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번 주는 대체 월요일부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회사가 주말에 나 몰래 일거리 경매라도 해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인간미 없게 금요일까지 야근을 시키질 않나, 특출나게 좋은 것 없는 회사에서 2년 반 넘게 근속하는 내 자신이 불쌍한 마음에 34번째 사직서를 쓰면서도 이번 주 주말은 좀 더 격렬하게 쉬어볼까 하는 다짐이 있었는데...
“이런 개매너...”
토요일 아침. 10시도 안 된 시간부터 잔뜩 소란스러운 탓에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이래서 뭘 해도 안 되는 인생은 안 되나 봐.
그래도 오늘의 나는 쉬기로 다짐 했으니까 다시 자자, 신경 쓰지 말자 하며 이어폰까지 껴도 겨우 10분 정도 잠든 게 전부였다. 대체 아침부터 뭘 하는 거야?
결국 덮고 있던 이불을 확 제끼고 잔뜩 짜증스러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어 빼꼼 바깥 상황을 살폈다. 문 앞에 정리 되지 않은 박스가 몇 개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사를 하는 듯 싶었다.
원래 앞집 살던 학생은 곧 졸업한다더니 벌써 방을 뺐나... 길게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니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게다가 새로 온 사람은 이미 혼자 마이너스를 먹여버렸는데.
아무래도 오며 가며 움직이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행색이 아니라 나중에 집주인을 만나면 인사는 하지만 웃지는 않겠다며 참으로 나다운 복수 방식을 선택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이건 거실에 둘까요?”
“아, 그건 저 주세요.”
정확하게 들린 거다. 가끔은 나보다 더 높았던 그 독특한 목소리가.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저주스럽게도 내가 그럴 리가 없어서 서둘러 문을 닫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했다.
야,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 내 감이 틀린 게 아니라면 앞집으로 이사 온 게 이동혁이다 이 말이지?
이동혁. 지난 1년을 그 이름 때문에 울다, 웃다, 욕하고 짜증내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씹고 뜯고 했는데 그게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내 앞 집에. 그것도 오늘.
“...미쳤네, 미쳤어.”
이제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당장 내가 계약이 반 년도 더 남은 이 집에서 빠져 나가든가, 이동혁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개고생을 하든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 선택은 후자였다. 생각해보니 평소에 앞집이랑 그렇게 자주 마주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고, 나는 평일에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게 들어오는데다 마지막으로 들은 이동혁의 근황이 맞다면 이동혁은 작업인지 뭔지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낼 테니까.
오늘 같은 주말만 조심하면 크게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긴 했다. 여차하면 존나 급한 척 하고 뛰어 내려가면 되지. 이동혁 성격에 앞집 사람을 굳이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을 거고.
“그럼 일단 잠이나 더 잘까.”
혼자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한참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새 바깥이 잠잠해졌길래 일단은 한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주의 나는 엄청 피곤하셨으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라 (上)
이동혁이고 뭐고 다 잊은 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은 다 지나가고 시계는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피곤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잘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몸은 도무지 일어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한참을 더 누워 있다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자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확인은 해 봐야지.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더 보냈다.
동료가 제 애인과 주말 데이트로 일본에 갔다는 소식을 내게 직접 카톡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아마 두 시간은 더 그러고 있었을 거다. 애인이랑 일본까지 갔으면서도 내 생각이 났으면 나랑 연애를 하지 뭐하러.
[택배 문 앞에 있습니다]
뭐가 온 거지. 혼자 살면서 느는 거라곤 게으름과 택배박스 뿐이었다. 샴푸 시킨 건 저번 주에 받았는데, 세제인가.
속이 텅 빈 느낌에도 꼼짝 안 하던 몸이 결국 택배 때문에 움직이게 됐다. 택배 가지고 들어와서... 귀찮으니까 청소는 안 하더라도 환기는 한 번 시켜야지. 지금 상태로는 혼자 사는 냄새가 집 안을 채우고 있을 것 같았다. 저녁은 뭐 먹지, 귀찮은데 시켜먹을까. 밥 해줄 사람 좀 있었으면 좋겠네.
현관문을 열자 보이는 건 세제가 아니라 생수 여섯 병이었다. 으, 이 죄책감. 원래 계획은 배달 오시면 박카스라도 한 병 드리면서 감사하다고 하는 건데, 냉장고 안에 있는 박카스가 제 역할을 못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다음엔 꼭 드려야 될 텐데.
박카스에 대한 다짐이 끝났으니 이제 문제는 이걸 주방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됐다. 두 번 정도 시도해본 결과 한 번에 들어서 옮기는 건 불가능 할 것 같고... 뜯어서 한 병씩 옮기는 게 나으려나.
“도와드릴까요.”
그거 몇 번 들었다 놨다 했다고 금세 힘이 빠져서, 쪼그려 앉아 생수병만 바라보다 가위를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앞에서 떨어진 목소리에 다시 원상태로 복귀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 이동혁 피하는 중이었지.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그 모든 계획이 무효화 됐다. 근데 지금 쟤 나 못 알아 본 거야?
양쪽으로 커튼처럼 떨어진 머리에 이동혁이 내 얼굴을 확인하지 못 한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 꼴로 마주쳤다간 난 당장 내일 이사가야 될 지도 모르니까.
근데 대답을 어떻게 하지. 말을 하면 걸릴 거고, 손으로 엑스라도 해? 아니면 그냥 들어가라고 손짓해야 되나. 아 이건 너무 무시하는 것 같잖아. 결국 내가 택한 방법은 고개를 더 숙여 절레절레 젓는 거였다. 제발 그냥 들어가라, 제발.
내 행동에 대답도 안 한 이동혁이 도어락을 풀고 문을 열 때까지 다리가 저리고 목 뒤가 뻐근했지만 그 자세를 유지했다. 걸릴 때 걸리더라도 오늘은 아니야.
“아닌 척 할 거면 신발이라도 다른 걸 신든가.”
“뭐?”
그 말에 번뜩 고개를 든 건 내 잘못이었지만 1년 만에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악한 새끼, 처음 질문은 떠본 거였어?
“어떻게 알았어?”
“1년을 질리게 보고 살았는데 그렇게 있는다고 못 알아 보는 게 이상한 거지.”
“옛날 얘기 하지 마, 기분 나빠.”
“하는 나는 좋겠냐.”
아. 이렇게 다시 만날 것 같았으면 헤어질 때 두 마디만 더 할 걸. 그럼 지금보다는 속 시원했을 것 같은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입만 다물고 있음에도 집에 안 들어가고 서있던 이동혁이 대뜸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고.
“우리 사이에 악수라도 하자고?”
“하여튼 눈치는 더럽게 없어요. 잡고 일어나라고 너 지금 다리 저려서 못 일어나는 거잖아.”
1년이면 꽤 긴 시간인데 아직도 이동혁은 내 얼굴만 봐도 대충 값이 나오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연애할 때도 내 기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았던 것 같기도 하고...
“과거 회상 하지 마, 기분 나빠.”
“그런 거 아니거든.”
어떻게 헤어진 사인데 이렇게 만났다고 내미는 손을 잡긴 좀 그래서 애매하게 손목을 붙잡고 일어났다. 내 다리...
“환영 한 번 거하게 해준다.”
“깝치지 마,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걸을 수는 있으시고?”
“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 아는 척 하지 말자.”
“너나 애매하게 굴지 마.”
“뭐?”
가까스로 문고리를 붙잡은 내 질문에 대답도 미련도 없이 들어가버린 이동혁 덕분에 혼자 절뚝거리며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개쪽도 이런 개쪽이 없네.
“아, 미친.”
현관 옆에 붙어있는 거울을 돌아봤다가 깨버릴 뻔했다. 지금 이꼴로 1년만에 원수 같은 전남친이랑 재회한 거라고요? 머리는 부스스 하고 대충 입고 있는 티셔츠에는 미키마우스가 존나 해맑게 Hi!를 외치고 있었다. 미안한데 지금 인사할 상황 아니야...
계획 변경. 걸린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지. 또 이동혁을 마주치면 내가 개다, 개.
* * *
멍멍.
인생이 원래 달다가도 짜다지만 내 인생은 염전에 처박혔나 짜다 못해 쓰기까지 했다. 절대로 이동혁을 자주 마주쳐서 그런 게 아니라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과 불행했던 기억을 생각해보면 비율이 그래.
당장 일요일 아침에 분리수거 하러 나갈 때도 마주치는 바람에
“맥주캔으로 집 새로 지어도 되겠다.”
“닥쳐. 남 쓰레기에 참견이야.”
사이좋게 분리수거 하는 대화합의 현장을 경험했고요. 분명히 이동혁 집에만 있는다고 사람들이 그랬는데
“출근?”
“신경 좀 꺼주라.”
“부러워서 그러지.”
“뭐가.”
“나는 이대로 집에서 그냥 편하게 앉아서 작업할 텐데, 넌 사람 개많은 지하철 타고 가잖아.”
“이런 씨,”
“사회의 소속원 같은 느낌도 느껴보고 얼마나 좋아, 부럽네.”
“엿먹어.”
이런 식으로 저번 주 내내 나를 괴롭히더니, 이번 주도 월요일 출퇴근 길에 마주치고, 화요일 출근길에 마주치고, 수요일 퇴근길에 마주치고 목요일인 오늘은
“없네.”
오늘은 또 무슨 시비를 걸까 온갖 생각을 다 하며 왔는데 웬일인지 모습을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동혁에 괜히 머쓱해져 뒷통수를 쓸었다. 어디 나갔나. 아니지, 내가 지금 걔 행방을 궁금해 할 처지가 아니잖아? 정신차립시다 선여주.
그렇게 집에 들어와서 옷도 안 갈아입고 쇼파에 늘어져 있는데 진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다.”
왜 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로 태어났는가... 왜 인간은 밤에 먹으면 살이 찌는 존재로 태어났는가... 고민해도 답은 비슷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올까. 혼자 살면 굶어 죽기 딱 좋다는 엄마 말이 빗나가지 않는 것처럼 냉장고 열어봐야 먹을 거 하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지갑 하나 달랑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어...”
“아, 앞집 사는 분이시구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내가 밤에 뭘 먹는 것에 대한 대가가 이거면 좀 갑작스러운데.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처음보는 여자와 그 사람을 배웅해주는 이동혁? 그게 다였다.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이동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애인인가. 이미 헤어진 사이에 그럴 수도 있는데 뭐 저렇게까지.
이동혁 애인이라...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겪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돌아서 갔다가 돌아서 왔다. 혹시 또 마주칠까봐.
봉투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안 나게 품에 안고서 조용히 계단을 오르는데 일부러 늦게 돌아온 보람있게 아무도 없었다. 괜히 이웃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빚쟁이랑 전애인은 목숨 걸고 안 마주치는 게 좋다더니. 그래도 한 동안은 안 마주치지 않을까, 아까 이동혁 표정 보니까 그럴 것 같기도 한데.
내가 그런 생각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데 뒤에서 이동혁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예상 빗나가는 건 여전하네.
“야.”
“왜.”
“바쁘냐?”
“왜.”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은근히 겁이 났다. 평소였으면 아무 생각 안 들었을 텐데, 아까 봤던 게 대단한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랬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얼굴을 해서 사람을 떨리게 하는지.
“벌레 좀 잡아줘.”
이런 씨ㅂ,
“제발 이런 건 혼자 좀 해. 벌레가 무서우면 세스코 신청을 하든가.”
“너 있는데 뭐하러 돈을 써.”
“진짜 줘패고 싶다.”
그대로 봉투 달랑이면서 이동혁 집에 들어갔다. 줏대도 없지, 편의점을 그렇게 빙글빙글 돌아서 갔다 와놓고... 생각해보니까 처음 와 보는 거잖아?
신기하긴 하다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게 해주세요. 계속 궁금해지면 큰일이니까. 안 보려고 했는데 벌레 잡고 현관에서 신발 신기 전까지 계속해서 눈이 굴러가는 건 내가 미친년이라서 그런 거냐고. 솔직히 다들 구남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 죄송합니다.
“뭘 그렇게 둘러 봐.”
“그냥 사람답게 잘 사네 싶어서.”
그렇게 쓸데 없는 소리 하면서 신발 뒷창 구겨진 걸 빼다가 본 거다. 구두 박스를. 저거 어디서 봤더라...
긴 시간 걸리지 않아 생각 났다. 일본 여행 자랑 했던 그 동료가 애인한테 선물 받았다며 박스채로 자랑 한 구두 브랜드. 여성화 브랜드 중에 제일 잘 나간댔나 뭐랬나. 다음날 바로 구두 밑창이 어쩌고 하면서 투정부렸는데. 나한테.
“간다, 다음에 벌레 나오면 그냥 같이 살아. 이사 가면 더 좋고.”
“웃기네, 나 이사 가면 동네에 친구도 없는 게.”
“너 내 친구였어?”
“친구는 아니지.”
“알면 됐다. 아, 저 구두 밑창 미끄러우니까 애인 주기 전에 수선 한 번 맡겨. 선물 주는 거 잘 신으면 좋잖아.”
“...어.”
문을 닫고 나와서 생각했다. 와, 이동혁 표정 봐. 나 방금 어이 없게 오지랖 부린 거지? 모르긴 몰라도 엄청 최악이네 나. 이래서 자주 마주치면 안 좋다니까.
* * *
괜히 오지랖 부려서 민망했던 그 목요일을 기점으로 이동혁은 커녕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야근에 주말 출근에,
“여주씨는 이번 주말에도 방콕이야?”
“음, 아마도요?”
“창창한 20대가 그렇게 시간 써서 어떡해~”
동료 직원 지랄은 덤. 내가 이번달 카드값만 내면 꼭 관둔다 여기. 35번째 사직서는 끝으로 갈 수록 욕이 한가득이었다.
얼마나 우울하던지, 연거푸 있는 야근에도 일을 끝마치지 못해서 금요일 퇴근 할 때 일거리를 잔뜩 싸들고 온 나를 보며 그런 생각까지 했다. 선여주 넌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사니. 일도 연애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거 없으면서.
“야, 안 바쁜 거 아니까 나와.”
원래 계획은 밤을 새서라도 일 다 끝내놓고 주말 내내 쉴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지내다간 갑자기 죽고 싶어질 것 같아 그냥 다 내일로 미뤘다. 오늘은 내 추락한 자존감을 위해서 쓰자. 좋은 게 좋은 거라잖아.
“그래서 전남친이랑 맞대고 사는 건 무슨 기분인데?”
“말 가려서 해, 같이 사는 것 같잖아.”
“그만큼 자주 본다며.”
“아니거든.”
황인준은 말을 잘하는 것 같다가도 꼭 저렇게 쓸 데 없는 말을 한두 마디 껴 넣어서 사람 속을 긁었다. 세상에 전 애인이랑 이웃으로 사는데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 사람 참 복 받았네.
“너 이동혁이랑 왜 헤어졌지?”
“싸워서.”
“너희가 뭐 하루 이틀 싸웠어?”
궁금해 하지도 않던 걸 집요하게 물어보는 탓에 굳이 그 날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원래 이런 게 지나고 생각해보면 진짜 별 거 아니었어서 쪽팔린데.
“난 시간이 없고, 이동혁은 자신이 없어서 싸우다 헤어졌는데.”
“미안, 나 외국인.”
“미친놈...”
이동혁이랑 헤어진 얘기는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다. 다들 왜 헤어졌어? 하고 물어 봐도 그냥 안 맞아서, 같은 말로 대처했지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 때 나는,
“나 걔랑 연애할 때 입사 초였잖아.”
“응.”
“적응할 건 많지, 일은 더 많고. 솔직히 내가 나쁘긴 한데 그 때 나한테 이동혁 신경 쓸 시간이 없었어. 어쩌면 그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고.”
“너 진짜 나쁘다.”
“닥쳐 봐.”
황인준은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굴었다. 저 새끼 요즘 아침드라마 챙겨본다더니 리액션이 우리 엄마 다 됐네.
“근데 이동혁은 그 때 학생이었거든. 당연하잖아, 입학해서 군대 갔다오고 복학하면 다들 그러니까.”
“미안, 나 외국인.”
“개빡친다...”
“그래서 싸웠다고?”
“응. 말했잖아, 난 시간이 없고 이동혁은 자신이 없었다니까. 서로 넌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 하다가 헤어졌어. 별 거 없다.”
“너희답네.”
다 지나간 일 다시 꺼내면 재수 없어진다고 진저리 치는 나를 보며 황인준은 웃었다. 웃음이 나오나 쟤는 지금. 이게 아침 드라마였으면 난 희대의 나쁜년으로 욕을 두 바가지는 먹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만난 거 운명일지도 몰라.”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걔 애인 있어.”
“이동혁이 애인이 있다고?”
“어. 걔가 말 안 해? 너희 연락 하고 지내잖아.”
“이동혁이 그럴 리가 없는데.”
“뭘 그럴 리가 없어, 연애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턱을 괴고 앉아서 혼자 심각하게 고개를 기우뚱 거리던 황인준은 갑자기 무슨 고민이라도 생긴 것처럼 굴더니 번뜩 나를 쳐다봤다. 먹이를 찾는 것 같은 눈빛이 어쩐지 예사롭지가 않아서 등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뭐야 쟤.
“넌 미련 아예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러고보니 황인준은 내가 이동혁이랑 헤어졌다고 처음 말했을 때도 비슷한 얼굴로 너 후회 안 해? 이렇게 물어봤었다. 나랑 이동혁 사이가 아깝기라도 한 것처럼.
“있는데 그런 미련 아니야.”
“그럼.”
“그냥, 헤어지기 전에 싸웠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헤어질 걸 하는 미련.”
“그게 뭐야.”
그런 미련이면 필요 없다고 나를 나무랐지만 진심은 진심이었다. 그런 생각할 때까지 둬서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할 걸, 그럼 안 헤어졌으려나. 전하지 못한 말은 많았지만 지금와서는 다 쓸모 없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이야기 좀 했다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긴 했다. 그 기분으로 다시 이동혁을 만난 건 조금 미스지만.
“이제 오냐?”
"아, 깜짝이야. 왜 거기있어?"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이제 오냐고."
“기다린 사람처럼 물어보네.”
“뭐래.”
1시가 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이동혁은 빌라 입구 놀이터에 앉아있었다. 다 큰 놈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무게 잡고 있냐고 장난이라도 쳤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이동혁 얼굴을 보니 그런 말이 안 나왔다.
"너 이새끼..."
"뭐."
“선물 사온 거 알고 기다린 거 아니야?”
“웬 선물.”
“이거.”
“뭔데.”
“살충제.”
이동혁은 봉투를 열어보곤 그냥 웃었다. 뭘 웃어 내가 자기 생각해서 약국 갔다가 하나 사왔구만. 근데 나 진짜 저거 왜 샀지? 아무튼 그 때나 지금이나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거 쓰고 너 부르지 말라고?”
“그걸로도 안 잡히면 그 때 부르라고.”
술 취해서 놀이터에 앉아 이런 얘기 하는 헤어진 사이가 몇이나 될까. 약간 알딸딸한 탓인지 말을 해놓고 뒤늦게 생각을 했다. 지금 내 입을 좀 틀어막아야 될 것 같은데.
“근데 이동혁 너 나랑 이러고 있어도 돼?”
“안 될 건 뭐야.”
“너 쓰레기다.”
“뭐래, 애인 아니야. 그 사람.”
“...뭐야, 그럼 그 때 신발은 왜?”
“친구 동생 생일이라서.”
나는 그 흔한 아, 하는 감탄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퍼즐이 그렇게 들어맞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쪽팔린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서. 그럼 지금까지 나 혼자 생쇼한 거야? 죽자 선여주. 그게 참회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신경 쓰였어?”
“아니 뭐...”
“그 때나 지금이나 솔직하면 죽냐 너는?”
“그 때 솔직해서 너랑 싸우고 헤어졌잖아.”
“...아.”
“빡치게 하지 마.”
그리고 또 정적. 아, 나 집에 들어가서 씻고 자야 되는데 여기 앉아서 뭐 하냐 진짜... 이동혁도 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연애할 때도 자주 이랬던 것 같은데, 그래도 누구 하나 서운한 소리 안 했다. 어색한 거 풀려고 말 꺼내면 여섯 배는 더 어색해지는 게 나랑 이동혁이라서.
“야 지금 이런 말하면 이상하긴 한데.”
“알면 안 하면 안 돼?”
“그래.”
“아니야, 해 봐.”
“많이 늦긴 했는데, 그냥 그 때 미안했었다고.”
“뭐가.”
“다. 나 때문에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잖아.”
툭툭 모래바닥에 꽂는 신발 앞 코가 더러워졌다. 내일 아침에 저거 닦으면서 엄청 후회하겠지. 미친년 술 처먹고 별 소리를 다 했네, 하면서. 그래도 언젠가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라 속은 가벼웠다. 머리랑 마음이 무거워서 문제지.
“나 먼저 들어 간다. 코에 바람 들면 감기 걸리니까 무게 적당히 잡고 들어 와.”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왔다. 돌아봤는데 날 보고 있으면 다시 가고 싶을 것 같아서.
생각보다 압도적이었던 투표결과... 그리고
망작 탄생의 끝을 찾아서...
아니 선생님들 다 진짜 웃긴게요ㅠ
'이걸 어떻게 골라요ㅠㅠㅠㅠㅠ전 못 골라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굳이 고르면 1. 3이요.(차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ㄱ그리ㅣ고 ㄴ내 글ㄹ을 그렇ㅎ게ㅔ 많은ㄴ 분이ㅣ 읽어ㅓ주신다ㅏ는 걸ㄹ 처음ㅁ 알아서 좀 ㄸ떨리ㅣ네요...
그래서 글 쓰는데 선생님들 뒷통수 치는 기분이라 쩜 우울했슴다.
재미 감동 설렘 인류애 모두 상실해버린 글...
글 제목 상실의 시대 각이었는데 애써 참았고요...
그리고 저는 한 개만 쓴다고 한 적 없읍니다... 투표는 그저 글 쓸 순서를 정하기 위함...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