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오사카 밤의 미덕 일본에서의 여름 밤은 꽤 습하고 더웠다.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루종일 근처 쇼핑 센터에서 돌아다닌 걸 떠올리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김태형이란 게 차라리 혼자 왔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게 했다. 수도꼭지를 돌려 잠근 후에 머리카락을 주욱 쓸어올렸다. 이마 위로 축축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다닥다닥 붙었다. 습기로 흐려진 욕실이 거울에 비쳤다. 나가기 싫다. 속으로 생각하던 건 속으로만 삼키고 걸려있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었다. 생각해 보니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갈 때 입을 옷을 안 들고 들어왔다. 김태형을 불러서 부탁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그닥 그런 부탁까지 할 정도로 매끄러운 사이가 아닌데. 얼굴 보기도 좀 껄끄러운, 아직 그 정도 사이. 벗었던 옷을 주워 입을까 했지만 그건 성격 상 못 참을 것 같았다. 결국 하는 수 없이 티비를 보고 있을 김태형을 불렀다. "김태형, 태태야." "엉?" "가운 좀 가져다 줘." "엉, 알았어." 다행이다, 무난하게 부탁한 것 같아서. 밖에서 잠깐 옷장을 열었다 닫는 소리를 내던 김태형이 욕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욕실 문 옆에 놓인 휴지가 안 끼이도록 천천히 문을 열었다. 김태형이 내쪽으로 가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샤워하면서 옷을 안 가지고 들어가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런가." 욕실 바닥을 보고 얘기하던 김태형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하며 손을 뻗어 가운을 붙잡았더니, 김태형이 가운을 꽉 움켜쥐었다. 뭐냐는 눈빛으로 김태형을 올려다보니 김태형이 나머지 한 손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꼭 내가 헐벗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나와야 하냐는 생각을 할 때 쯤이었다.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 우리 얼굴 맞대고 얘기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러네. 근데 나 이거 입어야 되는데." "아, 맞다. 미안." 김태형이 그제서야 한 발 물러서서 문을 닫았다. 벗은 놈이랑 얼굴 맞대고 얘기도 하다니, 속도 좋다. 전혀 불편하다, 이런 상황은. 누구라도 외국으로 휴가 나와서 만난 첫사랑을 반가워 할 리가 없을 텐데. 그것도 좋게 헤어진 것도 딱히 아니었던. 잠깐 생각을 멈추고 가운을 팔에 걸쳤다. 꽤 폭신폭신한 게 기분까지 좋아지려는 것 같다. 꽤 개운한 샤워를 마친 후에 맥주를 마시려던 게 내 계획이었는데. 머리를 툭툭 대충 털면서 나와 김태형의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맥주 마실래?" "응." 김태형과는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알고 지냈었다. 그러다가 이학년 때부터 사귀게 됐었는데, 결국 삼 년 정도를 사귀고 헤어졌다. 쌍방 과실이었는데 서로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생각 안 하려고 했는데. 김태형이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건네 하나를 내쪽으로 건넸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아사이 맥주. 일본에서 먹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잘 됐다." "어, 고마워." "뭐하고 지냈어?" 그냥, 이것저것. 일에 치여서 바쁘게 지내다 나온 휴가에서 김태형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속으로 생각하며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바쁜가봐, 연락 한 번 안 한 거 보면." "응, 조금." "사실 네 생각 자주 났었어." "그래?" 응. 김태형의 말에 조금 짜증이 났다. 꼭 헤어진 첫사랑 찾아와서 다시 잘 시작해 보자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난 아닌데. 눈을 피하며 맥주를 들이키자 김태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숨을 확 들이키고 이마를 짚는다. "있잖아. 내가 생각해도 그 때 내가 진짜 미친 것 같아." "알긴 아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그런 말할 거면 그냥 가." 지민아. 짐짓 굳은 표정의 김태형이 나를 불렀다. 듣기도 싫고 마주치긴 더 싫다. 쉽게 하는 사랑이 사랑일까. 그딴 것도 사랑이라 하는 걸까. 목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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