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tney Spears - Baby One More Time
그는 나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가졌다.
나는 그런 그의 끊임 없는 집착에 시달렸다.
우리들은 이미, 서로 정반대의 끝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 부터.
온 몸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온 신경은 나지막히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땀으로 번져가는 몸은 바짝 긴장해져 있었고, 난 그들의 시선을 피해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긴장감이 온 몸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숨을 몰아쉬듯 움직이고 있었다.
" ...5층 비상구 이상 무. "
귓가를 강타하는 목소리. 고개를 조금 올려 그를 쳐다보면 그는 대충 훑고 이 곳을 지나간다.
점점 멀어져가는 소리에 안도하는데, 이내 들리는 목소리.
" 아가씨, 실력 많이 늘었네. 예전 같았으면 금방 잡혔을텐데. 그래서 우리가 애 먹고 있긴 하지만. "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 6시에 신라호텔 카페에서 만나요. 적어도 6시까진 잡히지 않아줬으면 좋겠네요. '
손에 와닿는 감촉마저 낯선 핸드폰 액정을 보며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녀가 몰래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
그 여자의 속셈은 가늠할 순 없었지만, 왠지 이 지칠대로 지친 굴레 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나를, 그리고 나에게서 그들을.
그 때 숨을 몰아쉬던 변백현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 근데 말이지, 아가씨는 늘 잡혀. 처음엔 나도 그냥 허술해서 그러나보다 싶었는데 말이지. "
그리고 웅크린 내 몸에 검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고개를 치켜들면 보이는 땀에 젖은 채 웃고있는 그.
" 매번 이렇게, 쉴 새 없이 도망가도 누군가 잡아주길 바라는 거...아니야? 그리고 그게... "
그는 내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움직였다.
" 이왕이면 우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거고. "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핸드폰 불빛 사이로 5 : 54 라는 숫자들이 아른거렸다.
그는 조금씩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하지만' 이라는 말과 함께 윗입술을 훑었다. 그리고는 살짝 떨어지며,
" 난, 그게 우리가 아니라...나 혼자였으면 좋겠는데. "
의미심장하고도 속이 뻔한 말에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는데,
" 잡히기 싫어서 도망치는거야? 아니면...대답하기 싫어서 도망치는거야? "
그리고 난 그런 변백현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하고는 그를 밀쳐내고 도망쳤다.
" 잡히기 싫어서. "
정신 없이 그들을 피해 도망치고, 어느 새 이상하리만치 반대쪽이 소란스러워질 무렵.
그와 스쳤던 입술이 붉고 뜨겁게 달아오를는 것만 같았다.
" ...... "
내 앞에 앉은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무뚝뚝히 쳐다보는 날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 오늘은 도망이 꽤 수월했죠? "
" 용건. "
내 짤막한 대꾸에 잠시 미간을 좁히고 웃던 그녀는 천천히 글라스 테두리를 검지로 쓸며 말했다.
" 손을 좀 써뒀어요. 금방 끝나겠지만. "
" 그러다 김종인한테 어떤 말을 들으려고? "
" 걱정마요, 입막음은 철저히 시켜뒀으니까. 그나저나... "
"......"
" 난 OOO씨가 어떡할지가 더 궁금하네요. "
" ...뭘."
" 당신 이력을 조사했어요. 20살때부터 만나 관계를 유지했죠. 그 동안 그 사람 그늘 밑에서 살았구요. "
그녀가 하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말을 가로채거나 끊을 수 없었다.
" 당신은 사회로 나오자마자 철저히 그 사람 그늘 밑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벗어난다면? 그 후는 생각해봤어요? "
말문이 막혔다. 두 손에 말라가던 땀이 흥건해지고 꿰뚫어보는 듯 한 두 눈에 숨이 막혔다.
" 그건... "
" 계획이 없을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아마 벗어나자마자 햇빛에 타죽거나 도로 붙들려가겠죠. "
" 혼자 살 수 있어. 어디서든... "
"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이 도망칠 수 있게. "
믿기지 않는 말에 눈길을 피했던 그녀를 직시했다. 무슨 수로? 김종인에게 미운 털이 박힐지도 모를텐데.
아니, 그 손에 어떻게 보복 당할지 모르는데.
" 물론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정체는 들키지 않을거에요, 그리고 완벽하게 그 사람 품에서 벗어나게 되면. "
" ...... "
" 철저히 죽은 사람처럼 살아줘요. 그 사람이 괜한 미련에 당신 찾지 않도록. "
" ...... "
여유롭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굴욕적이라는 듯 잠시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물어왔다.
" 해볼만 하잖아요? 죽은 사람처럼 사는 건, 내 도움을 받지 않고도 해야하는 거고. "
여유롭게 말을 잇는 그녀의 유려한 얼굴선을 곁눈질로 훑었다.
절실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사랑.
그게 바로, 내 눈 앞에 앉아있는 정수정이라는 여자가 품은 감정이었다.
" 내가 어디까지 참아줘야 해. "
만남을 끝으로 다시 그들에게 붙들렸다. 바짝 긴장한 그들을 뒤로 둔 채 얼얼한 뺨에 손을 얹었다.
" ...참지마, 그냥. "
입 안이 터진 듯 안에서는 비릿한 맛이 진동을 했다. 그는 내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 참지 말라고? "
" 그래, 그냥 참지마. 그러니까... "
" OOO. 너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덜 됬나본데. "
" ...... "
" 내가 안 참으면 넌 그 두 발, 잘려. 알아? "
" ...... "
김종인은 화를 다스리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고 나를 스쳐갔다.
그리고 미쳐 말리기도 전에,
" 누가 놓치라고 했냐. "
점점 높아지는 언성과 함께 발길질에 뒤로 넘어간 도경수를 보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 ...보스, 그게..."
" 입 닥치고 있어. "
" ...... "
그리고 천천히 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변백현 앞이었다. 순간 온 세포가 요동쳤다.
무뎌졌던 윗입술의 달아오르는 통증이 다시 돋아날 무렵, 김종인의 손이 높이 그의 뺨을 고정한 채 올라갔다.
" 보는 앞에서 놓치지는 말았어야지, 안 그래? "
" ...... "
난 여태껏 내 도망으로 이유 없이 맞고 다치는 그들을 옹호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정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나중에는 내 옹호로 오히려 그들이 더욱 다칠까봐였다.
하지만.
" 그러지마! "
" ...... "
" 하지마...내가 잘못했어. "
내 걱정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김종인의 얼굴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어려있었다.
내 옹호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내 걱정대로.
" 뭐 있었구나. "
" ...그런게 아니잖아. 제발..."
"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확실하네. 더 들을 필요도 없어. "
" ...... "
" 니네들, 나가. "
그의 말에 모두들 경직된 듯 멈춰섰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 나가라고, 다들! "
그리고는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 참아주는 것도 이젠 한계야, OOO. "
그는 더 이상, 내가 오래 전 알던 김종인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예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