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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향기 전체글ll조회 676l 7



닝이 마음에 들었던 카와니시가 먼저 들이댔고, 성격이 잘 맞을뿐더러 외모도 취향인 덕에 닝은 그를 받아주었어. 오랜 연애기간 내내 둘은 꽁냥꽁냥 잘 사귀었지. 주변 사람들도 둘의 한결같음에 감탄 한번쯤은 했을거야. 보통 그 정도 사귀면 조금은 변화가 찾아올 법도 한데, 두 사람은 한결같았거든.


하지만, 권태기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들처럼 굴던 둘에게도 기어이 권태기가 찾아오고 말았어. 더 이상 안 좋아해서는 아니었어. 여전히 감정이 있음은 분명했고, 스스로 자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어. 하지만, 그 전처럼 간질거리지도, 죽고 못 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지. 열꽃을 피우는 순간의 설렘도 그대로고, 목소리만 들어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무언가 달랐어.


식은 것도, 질린 것도 아니고, 그냥 무뎌진거야. 설레기보다는 지루함을 더 자주 느끼게 되었어. 그저 항상 제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뿐이야. 그저, 그 익숙함의 감정 때문에 관계가 유지됐어. 모든 게 서로에게 맞추어져 있으니 서로를 끊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조차 귀찮게만 느껴지니까. 아무래도 질린 건 아닐까 싶기도 했지. 


언제고 사랑을 약속했다지만, 조금 식었다는 사실은 서로가 제일 잘 알고 있지. 따지고 보자면, 마음이 식었다기보다는 여유가 없어진 탓이야. 피곤하니 쉬고 싶고, 내 시간도 가져야겠는데 애인을 보기는 봐야겠고. 힘들고 지치니까 마음의 안식처인 존재에게 기대고는 싶은데 상대방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테니까 투정 하나도 못 부리겠고. 마음이 지치니 몸이 지칠 수 밖에 없었어.


이 사람이 마냥 좋은 건 여전하고, 사랑하니 움직이고도 싶은데 그럴 힘이 없었어. 그러니 서로의 무기력한 대꾸들에도 누구하나 무어라 말하지 않았어. 제멋대로 끓어오르는 감정과는 다르게 귀찮았지. 상대가 귀찮다기보다는, 그걸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지만, 자연스레 찾아온 귀찮음과 지겨움과 무뎌진 감정에 더불어 헤어짐마저 자연스러울까 두려웠어.


지겹다는 감정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욕심의 괴리감 때문에 싸운 적도 있을거야. 예를 들어, 타이치가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닝은 그저 계속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굳이 왜?”

“새로운 거, 싫으니까.”


붉게 물든 닝의 목덜미가 보여서, 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아.


“그래. 나도 귀찮아.”


그렇게 말하면서. 닝이 제 눈치를 보는 걸 아는 타이치가 소파에 누워 손짓하면, 닝은 그 품 안에 들어가 누웠어. 익숙하지. 그 상태 그대로 닝은 잠들어 버리고, 타이치는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어. 질린 것도, 싫은 것도 아닌데 왜 달라진걸까.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


연애기간 동안 동거는 하지 않았지만, 동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을거야. 하지만, 이제는 각자 떨어져 있는 날들이 더 많았지. 귀찮으니까. 만나도 딱히 특별난 일을 하지 않으니까. 각자 쉬었으면 싶어서. 


우습게도 둘 다 서로와 논 시간이 더 많아서, 안 만난다 해서 특별난 일을 하지도 않아. 또 집에 틀어박혀 침대에 누워 지친 몸을 쉬게 할 뿐- 이라고 타이치는 생각해. 닝은 워낙 집순이니까, 그녀 또한 저와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거지. 뭐했냐고 물어보아도 항상 똑같은 답만 돌아오기도 하고.


뭐하지, 뭐하지. 고민하던 타이치는 닝이 제게 언젠가 선물해주었던 책을 꺼내들었어.


[ 저를 미치도록 간질이던 이름 모를 것들에 어느새 무뎌진걸까. 숨을 쉬는 일만큼이나 익숙해진 감정들은 더 이상 제 이름을 속삭여주지 않았다. ]


일부러 준건가. 타이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어. 보고싶다는 생각보다는 밉다는 생각을 하며 ...


갑작스레 귓가를 울리는 벨소리에 타이치는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집어들었어. 누구야. 발신자를 확인도 안 한 타이치는 바로 전화를 받아들었지. 닝과는 근래 들어서는 라인 위주의 연락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녀일거라는 가능성은 배제했어. 아니나 다를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물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닝 씨 보호자 맞으신가요?”


뭔 소리야. 눈을 대충 손으로 비빈 타이치는 닝이 길을 잃었다던가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넘겨짚었어. 아무리 길치라도 어린애는 아닌 닝이 그럴리가 없다는 사실은 잘 알면서도. 전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네, 맞는데요.”

“XX병원입니다. 환자 분께서 교통사고로 ...”


그 뒤의 말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가겠다 이야기하곤 전화를 끊어버렸으니까. 


항상 집에만 있던 사람이 뭐 하겠다고 밖에 나가서. 나갈거면 나를 데리고 가던가. 길을 잃었으면 나한테 전화를 하던가. 이어폰을 꽂고 다니지를 말아야지. 주위를 잘 살펴야지. 너는 왜 그렇게 부주의해서.


무슨 정신으로 뛰어나갔을까. 사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옷도 안 갈아입고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는 사실 밖에는. 


응급실로 뛰어갔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정신을 어디에 뒀는지조차 모르지. 막연히 병원이라는 장소는 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릴 뿐이야.


걔는 병원 안 좋아하는데. 냄새부터가 기분 나쁘다고, 불길하다고. 그렇게 싫어하면 올 일을 안 만들어야지. 너는 왜. 


타이치는 고개를 홱홱 돌려가며 두리번거리느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지도 몰랐어. 어디로 가야되지?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도 자각 못 했어. 현재 저들의 건조한 관계와는 별개로 닝은 타이치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거든. 


타이치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눈으로 따르기만 하다가 응급실 밖의 데스크로 향했어.


“응급실에 닝 ... 이라는 사람 있어요? 없죠?”


부디 없다고 말해달라는 눈을 한 타이치가 물었어.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은 수도 없이 봤다는 듯이 간호사는 무표정하게 마우스를 딸깍거렸지.


“보호자 분이신가요?”

“네.”

“중환자실에 계시네요. 현재 면회는 불가하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중상을 이야기하는 간호사가 어찌나 미워보였는지. 하지만, 그보다 더 미운 사람은 제 자신이었어. 내가 그 사람의 가족이니 볼 권리가 있다는, 그 사람과 이런 관계이니 반드시 봐야만 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 하는 무미건조한 연인 관계인 제 처지가 더 미웠어. 오늘조차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물어온 닝에게 미안하다는 말만을 전했던 제 자신이 제일 원망스러웠어.


괜찮은걸까. 그렇게나 아픈걸까. 수술까지 했겠지. 


타이치는 아무래도 좋으니 닝이 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빌었어.


*


그렇게 일주일 가량이 지났어. 당연하게도, 타이치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 했지. 드디어 면회 허가가 내려지고, 그는 곧바로 달려갔어. 


닝을 만나기 전에 의사 선생님부터 만나게 되었지. 골절 없이 타박상 뿐이었지만, 내상이 있어서 수술을 했고, 잘 마무리했다는 이야기야. 타이치는 안도했지만, 여전히 중환자실에 있는 이유를 알지 못 해 갸웃거릴 쯤, 말이 이어졌어.


이틀 간 의식불명이었기에 아직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중환자실에 있는 거라고. 회복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아직까지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고.


“지금은 일어나셨습니다만-”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듣지도 않은 타이치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어.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는 닝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했지. 매일 보는 것이 일주일간 못 보는 것보다 더 익숙한 존재. 타이치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닝에게 다가갔어.


“닝.”


닝이 고개를 돌렸어. 울거나, 웃거나. 둘 중 한 가지의 표정을 할거라 생각했는데. 닝은 그 어떠한 것도 품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누구세요?”


호기심이 잔뜩 어린 질문만이 돌아왔지. 순간 벙찐 타이치는 멍하게 닝을 쳐다봐. 그리고 눈물을 뚝 떨어트렸어.


“장난치지 마.”


닝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갸웃거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맑은 눈이 진심이라는 걸 타이치는 그 순간에 얼핏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어. 


그 때, 뒤로 다가온 의사선생님이 나지막이 말했지.


“역행성 기억상실입니다. 사고 전의 특정 기간 동안의 기억이 사라진 것인데, 성인까지의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음을 확인했지만, 그 이후는 ...”


“아 ...”


타이치는 제 손으로 얼굴을 덮었어. 널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나는 왜 성인이 되고 2년이 지나고 나서야 너를 만나게 되어서. 닝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어.


“저 분, 누구예요?”


의사는 목례를 하곤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전하곤 자리를 떴어. 눈물을 주륵주륵 흘려내던 타이치가 어려운 발걸음을 떼 닝에게 다가갔어. 


너를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너의 상실이 나의 상실이 될 리는 없었겠지. 


너를 조금만 덜 좋아했더라면, 그렇게나 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던 네가 타의에 의해서 끊어내버리는 지금 이 순간, 안도했을거야.


하지만, 식어버렸다고 이야기 하는 지금조차도 이렇게나 아파하는 나는 도대체 너를 얼마나 사랑했던걸까. 그리고 난,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걸까.


타이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닝은 눈썹 끝을 늘어트리며 물었어.


“괜찮으세요?”

“닝.”

“저 아세요?”


닝의 순수한 질문에 타이치는 눈도 마주치지 못 했어.


“너, 29살이야.”

“그건 알아요! 제가 역행성 기억상실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설명도 들었구요. 음-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성인이 된 뒤에 만났다는 이야기겠죠?”


똑똑하네. 타이치는 그렇게 중얼거렸어. 네가 조금만 더 똑똑해서, 나를 처음 만난 그 순간만이라도 기억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되도 않는 생각이나 하면서.


“닝.”

“네?”

“나 정말 기억 안 나?”


타이치가 물기 어린 눈으로 닝을 쳐다보았어. 


네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기 시작하고 29년이라는 시간동안 네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 네게 가장 깊게 박혀 있는 존재는 나라고 생각했는데. 9년을 잃더라도, 나와의 6년은 기억할 줄 알았는데. 내 이름만큼은 기억할 줄 알았는데. 나를 보기만 해도, 내 정체는 떠올릴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당연하다 여겼어. 그런데 너는, 날 까맣게 잊었구나.


타이치는 더 이상 눈물을 닦아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 그저 당황에 물든 두 눈을 곧게 마주할 뿐이었지.


너를 놓아버렸던 나. 


그런 나를 놓지 않으려 하던 너.


이제는 내가 너를 놓지 않기로 결심했어. 너를 알면서도 외면해온 나보다는 나를 기억조차 못 하는 너에게 사랑을 부어주는 일이 더 쉽겠지.


길게 내뱉어지는 숨을 다시 꿀꺽 삼킨 타이치가 입꼬리를 다시금 올려 보였어. 그리곤 허공에 붕 뜬 닝의 손을 덥석 잡았지.


"내가 널 좋아해."


다시 시작해보자.


"널 사랑해."


우리들의 처음부터 다시.


"내가 널 6년동안 짝사랑한 사람이야."


나와의 행복을 잊는 동시에, 나와의 불행 또한 잊어버리도록.


"우리는 그런 사이였어."


언젠가 들키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런 사이라고 해두고 싶었어.


————————


환히 웃는 닝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저렇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일까 생각하게 되는 타이치.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지만, 확실히 최근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지.


행복하게도 웃는 얼굴이 좋아서, 많이 먹으라고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주고, 예쁜 꽃도 사다주고, 하고 싶다는 얘기도 다 들어줄거야. 제 곁에서는 꽤나 오랜 기간동안 덤덤한 얼굴만을 하고 있던 것이 조금 많이 미안해서.


*


닝은 무려 9년 분량의 기억을 잃었으니, 제 핸드폰 비밀번호도 풀지 못 하겠지. 가족은 이런 일에 도움이 안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지만, 타이치는 저를 짝사랑해온 동시에 아주 친한 친구라고 이야기 했기에, 닝은 그에게 핸드폰을 건넸어. 기억의 조각인 탓에 초기화를 해야만 하는 서비스 센터에 가는 대신 타이치는 자리에 앉아 곰곰히 생각할거야.


닝이 못 풀어낸다니까 예상 가는 몇 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었지. 타이치는 네 자리 숫자에 제 생일을 넣어보았어. 하지만, 열리지 않았어. 그럼 사귄 날? 여전히 풀리지 않았어. 


가능성 있는 것들을 몇 번이고 시도해도 풀리지 않아서, 핸드폰이 제시한 대기시간 동안 한참을 고민하던 타이치는 마침내 저들의 첫만남이 언제였는가에 대해 곰곰히 기억을 더듬어 봐. 벚꽃이 만개한 4월 중순의 어느 날.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 즈음의 날을 몇개 입력했어. 그리고 0415를 입력하는 순간에 잠금화면이 풀렸지.


제가 기념일 날 아무것도 안 하고 넘기기에는 미안해서 아차하고 사온 꽃들이 장식한 배경화면을 타이치는 멍하게 내려다 봤어. 기껏해야 저들의 기념일 정도가 정답일 것이라 여겼는데, 첫 만남이라니. 미안함에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지만, 애써 억눌렀어.


하지만, 제 연락처를 [ 내 사랑 ] 이라고 저장한 것을 보고, 아랫입술을 꽉 물고 말았지.


닝도 저처럼 무뎌졌다 여겼던 것은 다 틀려먹은 생각이었던거야. 닝은 하나도 무뎌지지 않았었지. 그 생각에 다다르니,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는 계속해서 나를. 


후회에 후회를 거듭해보아도 이미 지나간 순간들일 뿐이야. 곧바로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을 내린 제 자신에 대한 칭찬을 하는 동시에 문득 그런 생각도 들지. 너는 나를 잊고 싶어진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너에게 상처만 주는 나를 잊고 싶어서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타이치는 연락처 스크린샷을 찍고, 제 흔적을 모두 없앴어. 그리곤 연락처의 이름도 바꿔버리지.


[ 타이치 ] 라고.


닝이 잊어버린 시간 속, 저에 대한 모든 감정도 잊어버리길 바랐어. 내가 더 고생하고, 더 안달내고, 더 힘들더라도, 닝의 아픔의 반의 반도 닿지 못 하리라는 사실을 아니까. 


0에서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


닝이 퇴원한 뒤에는 제 집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저들이 특별난 사이도 아닌데 어째서 그래야 하냐 묻는 닝에게 타이치는 무어라 말을 하지 못 했어. 저들의 섞인 물건들이 제 집을 잘도 찾아간 지도 꽤 되었기에, 틈은 없었어. 진실에 대한 뒤늦은 고백 따위 더는 할 수가 없어서, 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


함께 보낸 6년의 시간을 모른체 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었던걸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 하지만, 굳이 방치됐던 시간들에 대한 대면 또한 하고 싶지 않았는걸.


그렇게 타이치는 닝과 함께 처음 시작했던 곳부터 하나하나 발자취를 더듬어갈거야. 닝을 처음 만났던 식당에 가고, 함께 다녔던 대학도 들르고, 공원을 가고, 즐겨보던 영화를 같이 봤어. 닝이 배실배실 잘 웃으니까, 타이치도 자연스레 웃음을 흘리지. 


이렇게나 간질거리는데, 나는 왜 그렇게 굴었던걸까?


*


하지만, 기나긴 시간만큼이나 모든 흔적을 지우기는 어려웠을거야. 닝의 집에 남아있는 타이치의 후드티로부터 의문은 시작되었지. 


어느 날에는, 닝의 핸드폰과는 달리 여전히 모든 것이 남아있는 타이치의 폰을 닝이 보게 되었어. 수백 장의 사진들과 기나긴 대화 기록을 보고 닝은 갸웃거렸어. 한 쪽의 짝사랑 뿐인, 기묘한 친구 관계라기에는 너무 이상했지. 오히려 제가 더 좋아하는 티가 많이 났는 걸? 그런 의문에 닝은 타이치에게도 물었어.


이건 언제 찍은 사진이야? 이거는? 이거는? 


이때는 왜 이런 얘기를 했어?


타이치, 우리 잤어?


타이치, 나는 왜 너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한거야?


그리고 타이치는 답을 내어주지 못 하고 울고 말았어. 닝이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살면서 그렇게까지 운 적은 없을거야. 그렇게까지 감정이 예민한 시기조차도 없었지.


“타이치, 왜 울어? 내가 잘못한거야? 미안해 ...”

“아니야. 네 잘못 아니야.”


그렇게 말해도, 타이치는 정확한 답을 내어주지 못 했어. 내 잘못이라는 고백은 커녕,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 했어. 그저 제가 닝의 인생에서 빠져주는 편이 나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지. 그러다가도 종국에는 제 욕심에 닝의 곁에 남아있을거라는 선택을 내릴거야.


————————



닝이 타이치의 거짓말에 대해 알게되는 순간



“타이치,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얘기는 항상 했으면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맞춰오는 타이치를 살짝 피했어. 닝의 행동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괜한 기분탓일거라고 타이치는 스스로에게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너 말이야 ... 나한테 거짓말 한 거 있어?”


타이치는 괜히 웃어보이며, 닝의 손에 깍지를 끼었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몸소 체험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피하려는 노력이었지. 닝은 그가 구렁이 담 넘듯 피하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미간을 찌푸렸어.


“대답해.”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어. 순전히 두려움 탓이었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함은 알고 있고, 이제와서라도 진실을 말하는 편이 더 미루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웠거든.


사실 너와 나는 연인 관계였어. 1년 동안 내가 너를 쫓아다녔고, 그 끝에 5년 간 사귄 오래된 연인. 그 부분은 이야기하기 어렵지 않았지. 문제는 그 뒤에 따라붙을, 왜 거짓말한거야? 라는 물음이었어.


어찌 답을 피해야 할 지, 아니면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지, 알지 못했거든.


무심하게도 굴었던 제게 끝까지 사랑을 주었던 닝이라면,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아. 하지만, 그 때의 닝과 현재의 닝에게는 큰 차이점이 있었어.


저들이 함께한 6년의 시간을 잃어버렸거든.


그 때의 닝은 타이치와 유대감을 쌓았고, 절대 잊지 못할 피부로 나눈 사랑이 있었고, 사소한 말들과 애정의 표현들을 모두 느꼈었지. 무심하게 굴었던 몇 달을 제외하고도 5년이라는 시간동안.


지금의 닝은 달랐어. 타이치의 애정 어린 말들, 표현들, 그리고 선물들까지 모두 받았지만, 고작 두 달에 불과했어. 고작 두 달.


그리고 이게 사실은 뒤늦은 후회에 대한 속죄에서 비롯된, 조금은 저 답지 않을 정도로 과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두 달 정도야 가뿐히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 타이치는 닝을 그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고, 잘 알고 있기에 두려웠어.


그래서 타이치는 망설여. 대답을 내어주지 못 하고, 입만 달싹이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덜미가 잡히고 마는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었어. 거짓말의 유무보다는 이유가 더 큰 문제였으니까.


“왜 거짓말했어?”


그리고 타이치가 반했던 닝은, 끈질긴 사람이었지. 돌아보지 않는 타이치를 계속 붙잡아둘만큼, 입을 열지 않는 타이치의 입을 결국 열게 만들어버릴만큼.


“이렇게 다시 시작할거면, 굳이 거짓말 할 이유가 없었잖아. 나랑 헤어지려고 아무 사이 아닌 척 한 것도 아니고, 왜 짝사랑일 뿐이라고 거짓말했어?”


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어. 타이치는 닝의 눈을 마주하지 못 한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었지.


“이해가 안돼, 타이치. 내가 헤어지자고 했던거면, 그냥 연인 사이라고 거짓말 하면 되는 일이었잖아.”

“...”

“이유를 알려주면 이해해보려고 할게. 혹시 내가 너에게 못되게 굴기라도 한거야? 아니면, 무심하게?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던거야?”


그 말에 타이치는 마침내 실토해버리겠다고 결심했어. 저가 그리고 깊게 사랑에 빠져버린 대상인 닝이 자책을 하는 일 따위는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거든. 그것도, 제 잘못 때문에.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네 탓이 아니라고. 절대.”


가차없이 이별을 고해서, 제가 죽도록 후회하게 만들었어도 됐을텐데, 닝은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지. 그것도, 본인에게도 권태기가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연기하면서.


그런 닝에게 타이치는 더 큰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 큰 짐을 지우고 싶지도 않았으며, 이제라도 실토하고 싶었어. 혹시나 용서를 해줄까 해서.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을 지워버리고 싶어서 거짓말했어.”

“무슨 뜻이야?”

“내가 너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았어. 네가 사랑받아야 할만큼, 너에게 주지 못했어.”


여전히 눈을 마주하지 못 하는 타이치를 닝은 가만 쳐다봤어.


“내가 너를 쫓아다닌 결과로 5년이나 만났어. 그런데 ... 그런데, 사고 나기 몇 달 전부터 내가 무심하게 굴었어. 무뎌져서, 지겨워서, 익숙해서 같은 핑계를 대면서.”

“...”

“내가 너한테헤어지자는 말까지 했었어. 근데, 네가 붙잡았고 내가 붙잡히는 척, 돌아왔어. 정말 너를 필요로 했던 사람은 나면서.”


닝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어.


“그래도 굳이 관계까지 거짓말 할 필요는 없었잖아.”

“모든 걸 잊어버린 널 보면서, 나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준 기억들도 다 지워버리고,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순진하고 서로만 바라봤던 그 때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었어 ... 그러면, 후회할 일 따위는 없었던 척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닝은 답을 내어주지 못했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다시 시작함으로서 연인이 시작할 때의 풋풋함과 설렘을 원했다는거지? 후회할 일은 다시 만들지 않으면서. 타임머신이라도 탄것처럼.


문제는, 타임머신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야. 있었던 일을 없었던 척 할 수는 있겠지만, 없는 일이 될 수는 없었어. 결국 진실이 드러나버린 지금처럼.


“미안해.”

“뭐가? 거짓말이? 아니면, 무뎌진 네가 했던 행동들이?”

“둘 다. 차라리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았을텐데, 속여서 미안해.”


닝은 타이치의 표정을 살폈어. 꼭, 이별을 앞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며 답을 내주지 않던 닝은 타이치가 시선을 슬쩍 들어보일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어.


“그거 알아? 나는 또 너에게 사랑에 빠져 버렸어. 지금은 그 때의 나도, 그 때의 너도, 그 때의 환경도 아닌데 말이야.”


타이치는 의미를 묻는 대신에, 정확한 답을 채근하는 대신에 조용히 기다렸어. 


“사람은 무뎌질 수 있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익숙함에 젖어 소중함을 잊어버린다는 말처럼. 그만큼이나 흔한 일이니까, 나도 기다려준걸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닝은 손을 들어 타이치의 뺨을 감쌌어. 이미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타이치는 그 손에 고개를 기댔지.


“나도 그런 날이 오게 될거야. 너를 지겹다고 느끼게 되는 날이. 하지만, 내가 너를 또 사랑하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하는 날이 온다면, 그 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붙잡아주겠다고만 약속해줘. 그거면 충분해.”

“진심이야?”


닝은 입꼬리를 올려보였어.


“용서할게. 다.”


그런 제안을, 그런 기회를 타이치가 놓칠 이유는 없었어. 그래서 덥석 붙잡았지.


“약속할게.”

“꼭 지켜야 돼.”

“꼭 지킬게.”


닝은 맑게도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들어 꼼지락거렸어. 반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 타이치는 새삼스럽게 그 이유를 깨달으며 새끼 손가락을 걸어주었어.


“그럴수도 있지. 사람이니까, 그정도의 후회할 짓 할 수도 있지.”

“용서해준거야?”

“응.”


이제 뭘 해야되는지는 알지?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닝에게 카와니시는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어보였어.


“알지.”


일전에 끝내지 못 한 입맞춤을 다시 시작했어.


*


후회하는 이야기들을 반복하지 않는, 제 연인이 상처받지 않는 선택들만을 내리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그렇게 꽁냥꽁냥 다시 시작해서 잘 사귀는 둘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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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센세..........ㅠㅠㅠ아침부터 타이치 드림이라니.. 암쏘해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3년 전
독자2
아ㅜㅜㅠㅜㅠㅜ눈물이 가슴이ㅜㅜㅠ 최고다 진짜...후회가득한 이 모습..
3년 전
독자3
세상에 ㅠㅠㅠ 아련아련완전 ㅠㅠㅠ 너무 좋아요
3년 전
독자4
금같은 타이치 드림... 감사합니다...
3년 전
독자5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찌통인데 하앙이다ㅠㅠ
3년 전
독자6
보는 내내 울컥했어요ㅠㅠㅠㅠㅠㅠ 센세가 내 찌찌 다 가져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찌통
3년 전
독자7
하앙 센세 절 울리려고 이런 글 써오신 거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 찌찌 ㅠㅠ
3년 전
독자8
센세ㅠㅠㅠㅜㅠㅠㅠㅠㅜㅠ 저 눈물 좔좔ㅠㅠㅠㅠㅠㅠㅜㅠㅠㅜㅠ
3년 전
독자9
절절하다라는 느낌이 와닿네요ㅜㅜ센세ㅜㅜㅜ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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