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번외 둘. 역할 반전
부제 : 평행 우주를 믿으시나요?
“작가님!”
“아, 막내 피디님이시구나.”
“여기요, 커피. 오늘 녹화도 너무 잘 봤어요.”
“저 커피 안 마시는데…….”
“작가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커피까지 마다할 만큼?”
“그런 건 아니고 제가 정말로 커피를 잘 안 마셔서…… 미안해요.”
“그럼 작가님은 커피 대신 뭘 좋아하시는데요?”
“피디님, 죄송한데 이러시는 거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워요.”
또 시작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이 프로그램의 막내 피디라는 여자는 틈만 나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관심사는 무엇인지를 묻고 저 혼자 대답하기 일쑤였다. 처음엔 그냥 심심한 사람 구제한답시고 대답해줬지만, 사람이 정도라는 걸 알아야지. 거의 한 달간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냥 물어보는 건데. 궁금해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자몽 에이드요.”
“자몽이요? 저도 자몽 들어간 거 다 좋아하는데!”
“그러시구나.”
“잘 어울려요. 작가님이랑 자몽.”
이래서 내가 방송 출연을 안 하겠다고 했던 거야. 작가 주제에 방송 출연해서 괜한 소리를 듣는 것도 싫었고, 내 일상에 의미 없는 인간관계가 자꾸만 늘어나는 것도 싫었다. 이런 식으로 만난 사람이 내 인생에 마음대로 끼어드려 들 때는 또 얼마나 신경질이 나는지. 이 여자가 딱 그런 사람의 표본이었다. 얼마 전 신간이 나왔으니 홍보차 토크쇼에 나가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편집장의 끊임없는 설득에 결국 출연을 마음먹기는 했지만, 첫 녹화도 하기 전에 열심히 해보려던 나의 의지를 꺾은 것도 이 여자였다. 책의 내용을 다 꿰고 있는 걸 보아 내 소설을 읽어 주는 고마운 독자 중 하나인 건 알겠는데, 자꾸만 사랑이니 뭐니 하며 딴지를 걸어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 연주 피디도 황 작가님 소설 다 읽어봤지?
― 당연하죠!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었어요. 저 작가님 팬이거든요.
― 마침 잘됐네. 그럼 연주 피디도 한마디 해. 책 어떻게 읽었는지. 그래도 되죠, 황 작가님?
― 그럼요.
되긴 뭐가 돼. 그 사람들은 애초에 내 생각을 들어볼 마음조차 없었던 거다. 무슨 말만 나오면 본인들끼리 웃고 떠들고 말하고 그걸 또 들어주고. 한마디로 이연주 그 여자가 나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꼼짝없이 듣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평가를.
― 우선 작가님 소설은 믿고 읽죠. 재미가 없는 적이 없었으니까요. 추리소설 하면 황민현 작가님을 따라올 작가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 별말씀을요.
― 그런데 딱 하나 궁금한 점이 있어요. 작가님을 만나 뵐 기회가 되면 언젠가 한 번쯤은 여쭤보고 싶었던 건데, 지금 해도 될까요?
― 네? 네…… 하세요.
― 왜, 그렇잖아요. 다른 추리소설들 보면, 아무리 장르가 그쪽이라고 해도 러브라인 하나쯤은 다들 설정해두기 마련인데, 작가님 소설은 유독 사랑에 박한 것 같아서요. 사랑 없이도 충분히 재밌는 건 인정하지만 시리즈가 끝나가는 이 시점까지도 사랑에 대한 아무런 암시가 없는 게 궁금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 질문을 받고 난 직후에는 어떻게든 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연주라는 막내 피디가 편집을 맡게 될 거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 앞에서 고작 사랑이나 운운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피디님. 피디님께서는 사랑을 믿으세요?
― 네. 당연히 믿죠.
― 저는 딱히 안 믿거든요. 특히나 추리소설에서는 사건의 단서나 이야기의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사랑 따위를 그려내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 사랑…… 따위요?
― 말이 너무 심했나요? 뭐, 아무튼 그쪽 장르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 사랑 이야기가 보고 싶으신 거면 로맨스 소설을 찾아 읽으시면 될 것 같아요.
대충 좋게 이야기하고 마무리할 수도 있는 대화였지만, 너무나도 해맑은 얼굴을 하고는 내 심기를 건드려대는 이 여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전미팅이니 이 미팅만 끝나면 프로그램을 고사하기로 했다고 정중히 말해보려던 나의 계획은 곧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엔 그렇게 느려터진 사람들이 왜 꼭 이런 일에만 열심인 건지, 회사에 연락을 해보니 이미 끝난 계약이라고 했다. 프로그램 하차를 위해서는 위약금을 두 배로 물어내야 한다고. 망연자실한 채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생각했다. 내 인생에 다신 없을 끔찍한 악연의 시작이겠구나, 하고.
“작가님, 오늘도 저녁에 약속 있으세요?”
그리고 오늘도 이 악연의 주인공은 지치지도 않고 나를 괴롭혀왔다.
Corinne Bailey Rae - Another Rainy Day
“네. 아쉽게 됐네요.”
“내일은요?”
“내일도요. 점심에 있던 약속이 저녁으로 미뤄져서 안 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 정말요? 그럼 점심에는 시간 괜찮으신 거예요?”
“……네?”
“이렇게 허술하신 분이 추리소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쓰시는지 몰라.”
“…….”
“내일 점심에 봬요. 시간 너무 오래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저 여자의 끊임없는 두드림에 철저하게 세운 방어막이 허물어질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마음의 문을 더 단단히 동여맸다. 사랑 없이도 멀쩡한 내 삶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게.
***
“저 작가님한테 궁금한 거 있는데.”
“이번엔 또 뭔데요.”
“여쭤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해도 물어볼 것 같은데. 궁금한 게 뭔데요.”
“그렇게 삐딱하게 살기 안 힘드세요?”
대충 예상 가능한 질문들이 몇 개 있었다. 내가 그렇게 싫으냐부터 시작해 정말로 사랑을 믿지 않느냐, 비혼주의자냐와 같은 사사로운 질문들. 첫 만남 때부터 팬이라며 친한 척을 하는 건 기본이었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니 다른 출연진들과는 눈에 띄게 나를 가장 챙기는 모습을 보였으니 딱 봐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고, 대부분은 한 번쯤 거절당하고 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거리를 두기 마련인데, 이 여자의 사전에 포기란 없는 듯해 보였고. 그래서 나에게 던져진 저 질문이 더욱 아니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삐딱하게 살기 힘들지 않냐니. 삐딱한 세상에 올곧게 서 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할 말로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별로요. 적어도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는 피디님보다는 덜 피곤하게 사는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어차피 참견한 김에 조금만 더 참견할게요. 사랑을 왜 안 믿어요? 제가 몇 년간 매체에서, 또 한 달간 현장에서 작가님을 지켜본 바로는 그 누구보다 사랑이 필요해 보이셔서 묻는 거예요. 외로워 보이던데.”
“사석에서 만나니 방송국에서는 차마 못 했던 말들을 막 내뱉나 본데, 막내 피디님 막 나가는 거 위에서도 다 알아요?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나?”
“……외로워 보인다고요. 작가님 기분 상하게 할 생각 없었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할게요. 걱정이었어요, 비아냥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
“쓸쓸해 보여요. 온기가 없는 사람처럼 한없이 차갑고, 날카롭고.”
“…….”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누구보다 잘나 보이는 작가님이 누구보다 위협적인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는 이유를요.”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귀찮게 굴었나 봐요. 뭐라도 알아내려고.”
“네. 그런데 한 달쯤 해보니까 그 방법도 안 통하더라고요.”
“이제야 좀 포기하려나 보네요.”
“아니요. 이제는 이해를 해보려고요. 뭐,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렇게까지 세게 말해도 포기라고는 모르는 참 지겹고 독한 여자였다. 나를 이해하긴 뭘 어떻게 이해하겠다는 건지. 무엇보다도 내가 당신의 이해 같은 걸 바라지도 않는데.
“제가 작가님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굴고 오지랖 부렸던 건 사심으로 그랬던 게 맞는데요, 어쨌든 같이 일하게 된 동료로서 딱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진짜 마지막으로.”
“하세요.”
“생각이 많아 보여요. 고민도 많아 보이고. 꼭 제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걸 작가님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게 항상 좀 그래요. 자꾸 도와주고 싶어져요.”
“…….”
“이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 가시도 좀 치우고, 경계도 좀 풀고.”
이해를 해보겠다더니 결국 돌아온 건 한층 더 깊어진 간섭과 오지랖이었다. 작가 일을 시작한 이래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유명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까지의 과정이 그 어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치열하고 치사한 이 바닥에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건 곧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뻔뻔해져도 모자랄 판에 괜히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 따위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직 낯설고 불편한 방송국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이런 말을 공적으로 하시는 거면 피디님은 출연자 한 명 한 명에게 이러고 계신 건가? 위에서 출연자 관리 좀 하라고 시키던가요?”
“네? 그런 거 아닌데. 작가님이 처음인데요. 물론 앞으로도 다른 분들까지 챙길 생각 없고.”
“동료로서 공적으로 하는 말이라더니, 지금 되게 사적인 거 아세요?”
“그런가. 그럼 그냥 사적인 대화였다고 치죠. 그리고 다른 분들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시거든요.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피디님이 저에게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간섭하고 계시다는 생각은 안 하시고요?”
“제가 작가님을 사적으로 대하는 게 싫으시면 걱정 좀 안 하게 해주세요. 자꾸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과하게 날카롭게 굴지도 마시고.”
“사연이 있으면 어떡할 건데요. 또 그딴 사랑이나 운운하며 가르치려 드시게요?”
솔직히 사랑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동료 작가들만 봐도 허구한 날 사랑 타령을 하기 일쑤였고, TV를 보든 음악을 듣든 간에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데 그걸 내가 부정할 이유가 뭐 있겠어. 그럼에도 내 인생에는 사랑이 끼어들 틈 하나 없다고 확신했다. 나 혼자 성공해 바쁘게 살아가기에도 바쁜 와중에 여유롭게 사랑이나 찾아 헤맬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깟 사랑 하나 없이도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온 나였다. 누군가는 염세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를 이러한 생각들은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던 몇 번의 연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딴 사랑이라뇨. 사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굴어가며 작가님이 지키고자 하는 게 뭔지 참 궁금하네요. 사랑을 믿지 않는 작가님이 안쓰러워요.”
“…….”
“도움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 거절하시는데, 제가 뭘 더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뭘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요.”
“제가 작가님의 팬인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정확한 내막까지는 모르더라도 평소에 작가님을 지켜봤으니 이쯤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지, 생판 모르는 피디 만났더라면 엄청 고생했을 거예요. 그 피디든 작가님이든 두 쪽 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굴어가며. 생각해보면 그런 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자존심 정도? 어리바리하던 20대 초반을 지나 나름의 경력을 가진 작가로 활약하고 나서부터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빠르게 판단해 각각의 사람들에게 나름의 반응을 보이는 것. 완전한 내 편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언제나 가면을 쓴 채 행동하곤 했다.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게, 다정하기보다는…… 재수 없게.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까칠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연주 피디는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보다는 더 호의적으로 대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도 금방, 아니야. 먼저 오지랖을 부린 건 저 여자였잖아. 이 정도 선은 그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하는 생각이 오가기도 하고. 도통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소 예외적으로.
“좀 심하게 말한 건 인정할게요. 공적으로는 함께 일하게 된 분이시고 사적으로도 뭐…… 제 팬이라고 하시는데 제 기분대로 행동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셨으면 됐어요. 어, 음식 나왔다.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까,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원래 저 좀 잘 봐달라는 의미에서 드리는 뇌물이었는데, 딱히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켁.”
“괜찮으세요? 여기 있어요, 물.”
“괜찮아요.”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이렇게까지 뻔뻔하기 참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패기로운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식사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힘들었다.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어떠한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끼지 못해 묵묵히 밥이나 삼켜내고 있는 와중에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근데 약간 위치가 바뀐 것 같다. 보통 출연자가 피디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잖아요.”
“그래서 억울하신가 봐요. 그런데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저도 마찬가지라.”
“제가 초래한 일이니 억울하면 안 되는 거 잘 아는데, 살짝 그렇네요.”
이제야 어색함이 좀 사라지나 싶어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던 것도 잠시, 시답잖은 몇 마디를 끝으로 대화가 끊겨버린 탓에 나는 다시금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미 다 잘린 고기 조각을 더 잘게 자르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작가님 혹시 평행 우주 같은 거 믿으세요? 저는 믿는데.”
그리고 때마침 들려온 반가운, 아니, 익숙한 목소리. 평행 우주에 대해서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몇 번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여러 소설의 소재로 쓰이기도 할 만큼 흥미로운 이론이니까. 충분히 친절하게 대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무심한 태도를 일관하기로 했다. 이유는 없었다. 반응이 궁금했다고 해야 하나.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이 상황을 즐기게 된 것 같았다. 누군가의 오지랖 때문에 나의 가치관이 지적을 받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나의 성격을 간섭받으면서도 그것이 비난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피디님 생각보다 순수하시네요.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왜요, 이거 되게 철학적인 이야기거든요. 어딘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같은 시대, 같은 사람을 배경으로 한 다른 세계.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미는 있겠네요.”
“그죠. 만약 그런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작가님이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열심히 믿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또 엄청 다정하고 따뜻하고, 여기와는 다르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를 이곳의 평행 우주에서의 나는 어떠한 모습일지를 궁금해하는,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달리 어색하리만큼 다정하고 사랑 넘치는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하는 그런 생각을. 그랬더라면 지금 나에게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아리송한 이 여자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곳에서처럼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관심을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사이는 아닐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세계에서의 이연주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계속 말해봐요.”
“그곳의 작가님은 항상 누군가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시키지도 않은 위로의 말들을 건넸으면 좋겠네요. 이곳의 작가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다른 우주 속에서라도 그런 성격이면 재밌겠다, 이 말이죠. 그럼 내가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기도 하고.”
“나랑 이러고 있는 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네. 생각할수록 참 억울하고 그렇네요. 나름 공적인 사유로 불러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사적일 수도 없을 것 같고.”
“거봐. 제가 피디님 오늘 엄청 사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게요. 맨날 방송국에서만 공적으로 보다가 처음으로 사적인 자리 마련해서 솔직히 조금 설렜는데, 지금은 그냥 불편해요. 작가님한테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한 건 또 왜요. 밥 먹다가 이렇게 갑자기?”
“저도 몰라요. 제가 작가님을 좋아하나 봐요.”
방금 들은 게 고백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순식간에 지나간 말이었다. 분명 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관심은커녕, 오히려 나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고. 다짜고짜 잡힌 오늘의 점심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부탁에 억지로 끌려 나온 자리였고, 내내 나를 향해 내뱉어진 말들 모두 불필요한 간섭이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에 나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던 것일까. 저 여자 또 시작이네, 하고 넘길 수도 있었던 말에 나는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일까.
“팬심이랑 헷갈린 거겠죠? 죄송해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다 드신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날까요?”
평소 같았으면 척으로라도 친절하게 대해야 했을 피디님께 이유도 없이 차갑게 굴었던 것,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을수록 고맙긴커녕 약점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졌던 것, 별 고민도 없이 튀어나온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온갖 생각이 얼어붙은 것까지. 어쩌면 스스로도 유치하다고 느꼈던 모든 행동들이 한 번에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서른이 넘도록 나의 부족함을 탓한 적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 앞에 미숙하고 서툰 사람이었다.
“오늘 밥은 그냥 내가 살게요. 아까 괜히 심통 부리느라 표현을 그렇게밖에 못했지만 나름 좋은 이야기 많이 들은 것 같으니까.”
“그래도 제가 고집부려서 억지로 시간 내신 건데 어떻게 공짜로 얻어먹어요. 제가 살게요.”
“누가 공짜래. 커피는 피디님이 사요. 팬심이든 아니든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막 뱉어놓고 이렇게 헤어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내가 찝찝해서 그래요. 커피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봐요. 팬심인지 뭔지, 피디님한테 확신이 서면 나도 한 번 생각해보게.”
“작가님 저 엄청 싫어하시잖아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궁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
“그러니까 커피는 피디님이 사요. 2차 약속은 제가 잡은 거예요. 아주 사적인 이유로.”
평행하게 흘러가는 두 우주는 결국 만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각 우주의 시공간이 정신없이 뒤엉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말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잠시 다른 세계의 나와 통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세계에의 나는 사랑에 서툰 것이 맞았다. 애정 없는 연애를 몇 번 겪어온 탓에 진실한 사랑의 필요성도, 그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로 평행 우주 속의 내가 사랑에 있어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그 세계 속의 나를 만나 조금 더 다정해지는 법을, 다른 누군가를 조금 더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에게 처음으로 오지랖을 부려준, 처음으로 내 인생에 간섭을 하고 내 일상에 팔을 뻗은 이연주 피디라면 좋겠다는 이상한 상상까지도. 이 세계의 이연주가 사랑에 냉소적이던 나의 문을 두드린 것처럼, 다른 세계 속의 나는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이연주의 벽을 허물고 있지 않을까. 추리 소설만 써오던 나에게도 로맨스소설과 같은 일이, 어쩌면 그보다도 더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 본편과는 다르게 까칠한 황 작가의 모습이 보고 싶어 쓰기 시작했는데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수습하느라 살짝 힘들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결과물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나름 재미있게 썼던 것 같아요ㅎㅎ
++ 이제 정말 끝! 마지막 번외까지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곧 공지로 찾아뵐게요🙌 메일링 잊지 말고 받아가셔요:D
사담은 이곳에서:) |
저번 번외를 올리면서 다음 번외는 조금 더 일찍 가져올 수 있을 거라 말씀드렸는데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네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저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봐요. 원래는 콘서트 시즌에 부지런히 글을 써 콘서트 마지막날에 맞춰 완결을 지으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다 아실 거라 믿어요. 워너원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4일 간의 콘서트가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이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아파하는 모습을 며칠 씩이나 봐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마지막 콘서트가 끝난 지도 벌써 4일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사진이나 영상을 우연히라도 보게 되면 눈물부터 나더라고요. 하나의 워너원을 보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참 힘들겠지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더욱 멋지게 성장할 열한 명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웃어보려 해요.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도 저의 독자이기 전에 한 명의 워너블이실 테니 언제나 즐겁고 예쁜 것들만 보며 버티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을 닮은 너에게를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곧 후기 및 메일링 공지에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