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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 샤이니 온앤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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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플입니다.

항상 오백을 지지해주시고 더불어 제 글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에 올려놨던 글이 사라져서 당황하셨던 독자분들 계시면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여기 다시 올려놨으니까 더 재밌게 읽을 수 있게 복습할 기회로 삼으셨으면 좋겠네요 (소근소근)

다음 편인 완결인데 부족한 글이지만 예쁘게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트 

(암호닉 신청도 받구요! 신청해주시는 독자분들에 한해서만 메일링을 해드릴 계획입니다.)

이미 신청해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만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4편에 암호닉으로 댓글 남겨주셨던 분들도 메일링 주소 남겨주세요! 사랑합니다♥

양식 : [암호닉/메일링 주소]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1

[오백] 질투는 나의 힘
W. 리플(Riffle)

 

예고없던 폭우였다. 미처 우산을 들고 오지 못해 회사 건물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벌써 세번째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이 없었고 내 지갑은 얇았다. 나는 까끌까끌한 지갑의 표면을 매만졌다.
택시를 부를까 하는 생각은 일찌감치 막을 내린 채였다. 대한민국에서 돈없고 힘없는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중죄(重罪)였다.
나는 무거워진 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나는 철컹거리는 쇠고랑을 차고 있는 셈이었다. 기가막히는군. 그래, 내가 죄인이지.
누군가 소맷자락을 잡으며 내 발걸음을 돌려 세울까봐, 경수씨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말을 붙여올까봐 허겁지겁 비상구의 계단으로 뛰어내려온 터였다.
내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칼퇴근의 정석 도경수를 보며. 나는 하나 둘씩 회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등 뒤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머쓱하게 코를 만졌다. 신세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 본론으로 돌아온다면 나는 당장 집에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슬쩍 겁이 밀려왔다. 진짜 뛰어갈까. 아씨 머리 젖는 거 싫은데, 어떡하지. 알 수 없는 막막함에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머리에 가방을 얹고 뛰어가는 걸로 끝이 났겠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 '보통' 이라는 범주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멀쩡한 겉모습은 표준 남성과 같아보이겠지만 다들 속고있는 거였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보통내기가 아니였다.
고2 체육시간이 끝나고 누군가 내 책상에 올려놓았던 땀냄새에 절은 체육복을 주저없이 창문 밖으로 내던진, 체육복 주인에게 한 대 얻어맞고서 가방 안에 곱게 모셔놓았던 물티슈를 꺼내 한 시간 내내 책상을 박박 닦던 인간.
발렌타인데이에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게 나에게 고백을 해왔던, 그 쑥쓰러움 많던 여자애에게 눈썹정리 해줄까, 라며 흔한 여고생의 대사를 내뱉었던 인간.
엉엉 울던 여자애에게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던지 빨갛게 부어오른 왼쪽 뺨을 조심스레 감싸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아차렸다.
아, 내가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내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고 그의 절반 이상은 답 없는 결벽증이 두둑하게 한 몫했다. 그런 내가, 그런 도경수가 머리에 가방을 뒤집어 쓰고 빗속을 뛰어간다는 것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참을 서있던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내일 아침에 누구보다 빠르게 출근도장을 찍는 게 빠를 걸.

비는 습한 바람을 불러왔고 습기는 내 모공의 문을 두드렸다. 왁스로 빳빳하게 세워 올린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흘렀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계단과 수많은 대리석들에 부딪혀 사방으로 갈라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가 이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정처없이 나를 구해줄 왕자님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왕자님이든 넝마를 걸친 거지든, 누구든 나 좀 데려가줘.

인생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이 시대 최고의 명언이 아닌가.
누군가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어머, 마치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런 시덥잖은 말을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입에선 바람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오던 경비 아저씨에게 씁쓸한 웃음만 보여주던 것도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 다음의 버스는 막차였다. 까맣게 죽어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가방 안으로 쑤셔넣었다. 이렇게 있다간 먼저 감기로 몸져누울게 뻔했다.
경비 아저씨에게 우산이라도 빌려야겠다 싶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다 회전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구둣발에 튀기는 빗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와 정말.

도경수, 넌 참 대단한 놈이야.


*


네모난 프레임에 벚꽃이 한가득 담겼다. 햇빛을 정면으로 맞서며 백현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먼저 채갈까, 조금 우악스럽기까지 했다. 손목이 뻐근해졌다. 백현은 한참 들고있던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아, 오늘 사진 잘 나오네. 천천히 찍어놓은 사진을 넘겨보며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심지어 날씨까지 좋아, 씨발! 씰룩거리는 입을 가리며 우스꽝스럽게 끅끅댔다.
곧 야심차게 준비해온 사진전을 열어야 할 시즌이었다. 백현은 남은 시간을 어림잡아 빽빽하게 스케줄을 세웠다. 눈도장을 찍어놨던 곳에서 한 방 찍고, 그 날 밤엔 어디를 가고…
백현은 뒷목을 잘게 두드렸다. 저만치서 피곤이 들끓어 오를 것만 같았다. 일에 혈안이 되어있던 탓이었다. 눈을 느리게 감으면서 파란 하늘을 스캔했다.
봄이 너무 좋았다. 손을 갖다대기도 전에 부풀어 올랐던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 어떻게든 고개만 돌리면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는 계절.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이라 따뜻한 공기를 마시는 게 아무래도 다른 계절보다 좋았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까짓 손목 좀 아프다고 카메라를 쉬게할 순 없지. 백현은 손목을 가볍게 털고 백팩을 고쳐맸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위치한 작은 꽃집에 들어가 촬영의 허락을 받아냈다. 백현이 자세를 몇 번이나 고친 후에야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댈 수 있었다.
손바닥만한 화분이 줄 지어선 가게가 백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코가 시큰거렸다. 정말, 이런거 너무 좋아 진짜. 문득, 백현은 울고싶어졌다.
항상 그랬다. 조금이라도 설레는 감정을 넘어서면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예뻐서 울고싶어! 라며 외치는 것을 잊지 않고.
평소의 신경질적인 말투와는 달리 백현은 뼛속까지 소녀감성이었다. 유달리 마음이 여렸던 엄마의 영향이었다.
그 덕분에 백현은 다른 남학생들과는 다른 남고시절 보냈다. 짓궂게 놀려오는 친구놈들에게 앙칼지게 손톱을 세우면서까지 설레임을 지켜낸 백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하여튼 백현은, 여러모로 독특했다.
수고하세요, 가게를 나서는 두 손에는 어김없이 화분이 들려있었다. 엄마한테 갖다줘야지! 웬일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절정을 달렸다.

그럴까. 엄마한테나 갈까. 백현은 고심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도 찍었겠다, 다음 일정을 정해놓지 않아서 널널하게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빽빽한 건물이 들어선 도심에서 예쁜 사진을 찍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구장창 꽃잎만 찍어대는 건 백현의 성에 차지 않았다.
커피가 당겼다. 휘핑크림에 코를 처박고 달짝지근한 시럽의 향을 맡아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다 싶었다.
걱정은 커피 마시고나서 하지 뭐! 여기쯤에 누가 커피 잘하는 집 있다고 했었는데. 백현은 큰 길을 따라 쭉 걸어내려갔다.


*


희대의 미친놈을 만났다. 어쩐지 기분이 좋더라니. 역시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 틀린 게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현진건이 왜 운수 좋은 날이란 작품을 써냈겠는가.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백현의 두 손에 곱게 들려있던 화분은 몰골을 알아볼 수 없게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게다가 한 입도 대지 않은 비싼 콩다방 커피를 뒤집어쓴 채.
뒷걸음질 치는 발에 밟혀 잔뜩 뭉개진 꽃잎을 보며 백현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을 벌벌 떨며 깨진 화분의 조각과 흙을 쓸어담던 백현은 자신의 앞에서 어떡해, 어떡해! 라며 자신보다 길길이 날뛰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와 부딪히자마자 눈알을 굴리며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길래 어디 팔이라도 골절이 된 줄 알았는데. 수트 자켓에 묻은 휘핑크림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살살 걷어내는 모습을 보며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혈압이 상승하면서 뒷머리에 얼얼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옷에 묻은 커피 때문에 저 지랄을 하고 있는거야?
인정사정없이 미간을 좁힌 백현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냐며 말 한마디 정도는 건네려던 마음이 공중분해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분명 상대의 잘못이었다. 자신은 그저 따끈따끈한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카페의 알바생에게 인사를 받고 나왔을 뿐이었고 곱게 포장된 화분을 고쳐쥐려 잠시 손에 힘을 풀었을 뿐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백현의 어깨를 치며 뛰어가려던 남자와 커피가 충돌한 건 순식간이었다.
고로 나는 잘못이 없다 이거야.
"저기요"
남자는 내 말은 들리지 않는지 허얗게 질린 얼굴로 알아듣지 못할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래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겠나 싶었지만 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먼저였다.
백현이 다시 말을 걸려하는데 남자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벙쪄있는 자신을 두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너를 돌고 있었다.
저거 지금 도망가는 거 맞죠?!! 엉망이 된 자신의 가게 앞을 치우기 위해 나와있던 알바생이 얼떨결에 고개를 흔들어 보이자 백현 또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잡히면 뒤졌다.


*


어색하게 웃는 연습을 하던 얼굴이 이내 울상이 되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꼼꼼히 펴발랐던 썬크림아래로 다크서클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 나 이제 스물여섯이야"
맞선이 웬말이냐고. 경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전 무작정 집에 들어와선 맞선약속을 잡았다며 자리에 나가라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없이 결연한 표정이었다.
싫다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전에 등짝을 한 대 얻어맞고 집에서 쫓겨 나와야했다.
"빠를수록 좋은거지. 경수야, 엄마는 떡두꺼비같은 손자 보고 싶어"
집을 나서기 전 걸레질을 하던 엄마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고 나는 꼼짝없이 구두를 신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경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더 이상의 말은 위험했다.
번듯한 수트를 입고 현관문을 빠져나오면서 백 번은 넘게 고민했다. 가야할 것인가, 가지 말아야 할 것인가.
경수의 머리와는 달리 몸은 이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먼저 카페에 앉아 상대를 기다려야하는 게 예의였지만 약속시간은 3분 밖에 남지 않았고 정신없이 뛰어가는 와중에 누군가와 충돌했다.
"아 죄송…"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뛴 자신이었기에 멈춰서서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경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자리에 굳었다.
뭔가 축축한가 싶었는데 조심스레 내려다본 자신의 수트에는 휘핑크림이 버젓히 묻어있었다.
무언가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런게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경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경수는 손가락으로 묻어있는 휘핑크림을 살살 걷어냈다.
지저분 해, 지저분 해, 지저분 해!!
미치고 팔짝뛸 노릇이었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나있었고 그 상대는 퇴짜를 맞은 줄 알게 틀림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감을 느꼈다.
"나는 이제 죽었다"
약속도 약속이었지만 경수는 자신의 옷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했다.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머릿속을 재빠르게 굴렸다. 조금 전 지나쳐왔던 거리에서 세탁소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걸어왔던 동선을 파악하고선 앞뒤도 재지않고 뛰었다. 약속이고 나발이고. 나중에 가서 생각해도 될 일이라 판단했다.
코너를 돌면 되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경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저 앞에 세탁소가 보였다.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2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2

W. 리플(Riffle)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경수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업무 도중에 빠져나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신은 평소에도 야근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일처리가 워낙 꼼꼼하기도 했고 무슨 일이 생겼든 정해놨던 시간에 일을끝내고 마는성격 탓이었다.
물론 여기에도 다른 의미의 결벽증이 존재했다.
경수의 칼퇴근은 성실한 업무태도에 의해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경수에게 이런 상황은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저, 팀장님. 잠깐 볼 일이 생겼는데 외근으로 체크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난데없는 외근타령에 부장의 얼굴엔 물음표가 올라왔다. 무슨 있어 경수씨?
"아, 저 그게…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요"
눈을 꿈뻑거리며 한번만 살려달란 표정을 지으니 팀장의 얼굴엔 장난스런 웃음이 피었다. 평소 저를 좋게 평가해온 걸 알았지만 이런 부탁을 하기에는 오히려 경수가 불편했다. 지난번 회식 때 친하게 지내자던 팀장의 말이 얼핏 들려오는 듯 했으나 그래도 엄연히 자신의 상사였다. 경수는 슬쩍 팀장의 눈치를 보았다.
"오늘 제출하라던 보고서는 다 작성했습니까?"
"네. 점심시간에 책상에 올려뒀었는데… 못 보셨나요"
팀장은 그 말에 실실 웃으며 나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슬그머니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경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쩔 것인가.
아까 팀장을 보니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던데. 여자 만나는 줄 알겠지. 이제 모든 사원들이 자신에게, 소개팅은 잘했어? 라며 물어오는 상황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다 자신과 부딪혔던그 남자때문이었다.
변백현이라 했던가…. 경수는 엘리베이터 속 자신을 쳐다보았다. 우울함이 바닥까지 내려오는 듯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온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경수는 정말 제 명에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


"저기요!!!!!"
누군가 거칠게 어깨를 잡아챘다. 경수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돌렸다.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불러세운 상대를 쳐다보고선 이상하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좀 전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남자였다. 고지가 코 앞이었는데. 세탁소의 문을 반 쯤 열려다가 경수는 그대로 문을 두고 돌아섰다.
"흐,으아,죽겠다"
무릎에 손을 짚으면서 혀를 내밀어 헥헥 대는 꼴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귀엽네. 경수는 흐뭇하게 웃다가 흠칫 물러섰다.
내가 지금 뭐라고 그런거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굴리고 있는데 별안간 백현이 고개를 들어 경수를 노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
"달리기 잘하시네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예?"
미친. 영구 박터지는 소리하고 있네. 백현은 코웃음을 치며 하얀 봉투를 경수의 품에 떠다밀었다. 주춤거리는 모습에 슬슬 짜증이 올라섰다.
"예? 라고 대답하면 내가 섭하지"
짝다리를 짚으며 달달 다리를 떠는 모습을 보다가 경수는 봉투 안을 살폈다. 흙과 뒤섞인 꽃잎들, 산산조각이 난 화분까지. 이거 원, 다 망가졌네.
"이게 뭡니까?"
"이게 뭐냐구요? 아까 당신이랑 부딪혔을 때 박살난 내 화분이예요! 내 커피는 그쪽 수트가 대신 마셨고! 이거 어떡할꺼예요"
아까잘못 들은게 아니었네. 깨지는 소리가 이거였구나. 경수는 작게 웅얼거렸다.
"아 진짜. 사람 말 못 알아 들어요? 어떡하실거냐구요"
뭣같네 진짜. 백현이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욕을 짓이기듯 뱉어내자 경수가 확 표정을 굳혔다.
"말이 심하시네. 욕은 왜 합니까?"
"허, 말이 들리긴 한가보네. 됐고! 사과하시죠"
저 근본없는 말투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수가 마른 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백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분명 욕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얼굴이었다. 아까 얼굴을 처음 마주쳤을 때 귀엽다고 했던 말은 제 실수였다.
대한민국은 외모지상주의야!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고! 욱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경수가 지갑을 꺼내 백현에게 명함을 건넸다.
'S&B 기업. 기획1팀 도경수'
"커피랑 화분값은 제가 변상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또 어디 가시는데요!"
경수는 하얀 휘핑크림이 말라붙은 제 수트를 내려다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탁소요"


*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을 보며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거라니. 백현은 못마땅한 눈으로 경수를 쳐다보았다.
"제 취향이 어때서요?"
"아 그냥, 뭐"
남자 둘이서 오기엔 좀, 그런 장소가 아닌가 싶어서. 민망한 듯 웃어보이는 얼굴에 백현은 속이배배 꼬였다.
여기가 뭐가 어때서! 이곳은 사진을 찍다가 발견한 장소였다. 언젠가 꼭 한번 들리겠다 마음을 먹었었다. 백현의 소녀감성에 부합하는 작고, 아담하고. 커피내음이 물씬나는.
지가 뭔데 내 소녀감성에 태클을 걸어. 백현은 두리번대며 카페를 둘러보는 경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저 뒷통수에 내 손바닥을 내리 꽂으리라.
"뭐 드실래요"
그때보니까 되게 단 거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크림 잔뜩 올린 거.
기가막혀서. 내 반응을 구경하려 저런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건가. 백현은 당혹스러웠다.
경수를 불러낸 건 자신이었다. 꼭지가 돈 상태에서 무슨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싶었지만 백현은 경수를 볼 때마다 저가 꼭 속 좁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런것이, 정신없이 경수를 쫓아가서 화분과 커피값을 받아내겠다며 짖어댔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탁소 앞에서 그렇게 사과를 받아내고 명함도 얼떨결에 받아냈어도 백현은 골머리를 앓았다.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트에 묻은 건 괜찮으려나. 백현은 한참을 생각했다.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도 눈 앞에 어른거리는 뭉개진 꽃의 형상에 아득바득 이를 갈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현은 밤낮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핸드폰 11자리를 눌렀다. 여보세요. 다정한 목소리에 백현의 가슴이 뛰었다.
"저, 변백현인데요. 그때 부딪혔던"
그거 고작 몇 푼한다고. 슬그머니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왜 만나자고 했을까. 이런 화창한 봄날에, 그것도 자신의 취향인 아담한 카페에 저 사람과 둘이.
주문하시겠냐는 카페의 알바생의 물음에 백현은 경수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꽤 얄미웠다.
"저는 카페모카요. 휘핑크림 잔뜩 올려주세요"


숨막히는 정적이었다.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알바생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문득 웃음이 났다. 경수는 맞은 편에 앉아 휘핑크림을 할짝대는 백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분위기라는 것이 그랬다. 낯설다 싶을 때 익숙해지고, 또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가고. 자꾸 휩쓸려가다보면 결국 그렇게 물들게 되고.
제 앞에 있는 백현을 쳐다보았다. 자꾸보니 뭐, 하얗고 눈꼬리가 쳐진게 괜찮기도 하고. 왈왈 짖어대는 성미도 두고보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입이 걸한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백현씨"
순간 백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예,예?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어지간히 당황한 듯 싶었다. 뭐가 그렇게. 경수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나봐요"
경수가 백현의 커피잔 옆에 놓인 카메라에 눈짓을 했다. 순간 풀이 죽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제가 사진 찍는 일을 해서요"
"오늘도 오면서 찍으셨어요?"
"네! 보여드릴까요?"
제 관심사가 대화의 화두로 던져지니 금세 꼬리를 흔들며 헤헤 웃는 백현이었다. 이건 어제 벚꽃 찍은거구, 이건 오늘 오면서 찍은거구. 아! 또 이건…
진짜 강아지네. 저도 모르게 백현의 뒷통수로 손이 향했다. 그러다 멈칫, 경수는 조용히 손을 끌어내렸다.
경수의 반응이 어떻든 백현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자신의 사진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벅찰 뿐이었다.
곧 첫 전시회도 열어요. 경수씨 제 사진 어때요, 괜찮아요?
"네. 사진이 참 예쁘네요, 백현씨랑 꼭 닮았어요"
순간, 경수에게 사진기를 들이밀며 오른손으로 다음 컷을 넘기려던 백현의 손이 굳었다. 덩달아 경수도 그런 백현을 바라보며 헙, 입을 다물었다.
또 제가 실언을 했는가 싶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을 했지?
백현의 코가 시큰거렸다. 홧 하고 달아오른 볼을 감싸며 백현은 경수를 쳐다보았다.
"제가 또 말을 잘못했나요? 사진이 예쁘다는 말 밖에 안했는데"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도 촛점을 잃은 시선은 눈에 맞닿아 있었다. 백현의 눈가가 서서히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며 경수는 어쩔 줄 몰랐다.
정말, 어쩌면 좋지. 백현은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직접 사진에 대해 예쁘다, 라고 칭찬을 들은 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자신과 닮았다고 표현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다정한 목소리로. 백현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설레는 감정을 넘어서 발 끝까지 간질간질한 게 정말 여기서 자신의 감정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 손님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대개는 핸드폰을 들이밀기도 했다.
경수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렸다. 말랑말랑한 게 와닿은 입술엔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자신의 볼을 감싸며 있는 힘껏 입술을 들이댄 백현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 하얀 얼굴과 잘게 떨리는 속눈썹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급하게 입술을 뗐다. 가볍게 쓸어내린 그것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건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백현은 결국 고개를 테이블에 묻으며 아이처럼 울었다.
달짝지근한 커피향이 밀려들었다. 손가락으로 자꾸만 더듬어 보았지만 생경한 느낌은 지워낼 수 없었다.


백현과의 입맞춤이 만들어 낸 혼란스러움이 아니었다.
도경수를 구성하는 세포는 모두 지독한 결벽증에 의해 완성이 된 것이었다. 숱한 연애 경험 중에서 자신의 기억에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것, 그 이외의 것은 없었다.
절대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었던 경수였다. 심장이 까마득하게 내려앉았다. 밀어내려던 것이 한꺼번에 들어찼을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하는 지조차 잊어버린 후 였다.
경수는 앞에 놓인 커피를 급하게 들이켰다. 백현의 카페모카. 입가에 잔뜩 묻은 휘핑크림을 혀로 훑어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백현에게 코가 꿰일 것 같다고. 그리고 오늘은, 지독하게 따뜻한 봄날이었다.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3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3

W. 리플(Riffle)

 

 

경수는 일주일 내내 야근이었다. 입사 3년만에 처음이었다.
경수가 야근을 한다는 건 동료들에게 있어서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저가 자처해서 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기획1팀 탕비실에선 비밀리에 회의가 열렸다.
진짜 이상한데. 경수씨 죽을 때 된거야? 장난스럽게 하하, 웃던 김준면 팀장은 따갑게 밀려오는 시선에 급하게 커피를 들이켰다.
까놓고 보면 회의의 주최자는 김준면 팀장과 여사원들이었다. 뒤에선 우리 경수, 우리 경수하면서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던 무리였다.
하지만 안절부절 못하며, 경수씨 좀 말려요! 팀장님 너무하시네요! 라며 상사보다 더한 질책을 하던 여사원들에게 준면은 등 떠밀린 것 뿐이라는 걸. 준면은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물론 이 논란의 여지를 만든 건 준면이었다. 누군가 성스럽다고 칭하던 미소와 함께 경수를 일방적으로 편애하는 것은 물론이요, 칼퇴근을 하는 경수의 뒷통수를 보며 종종 귀엽다고도 표현해온 걸 보면 알만 했다.
하지만 저는 귀여운 동생 정도로 경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회식 때 한층 무르익은 공기를 타고 은근슬쩍 경수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말했던 것은 진심이었다.
싹싹하고, 일도 잘하고, 웃는 얼굴도 귀엽고. 하여튼 자꾸만 챙겨주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다.
팀장의 옆에 서있던 경수의 입사동기 세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쯤되면 다들 중증인데, 이거.
"전날에 약속이 있어서 나간 건 뭐예요? 여자 만난 거 아니예요?"
"그거 그냥 누구 만난거라던데"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 다음부터 쭉 이상하잖아"
"어, 그러네. 뭐지?"
"차였나"
무덤덤하게 한마디를 내뱉곤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세훈을 보며 여사원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우리 경수가 어디가 어때서!
조용하던 탕비실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절망 어린 얼굴들을 보며 세훈은 속으로 실컷 비웃음을 삼켰다. 한심스럽다는 그 눈빛은 자신이 신입사원이었을 때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제가 지금껏 봐왔던 경수는 그랬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 듯 했으나 행동거지로 보나 씰룩거리는 표정을 보나 금세 다 드러났다.
그리고 그 걱정이란 것도 알맹이 없는 빈 껍질과도 같은 사소한 거였다. 그래서 혼자인 채 놔두면 빙빙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경수가 야근까지 자처한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뭐. 도경수 인생에 고민 하나 없었으랴. 세훈은 마음을 비웠다.
아무튼 경수가 저러고 있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혼자 삽질을 하거나, 진짜 고민이 생겼거나.
"커피들 마시면서… 왜들 그래요?"
해맑은 얼굴로 탕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찬열은 적잖게 당황했다. 이건 무슨 일인가. 표정들이 아주 가관이었다.
팀장님, 여기 공기 왜 이래요. 완전 칙칙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어봐도 준면은 실실 웃기만 했다.
흡사 TV에서 방영해주던 CSI의 한 장면을 방불케하는 여사원들의 얼굴을 보며 무슨 일인가 생각하던 찬열의 입이 자연스레 올라갔다. 아, 이거.
"경수씨 때문에 그러는거야? 우리 경수, 애인 생겼다더니. 사랑싸움 하나보네"
테이블에 커피를 올려두며 잽싸게 탕비실을 빠져나가는 찬열의 뒷모습에 여사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결국… 그랬구나, 여자친구랑 싸워서!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고!
세훈과 준면은 슬슬 눈치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지금이 빠져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가장 막내인 신입사원이 나즈막히 내뱉은 말에 모두가 멘붕에 빠졌다.
"어차피 내꺼가 되지 못할꺼면, 게이나 되버려"
순간 커피를 잘못 들이킨 준면은 컥, 가슴을 두드려댔고 세훈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직을 준비 해야하나…"


이런 상황을 모른 채 경수는 애꿎은 마우스만 눌러대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진 이후로 그냥 일에만 치여 사는 자신이었다.
칼퇴근을 해도 밤잠을 설칠 것이 분명했기에 그냥 미친듯이 일하다가 녹초가 되어 집에 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자꾸만 백현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경수는 깜빡거리는 커서를 쳐다보며 물끄러미 생각에 빠졌다. 모니터를 꽉 채운 화얀 화면에서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말랑말랑하고, 강아지처럼 생긴.
"… 변백현"
그 날 이후로 백현을 다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누군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상.
다리가 달달 떨렸다.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울먹거리는 표정이 생각나면 해야 할 일까지 끝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야근을 하는 이유에 손이 느려진 일 때문인 것도 추가해야만 할듯 싶었다.
경수는 뭔가 단념을 하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결벽증 때문에 그 존재를 더럽다고 여길 줄 알았는데 자신은 하얀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싶어했다. 아니, 봐야만 했다.
창피하지만 카페에서의 그것은 첫 입맞춤이었다. 경수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백현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자신이 '첫'이라는 것에 꽤 집착을 하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나는 밀어내지 않았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제 성질을 부릴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심하게 받아들일 것도 아니었는데. 밤잠을 설치며 떠올렸던 끊임없는 물음의 연속이었다.
그럼 연락을 해야하나? 서로의 얼굴을 보면 껄끄럽지는 않을까. 경수는 무언가 조급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기에도 뭔가 찝찝했다.
그나저나, 백현의 번호가 자신에게 있었던가? 먼저 연락을 해왔던 적은 있어도 자신이 번호를 누른 기억은 없었다.
"미치겠네"
또다시 막혀버렸다. 막막해진 기분에 경수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밀어올렸다.
그럼 그렇지. 자신에게 백현의 번호가 있을리가… 어?
오세훈, 오세훈, 엄마, 팀장님, 010-…. 낯선 번호 하나가 액정에 들어찼다. 수신 기록 안의 낯선 11자리 숫자.
그의 전화번호였다.


*


뒤척이는 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귓가에 파고들었다. 잠도 오지 않는데 미적거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텁텁한 이불 속의 공기를 들이마쉬다가 백현은 이불을 걷어냈다.
숨통이 트였다. 까치집을 얹은 머리를 매만지다가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냥 콱, 죽어버릴까. 백현은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벅차오름을 진정시키려는 그 때, 왜 경수의 입술만 보였는지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실수, 그래 실수였어. 백현은 머리를 잡아뜯었다. 단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작고 아담하던 카페, 그 속에 앉아있던 우리 둘,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카페모카, 그리고 도경수.
경수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아, 나 진짜 어떡해.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미친놈인가봐"
백현은 훌쩍이며 코를 킁 들이마셨다. 이제 자신이 어떡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수에게 연락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과해야하는데, 근데 이게 사과를 해야할 일인가. 이건 또 뭔소리야. 엄마, 나 진짜 미쳤나봐.
백현은 밀어놓았던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끝까지 덮었다. 몇번째 되풀이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었으면 바랬다.

핸드폰도 꺼놓고 집에만 틀어 박힌 지 일주일이 넘었다. 자신의 일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사진전에 쓸 사진은 다 업체에 맡긴 상태였고, 갤러리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대충 다 준비는 해놓았다.
다만 해결하지 못한 게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정리라는 것 정도.
백현은 구석에 처박혀있던 핸드폰을 켰다. 잘게 진동이 몇 번 울리더니 까맣던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순간 백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내가 연락두절인데 어떻게 연락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 수가 있어?
코가 시큰거렸다. 별게 다 섭섭하네, 진짜. 문자도 전화도 자신에게 온 것은 없었다. 백현은 자기가 착각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곧 누군가에게는 연락이 오겠지! 하다못해 일과 관련된 사람에게라도!
백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이내 풀이 죽어 애꿎은 이불만 내리쳤다. 26년을 헛살았네, 헛살았어.
이러다 남아있던 한숨도 다 떨어져나가겠다 싶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 뜯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카메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백현은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자고 다짐했다. 집에만 틀어박혀서 뭘하고 있는거지. 일도 뭣도 다 내버려둔채 고작 하는 일이 머리 잡아뜯는거라니!
우울했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맴돌았다. 그래, 나 변백현이야.
"이대로 죽을 순 없지!"
백현은 박차고 일어나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땅에 발을 디뎌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붙잡으며 문을 세게 닫았다.
세면대 위로 물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와 함께 베개 밑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근 일주일 만의 전화였다.
수신자는, 발신번호 표시제한이었다.

 

*


두 눈에 세상의 빛을 처음 담았을 때, 그 와중에도 나는 누군가를 향한 질투를 불태우고 있었다.
어머! 멋진 왕자님이예요, 라며 간신히 탯줄만 자른 나를 엄마의 품에서 아빠의 팔로 떠넘겨주었던 간호사를 노려보았던 게 질투의 시작이었다.
누군가 그런 건 질투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지지않고 팔을 물어뜯을 자신이 있다. 왜냐고? 우리 엄마가 인정했으니까.
"양수를 뒤집어쓴 애가 눈을 치켜뜨는 거 봤어? 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내 질투의 역사는 인생을 통틀어 지속되어 왔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아빠는 '원래'라는 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에 예외로 삼은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원래 질투가 많다. 더불어 욕심도 많다. 누나는 그런 나를 보며 질색을 표했지만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내 엉덩이를 툭툭 토닥여주었다.
자고로 남자는 꿈이 커야하는 거야. 우리 백현이는 남자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되도 않는 말이겠지만 그 한마디가 안달나있던 내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었다.
"엄마! 배켜니가 내꺼 뺏어먹어!", "엄마! 배켜니가 내 머리 잘랐어!", "엄마, 엄마! 얘 좀 봐!", "엄마!"
엄마는 '엄마' 라는 말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지금은 조금 덜하겠지만 누군가 "엄마!" 라고 하는 소리만 들으면 흠칫 놀라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런 나 때문에 정작 죽어나는 건 우리 누나였다.
변백현이라면 지긋지긋해하는 누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19년동안 시달렸던 삶을 청산하고자 했지만 집과 가까운 대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그것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남매의 정이라고 했던가. 하나뿐인 내 누나는 나에게서 인내심을 배웠고, 참을성을 배웠고, 질투를 배웠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는 말은 하등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서 배운 것들은 누나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첫월급을 탄 날, 누나는 처음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끔 누나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내 볼을 잡아늘리며 하는 말이 있다.
"얘가 내 인생선배야"
나는 누나를 괴롭힌 기억 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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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ㅠㅠㅠ비회원에 오늘 처음읽는데 여기 캐릭터 하나같이 매력철철넘쳐요ㅠㅠ 미칠듯한 결벽증이지만 어수룩한 경수ㅋㅋㅋㅋ랑 질투의 화신 분답은 백현이ㅠㅠㅠ 왜이리 귀엽죠?!!!!!!!!!!!! 카페에서 뽀뽀할땐 저도 긴장해서 같이 헙!!하고 지켜보았어요 으아아아 정말 푹빠져버릴거같아요ㅠㅠㅠ
11년 전
리플
ㅠㅠㅠㅠㅠㅠㅠ빠져빠져 리플에게 빠져!!!!!!!! 비회원이셔도.. 제가 많이 사랑합니다. 일단 첫 댓글이시라는 것부터 저를 녹이셨네여ㅠㅠㅠㅠ 댓글 늦게 달아드려서 죄송해요..하지만 제가 이렇게 늦게라도 달려왔으니 한번만 봐주셔야 해요? (찡긋)
11년 전
독자2
분명히 글 들때가 됐는데 신알신 안뜬다고 저는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말이죠....ㅎㅎㅎㅎ 왜일까요 갑자기 느낌이 쎄 해서 필명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업뎃이.... 그래요. 나는 바보에요.. 저번편 목록에서 보구 들어갔던거 깜빡하고 신알신 안해둔거 있죠, 나 지금 굉장히 급하니까 빨리 나타나세요 작가님!!!
11년 전
독자3
[됴블리/(이메일은 본인/글쓴이/운영진만 확인 가능)]
11년 전
독자4
빨리 뭐라도 메일링해주세요. 나 여기 땅파고 누울거야....
11년 전
리플
으앙 나는 왜 댓글을 지금 보았는가..ㅠㅠㅠㅠㅠ 메일링 쏘러 갑니당!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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