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하기 전 가스는 잠궜는지, 혹시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차에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뜬 네 이름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어, 지금 나가고 있어. 일은 잘 끝났어요? 다행이네. 급한 전화 받고 나가길래 걱정했었지. "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퍽 반갑다.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 한켠에 털뭉치로 장난을 치던 노란 태비 고양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버려 둔채 야옹-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 아빠 목소리 들었나봐. 지금 나비가 발치에서 바꿔달라고 야옹거린다. 바꿔줄까? "
반장난으로 고양이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자 나비는 핸드폰 액정에 코를 박고 몇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다시 한번 야옹- 하며 소리를 낸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너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도 또한 따라서 웃었다.
" 응, 응. 알았어요. 그럼 있다가 봐요. 운전 조심하고. "
너는 알았다며 짧게 투덜거리고는 통화를 끊었고, 나는 칭얼거리는 나비를 품에 안아들고 털을 가볍게 쓸어내며 토닥였다.
작은 방에 들어서서 한켠에 마련된 캣타워 위에 나비를 올려두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 미안해, 오늘은 엄마랑 아빠랑 둘만의 데이트니까 오늘 하루만 봐주라. 대신 올때 우리 이쁜 딸이 좋아하는 캔 사다줄게. 약속? "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꼬리를 한번 흔들어보이던 나비는 내 말을 알아 들었다는 듯이작은 소리로 울음소리를 내고는 스크래치 기둥에 손톱을 대고 벅벅 긁기 시작했다.
알아줘서 고맙다. 나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다 문득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늦었다. 호들갑을 떨며 나가려다 나비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다녀온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섰다.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들고 있던 두툼한 가디건을 걸쳐입고 너와의 약속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제 갈길을 찾아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한 카페 앞에 도착했다.
' 만남 ' 카페의 이름은 만남이였다. 카페 문 앞에서 물끄러미 간판을 바라보고 있자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
그날은 유독 비가 짖궃게 내리던 날이였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 우산따위가 손에 있을리가 만무했다.
비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한 카페 앞 처마 아래에 들어섰고, 곧이어 어떤 남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에 젖은 채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섰다.
잔뜩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짖궃은 하늘을 원망스레 쳐다보던 남자를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자의 고개가 돌아가려 하자 황급히 눈을 피했다.
그리고 남자를 따라 언제 그칠지 모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묵묵히 머리카락과 옷에 달라붙은 물방울들을 털어내더니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보다 쉽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하늘에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 어서오세요, 카페 '만남' 입니다. "
만남. 어째 지금 상황과 들어맞는 것 같아 작게 웃음을 짓자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곧 웃는 것을 멈추었다.
남자는 한참을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라떼를 주문했고 창가쪽에 자리했다.
나는 남자를 따라 시선을 따라가다 주문하겠냐는 친절한 여직원의 말에 그제서야 커피를 주문하고는 남자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은 고요했고 커피향만이 기분좋게 맴돌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진동벨이 울림과 동시에 정적은 깨져버렸고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탁자에 무릎을 부딪쳤고 발끝부터 올라오는 찡한 느낌에 끙끙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남자는 웃는건지 아닌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쪽팔려. 고개를 숙이고 괜히 앞머리를 매만지며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들고는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아 머그컵을 양손에 쥐었다.
따뜻한 기운이 손에 퍼지는 느낌이 좋다.
한모금.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모금.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제 막 가방에서 책을 꺼내고 있었다.
그를 따라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고는 한장씩 넘기며 글 속에 빠져들었다.
한모금. 한모금. 그리고 한모금.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맑게 개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환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벌써 나간 모양인지 자리에 없었다.
소나기였나 싶어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쟁반을 카운터에 돌려주고는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강한 햇살에 손을 들어올려 해를 가리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때 야옹- 하고 우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출처를 찾으려 애썼고 곧 노란 태비의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 남자도 함께.
" 아. "
남자는 짧은 음절을 내뱉고는 고양이를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환하게 웃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고개를 숙인채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있는다.
고양이는 그런 그에게 머리를 부비며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 고양이 좋아하세요? "
" …작은 동물은 다 좋아해요. "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어보였다.
우쭈쭛. 착하지. 고양아. 고양이에게 손짓하자 남자는 고개를 살짝 저어보인다.
고양이 말고 나비. 나비라고 해야지 대답해요.
아 그래요? 나비야, 나비야. 그제서야 고양이가 돌아보며 내밀었던 손 위로 머리를 부빈다.
" 와, 진짜네. 그쪽은 이 고양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
" 그냥, 처음부터 나비라고 불렀는데…. "
말 끝을 흐리며 고양이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귀여워. 쑥쓰러워하는 모습이 퍽 귀여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난 별빛이예요. 그쪽은요?
정택운.
이 고양이 주인 없는거 같은데….
제가 데려다 키우려구요.
그럼 고양이 보러 그쪽한테 연락해도 돼요?
네?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내가 온지도 몰라? "
" 그냥. 처음 만난 날 생각하고 있었어. 이 카페에서 처음 봤잖아. "
" 아, 그 소나기 내리던 날? "
" 응, 우리 나비도 그날 처음 만났고. 진짜 카페 이름 잘 지은거 같아. '만남' 덕분에 만났잖아. "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택운은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러게. '만남'이 없었으면 우리도 못 만났겠네. "
" 그리고 소나기도. "
*
당신은 우리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