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굵어졌다. 작업 끝내고 집으로 온다는 메시지가 9시. 지금은 9시 40분.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현관 앞을 서성이며 마중을 나갈까,
망설이다 엇갈리기라도 하면 양쪽 다 고생이니 포기하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틀었다. 예쁜 기상 캐스터가 어제에 이어 소나기가 며칠 더 내릴
전망이라며 외출 시 우산을 챙길 것을 당부했다. 한숨을 쉬며 서랍장에서 옷가지들을 꺼내어 욕실 수건걸이에 걸어 두었다. 기상 캐스터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내가 아는 김남준이 외출 시 우산을 챙길 리는 없다.
초인종이 울렸다.
열린 현관문 사이에 역시나 물에 담갔다 뺀 듯 푹 젖은 김남준이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으억 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털고 서 있다.
“작업실에 남는 우산도 없었어?”
“나올 때만 해도 별로 안 내렸었는데 버스 내리자마자 갑자기 어엄청 쏟아지잖아요. 어우, 내 가방”
“일단 씻어”
“아니 이거 여기 먼저”
“내가 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물 다 떨어지잖아”
욕실로 남준을 밀어 넣고 식탁 위에 수건을 깔았다. 그 위에 온 몸으로 사수를 하긴 한 모양인지 물기가 덜한 가방을 올렸다. 제일 중요할 휴대폰이랑
노트를 먼저 꺼내고, 렌즈며 목 아플 때 먹는 약이며 마구 뒤엉켜 있는 물건들도 차례대로. 도대체 이건 왜 들고 다니세요? 칼날은 없고 플라스틱 몸체만
아련하게 남은 면도기를 들여다보며 혀를 차는데 욕실 문이 달깍, 열리고 목소리만 날아온다.
-자기 나 입을 거 있어요??
거기 걸어놨잖아, 웬수야! 소리치니 아하! 하면서 문을 닫는다. 곧 물소리가 들린다.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가방을 널어두고 거실로 들어와 방바닥 물기를 대충 닦아내는데 목에 수건을 두른 남준이 욕실에서 나온다.
검정 티셔츠에 검정 트레이닝 바지. 바지 사이즈는 맞는데 길이가 안 맞아 끝단이 발목 위로 바싹 올라와 있는 건 또 봐도 웃기다.
“어우 무슨 비가 이렇게 와? 우산 하나 사야겠네.”
“비 그치기도 전에 잃어버릴 걸 뭐 하러 사?”
“…역시 그런가? 챙겨 다니기 귀찮기도 하구, 그쵸?”
저렇게 눈치 없는 김남준이 지하철과 버스에 뿌린 안경이랑 우산을 회수하면 그걸로 한 철 장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안경은 값이 나가니까 어떻게든
안 잃어버리려고 노력하는데 우산은 아예 잊고 산다. 일회용이든 한 손에 쥐어지는 작은 우산이든 챙겨줘도 함께 쓸 때가 아니면 어김없이 빈 손이다.
처음에야 걱정이 먼저였지만 이제는, 이제는!
자기가 하겠다며 내 손에 들린 걸레를 빼앗아다가 나를 등지고 쪼그려 앉는다. 물끄러미 뒷모습을 보는데 검정 등판이 뭔가 이상하다. 가만히 살피니
물기가 잔뜩 번져 있다.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
“등! 좀! 제발! 쫌!!!!!!!!!!”
말이 끊길 때마다 짝 소리가 나게 등을 때렸더니 남준이 벌떡 일어나 악 악 거리며 몸을 비튼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대체 왜 등짝을 안 닦는 건데?”
“아, 그게 아니고, 금방 마를 건데,”
“금방 마를 건데 뭐 하러 닦아? 그럼 어차피 배고플 거 밥은 왜 먹어, 어차피 죽을 거 왜 살어??”
“어, 윤기 형도 똑같은 소리 했었는데”
“…농담하냐, 지금?? 감기 걸리면 또 얼마나 고생하려고 그래, 진짜!!”
투덜대는 나를 보던 남준이 빙글 웃는다. 이게 웃어? 이번엔 팔뚝을 때리려는데 손목을 가볍게 잡아챈 남준이 제 목에 걸려있던 수건을 손에 쥐어준다.
“그럼 닦아줘.”
나는 팔 안 닿으니까, 자기가 닦아줘요! 뻔뻔하게 등을 돌리고 선 남준을 한참 노려보는데 몸을 막 펄럭거리면서 나를 재촉한다. 진짜, 애도 아니고.
티셔츠 안으로 수건을 넣어 물기를 꼼꼼히 닦아냈다. 젖은 거 입고 있으면 안 되는데, 옷장에 입을 만한 게 더 있나 잠시 생각하는데, 김남준의 마른
등판이, 새삼스럽게 넓어서, 참 어이가 없게도, 안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
“백허그 하면 신고 할 겁니다.”
“아, 안 할 거거든?!!??!!?”
쓸데없이 눈치는 빠른 김남준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 그런다. 뜨끔해서 얼른 남은 물기를 닦고 남준의 어깨에 수건을 던지다시피 걸어두고 돌아섰다.
소파로 가 앉으려는데 순간 허리께와 등 뒤가 따뜻해진다.
“그럼 내가 해야지 흐흐”
남준이 상체를 웅크려 내 어깨에 턱을 괴고 내 등을 가까이 당겨 안았다. 스텝을 밟듯 왼쪽 오른쪽으로 함께 흔들거릴 때마다 덜 마른 밝은 머리칼이
목에 닿아왔다. 샴푸 향기와 남준의 체취가 은은히 느껴졌다. 하여간 이 능글맞음을 이겨낼 수가 없다.
“신고 할 거야, 김남준”
“…잡혀가는 김에 더 해야지”
목덜미에 진하게 입 맞추는 남준을 요리조리 피해보지만 결국 전보다 더 꽉 붙들린다.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나던 빗소리가 갑자기 로맨틱하게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다.
/
모든 것은 이 사진 한 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털썩)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