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
날이 밝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학교였다. 졸업한 후 한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 거의 이십년 만에 찾아 온 학교는 겨울방학을 맞이한 듯 했다. 항상 왁자지껄하던 운동장은 사라지고 한가득 쌓여있는 눈만이 학교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푹푹 패이는 눈을 밟으며 학교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학교는 생각보다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외관만 조금 깔끔해졌을 뿐 우리가 처음 만난 교실의 위치도, 몸이 약해서 체육시간마다 네가 앉아 있던 등나무도, 항상 같이 가로지르던 운동장도 모두 그대로였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옛 생각에 코가 시큰해 질 때 쯤 나는 이곳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은행나무였다. 그것은 신기할 정도로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땅 위로 튀어나온 굵직한 뿌리들과 굵게 치솟은 가지 위에 누런 은행잎 대신 놓인 흰 눈은 내 열여덟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눈을 하고선 그것으로 향했다. 폭설로 높게 쌓인 눈 때문에 발을 딛는게 힘들어서 몇 번이나 넘어지는 바람에 옷이 조금 젖긴 했지만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무의 두꺼운 뿌리 사이 빈 공간에 멈춰 선 나는 두껍고 차가운 나무 껍질을 쓰다듬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를 확인함과 동시에 온 몸이 얼어붙었다. 너와 나였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맨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있는 열여덟의 우리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보통의 남자 고등학생들의 하굣길은 여느 사춘기 남자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떠들썩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말 한마디 꺼내지도 않고서 매일을 나란히 걷고있었다. 나는 이제서야 알았다. 마땅한 대화랄 것도 없이 누가보면 참 지루하겠다 싶은 나란한 걸음을 우리 중 그 누구도 불편히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저 우리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주보며 하는 대화는 없었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곳을 보며 걸었고 같은 곳을 향해 걸었다.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정적을 사이에 둔 나란한 걸음을 사랑했다.
어느 새 열여덟의 우리는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나무를 마주보았다. 언제나 조용한 겨울의 나무를 한참동안 쓰다듬고 바라보다가 팔을 뻗어 천천히 그것을 안았다. 몇백년을 산 나무를 내 팔로 완전히 안는 것은 턱도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힘을 주어 그것을 안았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제가는 만나게 되어 있단다.' 동화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너는 우리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나에게 저 말을 전하고 싶어했다. 너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고, 나 또한 놓지 않았다.
"경수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너의 이름은 뿌연 입김과 함께 공중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의 가장 찬란하던 나날을 함께 만들어 갔던 너의 얼굴, 손짓, 표정……. 그리고 너. 나는 나무를 더욱 끌어안았다. 마치 나무가 너인 것 마냥.
"사랑한다."
열여덟의 나는 항상 내 옆에 있던 너를 사랑했고 지금의 나는 내 청춘의 가장 빛나던 나날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아직도 나의 청춘과 너의 찬란한 인영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허공에 부유하던 마음을 전하며 웃을 수 있었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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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팔랑귀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