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이후로 아주 착실하게 수능준비에 임했다. 평소엔 딱히 공부에 조바심 내던 성격도 아니었는데, 불같이 달려들어 공부에만 매달렸다. 수능을 잘 쳐야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 들으면 재수 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할 일이 심각하게 없는 탓에 공부에만 집중했더니 내신 성적이며 모의고사 성적은 언제나 1등이었다. 방학 전에 쳤던 6월 모의고사도 역시나. 그런 나에게 담임선생님이 늘 하던 말은, 넌 이렇게만 하면 대학 자유이용권을 얻을 수 있으니 끝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었다. 아저씨를 만난 이후부터 조금씩 소홀해지던 공부였지만, 마침 상황도 이렇게 됐고, 그 대학 자유이용권인지 뭔지 제대로 얻어보자 싶었다.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는 사이, 딱히 의미도 없던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아저씨이...나 아이스크림..." "안 돼, 조금 전에 먹었잖아." "아 진짜 더워요..더워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단 말야!!" "땡깡부리지마. 누가 어린애 아니랄까봐." "...재수 없어," "뭐 임마?"
이마에 꿀밤을 놓으려는 아저씨 손을 피하고 슬며시 웃음을 지어보이니 갈수록 뻔뻔함만 느는 것 같다며 면박을 줬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문제에 집중하자 아저씨도 다시 일에 집중하는 듯 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사람인데, 집에 혼자 틀어박혀 공부만 하려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결국 다시 아저씨 집에 자리 잡았다. 아저씨도 저번에 말했던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하는 중인지 잠도 제대로 못자며 새벽까지 일을 했고, 그 옆에 앉아 나도 한참을 공부만 하다 못 버티고 잠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눈을 떴을 땐, 아저씨 침대 위에 있었다.
"효신아," "응? 왜요?" "너 아침에, 집가서 옷 갈아입는 거 안 귀찮아?" "...응?" "아니, 뭐, 그냥...귀찮을 것 같아서..."
예상치도 못했던 아저씨의 말에 그저 멍하니 아저씨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부도 아저씨 집에서, 밥도 아저씨 집에서, 잠도 아저씨 집에서, 할 건 다해놓고 씻고 옷갈아입는건 꼬박꼬박 내 집으로 가서 했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늘 그렇게 해왔을 뿐이었다. 아저씨가 그런 내 행동을 콕 찝어서 말해주니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별로 귀찮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저씨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꽤나 귀찮은 짓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 옷, 아저씨 집에 가져다 놔요?" "네가 싫으면, 안 그래도 되고..."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그냥, 너 하고싶은대로 해." "...갔다 올게요." "어?"
옷가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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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신아, 밥 먹자." "잠깐만요, 나 이 문제만 풀고..." "밥 먹고 풀어도 되잖아, 얼른 일어나." "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던 나를 단숨에 일으켜 세운 아저씨가 등을 떠밀어 부엌으로 밀어 넣었다. 본인도 바쁜 직장인이면서 고3인 내가 밥 굶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며 항상 시간 맞춰 밥을 차려주는 아저씨였다. 심지어 평일엔 내가 학교에서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문자로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아저씨와 나의 대화창엔 밥 먹었어? 네, 먹었어요. 하는 대화가 주기적으로 등장하곤 했다.
"맨날 이렇게 차려주는거 안 귀찮아요? 내가 해도 된다니까..." "여긴 우리 집이니까, 내가 해주는 거지." "전에 우리 집 왔을 때도 아저씨가 했잖아요." "그건 내가 손님이니까." "나도 손님인데?" "네가 무슨 손님이야, 동거인이지." "엥?" "어?"
아저씨의 말에 밥 먹다 말고 아저씨를 쳐다보자 아저씨도 본인이 한 말에 당황했는지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본인도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은 말이였는지 어떻게 수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난 이제 거의 내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있었고, 가끔 필요한 게 있을 때만 가서 가지고 오는 정도였으니 아저씨 집에서 같이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저렇게 대놓고 동거인, 이라고 해버리니 분위기가 상당히 묘해졌다.
"그..어, 그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요." "...그치?" "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살래?" "에?" "응?"
그렇게 한참을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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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능을 앞둔 나에겐 더더욱 시간이 잘도 흘렀다. 하루가 1초같이 느껴지고, 눈 감았다 뜨면 수능이 한 발자국씩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학교시험은 쪽지시험 치는 것 마냥 평온하게 쳤었는데, 그래도 나름 수능이라고 하루하루 긴장감이 크기를 키워가는듯 했다. 그에 반해 아저씨는 서서히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다달았을땐 거의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고생하더니, 이제는 확실한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집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나를 더더욱 지극정성으로 챙기기 시작한건, 말 할 것도 없었다.
"일주일 남았네," "그러게요, 진짜 일주일 밖에 안 남았네..." "잘 할 수 있지?" "알 수 없죠, 뭐." "뭐야, 수능이라고 긴장하는 거야?" "아뇨. 그냥, 수능에 대한 예의정도? 잘 칠거라고 자만하면 망할까봐." "얼씨구,"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그 순간까지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자체가 좋았다. 일주일 뒤면 큰 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해질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러다 문득, 1주일 뒤면 내 수능이 끝나고, 아저씨와 내가 약속했던 날이 다가와 있다는 생각에 괜히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니, 수능보다 더 떨리는 일이 돼 버렸다.
"아저씨," "응?" "나 수능치고, 아저씨 집에 와있어도 되죠?" "맨날 학교마치면 우리 집에 오면서, 뭐 그런걸 물어봐?" "아니 그냥...그냥요," "떨려?"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다." "글쎄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인거 티나요?" "어, 많이."
장난치듯 웃으며 나를 끌어안는 아저씨 품에 가만히 안겨있자 아저씨가 내 등을 토닥였다. 좋다고 달려들어 놓곤 막상 시간이 다가오자 혼자 긴장해 몸을 뒤척이는 내가 웃길 법도 한데, 아저씨는 그냥 말없이 날 안아줄 뿐이었다. 그런 아저씨 품에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 이 아저씨 너무 좋아서 어떡하지. --------
"잘할 수 있지?"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 "끝날 때 데리러 올게. 교문 앞에 있어." "응, 알았어요. 근데 사장님이 이래도 되요?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고 회사도 빠지고..." "중요하지, 수능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응, 다녀올게요." "긴장하지 말고!" "뭘, 굳이 그런 걱정을..." "잘하고와-"
수많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혼자 20대 남자인 탓에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쏟아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팔까지 흔들어가며 인사하는 아저씨를 보다 같이 손을 흔들어 주곤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조용히 막바지 공부에 열을 올리는 교실에 앉아 한참을 혼자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무언가 보려고 하면 더더욱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타입이라 그냥 눈 감고 앉아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까부터 자꾸 내 머릿속에 퐁퐁 솟아나는 아저씨 생각에 꽤 여러 번 머리를 짤짤 흔들어대야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 왜, 미치겠네.
"자, 수능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알죠? 괜히 부정행위 하지 말고, 의심받을 행동도 하지 말도록 합시다. 여러분 인생이 달린 시험이에요." "네-" "다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감독 선생님의 마지막 말 한마디와 동시에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다. 차분히 문제에 집중했고,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첫 과목에서부터 좋은 예감이 든 덕분에 기분도 한층 좋아져 뒤로 갈수록 시험은 더더욱 술술 풀려나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저씨한테 지금 시험을 너무너무 잘 치고 있다고 말해주려다, 핸드폰을 제출한 게 생각나 아, 맞다...하며 다시 밥을 먹다 순간 혼자 웃음이 터져버렸다. 핸드폰을 제출한 것도 잊을 만큼 아저씨한테 소식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니, 콩깍지란 게 무서운 거긴 무서운 거구나, 싶었다.
수능은 생각보다 꽤 빨리, 그리고 꽤 허무하게 끝이 났다.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문제만 풀고 나니 몸이 찌뿌둥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대다가 문득, 몇 년 동안 시간을 쏟아 부은 게 이렇게 시험 한 번으로 결정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모두가 빠져나간 교실에서 한동안 혼자 멍하니 앉아있었던것 같다. 사실상 열정이 끓어 넘쳐 공부에 목숨 건 적이야 없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결과는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애꿎은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이제 막 켜져 불빛이 환하게 빛나는 핸드폰을 들고 교문 밖을 나섰다.
[미안해, 일이 좀 있어서 못 데리러 갈 것 같아. 끝나면 아저씨한테 전화해.]
켜진 핸드폰에는 아저씨답지 않게 딱딱한 말투로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평소라면 우는 이모티콘이라도 붙여 보냈을 사람인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무렴 어떻냐며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척동생도 아닌 내가 수능을 친다는 이유만으로 아저씨는 사장이라는 직책의 권한을 이용해 오늘 하루 회사를 아예 빠져버렸다. 회사에는 대체 뭐라고 말을 했으려나-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았을 아저씨를 생각하며 또 혼자 웃었더니 옆에 있던 여학생이 슬며시 한 발짝 나에게서 떨어졌다.
...방금 나 무슨 취급 당한거지? --------
혼자 신나서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해 생각해보니 아저씨한테 전화하는걸 잊고 있었다 는걸 깨달았다. 근데 뭐, 이미 집 앞까지 왔는데 지금 전화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어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놀래켜주기나 하자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느리게 올라가는 것 같은 엘리베터에 괜히 꿍시렁대며 불만을 늘어놓다 8층에 도착하자마자 쏜살같이 튀어나가 아저씨 집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 내 집 쪽으론 시선도 두지 않고 아저씨 집으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긴 갈색 머리에 꽤 큰 키를 가진, 여자였다. 아저씨 집에서 방금 막 나온, 여자. 갑자기 머릿속이 띵해지는 느낌이 들어 그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여자는 나를 지나쳐 내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저씨에겐 누나가 두 명 있었다. 그리고 난 언젠가 아저씨 집에 있는 앨범에서 그 누나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아저씨와 똑 닮은 이목구비가 신기해 한참을 쳐다봤었다. 그래서 더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사실은, 그 여자는 아저씨의 누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 신나서 어쩔 줄 모르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을 치며 나뒹굴었다. 어떻게 할지 몰라 아저씨 집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내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한동안 아예 들어온 적이 없어 싸늘해진 집안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저 터벅터벅 걸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엎어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족도 아니면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드나들 수 있는 여자. 답이 나올 수 있는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한테. 이럴려고 그렇게 달콤한 말로 날 휘감은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지다,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나는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준게 아저씨였고,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간 것도 아저씨뿐이었다. 함께 살지 못하는 부모님도, 공부에 치여 각자 신경도 못쓰던 친구들도, 모두 아저씨가 대신 해주는 셈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고, 그래서 더 믿었는데. 결과가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이 내 생에 최고의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저씨와 소중한 약속을 한 날.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험을 기분 좋게 치른 날. 그 마지막에 웬 여자가 아저씨 집에서 나오는걸 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모든 게 그저 막막해지기만 했다.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차마, 소리조차 낼 수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