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 00
[prologe]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초록빛 들판 끝.
금빛 용이 수놓아진 붉은색 곤룡포가 잔잔히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렸다
몸을 쓸어오는 따스한 바람과는 달리 파란 슬픔을 담고 있는 사내의 눈길을 따라가자
들판 끝 절벽에 위태롭게 자란 나뭇가지에 걸린 두 개의 검이 보였다.
나란히 걸린 두 개의 검은
제 주인의 신분을 나타내주듯 푸른색과 붉은색의 보석이 각각 박혀
찬란한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내 흔적은 결코 지니고 가지 않겠다는 말이냐.."
두 개의 검을 슬픈눈빛으로 어루만지던 사내는
이내 초원을 지나 숲으로 사라졌고,
사내의 몸을 어루만지던 따스한 바람 역시 사내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1화]
" 야!!! 김태형!!! 야!!! 오늘은 빠지면 안 된다고!! "
" 니가 잘 말해줘!!! 오늘 풍물패 오는 날이란 말이야!! "
" 야!!!!! "
제법 큰 키로 기왓담을 훌쩍 넘어 사라져버린 태형을 보며
숨가쁘게 쫒아오던 지민이 한숨을 내쉬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오늘 경합 있는데 또 빠지면 어쩌자는거야 "
마을에 풍물패가 오는 날이면 화랑은 뒷전이고 매사 도망쳐 나가기 바쁜 태형은
그 때마다 스승들에게 발각되어 혼나곤 했지만
담 넘는 것을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게다가 오늘은 낭도들 앞에서 경합시범을 벌이는 날 아니던가
(* 낭도: 화랑이 거느리는 화랑 아랫 계급의 사람들 )
그런 중요한 날 겁 없이 도망간 태형과
그런 태형을 말리지 못한 자신에게까지 불호령이 떨어질 생각을 하자
두려움에 울상이 된 지민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지민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른 채
날아갈듯한 발걸음으로 마을 시장에 도착한 태형은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씩 웃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냅다 달려갔다.
이미 시작한 풍물놀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 잘 보이지 않자
숨을 훅 들이마신 태형이 이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맨 앞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는 한참을 신나게 놀던 태형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공터를 쭉 둘러봤다.
"...? '
자신과 눈이 마주친 건 다름아닌 한 남자아이.
풍물패 뒤쪽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조금 작아 보이는 몸집에 꾀죄죄한 행색.
그 중에 한없이 맑은 눈동자만 빼면 영락없는 거지꼴이였다.
이내 아이의 눈을 피해 풍물패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따갑게 느껴지는 아이의 눈길은 어찌 할 도리가 없어
불편한 기분으로 놀이를 즐기다
풍물패가 돌아가고 이내 자리를 떴다.
" 아이씨.....분명히 쫓아낸다고 하실 텐데..."
돌아가면 불같이 떨어질 스승의 불호령에 이제야 겁이 났는지
조금이라도 덜 혼나기 위한 변명거리를 애써 생각하며 걷자
금새 화랑도 숙소 문앞에 도착했고.
크게 혼날 준비 하라는 듯 굳게 닫혀있는 대문에 괜시리 더 겁을 먹으며
손잡이를 슥 잡았다.
" 저기...'
" 왁!! 깜짝이야!!! 뭐야!!! "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자신의 팔을 잡아오는 느닷없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가 떨어지는 태형.
생각보다 더 격렬한 반응에
상대방이 더 놀랐는지 큰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서 있었다.
" 너....아까 풍물패 꼬맹이 아냐? 나 따라왔어? "
넘어지면서 여기저기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태형이 아이에게 물었다.
' 끄덕 '
" 왜? "
태형의 물음에 큰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 저도 들어갈래요 "
" 어? 어딜? 여길? "
태형의 손끝이 향한 곳은
방금 전 자신이 잔뜩 긴장한 채 손잡이를 잡았던
화랑의 대문이다.
' 끄덕 '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아이.
" 내가 여기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어? "
도데체 어떻게 알고 따라온건지,
혹시 밖에서 말실수라도 하였나 싶어 긴장하며 물었다.
" 옷 "
짧은 단답.
옷?
아이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니
나 화랑이오 라고 뽐내는듯한 빨간 저고리와 두루마기가
저 멀리서 봐도 딱 화랑이었다.
" 아...근데 꼬맹아 여기는 내가 맘대로 들여보내 줄 수가 없는 곳이라..."
" 들여보내주세요 "
" 아니...너 부모님한테 말씀은 드리고 온 거야? "
"......부모님 없어요 "
"어..? "
"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
" 아....미안.."
" 들여보내주세요 "
" 아니 진짜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 야 안들어오고 뭐하냐 "
아이의 부탁에 쩔쩔매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지민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 어?..어 잠시만 "
"......."
" 저기 꼬맹아 일단 밤이 늦었으니까 일단 집에 가고
내일 다시 와 내일 "
일단 어떻게든 돌려보내야 된다는 생각에
임시방편으로 내일 다시 찾아 오라는 말을 건네었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 ...집 없어요 "
" 에??? 집이 없어? 그럼 어디서 지냈는데? "
" 그 아저씨들 따라다녔어요 "
아저씨들? 아. 그 풍물패 말인가.
" 야 일단 들여보내, 내일 아침에 내 보내던지 스승님께 여쭤보든지 하고 "
얼굴을 쏙 빼고 잠자코 지켜보던 지민이 한소리 했다.
" 아..미치겠네..."
"....."
" 나도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자 "
늦은 밤에 아이를 혼자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될대로 되란 식으로 아이를 숙소로 들여 보냈다.
태형이 대충 세수를 한 채 옷을 갈아입고 와
아이에게 안쓰는 이불 하나를 건네주고
자신도 지민의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 꼬맹아, 이름이 뭐야? "
"..정국이요 전 정국 "
" 몇 살? "
" 열 일곱이요 "
" 어?! 열일곱? "
열아홉인 태형보다 불과 두살밖에 어리지 않다.
열 일곱의 몸집이 저리 작을 수 있을까
깜짝 놀라며 재차 물었다
" 진짜 열일곱이라고? "
" 네 "
하긴, 부모도 집도 없는 아이가
얼마나 잘 먹고 컸겠는가.
매일 풀 아니면 죽으로 끼니를 떼웠을 텐데
정상적인 몸집이면 더 이상할 노릇이였다.
" 근데 왜 여기 들어오고 싶은 거야? "
"........"
" 아니 뭐 꼭 말 안해도 되고..."
" 무술을 배우고 싶어서요"
" 무술? 그건 왜? "
"......"
그 질문을 끝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들려오는 태형의 코 고는 소리.
아이도 잠시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 김태형!!!!!!!!!!!!! "
아침부터 태형의 숙소가 소란스러웠다.
불같이 화가 난 태형의 스승과 이제 잠에서 깨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서 졸린 눈을 끔뻑이는 태형.
그리고 온 화랑의 관심을 받고 있는
몸집 작은 아이 하나.
" 아아아아아! 스승님!! 아! "
태형이 자신의 스승에게 귀를 잡혀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 너 내가 한번만 더 허락없이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어떻게 한다고 했는지
기억하겠지? "
" 아 스승님 일단 이것 좀 놓으시고! 아! "
" 그리고 밖으로 싸돌아다닌것도 모자라 저 아이는 또 뭐야?! "
" 아아아아아아!!!! "
귀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탓에
스승이 태형의 귀를 비틀어 놓았다.
" 아 진짜ㅜ "
태형이 빨개진 귀를 어루만지는 사이
아이가 마당으로 내려와 스승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당돌하게 내뱉은 말
" 무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
1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