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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향기 전체글ll조회 504l 6

•  피아노과 카게야마 X 돌싱 타학과 교수 닝


•  닝이 가르치는 학과는 음악계열이 아닌 선에서 자유롭게 생각해주셔도 좋습니다.


•  카게야마를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은, 감정을 감출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기에 불도저 마냥 직진하는 인물로 해석하여 쓴 글입니다.




1


"어리니까, 네 또래를 만나는 건 어때."


"저는 교수님이 좋아요."


어금니를 꽉 깨문 닝이 시선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모든 말에 꼬박꼬박 답을 내어주던 그녀는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답을 조용히 기다리던 그가 고개를 푹 떨궜다. 


그를 슬쩍 올려다본 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돌린 제 뒤로 따라붙는 시선에 괜한 죄책감까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제가 닿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고작 23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눈빛을 지닌 그는 서른인 저를 벌써 몇 달째 졸졸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너의 귀중한 청춘을 제게 허비하지 말라 말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아무리 밀어내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 일상에 스며들기 위해 애썼다.


제 숨통을 죄어오는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독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애쓰는 시기는 종종 찾아오곤 했었다. 그러다 맑은 얼굴과 함께 애정을 내보이는 그를 마주할 때면, 받아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터무니없는 생각. 


이제는 사랑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니까, 심심풀이로 할 법한 연애조차 귀찮을 정도로 혼자인 시간이 더 즐거우니까, 그런 류의 더는 제게 부합하지 못하는 핑계들만을 대며 외면해야만 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카게야마가 입을 열 때마다 하는 말이라곤 저를 향한 애정들을 가득 담아 예쁘게 포장한 선물들뿐이라는 사실은 제 마음을 간질이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가뭄의 단비라도 되는 양 삭막한 현실 속에서 제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화려한 포장지 속 감춰진 실체를 이미 목격한 전적이 있는 저로서는 더 이상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더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2


피아노과의 수석, 천재, 제왕. 이 모든 수식어는 단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단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이 모든 호칭은 그의 인기와 능력에 대한 서술을 완벽하게 해냈다. 제가 처음으로 대학에 발을 들이게 된 순간부터, 피아노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자리에 부임하게 된 제 귀에 들어온 그 이름의 주인은 굉장한 유명인사였다. 그 뿐이랴, 작년부터 이 학교에서 피아노과의 교수 자리를 하나 꿰차게 된 키요코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유 없이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학생들의 선망은 물론이고 교수들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천부적인 재능에 관한 이야기는 어찌나 유명한지, 그의 공연이라면 피아노과 교수들은 어떤 선약이 있었든지 간에 약속을 깨고서라도 방문할 정도였다.


훤칠한 키와 화려한 외모, 날카로운 인상과 잘도 어울리는 과묵함과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을 시작했다가도 포기하거나 용기를 내어 그에게 고백했다가도 차이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학생들의 사생활에 별 관심 없는 제 귀에까지 들어올 수준이었다. 


그렇게나 대단한 카게야마 토비오는 계속해서 제게 애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청춘의 치기 정도로 치부해 보려 했지만, 그의 끈질김과 진득함에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가 진심으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제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더 잘나고, 어린, 그 또래의 학생들이 널리고 널리다 못해 그를 향한 애정까지도 당당하게 내보이는 이들도 수두룩했건만,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저만을 쫓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어쩌다 내게, 왜 내게, 애정을 품은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의 순수한 마음을 부담으로밖에는 바라보지 않던 제 시선은 어느새 연민으로 변해 있었다. 연상에 대한 로망인 걸까.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성숙함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조금은 무지한 호기심인걸까. 


저도 어린 시절에는 연상에 대한 막연한 로망 따위를 품은 적이 있었으니 애써 그를 이해해보려 했지만, 딱 거기까지가 제 한계였다. 제 로망은 저와 비슷한 또래를 향한 꿈일 뿐이었기에 노력에 그칠 뿐, 결코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설사 카게야마 토비오의 막연한 호기심일 뿐이라 하더라도, 일곱 살이나 많은 제가 아닌 딱 그 또래의 인물들 중 두세 살 많은 사람을 찾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보다 나이가 많은 동시에 괜찮은 사람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려 있었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배려심도 깊다 못해 안정감마저 선사해주는 그런 존재는 조금만 눈을 돌려도 보일 터였다. 


애초에 저는 그의 상상만큼이나 안정적인 성숙함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기에 그런 로망을 담은 시선에는 영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 카게야마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3


키요코를 만나고 나오자마자 시야에 걸리는 벤치에 앉아있는 카게야마를 발견한 닝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측은함과 미안함이 잔뜩 뒤섞인 감정들이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눈썹 끝을 축 늘어트린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인기척이라도 느꼈는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린 카게야마는 곧 닝을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머금었다. 실에 엮인 듯 당겨지는 입꼬리에 그의 입이 호선을 그려냈다.


붉게 물든 단풍이 서늘한 바람에 살랑였다. 따뜻한 색의 배경을 뒤로하곤 차디찬 칠흑빛 머리를 타고 시선을 내리자 광활한 우주를 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다정한 눈빛이 평소의 덤덤한 얼굴에 무게를 싣는 날카로운 눈매와는 상반됐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달싹이기만 하는 카게야마의 입을 본 닝이 고개를 홱 돌리며 옆의 샛길로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분명 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왔다. 제 뒤에서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바닥을 타고 제 귀로 흘러들어왔다. 초록색 잎들이 붉고 노랗게 물드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평범한 날, 풋풋한 사랑과 함께해야 할 청춘인 카게야마가 사랑에 회의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다.


"피곤하실 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하얀 목폴라 위를 덮은 검은색 코트 자락이 그보다 짙은 칠흑빛 머리칼과 함께 바람에 나부꼈다. 제가 받아들기 전까지는 거둘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큰 손을 들이미는 카게야마에게 결국 흰 깃발을 들어 보인 닝이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네. 손 끝이 스쳤다는 사실 하나에 카게야마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닝은 캔커피를 손에서 놀리며 상표를 확인했다. 카페모카. 갈색으로 물든 네 글자를 그녀는 지그시 내려다봤다. 내 취향은 어떻게 안 건지. 그냥 무난하게 고른 거려나. 캔커피를 손으로 한 번 꽉 쥐었다가 힘을 푼 닝이 곧 캔을 숄더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고마워."


아무리 제가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기에 그를 밀어내려 애쓰고 있다 하더라도. 여린 마음을 어떻게든 제게 내보이고 싶어 이 서늘한 날에도 캔커피 하나만을 손에 쥐곤 막연히 제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을 카게야마를 올려다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보다 한참 위에 위치한 그의 눈과 다시금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자 카게야마는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꿀꺽-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침과 새빨갛게 채도를 높이는 귀. 닝은 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카게야마를 가만 올려다보았다. 어리고, 예쁜 마음. 여리고, 순수한 마음. 순수하기에 애정이 가득 담긴 마음을 거리낌 없이 내보이는 카게야마 토비오. 


가을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흑백의 존재가 적색을 머금은 모습을 저도 모르게 눈으로 찬찬히 살피던 닝이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여지를 주어선 안되는데, 여지를 주고 있는듯 보이는 건 아니겠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여지를 주고 있는 걸까 싶은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4


교수와 제자. 아니, 그는 제 과는 커녕 비슷한 계열의 학생조차 아니었기에 굳이 따지고 보자면, 전혀 불가능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애정을 표하며 손을 뻗어오는 그를 밀어내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를 하나 꼽아보자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 카게야마를 우려하는 이유를 모두 제외하고, 오로지 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이유.


카게야마 토비오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 해서 똑 닮았다거나 비슷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 관계가 꽤 유사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나게 된 테라다 토메오와의 관계는 그로부터 시작됐었다. 낯을 가리는 제게 그가 먼저 다가왔고,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먼저 사랑을 고백했었다. 다정한 토메오와의 연애 기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성인이 되고, 대학을 다니는 내내 사귀던 저들은 서로에 대한 확신과 확신 끝에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었다. 온전히 애정 하나만으로 피워낸 다짐이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즐겁게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교수를 목표로 삼고 있는 제게 결혼이 걸림돌이라도 될까 두려워 더욱이 열심히 달려와야만 했으니까. 


저는 주변 이들이 제게 무어라 질책하던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렸고, 간혹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넘어진 날들에는 토메오의 격려 하나만을 버팀목 삼아 다시 일어났다. 테라다 토메오는 처음 그가 제게 다가왔던 그 날들처럼 손을 내밀어주고, 저를 잡아 일으켜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다정한 그의 모든 언행은 제 인생의 기둥이었으며 그가 제 가족으로 자리 잡기에 결정적인 근본들이었다.


그쯤에는 다정한 그가 언제고 제 옆에 있어 주리라는 믿음은 더 이상 믿음에 불과하지 않은 확신이었다. 이 사람이 언제고 저를 사랑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격도 좋은 잘난 인물과의 연애 관계는 처음부터 줄곧 주위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문을 품게 하곤 했지만, 저는 토메오를 향한 맹목적인 신망이 있었다. 제게 행복을 선사해준 인물이자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해준 인물이었으니 그는 영원토록 제 곁에 있어줄 것이라는 믿음은 제가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에조차 기저에 남아 있었다. 그 신뢰와 감사를 토대로 형성된 애정을 저는 그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는 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제 뒤통수를 거하게 때렸다.


사랑의 서약을 맺고 고작 2년이 지난 후였다.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리라 약속하고 고작 2년에 불과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길었던 연애 기간의 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저들의 관계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아직 콩을 키워야 할 신혼이었음에도 매일같이 싸워대며 눈물을 흘려댔다. 험한 말에 상처 입고, 변해버린 상대에 대한 배신감에 잠을 못 이루는 와중에도 그저 시행착오일 뿐이라 치부했다. 결혼 전에조차 서로로 범벅이 되어 있었음에도 사소한 다툼 한번 한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순리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고쳐야 할 것을 고쳐나가고, 어긋난 표현 방식들을 맞춰나가는 과정. 모든 관계에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라고 그렇게 자기세뇌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긋난 것은 저들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닌 토메오와 저의 관계 그 자체였다.


"에 ... 저기, 닝 ... 저 사람, 테라다 상 아니야?"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친구인 키요코를 만나 점심을 먹고 길을 거닐던 어느 봄날이었다. 상쾌한 봄 바람에 숨을 크게 들이쉬는 순간 팔을 톡톡 건드려오는 시미즈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서로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멀었지만, 서로의 얼굴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시야에 걸렸다. 어찌나 익숙한 얼굴들인지 신원 정도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테라다 토메오와 그와 다정히 팔짱을 끼고 있는 제 남편의 직속 후배. 그의 직장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방문할 때면 꼭 마주치는 인물이었으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외근인 탓에 늦게 들어올 예정이라던 토메오의 말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는 욕짓거리도, 외면의 말도 아닌, 허탈감으로부터 비롯된 실소였다.


"허."


그래서 당신이 그랬었구나.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나 무관심했구나.


그래서 당신이 야근과 외근을 밥 먹듯이 했구나.


딱 맞아떨어지는 원인과 결과. 이제서야 완벽하게 맞춰지는 퍼즐 조각들. 원인을 모를 때야 이해할 수 없던 그의 모든 근본 없는 언행들이 그제서야 이해됐다. 


항상 하루를 공유하던 사이인데 갑자기 듣기 싫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도, 항상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위로를 받아왔었는데 갑작스레 화를 내었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도 잘 이해되었다. 어찌나 잘 이해되는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닝- 일단은 ..."


"고마워, 키요코."


고마워. 돌이킬 수 없는 강을 지나기 전에, 바로잡아줘서. 내가 알아채지도 못하고 혼자 깊고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 전에 붙잡아줘서.


"야."


얼마 만에 부르는 건지 ... 닝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 이후로 보름 동안이나 말을 섞지 않았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저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 새로운 사랑에 얼마나 푹 빠진 건지, 토메오는 제 변화조차 눈치채지 못 해 의구심도 품지 않았더랬다. 


“이거 뭐냐?”


현관문으로 향하던 닝이 그를 돌아보자마자 토메오는 종이 한 장을 팔랑거리며 들어 보였다. 잔뜩 구겨진 인상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따지고 보면 그의 웃는 얼굴을 더 오래간 봐왔는데, 이제는 그의 구겨진 얼굴이 더 익숙했다. 먼 훗날에조차 그 험한 인상만이 기억될 정도로. 조소를 지은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써져 있잖아. 이혼 서류."


“그러니까, 이게 왜 여기 있냐고.”


태연하게 핸드폰으로 얼굴을 비추어보며 머리를 정리하는 닝을 향해 날이 선 말이 날아왔다. 잔뜩 구겨진 얼굴과는 달리 토메오의 셔츠는 구김 없이 곱게 펴져 있었다.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거라고 믿는데."


"..."


"서류는 채워 넣을 필요도 없어. 표시해 놓은 부분에 사인만 하고 도장만 찍어놓으면, 내가 알아서 갖다 낼게. 난 바빠서 이만."


도대체 제 말 중 어느 부분이 또 그의 심기를 긁어댄 걸까.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토메오를 눈에 담은 닝이 다시 몸을 현관문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애써 얼굴을 굳히며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내 체면이 있지. 어떻게 이혼을 하냐?"


조용히 수긍해줄 거라 여겼던 것마저도 제 착각이라는 듯 그는 체면을 들먹였다. 바쁘다는 말이 네 심기를 건드렸구나. 몸을 굽혀 운동화의 뒷보강을 피던 닝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본인의 체면을 거들먹거리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를 육 년 간 봐온 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제 명예를 건들고 있다는 사실을. 교수직을 목표로 하고 있는 네가, 최대한 빨리 교수직을 따내려 아등바등하고 있는 네가, 돌싱이라는 꼬리표를 달 감수를 하겠다고? 분명한 비아냥이 섞여 있는 말에 그녀는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너는 조용히 이혼해주겠다는 나한테 감사해해야지."


비아냥에는 비아냥으로 응수했다. 이러나저러나 제게도 꼬리표가 달릴 테지만, 상관없었다. 결국 무고한 자는 저였고, 가해자의 무게는 온전히 그에게 있음이 확실했다. 그 어떠한 꼬리표도 능력으로 찍어 누르면 되는 일이었다. 고요함만이 감도는 집 안에 천과 천이 시끄럽게 맞닿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안에 사인 해놔."


시간도, 감정도 모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닝은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시야를 흘리는 눈물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늘 밤, 본인이 사인 한 이혼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의 연인에게 전화를 할 테다. 그리고 저는 키요코가 자책이라도 할까 싶어 유일한 내 사람에게 연락조차 못 하고 혼자 술이나 마시리라.


하지만, 본능적으로 토메오에게 전화를 걸 저 자신의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는 탓에 마음대로 알코올을 들이붓지도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제 몸에 배어버린 외로움과 함께 눈을 감은 거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수도 없이 많은 그와는 달리 그가 빠져나가니 아무도 없는 제 신세가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꼴도 보기 싫은 테라다 토메오를 향한 애정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여전히 제 속에 애정이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죽도록 싫었다. 


관계는 무참히도 끝이 났는데, 밑바닥을 보이는 애정은 여전히 끝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었다.



5


굳이 관계의 종류를 나누어보자면, 카게야마는 대놓고 쿵 하고 마음에 들어서는 편이었지만, 닝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그녀에게만큼은 한참이고 물과 대립하던 기름이 끝끝내 마블링을 만들어내듯 스며드는 존재로 남기를 택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닝을 마주한 채로 인사를 건네며 애정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라도 내보이기 위해 애썼다. 제가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해보아도 그런 그에게 이끌려가는 시선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귀를 벌겋게 물들인 채로 시미즈 교수님을 뵈러 올 생각은 없냐고 줄기차게도 물어오는 그를 어찌 모른 체 할 수가 있을까. 


자정의 밤을 닮은 머리를 하곤 하얗게 질려서는 귀만 색으로 물들인 채 서 있는 카게야마를 신경 안 쓸래야 어찌 안 쓸 수 있을까. 


색채라곤 하나도 없이 온통 흑백만을 머금은 존재가 색을 얼굴에 칠한 모습을 보고도 어찌 그에게 시선을 안 던질 수 있을까. 


카게야마는 제가 아무리 밀어내 보려 해도 밀려나지 않았다. 어느 하나 잘난 것이 없어서 이 지경까지 온 제 어느 부분이 그렇게도 좋은 건지. 어느 점이 그렇게나 좋아서 저를 마주하기만 해도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마는 것인지. 그 사람은, 다 질린다고만 했는데.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그 사람도 처음에는 너와 똑같이 행동했다는 거겠지. 홀로 그 사실을 곱씹은 닝은 잔뜩 구겨진 소맷자락과는 달리 곧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 봐.”


덤덤하게도 말을 내뱉어놓고는 닝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제발 제게서 시선을 거두기를, 말을 거두기를, 걸음도 거두기를, 아니, 관심조차도 거둬가기를 바랐다.


내가 이혼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인데, 애초에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뀐 교수인데, 너는 왜 그 무엇도 모른다는 듯이 구는 걸까. 완벽한 본인과는 달리 흠집이 잔뜩 나 있는 사람이 취향이기라도 한 걸까. 본인을 닮아 잘난 사람을 만나도 될 너가 도대체 뭐가 그리 부족해서 그 무엇도 손에 쥐지 못한 나를 좋아할까.


어느 날은 그에게 후회 라는 단어를 언급했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답은 내놓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잠시 굳었던 그의 얼굴이 저와 눈을 마주하는 순간에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었다. 분명 그를 단념하게 만드리라 다짐했었건만, 제 포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참, 예쁘고 순수하면서도 풋풋한 사람이었다. 어찌나 순한지 잘난 맛에 살면서도 그 맛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30년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오면서도 처음 보는 존재였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웠지만, 제게 애정을 품은 그는 조금도 어른스럽지 못했다. 아마 그의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기겁을 하며 뒷목을 잡으실 것이 뻔했다. 굳이 본 적 없어도 뻔히 그려지는 장면이었다. 


제가 그의 부모님이었다면, 그렇게 반응했을 테다. 연락도 끊고, 지원도 끊어가며 기어이 연을 끊으려고 했겠지. 그렇게나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앞으로의 인생 따위도 알아서 하라 이야기하면서. 아무리 애지중지하던 아들이라도 저는 그리 가차 없이 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애정은 그렇게나 옳지 못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너의 어린 애정은, 아니, 환상은 그렇게나 옳지 않다는 사실을 어째 너만 모르는 듯했다.


"교수님, 정말 시미즈 교수님 뵈러 안 오실 겁니까? 그냥 잠깐, 아주 잠깐이라도 ..."


닝의 묵묵부답에도 카게야마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의도가 뻔한 부탁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에 드러난 핏줄이 터질 기세로 꽉 쥔 주먹 안으로 감춰진 두려움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를 물과 대립하는 기름이라 여겼던 제 확신은 모두 착각이었다. 너는 물과 어우러지는 수채화 물감이었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다 못해 색을 나누고 계속해서 상대를 물들이는 수채화 물감. 


닝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가 지닌 두려움이 제게도 퍼져오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기름이었다면, 밀어낼 수라도 있을 텐데 더 이상 그를 밀어낼 수도 없게 되어버려서 무서웠다. 결국, 그를 받아주는 날이 올까봐 두려웠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언젠가 그에게 마음을 주고, 몸을 주고, 내 인생의 반마저 기꺼이 건네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제 속에 스며드는 만약 이라는 단어는 저를 두려움 속으로 잠식시켰다. 과정이 어떻건 간에 결국 카게야마는 어리고, 똑똑하고, 예쁘고, 화려하여 그와 닮은 말간 아이에게 눈길을 주게 되리라는 사실을 저는 잘도 알고 있었다. 


피할 수 없을 그 과정이 무엇일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 따위도 없었다. 또다시 한순간의 달콤함을 위해 모든 두려움을 감내하기에는 과거의 흉터가 너무도 짙었다. 


이별이 무서웠고, 또 다시 앓아야 할 고통이 너무도 큼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제 과거의 주인공과는 달리 완벽하기만 한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아이에게 받을 상처는 더욱더 깊고 고통스러울 것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 이별이 더더욱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인간을 향한 마음조차도 아직까지 완전히 씻어내지 못 했는데, 완벽한 너와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까. 완전히 씻어질 날이 있기는 할까.


사념에 빠져 생각의 가지를 뻗쳐 나가던 닝이 곧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그의 마음을 받아주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도 제게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스며들어서는 안 됐다. 이 이상 그가 제게 스며들어서는 안 됐다. 


무서웠다. 자칫 했다가는 그에게 나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던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제 질문에 답을 않는 그를 보며 웃어버리고, 그를 받아들일게 될까 무서웠다. 그렇게 받아들여봤자 저는 결국 다른 아이에게 시선을 주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 뻔했다. 또다시 제 모든 걸 쏟아부은 존재를 떠나보내는 경험 따위를 굳이 사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있지, 토비오. 차라리 언젠가 만날 그 아이를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더 이상 아이도, 학생도 아닌, 회색빛으로 물들어버린 어른인 나 말고. 세상에 찌들고, 마음에 짙은 흉터가 남아버린 어른인 나 말고, 너의 순수함에 말갛게 웃어줄 그 아이를 기다리는 건 어떨까? 나는 네가 오염되는 걸 바라지 않아. 특히나 내가 그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고. 그러니까, 제발 다가오지 말아줘. 이제는 얼굴을 비추지도 말아줘. 제발, 그래주면 안될까?


전할 용기 따위는 없는 말들을 닝은 계속해서 되뇌었다. 주인 잃은 공간을 채워가는 공기만을 눈에 담으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발, 나 좀 살려주면 안 될까?



6


"이제 그만 찾아오지 그래? 갈 때 되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가겠지."


문으로부터 네 보폭으로 딱 한 걸음 내디딘 거리에 네가 서 있었다. 언제나와 똑같은 자리에서 또다시 네 본심을 숨긴 질문을 하던 너는 내 답에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새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어느새 생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사나운 눈매를 지닌 깊은 눈은 한 곳에 자리 잡지 못 한 채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네 귀의 붉은 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색채 따위의 단어를 연상시키지 못할 정도로.


어떤 답이 돌아올까 기다리며 손을 꽉 쥐었다. 초침이 째깍거리며 정적이 감도는 사무실을 시끄럽게 울리다 기다란 분침이 한 바퀴 돌았다. 여전히 답을 않던 카게야마는 저를 지그시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그렇게 목례를 한 뒤에 걸음을 돌렸다. 그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몸을 돌리고 문으로 향하는 그는 의외로 꽤나 태연한 모습이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모습임은 사실이었다. 비록 순수한 애정에 날카로운 말투로 상처를 내어가며 밀어냈다는 사실이 조금은 죄책감을 안게 만들었지만, 한 아이의 인생을 살렸으니 괜찮았다. 죄책감을 떠안을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그의 마음의 깊이를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며 내버려 두기라도 했다면-


닝은 제 머릿속을 뒤덮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여태껏 그래왔듯이 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 네 인생만을 열심히 살아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관심 두지 말고, 더 귀중한 존재들에게 마음을 줘.


문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의 내려앉은 어깨가 신경을 거슬렀지만 괜찮았다.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순간들일 뿐이었다. 특히나 좋은 이야기만 해주어도 불안감에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는 여린 존재들이라면. 


어린 청춘들은 희망이었고, 카게야마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 또한 청춘에게만 눈길을 주는 어리고 희망찬 청춘이길 바랐다.



7


“왜 왔어?”


“... 그냥 얼굴 뵈러요.”


“내가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그냥 제가 좋아서 뵈러 왔어요.”


제 모든 바람들과 안념이 순식간에 소멸한 순간이었다. 카게야마는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서서는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로 언제나와 다른 말을 제게 건네왔다. 전처럼 돌려 돌려 전하는 마음이 아닌 직접적인 고백이 사무실을 가로질러 제게로 달려왔다. 


깊은 눈의 진한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짙었으며, 그의 붉은 귀는 피로 칠하기라도 한 듯 언제라도 터져버릴 기세로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그가 얼른 올바른 길을 찾기를 바라는 측은지심을 가졌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의 둔한 성격이 너무도 싫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해주어야 하는 걸까. 아, 사실은 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만 와. 너와 같은 감정은 나누기 싫어, 라고 직접 이야기해주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닝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카게야마는 돌아갈 마음 따위는 없다는 듯이 사무실을 빙 훑어보고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고지식하기는. 닝은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이 신경을 끄고 제 할 일에 몰두하려 해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제 나이도 알고, 제 상황도 모두 알고 있는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마음을 키워내는 추악한 사람을 향한 애정이 왜 그렇게나 끈질긴 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길쭉한 인영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온기가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만으로 채워지는 공간 너머로 보이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는 네 손길에 열리지 말아야 할 문이, 쓸데없이 제 취향인 얼굴과 목소리가 넘어오지 말아야 할 경계를 지키고 있는 문이 굳게도 닫혀 있었다.


저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에 마주하는 얼굴이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래야, 내 인생이 한결 편해질 테니까.


“하-”


상념에 눈을 감으면 검은 물감으로 뒤덮이는 앞, 그리고 눈을 뜨는 너. 


닝이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정말 너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을 아는구나. 너의 순수함은 사람을 더더욱 배덕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모든 언행 하나하나가 다 스며들어 뇌리에 박혀서는 빠져나올 생각을 않았다. 눈만 감아도 모두 훤히 그려질 정도였으니 중증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주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나도 너를 바라보고 네가 내 인생에 스며드는 날이 온다면, 기어이 네가 어리고 말간 또래의 아이에게 눈길을 주는 그날까지도 깊게 남아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게 쿡 박혀 있었다. 어리고 다정하면서도 예쁘기까지 해서 그와 잘 어울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만 그 사람처럼. 


아직까지도 마냥 욕하지는 못하게 만드는 다정한 언행과 잘난 얼굴이 제 기억 속에 깊이 박혀버린 바람에 애정 어린 마음을 오래간 외면했던 저 자신을 탓하게 만드는 그 사람처럼 결국 너도 변해버릴 텐데. 그 사람보다야 한참 더 잘난 네가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서 맴돌면 어쩌자는 걸까.


“그냥 제가 좋아서 뵈러 왔어요.”


이 와중에도 네 목소리가 또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너는 정말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8


“카ㄱ- 미야?”


출석을 부르다 말고 그의 이름을 툭 내뱉으려던 제 입을 겨우 막아냈다. 하마터면 그와 고작 한 글자를 닮아있는 학생의 이름을 보곤 자연스럽게 불러버릴 뻔했다.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온전히 입에 담아본 적도 없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 모든 변화는 모두 그의 탓이었다. 제 모진 말들에도 여전히 인사를 하고 문 앞에 가만 서서 저를 쳐다보기만 하다 말없이 떠나버리는 카게야마 토비오 때문이었다. 그러다가도 아주 가끔은 본인의 여린 마음에 대한 고백을 툭 내뱉고는 떠나버리는 그의 탓이었다.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알아채지 못하는 그의 둔함, 어린 나이를 대변해 보이는 그의 순수함, 중저음의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 화려한 집안보다도 더 화려한 외모, 그리고 ...


이 모든 걸 가진 네 탓이었다. 결국, 머릿속에 깊게도 박혀버려서는 엄한 생각밖에는 하지 못하게 만드는 너 때문에 감히 넘봐서는 안 될 존재에게 다가가도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이 모든 건 너에게 뻔한 질문을 던지고 너의 뻔한 대답을 들으며 웃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안겨주곤 했다. 


참으로도 순수해서 참으로도 위험한 존재. 부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래왔다. 하지만, 이제는 확신은 커녕 희망조차 제대로 품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상처 받았으니, 처음이 어렵다지 두 번 정도는 아파도 별 감흥 없지 않을까. 제 상상만큼이나 힘겹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 믿고 싶다는 욕심을 제게 한껏 안겨주었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게 아니잖아. 


닝이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강의하다 말고 몇 번이나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게 되고 말을 멈추게 될 정도로 네가 눈에 아른거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에 관한 생각들과 선택에 관한 사념들. 끝내 계획했던 만큼의 진도를 나가지도 못해서 따로 정리해 두었던 프린트물의 복사본만을 던져주고 수업이 끝났다. 


공사 구분조차 못 하는 저 자신이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너를 받아들여 버리면 어째야 하는 걸까. 벌써부터 이 지경이 되어버렸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울고 싶었다. 


차라리 펑펑 울면, 이 모든 상념이 눈물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해 발에 짓밟히고 짓밟히다 마침내 사라질 수 있을까. 


소매로 눈물을 닦아낼 때마다 모든 착각과 감정들조차 함께 닦여 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나마 모두 내 속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다 너 때문이었다.


이 모든 건,


다,


모조리 다,


네 탓이었다.


“안ㄴ ... 괜찮으세요?”


또 너였다. 또, 또, 또 너였다. 너는 내게 왜 그러는 걸까. 도대체 왜 내가 가장 힘든 날들에만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근래 들어서는 하루하루가 모두 고비임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특히나 지치는 날들에만 나타나기 일쑤였다. 전과는 달리 하루걸러 하루 찾아오는 그는 꼭 그런 날들에만 맞추어 귀신같이 찾아왔다. 


이 눈물들이 실은 모두 너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물론 그가 알아서는 안 됐지만, 그렇게나마 제 눈 앞에서 사라져줬으면 싶었다. 어찌나 찰떡같이 타이밍을 맞추어 찾아오는지 모두 집으로 향하고도 남을 시간인 지금에조차 그는 제 사무실로 찾아왔다. 하필 그가, 하필 이 시간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조차 않았다.


이젠 조교까지 의심을 하고 있어. 의구심을 담은 부엉이의 눈이 아닌, 하이에나를 닮은 눈초리를 하고서는 너를 바라봐. 그리고 나를 돌아보지. 얼마나 말들이 많겠어. 천재로 소문이 자자한 어린 남학생이 다른 학과, 다른 계열의 이혼을 겪은 교수와? 콧방귀도 안 나오는 소리였다. 여기저기 술자리의 안줏거리나 될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문젯거리 삼을만한 관계라는 뜻이었으며 그것을 모른 체 하고 싶어지는 제 마음 또한 문젯거리 삼아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 속을 가득 채운 흙탕물은 꼴에 또 물이긴 하다며 말간 백색 물감에 완전히 물들어버렸다. 주제에. 제 주제도 모르고. 손을 한 바퀴 휘젓기만 해도 다시 흙탕물이 되어버릴 주제에, 어지러웠던 마음이 말끔히 정리되고 말았다. 


너는 정말 사람이 돌아버렸다는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 울어버리게 만들었다. 이 모든 분과 한과 악이 이리저리 섞이고 섞이다 못해 눈물까지 쥐어짜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모두 너 때문에 생겨난 것들로. 그러니 제발, 제발- 


“왜- 왜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다가오지 마.


내 앞에 얼굴을 보이지도 말고, 네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다가오지도 마.


카게야마는 꼬박꼬박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사제 관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하고 있었다. 눈물을 주르륵 흘려내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저에게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며 우려가 가득 담긴 말을 건네기까지 하는 그 때문에 기어코 더 많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을 내치지도 못하는 저 자신을 향한 분이 가득 담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투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니. 내가 그만 울기를 바란다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제는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아팠다가 다시 늘어지는 꼴을 반복하는 속 때문에 심장까지 아려왔다. 차분히 뛰고 있는 심장은 누군가 손으로 쥐어짜기라도 하듯이 욱신거렸다.


너는 모르겠지. 내 심장을 쥐고 있는 그 손의 주인이 너라는 걸. 그래서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도 몰라. 그저 그 순수한 애정을 티 내고 붓기만 하면 되는 너는, 절대 모를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너는 그런 얼굴을 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닝이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마치 본인이 더 서글프고 아프기라도 하다는 듯한 얼굴을 그가 하지 않았으면 했다. 저보다도 더 아픈 얼굴을 하는 그가 싫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그가 미웠다. 나는 이미 네 색에 물들어버렸으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이미 너의 색으로 범벅이 되어 잠식되어 버린 내가 안 보이는 거야?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과는 달리 내뱉고 싶은 말들은 모두 저 기저로 꾹꾹 억눌러졌다. 


이미 뒤덮여버렸어. 흙탕물 속의 더러운 잔해들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흑색으로 뒤덮여버렸다고. 그 어떠한 색도 제 존재감을 뽐내기는커녕 감히 침범하지 못할 너의 색으로 새까맣게 물들었어. 그러니, 제발 가줘. 도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 물을 감싼 이 피부의 결을 타고 하나하나 다 덮어버려야 만족하겠어? 나 자신을 제어하지도 못 할 정도로 네 색만을 머금어야만 만족할 거야?


그는 어찌나 둔한지 못됐다고밖에는 표현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왜 너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너는 느끼지 못 하는 걸까.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과 똑 닮아있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 하는 걸까. 혹시 네 눈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짙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너와는 달리 순수하지 못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나, 엄청 티 내고 있잖아.


이제는 네게 마음을 주고 있으니 멀어져달라고.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떠나 달라고.


“이제 그만 울어요. 그러다가-”


그만해달라고.


제발 등을 돌려달라고.


이렇게 티 내고 있잖아.



9


눈을 감아도, 감지 않아도 그가 보였다. 그가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서조차 그가 보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를 하염없이 거닐기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힘들었다. 문신처럼 남아버린 흉터와 내 앞을 계속해서 가로막는 벽 때문에 이제는 지쳤다.


“교수님.”


멍하게 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드디어 문이 열리고 카게야마가 들어왔다. 그의 인영만이 아른거리던 그 자리를 떡하니 메꾸고 서 있었다. 


너는 어떨까. 아직도 내가 그렇게나 좋을까? 사실, 나는 네가 날 안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래야만 네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나를 잡아먹기 전에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너의 귀는 언제까지 붉을 예정인지 알고 있니? 나는 알고 있어. 아마, 더 이상 그 사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 생각을 하지 않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 지나고 나서겠지.


“조교님께서 저보고 왜 교수님 뵈러 오는 거냐고 하셨어요.”


카게야마의 말에도 닝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와- 그 학생 진심이래? 그래. 조교는 그렇다 쳐도, 너는 그런 하이에나 같은 눈빛을 보고도 정말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라고 믿는 거야? 


그녀는 혀로 입안을 크게 굴리며 그를 멍하게 쳐다봤다. 하기야, 너는 이렇게나 둔하니 못 알아채는 것이 당연한 거겠지. 그래서, 너는 뭐라고 답했어?


"..."


"그래서 제가 교수님 짝사랑해서 마음대로 오는 거라고 했어요.”


그는 하이에나 같은 조교보다도 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타인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그를 과소평가한 듯 싶었다. 아무래도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내보이기 위해 저런 고백을 던지는 것 같은데. 닝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안하게도, 저는 그를 받아줄 정도의 크나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 그랬어요. 오늘은 일찍 가봐야 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닝이 의아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그의 말들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분명 저인데, 되레 그가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덤덤하게 말해놓고는 왜 네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설마, 내가 착각이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너는 정말 너무 뻔했고, 둔했고, 어렸으니까, 네가 그런 눈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하는데, 그 날 이후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제 존재조차 잊은 사람처럼.


왜 안 올까? 


이 추운 날씨에 괜히 건물 밖에 놓인 벤치에 앉아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고 있어도, 그의 인영조차도 시야에 걸리지 않았다. 어째서. 설마 그의 고백에 그렇게 대꾸했다는 이유로? 


제가 그렇게 스리슬쩍 넘겨버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그는 다음 날 찾아왔고, 고백 따위는 처음부터 한 적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언제나와 똑같이, 한결같이. 


닝이 고개를 숙였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이 바닥을 나동그랐다. 발로 툭 치자마자 바스러지는 갈색 이파리에 그녀는 콧방귀를 뀌었다. 항상 그랬잖아. 항상. 


갑자기 이럴만한 이유는 없는데.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납득이 가는 이유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뎌졌다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저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이유였다.


상처받았으려나. 그 여린 마음에 연신 내어놓은 상처가 결국 그를 돌아서게 한 걸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그토록 빌고 빌었듯이 제 마음을 꾸밈없이 내보이던 존재가 다시는 제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더 이상 그의 여린 마음을 건드리며 크기를 재어보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했다.


그냥 키요코랑 이야기하는 김에, 잘 지내는지만 보고 오자. 쿨하게 보고 오기만 하는 거야. 애초에 내 목적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 시미즈 키요코와의 대화인 거야. 그러니까, 쿨하게.


“웬일이야, 닝? 학교에서는 볼 생각도 안 하더니.”


닝을 보자마자 환히 웃어 보이는 키요코는 이미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다 말고 두 팔을 벌리는 그녀를 마주 안으면서도 닝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아무리 그녀의 사무실을 샅샅이 눈으로 훑어보아도 비어있는 책상들만이 시야에 걸릴 뿐, 제가 찾고 있는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 군은 이제 안 오는데."


"언제부터?"


매번 방문을 고사하던 제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한 키요코는 곧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뒤늦게 제 실수를 눈치챈 닝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스스로도 얼추 인정해버린 마당에 이제 와서 키요코에게까지 손을 내저을 수는 없었다. 비록 진정한 본심을 꺼내 보일 생각도, 제 입으로 인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얼마 전부터 교수실에는 안 오고 있어. 큰 공연이 곧 있을 예정이니까 당연하긴 하지만, 이상하긴 하지. 항상 말없이 있긴 했어도 굳이 시험 기간 때도 꼬박꼬박 와서 내 일까지 돕던 학생인데.”


근무 태만인 조교 대신 더 배우기 위해서라며 키요코를 돕던 그였다. 보수도 없이 꼬박꼬박 성실하게도 그녀를 도왔었다. 아무리 바빠도 꾸준하게도 도우러 오던 학생이 순전히 이타심만을 이유로, 학구열만을 이유로 자처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키요코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카게야마는 이 일을 본인의 사심을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 또한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뿐더러 제 친구를 위해 카게야마를 기꺼이 받아주다 못해 슬쩍 정보를 흘리기도 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서는 당사자들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키요코가 답을 내놓지 못하는 닝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래도, 억지로 상자 안에 욱여넣기만 하던 감정이 마침내 터져버린 듯한데. 언제고 곧은 길을 가겠다며 꿋꿋하게도 본인이 정해놓은 길을 벗어나지 않던 닝을 이리 만들어버릴 정도라니. 다정히 웃어준 키요코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굳이 교수실까지 올라오던 사람이 왜 안 올까.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키요코의 사무실에 와 일을 돕던 그가 왜 안 오고 있을까. 바빠서? 공연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해져 있는 답으로 향하고 싶지 않아 닝은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써 제 눈앞에 내밀어진 답을 외면하며 그녀는 괜히 웃어 보였다. 제게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보라며 등을 토닥이는 키요코의 눈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분명 외면할 생각이었다.



10


내가 왜 숨었지.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닝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슬쩍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흘기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다른 학생들과 섞여 있는 그는 괜찮아 보였다. 다른 이들과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 꽤 괜찮아 보였다. 많이, 아주 많이, 그러니까, 카게야마는 너무 괜찮아 보였다. 괜히 신경 썼네. 저도 모르게 닝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괜히 신경 썼어. 피아노가 그의 전부라는 소문이 자자한데도 친구는 많이도 있고, 무표정하기만 하던 사람이 즐거워보이기도 했고. 속으로 웅얼거리던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눈을 동그랗게 키워냈다.


생각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잘 지내면 좋은 거지. 애초에 내가 걔를 걱정할 권리도, 이유도 없잖아. 카게야마를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히려 신경을 꺼야 하는 축에 들지. 애초에 이게 내가 원했던 거잖아. 그치?


“왜 숨어요?”


닝이 놀란 낯빛을 띠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얘 언제 왔지? 상념에 빠진 탓에 그의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참 위에 위치한 얼굴은 아까와는 영 딴판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 숨었어.”


“...”


절대 그를 본 티를 내서는 안 됐다. 그를 신경 썼다는 사실도, 그가 자꾸만 생각나 찾아 나섰었다는 사실도, 그러다 되레 속이 상해버렸다는 사실도 그가 알게 해서는 안 됐다. 티 내지 말자. 제발, 티 내지 말자.


“나랑 눈-"


눈을 가리키는 그의 손에 닝이 흠칫하며 벽에 등을 맞댔다. 움찔 떨리는 그녀의 어깨와 본인의 어깨 너머로 옮겨지는 그녀의 시선을 온전히 눈에 담아낸 카게야마가 웃었다. 


어쩔 수 없이 터져버렸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그를 닝은 눈에 담아내었다. 단 한 번도 웃은 적 없던 말간 사람이 짙은 눈이 휘어지도록 웃어 보이고 있었다. 


문득, 그 얼굴을 매일 마주하게 될 미래의 누군가가 부러워졌다. 거리낌 없이 너의 애정을 받아내고 너에게 사랑을 쏟아줄 누군가가. 매일매일 이 얼굴을 마주한 채로 숨을 쉬고, 너의 품에 안겼다가, 너의 연주 소리를 듣다가, 또 눈을 감고, 끝에는 영원히 눈을 감는 그 날까지도 이 해사한 웃음을 보게 될 누군가가 너무 부러웠다.


그 동시에 그 누군가는 너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그렇게 너의 끝 사랑이 되어 너에게도 사랑을 부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그럴 재목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도 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생각해요?”


넋을 놓은 채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던 닝이 제 볼을 가볍게 건드리는 손가락에 퍼뜩 시선을 올렸다. 글러먹었네. 아무래도 제대로 말아먹은 것 같았다. 


반짝이는 두 눈을 마주한 그녀는 미간을 구겼다. 너는 왜 남의 얼굴에 마음대로 손을 대고 그래. 그렇게나 예쁜 손은 하얗고 까만 건반이나 너의 사랑을 받을 사람에게나 대란 말이야. 남의 학과 교수 말고.


“떼.”


닝이 단호하게 내뱉은 한 음절에 그녀를 가만 내려다보던 카게야마는 여전히 별이 박힌 눈을 한 채로 손을 거뒀다.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처럼 빛나는 눈을 마주한 그녀는 입을 함부로 떼지 않았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입꼬리만 당겨 올리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니 심장이 아파왔다.


"교수님."


"..."


"교수님 봐서 좋아요."


나는 너의 모든 부분이 모조리 다 싫었지만, 그중 제일 싫은 것은 너의 말들이었다. 담백한 목소리를 닮은 네 담백한 말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이유라 함은 쓸데없이 담백해서. 달지도, 쓰지도 않아서 뭘 넣은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한 네 말들. 이제 단 것은 질렸지만, 질리지도 않을 담백함은 제 속을 자꾸만 긁어댔다. 저와의 반의어인 솔직함을 그대로 담아낸 말들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곤 얼굴을 미묘하게 구긴 닝이 고개를 홱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그리고 그는, 곧바로 넓은 보폭으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11


"교수님."


한동안 저를 안 찾아오던 남학생은 또 제멋대로 사무실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김에 감탄하다가도 결국 그 끈기에 부채질해준 사람은 저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이제는 그를 밀어낼 핑계조차 사라졌다. 결국 마땅히 할 말을 골라내지 못한 닝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제 공연 보러 오세요.”


와주세요 도 아닌 오세요. 의사를 묻는 말 따위가 아님은 분명했다. 하지만, 다짜고짜 오라고 말하는 카게야마에게 저는 고개조차 가로저을 수 없었다. 애초에 키요코가 가는 공연에 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다 해서 바로 응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겨우 알량한 자존심 따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닝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그저, 이쯤 되면 그는 둔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사념으로 빠져버릴 뿐. 


그를 단순한 인간으로만 치부해버린 것은 모두 제 착각이었다. 그는 둔하지도, 교활하지도 않았지만,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 해서 완벽히 파악해낸 것이냐 물으면 그 또한 아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속을 파고드는 것이 쉬운 듯 보여도 쉽지 않았다. 꼭, 그의 담백한 말들을 닮아 있었다.


“꼭 오세요.”


결국, 티켓까지 들이밀며 하는 말에는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티켓을 손에 쥐면서도 굳이 직접 건네오는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알기도 전부터 키요코가 그녀의 학생들과 준비를 많이 한 졸업 공연에는 꼭 가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그 사실은 굳이 캐내지 않아도 카게야마 정도면 뻔히 알고 있을 테였다. 


직접 말해주고 싶었을 마음이야 이해되었지만, 왜 티켓까지 손에 쥐여주는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저히 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워낙 순수한 아이라 그런 걸까, 너무도 담백하고 단순한 저 속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티켓은 카게야마 군이 직접 주고 싶다고 했는데, 혹시 못 받았어?'


"그건 아니고 ..."


우려스러운 얼굴로 묻는 키요코에게 닝은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 웃어넘겼다. 제가 그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확신이라도 얻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의 공연만큼은 제가 볼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다행이네. 근데, 진짜 너 좋아하긴 좋아하나 봐.”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에 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논리정연하게도 읊는 키요코의 말들 중 틀린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처절하게 부정하는 이유는 그 끝자락에 다다르면 왜 안 받아주는 것이냐는 질문을 해 올 것이 뻔해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며 힘들어하던 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온 키요코는 근래 들어 특히나 그런 말을 자주 해오고 있었다. 


키요코의 말을 끊어먹은 닝이 손을 내저으며 저녁이나 같이 먹자 통보하곤 그녀의 사무실을 나섰다.


착하잖아, 솔직하잖아, 잘생겼잖아, 널 좋아하잖아. 수많은 타당한 이유를 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제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자 핑계를 내 입으로 직접 말하면 더 비참해질까봐. 


그 어린 애를 내가 왜, 어떻게 받아줘. 내가 대학 입학할 때도, 걔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 그런 말들을 내 입으로 내뱉고 만다면, 더더욱- 


아.


그녀가 실소를 흘렸다. 이미 그르친 일이었다. 제 유일한 다짐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그렇지. 안 받아주는 게 맞아. 그게 맞는데, 그 사실은 내가 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아는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자괴감과 배덕감에 닝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또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내 마음이라도, 내 감정이라도 내가 쥐고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해도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지갑에 예쁘게 꽂아둔 티켓을 뺄 생각은 하지도 않는 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미웠다. 저 자신이 죽도록 싫었다.



12


산들바람을 닮은 부드러운 음악.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연주. 


너의 공연을 봐봤자 너를 향한 하찮은 감정의 몸집만 불릴 뿐인데, 내가 왜 온 건지. 또다시 뒤늦은 후회를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미소를 머금은 채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면 더 후회할지도 몰랐다. 지금보다도 더 큰 후회를. 


침을 꿀꺽 삼킨 닝이 조명을 반사할 정도로 새하얀 셔츠를 입은 그의 옆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 옆자리에 앉은 키요코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나 먼저 가볼게.”


“어? 카게야마군 차례는 아직 안 끝났는데 ...”


“알아.”


애써 웃어 보였다. 이 속의 후회들과 뒤섞인 추악한 감정들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입꼬리를 당겨 보였다. 물론 알고 있었다. 제 짧은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드러나 버렸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착한 키요코는 애써 모른 체 해주며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닝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점차 클라이맥스로 향해 가는 연주를 듣고 싶다는 욕심이 점차 커지는 것을 무시하며 힘겹게 다리를 이끌고 관객석을 빠져나왔다. 


이제 막 하이라이트로 열심히 달려가는 연주 중에 나오기로 결심한 것은 단순한 후회 탓이 아니었다. 절정을 찍을 때쯤이면 울컥해버릴 자신이 두려워서였고, 관객석으로 몸을 굽히며 인사를 하다가도 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어찌나 부드러운지 제 마음마저도 야들야들하게 만들어버리는 음악을 듣고 있자니 회의감이 파도처럼 몰려왔었다. 제가 성인이 되는 순간에조차 그는 초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 제가 한심했다. 그 와중에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본인이 사랑하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는 그가 너무나 예뻐 보여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나이 먹고도 감정 조절 하나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데, 너는 잘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너는 그렇게나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그 사람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두려움만 품고 사는 주제에, 너를 좋아하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는 미련이 끝내 닝의 발목을 꽉 붙잡았다.


너는 빛나서 예뻤다. 클라이맥스에는 다다르지도 않았고, 손가락을 몇 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의 울림을 주는 연주를 해내는 네가 참으로 멋있었다. 사적인 감정을 모조리 배제하고도 당당히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너의 재능을 살려 무대 위에서 네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동경의 눈빛을 받는 너는 멋있었고, 눈이 부시도록 너만을 비추는 밝은 조명과 과하게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을수록 제 속이 상했다. 너를 향한 동경과 애정이 그 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남과 동시에 너를 닮은 예쁜 사람과 예쁜 사랑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피어난 탓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사람과 사랑해야만 너는 오래도록 빛을 발하며 무대에 서 있을 수 있을 터였다. 


말간 너와는 달리 흉터가 그득한 나는, 너보다 나이가 한참 많으면서도 한참 한심한 나는, 너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네가 가장 빛나는 순간에 나는 내 마음을 잔뜩 구겨 바닥에 내던졌다.


이 모든 건 확신이자 내 손으로 쓰고자 하는 결말이었다. 앞으로는 문도 잠글 것이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향할 것이며, 조교에게도 귀띔해놓을 것이다. 진작에 할 수 있었을 모든 방법을 떠올리며 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그에게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네게 수많은 틈을 내보였다. 네 탓이라 여겼던 모든 원인은 사실 모두 내 탓이었다. 나는 여태껏 너를 외면하는 수많은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내 공허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모든 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화려한 너를 더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 위의 너를 보고 나서야 너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조차 밝게 비추는, 태양보다도 밝은 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나는 아름다운 월광을, 달을, 그리고 너를 사랑할 자격이 없으니까.


“교수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닝이 우뚝 멈춰섰다. 이것 봐. 네가 이렇게나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는 끝끝내 미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너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서 있었잖아. 


몸을 돌리자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하게 펴져 있던 새하얀 셔츠와 검은 넥타이, 그리고 단정하게 반만 올렸던 머리마저도 모두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정말 잘생겼구나. 이 와중에도 너를 피하기보다 네 얼굴을 훑어볼 지경이라니, 새삼스러웠다. 너 진짜 화려한 사람이구나. 그 누구와도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을 내뿜는 사람이구나. 재능 있고, 착하고, 잘생긴 너는 정말 화려한 사람이구나. 


별 하나도 온전히 품지 못하는 칠흑의 심해인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화려한 빛을 만들어내는 고귀한 달님이었구나. 


내가 아무리 너를 필요로 해도, 너에게 다가서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구나.


“왜 중간에 나가셨어요?”


“그냥.”


“... 네?”


숨을 고르던 카게야마가 사나운 눈매를 유순하게 늘어트리며 묻는 모습에 닝이 미소를 머금었다. 덤덤한 답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유를 갈구하는 눈빛에도 무엇 하나 내놓을 수 없었다. 내가 너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


“왜, 왜 울어요?”


닝이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렸다. 너는 타이밍을 더럽게 못 맞추는 사람이었다. 완벽한 너의 틈이었다. 


저 높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이라서 그런 거야? 바다가 잔잔하든, 파도를 일으키든, 아예 말라 없어지든 간에 제시간에 모습을 보이고 또 사라져버리는 달이라서? 나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존재라서? 그녀가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테니, 오지 마. 


절대 닿지 못할 관계 속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 되게 하지 마.


더 이상 멀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


그녀에게 다가서던 카게야마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녀의 얼굴을 향해 뻗던 손을 그가 조용히 거둬갔다.


"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입술까지 파르르 떠는 닝을 보며 카게야마는 자리에 목석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멈출 생각을 않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힘겹게 숨을 내쉬는 그녀를 그는 가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무엇 하나 해주지 못한 채 카게야마는 그녀보다도 더 서글픈 얼굴로 닝을 내려다봤다.


토비오, 너는 그럴 필요 없어. 정말이야. 그저 나 자신을 향해야 했던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버린 것뿐이야. 나를 모른 체 하고 저 멀리 떠나버려도 돼.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이 유유히 떠나버리는 순간에조차 이 자리에서 울고 있을 나를 네가 보지 않았으면 하니까, 차라리 떠나줘.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굳이 네가 제시해주려 할 필요는 없어. 나는, 그냥, 그저 ...


"너를 좋아할 뿐이니까."


제 의지와 상관없이 또다시 입 밖으로 튀어 나가버린 말에 그는 언제 슬퍼했냐는 듯 밝게도 웃었다. 여전히 얼굴에 남아있는 설움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이었다. 


너는 영원히 모를 거야. 너는 무표정 할 때도 잘생겼고, 얼굴을 구겨도 잘생겼고, 뭘 해도 잘생겼는데, 그렇게 웃을 때만큼은 정말 예쁘다는 사실을 너는 영원토록 모를 거야.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웃음이거든. 그러니까,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와 함께 웃어주고 너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밝게 웃어줘. 네가 웃는 순간에조차 울기만 하는 나 말고. 먼저 다가가지도 못 하는 내게 다가오지도 말고.


"더 빨리 말해줬어도 좋았을 텐데요."


어느새 닝의 앞으로 다가선 카게야마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마주 안지도 못 할 정도로 서럽게 우는 그녀의 몸이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젖어가는 내내 카게야마는 그녀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카게야마 토비오,


카게야마,


토비오,


내 말 안 들어줘서 고마워.


————————


“...”


눈을 떴을 땐,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차 특유의 내음이 코를 찔렀고, 어색한 풍경의 차 내부가 시야에 걸렸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땐, 저를 내내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보이는 얼굴이 옆에 있었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넋을 놓은 채 네게 내 마음을 토해내 버렸을 뿐인데 왜 너의 차에서 잠들어 있던 걸까. 설마 울다가 잠든 건 아니겠지?


"나, 왜 여기 있어?"


제 물음에 그가 내어준 답은 제 예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나 정말 추함의 극을 보여주고 있구나. 창피함에 이미 잔뜩 부어버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감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미 다 봤을 테지만, 굳이 그 시간을 연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뻐요, 좋아요.”


“...”


“좋아해요.”


손을 내리지 않는 닝에게 카게야마는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애써 가리며 제 마음을 고백했다. 이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로 듣는 담백한 고백은 달았다. 그렇다 해서 제 한심한 선택과 언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뒷수습은 어쩌려고 그런 식으로 실토해버린 건지. 종국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복잡한 심경도 모두 꺼내 보였으니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저 자신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낼 뿐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렸으면서 또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근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얼굴을 가린 제 두 손을 잡아 내리며 하는 말에 닝은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했다. 끈질기게도 시선을 곧게 내리꽂은 채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카게야마가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살거렸다. 


"사랑해요."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제 볼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맞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받아들일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이 제 입술에 맞닿았다. 


영원히 닿지 못하리라 믿었던 달이 이리도 따스하면, 나중에 버려지는 한이 있더라도 눈을 감고 싶어질텐데. 제 볼을 감싸는 커다란 손에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는데.


여담


카게야마는 닝이 본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닝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알아채었습니다. 닝이 말했던대로 티를 아주 많이 냈기 때문에, 모른 체 하는 것이 더 어려웠죠. 닝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그는 단 한 번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카게야마가 갑자기 닝을 찾아가지 않은 것은 일종의 테스트였습니다. 곧 졸업이 다가오니, 그 이후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막막했고, 닝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요. 일종의 설계였습니다. 눈치는 없는 둔한 사람이어도 배구에서 셋업을 하듯 설계는 잘 할 인물같다는 해석. 순수한 마음 하나만으로 직진하는 그는 순진하지만은 않겠죠.


중간중간에 오락가락하는 닝의 말들이 보이실겁니다. 이는 계속에서 커지는 애정과 어떻게든 부정하려는 마음이 대립하는 탓. 사소한 단어의 선택에도 이 차이를 담아내었으니, 찾아보시는 것도 나름의 소소한 재미 ...ㅎㅎ


감정을 담아내기 위한 이런저런 장치가 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 제발, 나 좀 살려주면 안 될까? ] 의 경우, 고민하지 않게 나를 떠나는 방식으로 살려달라는 닝의 생각과 그냥 더 밀고 들어와서 너를 마음껏 사랑하게 해달라는 마음의 대립.


다른 중의적 표현 등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꼭 하나 더 짚어보고 싶은 것은


[ 나는 너의 모든 부분이 모조리 다 싫었지만, 그중 제일은 너의 말들이었다. 담백한 목소리를 닮은 네 담백한 말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중략) 이제 단 것은 질렸지만, 질리지도 않을 담백함은 제 속을 자꾸만 긁어댔다. 나와의 반의어인 솔직함을 그대로 담아낸 말들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싫다고 말하지만, 모조리 다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전남편의 다정함, 즉, '단 것'은 질렸지만, 카게야마의 담백함은 속을 긁어대듯이. 본인과는 전혀 다른 솔직함이 너무 좋아서 계속해서 부정하려는 제 마음을 긁어대며 괴롭힌다는 것. 닝은 카게야마의 담백함이 제일 좋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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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뭐야!!!!!!!! 소재부터 너무 맛있어보이잖아!!!!!!!!! 하앙
3년 전
독자2
센세 최고야 하앙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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