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me kat - Bug In A Web
눈을 떴을 때 창 밖은 어두웠다. 어둠이 삼킨 세상은 희미하고 미화된 피로한 불빛들로 꾸며져있었다.
헝크러진 머리를 정돈해 헐렁히 쥐고 묶고 무거운 문을 열면 보이는 방의 외관.
이 방은 두 개로 나뉘어져있고, 내가 지내는 방은 숨겨져있다.
이 다섯 남자가 지내는 방이라는 속임수 하나로.
" 아, 깼네. "
나를 깨우러 오던 길이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도경수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리고 집중되는 이목.
" 보스가 찾지도 않았는데 깨고, 왠일이래. "
시시콜콜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히 늘어진 윙체어에 앉아 제각각 노닥거리는 다섯을 둘러봤다.
" ...일들 하고 왔나봐? "
무덤덤하게 물으면 손에서 쥔 게임기를 놓지 않고 있던 박찬열이 고개를 든다.
그의 질문에 산만하던 나머지까지 흥미롭다는 듯 날 보았다.
말해봤자 인상 찌푸릴텐데.
" 있어, 그런게. "
피곤하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낼 필요 없으니 입을 열지 않았다.
코를 찔러오는 미미한 철의 냄새.
이제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탄환의 거북한 냄새와 피에서 묘하게 풍겨오는 철 냄새.
일을 끝내고 돌아온 그들에게는 늘 그런 냄새가 난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책을 읽고 있어도 말이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책을 집어드는데 옆에 있던 변백현이 얼굴을 가린 내 책을 검지로 내리며 눈을 마주했다.
" 난 알 것 같은데. "
" 뭘? "
내 되물음에 변백현은 말없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제 소매를 내 코밑에 두었다.
진동하는 미미한 냄새들.
" ...... "
" 이 냄새들 때문이잖아. "
그리고는 다시 책으로 내 시야를 가려벼리는 변백현. 그리고 천천히 종이결들 너머로 보이던 변백현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걸맞지 않게도 서글프게 웃고 있었다.
마치 7년을 넘게 함께 해온 이 삶이 후회 된다는 듯.
그 때 가운데 테이블에 놓여져있던 투박한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다들 굳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가야겠네. "
다들 슬슬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문.
오세훈은 둘러싸인 내 옆에서 말한다.
" 보스 앞에선 웃어라. 그런 딱딱한 얼굴 집어치우고. "
웃기는 소리, 웃음은 아무 때나 나오는 줄 아는걸까.
다섯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도망갈 틈도 없는 복도를 걸어 도달한 방 문을 열자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 ...... "
그녀는 김종인과 곧장이라도 침대 위로 쓰러질 듯한 위태롭게 농염한 표정으로 벽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을 붙드려는 손에서 비껴가자 김종인은 늘 그랬듯 미간을 좁히고는 뭐냐는 듯 두 눈을 마주했다.
" 일이 있었으면 제대로 끝내고 가. 그런 얼굴 마주 보고 먹으면 체할것 같으니까. "
" 그래, 알겠어. "
그는 내 말에 다시 뒤돌아 그녀에게 향했다.
미세하게 쥐어진 그녀의 주먹을 볼수록 고소하면서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숭고한 사랑을 하고자 하는 그녀를 가로막은건 나다.
남들은 그녀를 훼방꾼이라 하겠지만, 아니었다.
" ......"
" 내가 지금 바쁘니 간단하게 답해주지. "
그가 마주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1분 후를 꿰뚫어찬듯 여유롭고도 서글픈 얼굴이었다.
" 합법적으로 살기 위해 당신들이랑 손 잡을 생각 없어. 무엇 보다, 결혼은 안돼. 왜냐면...
나한테는 OOO이 있거든. 그러니까, 합병 방식이 고리타분한 결혼이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보지. "
" ...... "
차갑기 그지 없는 말이었다. 내가 저 여자라면, 문전박대하는 남자를 매일 같이 찾아오는 정수정이라면 어땠을까.
김종인을 죽기 전까지 두들겨패진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르다. 정수정은 다르다.
" 좋아요, 우리 합병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거 겠죠. 하지만,
방식은 바꾸지 않을꺼에요. 내 목표는 당신과의 결혼이니까. 이만큼 안전한 결속도 없잖아요? "
타당한 말로 포장된 그녀의 고백에 김종인은 헛웃음을 치더니 나를 이끌고 나서버렸다.
그녀는, 내게 부질 없는 삶의 의미를 부여한 이 남자를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런 모욕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저녁을 먹는 내내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딫히는 소리만 그윽했다.
그리고 접시 안의 내용물이 비워질 때 즈음,
" ...OO아. "
그의 다정한 부름에 두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올리면 반쯤은 넋이 나간 그가 나지막히 물어왔다.
" 너도...너도 그렇겠지, 내가 이 결혼, 하지 않았으면 하겠지. "
" 응. "
순간 화색이 돌아 나를 마주하는 그를 향해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 아직은. "
" ...아직은 이라니. "
마른 침을 삼켰다. 저 손에 쥐어진 것 중 어느 게 덜 아프려나. 진짜 던질까?
" 너를 사랑해주는 것도 좋지만, 너가 사랑하기도 하는 여자랑 결혼해. 이왕이면...정수정 그 여자가 좋고. "
그 말에 잠시 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의외로 들려오지 않는 괴음.
대신 들려오는 허탈한 웃음소리.
" 나가봐. "
" ...... "
" 내가 지금 너한테 이 칼 던지기 전에, 그냥 나가달라고. "
억누른 듯한 목소리에 천천히 일어서서 나와 대열을 이루는 다섯과 방을 나섰다.
그리고 내가 나간 그 방에서 그는, 손에 집히는 것들은 모조리 내던져 깨뜨리며 울부짖었다.
" 왜...왜 넌... "
그리고 점점 그 소리들이 멀어져 갈 무렵, 창 밖을 내다보던 박찬열이 중얼거렸다.
" 내일도 미친듯이 뛰어다녀야겠네, 누구 잡으러. "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를 사방으로 둘러싸 익숙하게 대열을 이룬 이 다섯은 조용했다.
" 변백현. "
" 왜, 아가씨? "
" 내일은 칼 안쓸게. "
"...그래. "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 원한다면 목숨을 끊어 잡지 못하게 하면 됐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들에게 온전한 집으로 붙들려 오는것이, 내 숨통을 죄여오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그에게 붙잡히는것이.
온 살이 떨리도록 싫으면서도, 나는 몸에 익숙해져있었다.
내 도망은 더 이상, 온전히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짙어져가는 정으로 그들을 내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수단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