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를 부탁해
03
월요일 오후의 버스는 제법 한산했다. 오후 수업 시간에 맞추어 아저씨와 함께 버스에 올랐을 때, 버스 안에는 서넛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버스 안으로 햇볕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지만 에어컨의 찬 바람 덕분에 버스 안의 공기는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흥얼거리며 경치라도 구경하거나, 아니면 잠깐 눈이라도 붙이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의자에 앉아 졸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아저씨보다 먼저 버스에 오른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뒤따라온 아저씨가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음악이나 경치, 졸음 따위의 것들은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이만큼이나 가까워진 거리는 아저씨를 의식하게 되기에 충분했고, 그만큼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나 달라져 버린 마음은 나조차도 불편하고 어색할 정도였다. 자신의 경호원에게 가벼운 호감을 갖는 정도야 괜찮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얼마간 함께 지내야 할 사람인데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 더 잘된 일이지 않은가. 무엇이라고 단번에 정의할 수도 없는 그 이상한 감정을 떨치기 위해 내가 떠올린 생각들이란 누가 봐도 어설픈 변명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꾸 아저씨에게 닿으려는 시선을 애써 창 밖으로 돌렸다. 버스가 출발했다. 조금 열려 있던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날렸다. 방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도 몇 번이나 거울을 확인하며 정리했던 머리가 망가지자 짜증이 일었다. 나는 창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반쯤 끌려오던 창문이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턱, 멈춰 버렸다. 더 좁아진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아까보다도 더 거센 힘으로 신나게 머리카락을 날려대고 있었다. 깊게 내쉰 한숨마저 바람에 섞여 사라지는 듯 했다.
창문 닫기를 포기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앞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제 멋대로 날리는 옆머리까지는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체념과 함께 고개를 숙인 채 머리가 날리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아저씨가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어깨쯤에 아저씨의 몸이 닿는 것이 느껴지자마자, 나는 놀라서 몸을 창가 쪽에 붙이고 고개를 들었다. 곧 바람이 멈추고, 날리던 머리도 잠잠해졌다. 창문을 닫은 아저씨의 시선이 곧바로 나에게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들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내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아저씨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조용하고 곧은 시선 때문에 나는 허둥대면서도 머리를 정리하던 손을 빨리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차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애써 피하고 있던 시선을 아저씨 쪽으로 옮겼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아저씨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가방에서 거울이라도 꺼내 머리를 확인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에, 아저씨가 내 머리 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아저씨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아저씨가 아직 떠 있던 내 앞머리 가닥을 잡아 내렸다. 그러는 표정이 썩 무심했다. 아저씨와 달리 무심한 표정일 수 없었던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리고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숨기기 위해 얼른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기에 나는 오히려 조급해졌다. 더구나 아저씨에게는 더욱 들켜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그런 다짐과 함께 나는 양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핸드폰을 붙잡았다. 무작정 재생버튼을 누르니 달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꾸 아저씨에게로 쏠리는 신경을 음악 소리에 집중하려 애쓰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듣고 있는 음악의 가사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흔한 사랑 이야기였다. 그 달달한 기운이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운 핑크빛의 앨범 아트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버스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창 밖의 풍경도 빠르게 움직였다. 창 밖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창 밖의 배경에 섞이는 모양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달아오르던 얼굴은 음악 소리와 함께 천천히 차분해졌다. 순식간에 붕 떠올랐던 마음이 가라앉으니 그 틈에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눈이 막 감기려는 순간마다 버스가 멈춰서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자꾸 잠이 달아나 버렸다. 버스 운전기사의 제동이 오늘따라 여간 난폭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잠기운에 취해 자다 깨다 하면서도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려 애썼다.
마침내 잠기운에 무너진 내 몸이 버스의 급제동에 휩쓸려 앞으로 고꾸라질 때가 되어서야, 나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 상황에서 앞으로 넘어지지 않은 것은 역시나 아저씨 덕분이었다. 아저씨는 내 쪽으로 팔을 뻗어 손을 창문에 대고 있었다. 가슴과 목 사이에 놓인 아저씨의 팔이 꼭 놀이공원의 안전바 만큼이나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몸이 앞으로 쏠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 팔에 턱을 올렸다. 졸음에 밀려 맥을 못 추던 정신이 그제야 온전히 돌아왔다. 나는 얼른 허리를 펴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팔을 내리고 나서도 한동안 나를 지켜보던 아저씨가 다시 팔을 들어 내 앞으로 안전바를 만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그 이유에 대해 의아해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지났다. 버스와 함께 몸이 들썩였지만 아저씨의 팔 덕분에 이번에도 어찌어찌 앞으로 고꾸라지는 일은 면하게 된 것 같았다. 과속방지턱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버스가 흔들리는 만큼이나 내 마음도 쿵쿵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과속방지턱 다음에는 커브길이 이어졌다. 몸이 옆쪽으로 휘청이는 바람에 한쪽 귀에서 이어폰이 빠져나왔다.
여전히 빠른 속도의 버스가 제법 안정적으로 직선코스에 들어서고 나서야 팔을 내린 아저씨는 또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어 내 목 근처에서 흔들거리던 이어폰을 귀로 돌려 놓았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온 재생 목록에서 다시 첫 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멜로디가 좋아 재생 목록에 넣었다가,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나 다음 곡으로 넘겨 버리곤 했던 그 달달한 음악이, 아저씨의 무심한 얼굴과 겹쳐지는 것은 꼭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가씨,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네? 아, 네…"
아저씨의 재촉에도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귀에 울리는 가사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유난히 감미롭게 들리는 그 음악의 박자와 똑같은 속도로 가슴이 열심히 쿵쿵거렸다. 항상 상상만 해왔던 것처럼. 꼭 사랑에 빠져 버린 순간처럼.
***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내리쬐는 햇볕이 뜨겁게 느껴졌다. 오늘 들어야 할 전공 수업의 강의실이 하필이면 학교의 가장 안쪽 건물에 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여름방학 내내 제대로 된 피서 한 번 즐기지 못 했던 것이 떠오르자 후회가 밀려왔다. 그보다 더 후회되는 것은 반팔 티 대신 블라우스를 입고 나온 조금 전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편하게 반팔 티를 입을까 하다가,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괜히 긴팔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던 조금 전의 내가 한심스러웠다. 정작 아저씨는 내 옷차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니 더 그랬다.
그나마 얇은 소재로 고른다고 고심한 블라우스 안으로 습기가 차는 것이 느껴지자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땀이 흐를 것 같은 얼굴에 의미 없는 손부채질을 하면서,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아저씨 쪽을 쳐다봤다. 아저씨도 나만큼이나 더워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버스에서는 입고 있었던 검은색 슈트의 자켓을 벗어 한 팔에 걸쳐 놓은 아저씨는 깔끔한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더운 그 긴팔의 소매를 걷어 올려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 와이셔츠가 내 블라우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단순하게도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개강을 맞이한 지 일주일이 갓 지난 캠퍼스는 활기찼다. 여기저기에서 이야기 소리나 웃음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 가운데에는 꽤 두꺼워 보이는 전공 서적을 들고 바쁘게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손을 잡고 여유롭게 캠퍼스를 거니는 연인들도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저씨와 나도 연인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다가 그제야 아저씨의 옷차림이 학교 안에서는 굉장히 눈에 띄는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캠퍼스 안의 남학생들은 대부분이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좀 더 단정한 차림새를 찾자면 남방이나 반팔 셔츠 정도였다. 어디를 봐도 정장이나 슈트를 위아래로 차려입은 사람은 없었다. 혹시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경호원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기껏 신경써서 부탁해놓고서, 누가 봐도 어색할 이 옷차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 갈 때는 편한 차림으로 입어 달라고, 집에서 나오기 전에 미리 부탁했어야 하는데. 오늘은 별수 없으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얘기하기로 했다.
수업이 있는 건물이 가까워지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찍 끝내주시는 일이 없기로 악명 높은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꼬박 세 시간을 강의실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질질 끄는 내 속도에 맞추어 아저씨가 걸음을 늦춰 주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수업 대신 아저씨와 계속 캠퍼스를 걷고 싶었다. 좀 더 천천히 걸어도 괜찮겠지. 아직 시간도 여유로우니까. 나 수업 들을 동안 아저씨는 혼자 뭐 하려나. 문득 생겨난 궁금증이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곧바로 질문이 되어 튀어 나갔다.
"아저씨."
"네, 아가씨."
"나 수업 들을 동안, 아저씨는 뭐 해요?"
"……"
대답 없는 아저씨의 얼굴에 웃음이 났다. 특별히 생각해 본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저씨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짧은 상상을 했다.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는다거나, 집에 가서 편하게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취미들을 즐기는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아가씨를 기다립니다."
"……"
침묵 끝에 나온 아저씨의 대답은 내 상상 속에는 없던 것이라서, 나는 당황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나 천천히 걸었음에도 벌써 발이 건물 가까이 도착해 있었다. 내가 멈춰서자 아저씨도 나를 따라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저씨는 역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왠지 진지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어, 어디서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가 눈짓으로 가리킨 것은 바로 옆의 벤치였다. 건물 바로 앞에 있는 그 벤치는, 하필이면 그늘도 없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곳이었다.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뜨거운 볕에 의자가 벌써 달아올라 있을 것이 뻔했다. 안 그래도 더운 차림으로 이런 곳에 앉아서 기다리겠다니. 꼭 그래야 하는 걸까. 나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자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생각해 보니 고마운 일은 더 많았는데, 정작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내가 깨트린 컵 조각을 대신 치워준 일이나, 내 쪽으로 달려오던 자전거를 피하게 해준 일. 볶음밥을 만들어 줬던 일도, 또 바로 오늘 아침 버스에서 있었던 일도 그랬다. 그렇다고 지나간 일을 다시 꺼내 고맙다고 하기에는 또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라도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네?"
"아까 버스에서도… 창문도 대신 닫아 주고,"
"……"
"버스 갑자기 멈출 때도 잡아 주고."
"……"
"그리고, 강의 끝날 때까지 혼자서 기다리려면 지루할 거 아니에요…"
"……"
"덥기도 하고…"
뜬금없이 무작정 꺼내 놓은 이야기임에도 아저씨의 반응이 담담했다. 평소와 같은 그 무표정에 금세 소심해진 내 목소리만 횡설수설하며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아저씨는 내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라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게 제 일이고,"
"……"
"제가 아가씨 곁에 있는 이유입니다."
"……"
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그 말에, 또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는 마음이란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아저씨의 발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피해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러는 동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얼굴을 아저씨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저씨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을지 궁금해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말 하나에도 복잡하게 밀려드는 여러 감정들 속에서, 가장 커다란 것을 고르자면 서운함이었다. 혼자서 멋대로 달라져 버린 마음을 깨달은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마음이야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아저씨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나는 벌써 아저씨와 내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더 친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몇 걸음이나 앞으로 나아갔던 내 마음은 아저씨의 한 마디에 터덜터덜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아저씨에게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아저씨는 내 경호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래도 그냥 고맙다고 말한 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선 그을 필요는 없지 않나. 아저씨는 나랑 친해지는 게 싫은가. 아저씨한테는 이게 일이니까, 직업이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어떻게 생각해도 서운한 마음은 여전했다. 혼자 기대하고, 그것 때문에 혼자 실망하고 있는 이 상황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아저씨는 나랑 같이 다니는 걸 정말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긴 일이 아니면 만나지도 못했으려나. 앞으로도 친해지기는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안 그래도 우울하던 기분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문득 아저씨 때문에 밤잠을 설쳤던 것이 억울해졌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저씨 생각이 차올랐다. 진짜 그 벤치에서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날도 더운데…. 그런 걱정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아저씨의 번호를 찾았다. 문자 메시지 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자리를 피해 놓고서 이제와 문자를 하려니 더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몇 번을 썼다 지우고, 전송 버튼 바로 앞에서도 실컷 머뭇거리다가 겨우 화면을 터치했을 때, 문자가 빠르게 전송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곧바로 후회에 빠졌다.
[더우니까 밖에 있지 말고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 있으세요 ^^;;]
어색함을 없애 보려 붙인 이모티콘이 메시지를 한결 어색하게 만들었다. 꼭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아저씨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마음이 불편했다. 그 불편한 내용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후회의 몸부림을 치던 나는 결국 핸드폰의 화면을 꺼 버렸다. 그 순간 지잉, 하는 진동과 함께 아저씨에게서 답장이 도착한 것은 정말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네 아가씨.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딱 아저씨다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이었다. 아저씨와 문자를 하다니. 방금 전의 대화가 없었더라면 그 딱딱한 문자에도 바보처럼 혼자 설레었을지 모른다. 아저씨한테는 이것도 그냥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강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필통 하나와 프린트 몇 장이 들어 있을 뿐인 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
수업 시작을 10분 정도 남긴 시간이었다. 강의실에 막 들어선 나는 친구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오후 수업답게 벌써 강의실이 시끌시끌했다. 1학년은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강의실의 절반 이상이 동기들이었다. 나는 그 시끄러운 틈에서 눈이 마주치는 몇몇 동기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마주친 민주가 반가운 얼굴로 손짓했다. 나는 얼른 그 옆자리로 가 앉았다. 내가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민주는 씨익 웃어보였다. 그 장난스러운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밝게 인사했다.
"민주 안녕!"
"와, 김여주 너…"
"응?"
"남자친구 생겼냐!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도 없이!"
"…남자친구?"
그렇게나 호들갑을 부리며 하는 말이란 정말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그 황당한 말에 잠시 멍해졌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민주가 말하는 내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아저씨를 가리키는 것임을 금세 깨달았다.
"아까 같이 있던 사람 남자친구 아니야?"
"…아니야."
"그래? 그럼 누군데?"
그렇게 묻는 민주의 표정이 얄밉게 보일 만큼이나 그 말에는 쉽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전 건물 앞에서 대화하던 것을 본 모양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머리가 복잡했다. 애초에 대기업 대표의 딸이라는 것도, 납치 사건에 휘말렸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한 적이 없던 친구에게 느닷없이 경호원 얘기를 꺼낸다는 것이 무리였다. 경호원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다면, 아저씨와 내 사이는 뭐라고 소개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다시 조금 전의 대화가 떠오르자 절로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같은 질문을 아저씨에게 한다면, 아마 아저씨는 나를 의뢰인이라고 소개할 것 같았다. 내가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떠올렸던 모든 일들이 아저씨에게는 그저 일의 일부였던 걸까. 나한테는 그렇게나 설레는 일이었는데, 아저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걸까. 다정하다고 느꼈던 건 내가 혼자 오해한 거였나. 나도 모르게 울상이 되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민주는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되게 잘 생겼던데. 양복 입고 있는 거 보면 직장인인가? 뭐야, 무슨 사인데. 그런 말들이 이렇다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민주가 장난스럽게 내 팔을 톡톡 몇 번 건드리고 난 다음에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야."
"에이, 그냥 아는 오빠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냐."
"진짠데…"
"아니면 뭐, 썸 타는 중?"
"그건 진짜 아냐."
그야말로 대단한 필터링이었다. 내가 겨우 입 밖으로 꺼내놓은 아는 사람이라는 어색한 사이는 민주 덕에 아는 오빠로, 또 아는 오빠에서 썸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그 말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썸 타는 중이냐고 묻는 말에는 금세 울상이 되어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사이인가 봐, 하고 이어질 뻔한 하소연은 입술을 깨물며 삼켜야 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민주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혼자서 고민할수록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켜드는 생각들이었다.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을 꺼낼 용기가 없는 나는 자꾸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 근데 너 그 오빠랑 썸 타면 길훈 선배랑은 어떻게 되는 거야?"
민주가 이야기하는 선배는 저번 학기에 복학했다는 세 학번 위의 선배였다. 저번 학기에는 우리와 같은 전공 수업을 들었던 데다가, 나와는 우연히 교양 수업도 하나 겹치는 바람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한 학기 내내 수업을 같이 들었음에도 그다지 친해지지 못한 것은 내 탓이었다. 가끔 밥을 사겠다는 선배의 말은 부담스러웠고,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는 것도, 멀리서부터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아는 척 하는 것도 불편하기만 했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길훈 선배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한 학번 위의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입학 후 군대에 가기 전까지 여자친구가 열 번도 넘게 바뀌었다고 했다. 깔끔한 외모 덕분에 인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여자친구가 생기고 나서도 계속 여자들을 애매하게 대하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단다. 벌써 선배들 사이에는 소문이 쫙 퍼졌다고, 혹시 모르니 가까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전해지는 이야기만 듣고 그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같은 교양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고, 눈이 마주쳐 머뭇거리던 때에 먼저 건네준 선배의 인사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기도 했다.
선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였다. 선배는 내 옆자리가 비어 있을 때면 꼭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내가 강의실에 늦게 도착하는 날이면 일부러 제 옆자리를 비워 놓고 나를 부르기도 했다. 지난 시간 필기를 보여줄 것을 부탁하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포옹 비슷한 어깨동무를 한다거나, 책을 안 가져왔으니 같이 보자고 하면서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하는 일들이 점점 잦아졌다. 처음 한 번이야 별 생각 없이 따라가 밥을 먹었지만,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자 소문에 신경이 쓰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뒤로는 선약이 있다거나 다음 수업 준비 때문에 가 봐야 한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조심스레 선배를 피했었다.
언젠가 저녁 무렵에 선배를 마주쳤던 날, 선배는 벌써 어디서 술을 마시다가 온 건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정말 술에 취한 사람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하는 말은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한 잔 하자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만큼이나, 나는 선배가 잡고 있던 팔이 신경쓰였고, 바쁘다는 말에도 막무가내로 나를 잡아끄는 선배가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찌어찌 힘을 주어 선배가 잡고 있던 팔을 뿌리치고서, 나는 눈을 꼭 감고 선배 쪽을 향해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는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갔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선배에 대한 소문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고, 자연히 선배와 같이 듣는 교양 수업 시간이 불편해졌다. 나는 부러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먼저 사람이 앉아 있는 옆자리에 앉곤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뒤쪽에 혼자 떨어져 있는 책상을 찾았다. 수업이 없는 날 학교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핑계를 대며 얼른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그렇게나 불편했던 학기를 겨우 마쳤기에, 이번 학기에는 같은 수업이 없다는 것에 조금 안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는 중에, 그것도 아저씨 얘기를 하던 와중에 주제에 맞지 않게 꺼내어진 선배의 이름은 의문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길훈 선배가 왜?"
"그 선배가 너 좋아한다며! 너 선배랑 잘 되고 있던 거 아니었어?"
"헐. 야, 절대 아냐."
조심스럽게 물은 질문에 터무니없는 답변이 돌아왔을 때, 나는 황당하면서도 놀란 마음에 손사래까지 치며 그것을 부정했다. 도대체 어디서, 왜 그런 소문이 난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민주의 어깨를 두 손으로 덥썩 잡고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듣고 온 거냐고 물으려던 때에, 또 한 번 펄쩍 뛸 만한 질문을 던져 놓은 것은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혜선이였다.
"여주야, 너 길훈 선배랑 잘 돼가고 있어?"
"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우리 쪽을 돌아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던 혜선이는 고개까지 저으며 열심히 부정하는 내 모습에 더 묻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주었다. 그 고마운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때에, 여전히 내게 어깨가 잡혀 있는 민주가 능청을 떨었다.
"길훈 선배가 아니라 그 오빠랑 잘 되고 있나 보네?"
"아니, 아직 아니라니까…"
"뭐야 뭐야, 아직 아니라는 건 곧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거네! 야 잘됐다 진짜!"
나도 모르게 덧붙여진 아직이라는 말에 민주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양 내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또 호들갑이었다. 어쩐지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었다.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대화의 주제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책을 펴고, 한손에는 펜을 든 채 몇 번이나 민주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는 동안 수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세 시간 내내 같은 자세로 앉아 아저씨를 생각하는 동안, 내 기분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없이 반복했다. 아저씨에 관해 떠오르는 아주 작은 기억과 생각 하나하나에도 내 마음은 그렇게나 쉽게 일렁대고 있었다.
***
"어, 여주야!"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가 뭐야,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아, 네…"
교수님이 수업을 정리하는 말을 마치시자마자 재빠르게 가방을 챙긴 나는 친구들과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신나게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에서 막 나서려던 순간에 마침 지나가던 길훈 선배를 만난 것은, 아마 우연이었다. 그 순간에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아저씨였다. 수업 시간 내내 고민했음에도 아저씨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은 찜찜했지만, 그보다도 내가 보지 못한 세 시간 동안의 아저씨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아저씨를 만나면 그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 자연스럽게 어색했던 분위기를 풀어 볼 작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 앞을 가로막은 선배와의 대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수업 전에 들은 불편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내 어색한 표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선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수업 끝났어? 시간 있으면 밥 먹으러 갈래?"
"아니, 저 선약이…"
선약이 있다는 말을 대충 얼버무리고 인사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대로 선배를 지나쳐 나오는데 문 밖에 아저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건물과 이어진 계단 아래, 아저씨 옆에 도착한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뒤에서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와 함께 아저씨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것도 모른 척 한 채,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발을 뗐다.
"아저씨, 가요"
"여주야! 선약 있다더니, 이 사람이 일행이야?"
"…네."
대답을 기다리던 아저씨의 목소리 대신 또다시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는, 더 모른 척 할 수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선배를 마주해야 했다. 그나마 아저씨 옆에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번처럼 팔을 붙잡혀 끌려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아저씨는 내 쪽에 말없이 서 있었다. 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금은 굳어진 얼굴로 선배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행이냐고 묻는 선배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당장 시비라도 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선배가 생각보다 더 예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선배의 다음 말 덕분에 오늘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누군데, 우리 과에 이런 사람도 있었나?"
"…제 남자친구예요."
"……"
무슨 정신으로 뱉은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저씨를 향한 선배의 예의 없는 말에 순간 울컥했고, 그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내 말을 끝으로 얼마간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 조용한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이 기회에 선배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차올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저씨가 사실대로 말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홧김에 거짓말을 뱉어 놓고서, 그제야 아저씨의 기분이 걱정되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 눈이 마주친 아저씨가 나를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미소에 나는 안심했다. 내 갑작스러운 거짓말을 눈감아 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정적을 깬 것은 어색한 표정의 선배였다.
"…여주 너 남자친구 있었어?"
"네."
"아, 몰랐네. 그래도 시간 되면 밥이나 같이 먹자."
내 단호한 대답에도 선배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괜찮은 척 애쓰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선배의 제안에 핑계를 대며 거절할 때 지었던 표정만큼이나 지금 선배의 웃음이 어색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선배의 제안을 더 깔끔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마 마지막이 될 제안이었기에 최대한 단호하게 끊어 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고민만 하고 있던 나 대신 아저씨가 선배를 보며 대답했다.
"밥은 저랑 먹을 거라서, 괜찮습니다."
"…네?"
"여주한테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한데, 그 이상은 제가 기분 나쁠 것 같네요."
"……"
"가자, 여주야."
그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나조차 잠깐 혼란스러웠을 만큼이나 아저씨의 말투는 담담했다. 선배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새삼 어른스럽게 보였다. 반대로 선배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지는 것에 나는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마지막 말과 함께 아저씨는 내 손을 잡아 끌며 걸음을 옮겼다. 선배에게서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걸음은 신기할 만큼 가벼웠다. 이렇게 후련한 기분으로 자리를 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업 전에 있었던 일이나 아저씨에게 서운했던 것까지 다 잊어 버린 채로, 그저 지금의 상황에 신이 난 나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아저씨를 올려다봤다.
"고마워요, 아저씨."
"친하십니까, 저 남자랑."
"아니, 절대 아니에요!"
"……"
고맙다는 말 뒤에 이어진 아저씨의 질문은 어색했다. 친구들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던 것과 똑같이, 아저씨에게 열심히 부정하고 나서야 나는 그 질문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아저씨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였다. 그러는 모습이 평소의 아저씨와는 다르게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짧은 망설임 끝에 아저씨가 내놓은 다음 질문으로, 나는 첫 질문의 의미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혹시 제가 한 말 때문에, 곤란해지셨습니까."
"아니요! 그것도 절대로 아니에요."
"그럼 됐습니다."
그제야 아저씨의 표정이 풀어졌다. 선배한테 한 말 때문에 내가 곤란해질까봐 걱정해 준 거였구나.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아저씨는 정말 어른스럽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그렇게나 고민했던 감정에 대한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아저씨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아저씨가 원한다면, 아저씨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나가지는 않기로 마음 먹었다. 쉽게 정리한 생각도 아니었고, 그 생각을 아저씨에게 전한 것도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온종일 머리를 어지럽히던 복잡한 감정이 이렇게라도 정리된 것이 그저 다행이었다. 말없이 걷고 있는 아저씨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그냥 아저씨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가 떨어져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결 시원해진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절로 웃음이 나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조용히 웃다가,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가 아직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선배가 지켜보고 있을까 걱정해서 그런 건지, 단순히 놓는 것을 잊어 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저씨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정작 잡혀 있는 손에 대해서는 잊고 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벗어난 다음에도,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맞닿아 있는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울림에 내 마음은 기분 좋은 박자로 쿵쿵거렸다.
안녕하세요 목마입니다 :) * 암호닉 목마름님, 민윤기님, 통통님, 윤기모찌님, 무민이님, 뿡뿡님, 알로에님, 가온님, 꾹꾹이님, 나니꺼님, 캡틴님, 권지용님, 틸다님, 현지님, 미스터쿠야님, 눈웃음님, 짐그래님, 버누님, 전정구기님, 망고님, 채영님, 소녀님, 알라님, 정팔님, 뿌이님, 전정국짱짱맨뿡뿡님, 탱탱님, 복동님, 전정국님, 썸월님, 됴종이님, 설레임과자님, 꽃님님, 스투시님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 암호닉 신청은 언제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글에 아무 때나 편하게 신청해주세요. * 늦어서 죄송해요. 뒷부분 내용을 좀 수정했더니 이번 편 분량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 정국 아저씨가 여러분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짝사랑 하면서 겪었던 감정을 여주를 통해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까 글이 저렇게 됐어요.. 제가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겪었던 때 그랬습니다. 좋아하던 친구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에도 혼자 기뻤다가 슬펐다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온갖 오해를 했었어요. * 사실 선배 이름을 우리 애들 이름으로 하고 싶었는데 좋은 역할이 아니라서 그냥 제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길훈 선배는 구상 단계에서부터 좀 느끼한 이미지였어요. 그래서 느끼함 -> 기름 -> 길훈이 되었습니다. 이게 제 작명센스의 한계예요.. 민주랑 혜선이는 그냥 문득 생각나는 이름들이었습니다. 길훈 선배 이후로 더는 작명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 한 문단을 너무 길게 쓰다보니까 모바일에서 읽을 때 눈이 아프더라구요.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 중에 모바일로 접속하시는 분들이 많기도 하고, 사실 저도 쓰면서 눈이 아파서 문단을 좀 더 작게 나눠 봤어요. 읽으실 때 편했으면 좋겠습니다. * 저 저번 편 올리고나서 바로 잠들었는데 일어나니까 집에 볶음밥이 있었어요. 심지어 당근, 양파, 감자까지 제 글에서 정국 아저씨가 만들었던 볶음밥이랑 똑같아서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집에 참치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엄마 내 글 읽는 거 아니죠? *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피드백해주시고, 추천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 덕분에 힘내서 글써요 저.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