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도 간다는데 철옹성을 못 부술까
3
이동혁
현여주
습관이 무섭다.
나는 알바를 가다가, 가서 바닥을 청소하다가, 컵을 씻다가 다시 혼자 앉아있게 되는 시간까지 계속해서 동혁이와 관련된 기억 회로를 돌렸다. 혼자 가지고 앓았던 것부터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최근의 일까지 오게 되면 다시 버릇처럼 우울했다가 또 원상복귀. 혹시 대개의 정신병들이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건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같은 기억을 반복해서 곱씹는다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분명히 그때
‘너 왜 지갑에 내 사진 들고 다녀?’
‘예뻐서 가지고 있었어요, 예뻐서. 됐어?’
‘너 보러올 겸해서 온 거야.’
‘겸하는 거 없이 그냥 오면 정확히 할게요.’
그때 그건 분명히 의미가 있었는데, 시간이 뭐길래 이미 그 효력이 다 없어진 것 같았다.
‘나한테 화났어요?’
‘안한 거 아니고 못한 거예요. 엄두가 안 나서.’
‘누나가 갑자기 그렇게 돌아서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원래는 길 가는 개미도 못 볼 정도로 쫄보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멀리 내다보고 있었는지. 어쩌면 부담이라는 단어가 다른 때보다 크게 다가온 건 내가 이미 은연중에 그걸 걱정하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미 걱정하고 있었으면서 그걸 피부로 느껴버리면 이렇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 피하고 또 피하고. 감춰버리고.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누나랑 결혼식.’
‘손잡아 줄 거야?’
‘한 번만 웃어주면 누나 생일 선물 받은 걸로 할게.’
그렇게 걱정하던 상황을 막상 마주하고 나니, 찾아오는 건 두려움이나 걱정이 아니라 후회였다. 속없이 저런 소리 한 게 쪽팔리기도 했다. 처음부터 둘이 온도가 그렇게 달랐는데.
처음 거짓말하고 외박하던 날 걸려서 혼났을 때가 인생 최고의 후회의 순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런 식으로 업데이트도 되나 봐. 이번 후회는 인생 최악의 후회였다.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던 걸 굳이 끄집어 낸 게 나 같아서.
그리고 보통 확신과 후회는 묶여 다니기 마련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분명 외양간을 고치면서 다짐 같은 확신을 했을 거다. 아,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고쳐놔야겠네. 내가 조심성이 없었구나.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없어진 소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그냥 혼자 앉아서 망치나 두들기며 지독한 후회만 반복하는 게 끝이지.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조용히 혼자 있을 시간이 생기면 괜히 핸드폰으로 친구들에게 몇 통 카톡을 날려보다 했던 카톡들을 다시 몇 번 읽어보고 생각한다.
별 거 아닌 대답에도 웃음이 툭툭 터지고, 답장이 오나 안 오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바쁘냐고 묻는 말을 해보고 돌아온 대답에 못내 아쉬웠지만 그렇구나, 열심히 해. 같은 말로 상황을 끝내버린 나를 보면서.
아, 진짜 좋아하는구나 하고.
내가 그 긴 시간동안 헷갈렸던 건 그냥 너를 많이 좋아해서 그랬던 거구나. 숨 쉬는 것처럼 그냥 자연스레 네가 좋아서 나는 그게 헷갈렸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장 난 문에 판자를 덧대어 고쳐도 이미 문을 열고 떠나버린 건 돌아오지 않는데. 그걸 데리고 도망가 버린 도둑을 탓하기엔 내 탓이 제일 커서 괜히 답답했다.
그래, 나는 이런데. 너는?
너는 왜 내가 너 때문에 화가 났는지 걱정했을까.
그 때 마주친 얼굴은 분명 걱정이었는데, 혹시 의미부여 하다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라도 생각하면 내가 좀 덜 민폐 같긴 하잖아. 시간이 지나서 약간 다툰게 그냥 무마 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잖아. 그래서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확신이 섰는데 뭘 예전으로 돌아가, 내가 달라진 이상 같을 순 없는데. 그럼 또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지겨워.
팔찌가 팔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뭐야 이 시간에? 너 과제 때문에 바쁘다며.’
‘생일 아직 안 지났어요. 58분이야.’
‘이거 주겠다고 온 거야?’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려고 온 건데요. 이건 그냥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그 때가 딱 좋았는데. 역시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나보다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정말 쓸데없는 욕심이기만 했을까. 그래도 나는 너를 잘 아는데. 그렇게 다독이며 스스로 달래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사이였다는 게 모든 걸 무마 시킬 수 있었다.
아팠다.
달에도 간다는데 철옹성을 못 부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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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씨 금요일은 안 나와도 돼. 집안 사정 때문에 가게 안 열거야.]
공백이 생겼다.
요즘은 이상하게 손님이 많아서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이리저리 청소하고 움직이다 보면 동혁이 생각이 나려다가도 금방 달아났는데, 안 그래도 주말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덜컥 쉬는 날이 생겨버렸다. 아, 나 지금 약간 상사병을 넘어 서서 혼자 있으면 또 심각해지는데.
결국 늦늦늦잠 자고 일어나서 씻고 집을 나섰다. 딱히 갈 곳도 없는데 그랬다. 오늘은 나만 휴일이라서 누구 붙잡아 술이라도 마시려면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게 집에서는 온전한 정신으로 있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당장 쇼파에만 앉아있어도...어후.
뭐하지 하다가 편의점에 들려서 젤리를 샀다. 단 거 하나, 신 거 하나 해서 두 개나. 단 건 내가 좋아하는 거였고 신 건 걔가 좋아하는 거였는데, 먹으면 혀 뒤가 저릿저릿한 걸 뭐가 좋다고 먹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찌릿한 게 아니라 저릿했다.
별로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발 닿을 곳이 없었다. 이방인도 아니고 갈 곳을 못 정해서 일부러 더 느리게 걷다가 가고 싶은 곳이 생겨서 발을 돌렸다. 어차피 생각나서 산거지 먹고 싶어서 산 젤리도 아니었으니까.
분명 느리게 걷고 있었는데 도착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동혁이네가 몇 호였는지 803호 찾는데 손을 여러번 헤맸다. 내가 디지털 치매인이 백만인 시대를 살고 있어도 기억하는 게 동혁이 번호랑 집 호수였는데 미친, 그거 잠깐 제쳐뒀다고 금방 긴가민가 한 걸 보니 노력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맞았다. 아등바등 짝사랑 했네 나.
젤리 두 봉지를 우편함에 넣어두곤 제발 두 형제가 오늘 이걸 한 번이라도 열어보길 기도했다. 저번에 들어보니까 택배도 일주일인가 있다가 발견했다고 하던데, 그걸 생각하면 기도하는 게 오바는 아니었다.
“야, 도둑.”
“왐마 씨 깜짝이야...”
“뭐 한다고 남의 집 우편함을 뒤지세요.”
“...너희 형제는 나 혼자 있을 때 기가 막히게 찾아온다.”
내가 별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날 한 번 쭉 보던 놈은 평소처럼 들어가자는 말을 안 했다. 이런 걸 보면 세월이 뭐 중요한가 싶다가도 10년 친구는 티가 나네 싶었다.
“밥은 먹었냐?”
“너랑 술 마시려고 속 비워두는 중이었는데.”
“그러다 피 토해봐야 정신 차리지.”
“오~ 약간 밥 사줄 것 같은 분위기인데 지금.”
형제는 형제다. 결국 가장 좋은 쪽으로 갈 거면서 저렇게 사포처럼 굴었다. 왜 얘가 아니라 이동혁이었나 몰라, 싶다가도 괜히 상상해보니 빈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서 관뒀다. 짝사랑하기엔 너무 아무 것도 없는 사이였다.
“와, 나 네가 사주는 밥 진짜 오랜만.”
“그야 네가 맨날 이동혁이랑 노니까.”
“질투?”
“결투 신청은 하고 싶은데.”
“졔삼다.”
사실 밥을 먹는다는 명목 하에 벌어진 1차 술판이었다. 상처는 원래 알코올로 소독하니까 지금 내 마음이 아픈 것도 알코올로 소독하면 되겠지... 미안합니다.
이동혁 형이 이동혁 보다 나은 게 있다면 눈치였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스타일이 딱 맞아 떨어졌으니까. 아마... 전생에 효자손... 죄송합니다.
“이동혁이랑은 왜 싸웠냐. 물어보고 싶은데 걔는 너무 저기압이라 눈치 보여서 뒤지는 줄.”
“뒤지지...”
“어쭈.”
“싸운 거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지.”
그렇게 말하면 녀석은 마시진 못하고 들고만 있던 소주를 탁 털어마셨다. 와 이거 어디서 봤는데, 데자뷰 같은데 지금. 저번에 저렇게 소주를 시작으로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냐.
“넌 뭐 맨날 니 잘못이래. 이동혁 걔도 실수 존나 많이 해. 그만 감싸.”
“이번엔 진짜 내 잘못이야. 내가 갑자기 거리 둬서 걱정한 것 같던데.”
“감싸는 거 맞네.”
“뭐가.”
“걔는 너한테 매번 거리두고 벽 치는데 네가 한 번 그러는 게 뭐 대수라고.”
엄마... 나 좋은 친구 뒀었나 봐... 멍청해서 그것도 지금 다시 한 번 깨달았는데 얘 진짜 좋은 놈이야... 자기 동생이랑 친구랑 싸웠다는데 이렇게 중립 지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편부터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내가 필요한 건 친구지 솔로몬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게 시작된 술판이 3차까지 갈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었다. 그냥 소소하게 이랬고 저랬고 이야기 하던 게 갑자기 살이 붙어서 사실 내가 동혁이 처음 봤을 때-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야 솔직히, 어? 스물 셋도 많은 게 아니잖아. 나 어려. 100살 넘어서까지 산다는데 미친 스물셋은 갓난아기 아니냐?”
“갓난아기는 아니지... 걔네가 들으면 기겁한다.”
“스물 하나랑 스물 셋이랑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내가 매번 이해하려고 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나는. 억울해.”
“...울면 진짜 두고 갈게.”
모아뒀던 작은 서러움이 펑펑 잘도 터지고 있었다. 팝콘도 아니고... 나랑 동혁이 얘기가 듣다보면 팝콘이 필요하긴 한데 옥수수가 없어서 내 속을 대신 터트리는 것 같았다. 펑 펑.
정말이지 두 살 차이가 뭐라고 누나, 하는 그 소리에 내가 업어다 키울 것처럼 굴었는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좋아해서 헷갈렸던 것도 이유지만, 그 누나소리가 꼭 한참 어린 동생처럼 느껴진 탓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동혁이가 너무 예쁘잖아... 지켜주고 싶게...
“둘이서 개진상 부리지 말고 연애를 해, 그냥.”
“아 도녁, 동혁이가 나랑 그럴 마음이 있대?”
“지지고 볶는 건 너희끼리 하면서 왜 나한테 물어.”
그 이야기를 집에 가면서 계속 했다. 둘 다 취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약간 취한 게 맨정신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동혁이가 보고 싶긴 한데, 머릿속이 약간 블러처리 된 기분이라 그게 생생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렇게 가면 너희 집 아니야?”
“어, 왜.”
“가면 동혁이 있어?”
“몰라, 그 새끼 약속 있댔어.”
“우와 그네다. 타고 갈래?”
“너 그러다 토한다.”
그러니까 스물셋의 두 취객이 집으로 향하던 길에 놀이터 앞을 지나다가 만나면 곤란한 상대를 만난 건 정말이지 누구의 잘못도 노림수도 아니었다는 거다. 어쩌면 운명 내지는 인연이라고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뭐냐, 이제 나가냐?”
“들어오는 건데.”
어차피 다 봤을 텐데 게걸음으로 조용히 뒤에 몸을 숨겼다. 당장 목소리를 라이브로 듣는 것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게 술이 깨는 것 같기도 하고. 기왕이면 술이 깨기 전에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헤어진 게 마지막인데 그 다음에 보여주는 모습이 취한 거라고? 혀를 깨물자... 지금 쪽팔린 사람 손을 드세요! 그대로 머리를 내리치세요...
사람이 셋이었고, 둘은 형제였고 둘은 친구사이였는데 둘은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사람이 셋이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야 가서 세탁기 좀 돌려, 얘만 데려다주고 들어갈게."
"어."
그렇게 보고 싶어서 몸부림 쳐놓고 지금은 최대한 안 마주치길 바라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끝나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걸 인지해서 그런가 심장도 더 떨리고 일단 난 아직 할 말 정리도 다 못 했어.
"그냥 내가 누나 데려다줄 테니까 형이 들어가."
"야, 나 그렇게 취하진 않았어."
"내가 누나랑 할 얘기 있어."
다 못 했는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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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이상한 부분에서 끊기긴 했는데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분량 조절 때문에 그래효... 믿어주세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