거짓말 안 해요.”
낯이 뜨거웠다. 눈물이 툭 터질 것 같았다. 손을 치워내며 배고프지 않냐 말을 돌렸다.
38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얇은 나뭇가지들을 의미 없이 엮고 있는 치타폰에게 나는 물었다.
“재밌어요? 뭐 만들어요?”
“그냥~ 손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심심하다고 해요... 애잔하니까.”
“채리씨, 우리 정글 사람 놀이 할래요? 나는 타잔.”
“아니요. 안 할래요. 혼자 하세요.”
자기는 타잔이라며 오랑우탄처럼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는 건 뭔데. 타잔도 그러나?
혼자 타잔 놀이에 빠져있는 치타폰을 뒤로하고 나는 내 앞에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식기 세트를 보며 뿌듯해했다. 오랜만에 소꿉놀이 하는 것 같고 즐거웠다. 점점 이 곳에 소속감이 들고 있었다. 앗,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채리씨, 나 밥 먹고 싶어요.”
혼자 잘 놀더니 어기적 거리며 기어와 양반 다리를 한 내 허벅다리에 제 턱을 올려놓는다.
살이 없어 뾰족한 턱이 여린 살을 파고드는데 그 느낌이 간지러워 다리를 흔드니 얼굴에 힘을 준다.
“미역국에 밥 말아서 먹고 싶다.”
보글보글 된장찌개, 식감 좋은 비빔밥, 포슬포슬 계란말이, 살살 녹는 불고기 등을 주고받다가 군침이 돌아 관두었다. 원래 바다 친구들이랑 별로 안 친해서 생선 조림이나 구이도 한 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 했던 나였는데, 삼시 세끼를 간 없이 생선과 과일로 때우자니 자극적인 맛이 확 당겼다.
“그만 합시다. 그래봤자 여기엔 그런 거 없잖아요.”
떠가는 구름 모양이 마치 산처럼 밥이 쌓인 모양 같다며 치타폰이 억지를 썼다.
“우리 안으로 들어갈까요? 들어가 보자.”
다리를 파닥거리다가 벌떡 일어난 치타폰이 내 팔을 들고 흔들거렸다. 나는 좀처럼 땅과 이별할 생각을 않는 무거운 엉덩이를, 그보다 더 질긴 치타폰 때문에라도 들어야 했다.
“우리 맨날 비슷한 곳에서 가자, 하고 나왔잖아요. 깊숙이 가자 했으면서.”
“그거는 치타폰 씨가 해 져요, 눕고 싶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힘들어요, 해서 돌아간 거죠.”
“와! 내가 언제! 언제 그랬어요! 몰아가네. 너무한다 채리 씨. 와.”
억울한 지 제자리에서 펄쩍 뛰는 그에 아랑곳 않고 시야를 가로막는 가지들을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전혀 긴장감 없어 지루해 풀린 눈으로 똑같은 풍경을 둘러보며 간간히 한숨 쉬었다. 움직이니까 더 배고파졌다.
“저번처럼 닭이라도 나오면 좋겍!”
슬쩍 몸을 비튼 채 걸으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땅으로 쑥 들어가는 왼발에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치타폰은 날 일으킬 생각도 않고 뒤에서 다소곳이 손을 모아 입을 막고 웃기 바빴다.
“안 도와주고 뭐해요!”
“괜찮,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그가 내민 손을 꽉 잡고 일어나려는데 치타폰이 오히려 내가 당기는 힘에 무릎부터 쓰러졌다.
“아니, 뭐 이리 비실해? 종이 인간이야?”
“채리 씨가 잡아당겼잖아요...”
“버텨야죠.”
“버터요? BUTTER?"
"무슨, 아닙니다. 그냥 각자 알아서 일어나는 걸로.“
질척이는 바닥을 짚으며 인상을 썼다. 마치 엄청나게 커다란 껌을 누가 뱉어놔서 그 위로 그대로 엎어진 끈적함이었다. 잘 떨어지지도 않는 갈빛의 질은 흙이 손바닥의 손금을 타고 물들었다.
“얼른 일어나요.”
“오오또케 일어나여...”
“어휴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야.”
이번엔 내가 그의 힘에 못 이겨 중심을 잃고 바로 옆으로 엎어졌다. 끈덕진 진흙이 얼굴에도 튀겼다. 떫은 표정을 하고 굳어 있으니 치타폰이 내 얼굴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진흙을 한 움큼 퍼내 던지니까 바로 울상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완연한 토인이 되어서는 큼직한 소리를 내며 발을 뗐다. 덤 앤 더머도 아니고.
“망했어. 찝찝해서 어떻게 지내.”
“미안. 근데 나도 똑같아요. 우리 쌤쌤.”
“어우!”
내가 부러 신경질을 내며 도끼눈을 하니 치타폰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브이- 한 손을 위 아래로 움직이며 눈을 내리감는 시늉을 해보인다.
“눈알 아파요.”
“이렇게 노려보면 눈 아프다고? 알겠어요.”
“네. 맞아요.”
잘 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치타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치타폰이 한 발 앞서려던 걸음을 뒤로 빼고 같이 멈춰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을 맞췄다.
“그렇게 웃지 마요.”
“네?”
“그렇게, 암튼 웃지 마요.”
“네- 채리씨 뭐가 또 말썽이에요? 나 이번에 아무것도 안 했어.”
차마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꺼내기가 민망했다.
39
입안에 아밀레이스 라곤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속에 모두 버석버석 건조되었다. 한국에선 들어보지 못한 벌레들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튕겨 올랐다.
“쟤...쟤 뭐예요...”
“...Tiger?"
“네? 지금 호랑이라고 했어요?”
호랑이가 여기 왜 나와. 장르가 라이프 오브 파이야?
크르렁 거리며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새기고 있는 위협적인 생명체에 기가 눌려 사지가 벌벌 떨리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나보다 조금 뒤에 있던 치타폰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채리 씨 달리기 잘 하죠. 유혹.”
“유인이겠죠. 그리고 미쳤어요? 치타폰 씨 나 좋다며! 그렇게 매정하게 나 제물로 바치고 튀는 거 아니에요!”
“쉬, 작게 말해요... 채리, 우리 죽으면 어떡해요?”
“안 죽어봐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저를 앞에 두고 감히 무슨 잡담을 그리 하냐는 듯 포효하는 범의 울음에 귀에서 피가 다 날 것 같았다. 접때 절벽에서 줄 없는 번지점프를 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나보다. 눈 한번 따악 감고 감히 도망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채리 씨, 무서워요?”
“그, 그럼 안 무ㅅ, 마, 말, 말 시키지 마요.”
“우리 그렇게 생각해요. Tiger 도 Cat 이에요.”
“쟤가 고양이 과라고 식성도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다그치거나 말거나 뒤에서 눈치 없이 야옹 거리며 허공을 할퀴는 치타폰에 이마가 절로 짚어졌다. 나는 숙연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수많은 먹이들 중 하나가 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호랑이가 터벅터벅 두꺼운 발로 다가온 건 그 다음이었다. 지은 죄가 많으나 여기서 죗값을 좀 치르고 가는 것 같으니 천국 문 기웃거릴 기회는 주십시오. 엄마 미안해 나 먼저 가 있을게,를 종알대고 있는 틈에 다가온 호랑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나와 치타폰 주위를 빙빙 돌았다. 내 등에 바짝 붙어 아무래도 안 통하나 봐요 소리나 하고 있는 치타폰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채리씨!”
“으엄마아아아아!”
내 바짓단을 물어 챈 호랑이에 철퍼덕 넘어졌다. 골반 뼈가 아린 건 고사하고 갈기갈기 찢기기 몇 초 전이 분명한 급박한 순간에 나는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우우어어!”
몸이 위로 붕 뜨더니 명치를 세게 맞은 듯한 고통이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호랑이 등 위에 얹힌 모양새로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약간은 신난, 아니 좀 많이 신나 보이는 얼굴로 치타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옹 맞아요, 야옹.”
이 남자, 절벽에서도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더니 이젠 호랑이까지. 배시시 웃는 치타폰에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깊숙한 데서부터 끌어올린 한숨과 함께 웃음을 끊어 뱉었다.
-
탭댄스 재업 끝났습니다! 끝 끝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