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게임
* 편의상 각 지역들을 1, 2, 3, 4, 5, 그리고 수도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그리고 세계관은 세계관일 뿐 아무 상관이 없읍니다... *'ㅅ'*
1.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에 손을 뻗었다. 잔뜩 긴장한 손은 마음처럼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일어난 가족들이 있는지 부엌 쪽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잘 들리지 않을 흐느낌 소리와 무언가가 자꾸만 떨어지는 소리도. 가만히 천장을 올려보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왔으니 오늘의 고비도 잘 넘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혹여 엄마가 나 없이 흐느끼며 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혹은 나 때문에 가족들이 걱정으로 하루를 채우지 않을까 따위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벽에 걸린 지도가 보였다. 아주 작지도, 크지도 않는 대한민국,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였던 곳을 나타내는 것. 이천 년대 이후, 수도는 끊임없이 비대해졌다. 다른 지역을 삼키고, 삼키고, 또 삼키고... 이러다 나라 전체를 통채로 집어 삼켜버리지 않겠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높아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한 지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지금 지도에서는 해골과 함께 5 라고 크게 쓰여진 곳. 아주 작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치고는 꽤 큰 규모였지만 거대한 수도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신식 무기들의 앞에서 무릎 꿇은 지역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곧바로 5 구역에 대한 출입 금지령을 내렸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 점점 황폐해진 곳, 그곳이 5 구역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느꼈다. 무언가 신선하고 즐거운 것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아주 먼 옛날 로마에서 했던 검투사와 사자와 대결 같은. 그리고 그 희생양은 오롯이 각 구역들의 몫이었다. 세상이 미쳐간다며 많은 사람들은 말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비대해진 수도를 막을 방법도, 자신들이 그 수도의 사람들의 재미를 위해 희생양이 되는 것도. 그저 그 희생양이 자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탄생한 것이 헝거게임이었다. 각 구역에서 추첨을 통해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소년, 또는 소녀 두 사람을 뽑아 조공인으로 수도에 보내는 것. 각 네 구역에서 온 여덟 명의 아이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임. 이것은 4년에 한 번씩 치뤄지는 일종의 행사였다. 아주 먼 옛날에 있었다는 올림픽, 혹은 월드컵과 같은 국가적인 행사처럼.
올해는 헝거게임의 해였다. 그리고 나는, 18살이었다.
2.
저번에 치뤄진 게임에서는 다행히, 아니, 다행히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뽑히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 옆집의 아이가 뽑혔었다. 검은 눈의, 웃는 게 순하던 아이. 엄마는 뽑기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화장실로 곧바로 향했다. 화장실에서는 엄마의 흐느낌 소리와 이따금 토악질하는 소리 같은 것이 간간히 들려왔다. 아빠는, 아빠는 그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뭔 일인지는 잘 몰라도 큰 고비를 하나 넘겼구나 싶었다. 그리고 4년, 또 다시 헝거게임에 뽑히냐 마냐가 우리 집의 가장 큰 문제였다. 올해 13살이 된 동생은 다행히도 딱 한 번의 고비만 넘기면 끝이었지만. 헝거게임에 출전할 아이들을 뽑는 추첨일이 다가올 수록 엄마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봐서라도 나는 헝거게임에 출전해서는 안 되었다.
한참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씩씩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밥도 잘 먹고, 잘 웃고, 추첨에 뽑히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고. 잠시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부엌에는 이미 온 가족이 일어나 앉아있는 상태였다. 와. 내 작은 탄성 소리에 세 쌍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맛있겠다. 작게 중얼거리고는 비어있는 내 자리로 가 앉았다. 이미 한바탕 눈물을 쏟아냈는지 엄마의 눈가는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애써 엄마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내 말을 시작으로 식탁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간간히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났을 뿐. 숨막히는 시간이었다.
옷장을 열어 한참 고민하다 평소에 자주 입던 옷을 꺼내들었다. 오늘 하루를 평소와 같이 무사히 보내기를 바라는 내 간절한 소망이었다. 마음 속에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부적일지도 몰랐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에 누웠다. 오늘 저녁에도, 이 침대에 누워서 시덥잖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시계 바늘은 9 와 6 을 가리켰다. 아홉 시 삼십 분. 추첨 시간은 열 시였다.
광장은 사람들로 드글거렸다. 1 구역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나, 싶기도 했다. 다 큰 아이들이 저마다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아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둘러본 엄마는 아랫입술을 꾹 짓이기며 가만히 내 손을 잡아왔다. 불안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애써 웃으며 엄마의 손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걸. 내 말에도 엄마는 넋이 나간 표정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있음에도 행운의 신이 내 편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3.
정확하게 열 시가 되자마자 1 구역의 추첨을 책임지는 관리 하나와 무장을 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곧 광장에는 크게 천으로 구역이 나누어졌다. 14살부터 20살 사이의 아이들만 원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엄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엄마를 돌아보고는 작게 웃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힘 없이 떨어지는 엄마의 손이 괜히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다시 뒤로 돌자 엄마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것이 보였다. 애써 엄마에게 웃어보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원 안에 들어서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행운의 신이 내 편이기를 빌고 빌었다.
"자, 행운의 해가 돌아왔네요."
역겨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성량은 또 어찌나 큰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토기가 쏠렸다. 아침에 먹은 밥이 영 체한 것 같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먹는 게 아니었는데.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꾸만 눈 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 이렇게 아플 리가 없는데. 애써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는 아예 껌껌하게 보이지도 않는 눈 앞에 골이 아파왔다. 이상하다.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로 다시금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을 꾹 눌렸다. 찌르르 아파오는 고통과 동시에 다시 눈 앞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쨍한 햇살에 괜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쉬어야지. 얼른 추첨이 끝나길 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조용해진 광장과, 나를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과 눈이 마주치자 절로 입술을 꾹 물게 되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서 가만히 내 쪽을 보며 미소짓고 있는 관리도. 아, 직감적으로 나는 느꼈다. 행운의 신은 절대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후들거리는 다리를 쭉 펴고는 단상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말 없이 길을 터주었다. 저 단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부디 내가 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허탈함에 웃음만 삐질거리며 흘러나왔다. 도저히 엄마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가만히 단상에 올라 관리의 뒤에 섰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은 관리는 또 다시 추첨을 하기 위해 공을 굴리기 시작했다. 오, 작은 탄성이 내 귀에 흘러들었다. 정호석. 관리가 퍽 기쁜 목소리를 마이크에 흘러보냈다. 또 다시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4.
어떻게 그 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수도로 생방송이 나가고 있다는 것조차 까먹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던 엄마. 그 모습이 혹여나 마지막이 될까 싶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한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저 모습이 정말로 마지막이 되면 어쩌나. 그러면 어쩌나, 싶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기차에 타고 나서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와 함께 뽑힌, 정호석이라는 아이는 생각보다 덤덤한 모습이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내 객실이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보면 비틀거리는, 영락없이 형편 없는 발걸음을.
소리내어 객실의 문을 닫고는 그 앞에 주저 앉았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걸어준 목걸이가 목을 졸라오는 기분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어떨까. 헝거게임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까? 그래, 게임에 나가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그게 그거잖아. 한참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 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없으면서 허세는.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곧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에 들렸다. 설마 제멋대로 굴었다고 관리가 온 건가.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 별 말 없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곧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했던 호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한참 머뭇거리다 침대로 오는 발자국 소리만 느껴졌을 뿐. 천천히 고개를 들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호석이 보였다. 야. 잘난 얼굴과는 달리 까칠한 말투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뭐. 덩달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자 정호석이 이것 봐라, 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한 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에 지지 않으려 가만히 정호석을 올려보자 정호석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실례. 전혀 실례한다는 표정이 아닌 표정과 함께.
그리고 정호석은 가만히 소리를 죽여 내게 속삭였다. 눈을 크게 뜨고 정호석을 보자 정호석은 잠시 머뭇거리다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5.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정호석과 나는 끈덕지게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가끔 가다 굉장히 수줍은 표정으로 손을 맞잡기도 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관리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호석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일종의 컨셉이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방패가 되어줄 것. 우리는 어린 연인과 같은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정호석을 몰랐지만 정호석은 나를 알았던, 아니, 나를 짝사랑하는 관계. 그리고 그런 정호석에게 의지하는 나. 정호석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카메라 앞에서만이었다. 카메라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언제 그렇게 애틋했냐는 듯 서로를 외면했다. 서로의 방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관리의 표정이 날로 좋아지고, 또 때로는 우리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을 보아서는 우리의 작전이 수도에서 꽤 잘 먹히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 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 객실도 그렇게 안전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어딘가에는 도청 장치가 붙어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마음놓고 쉴 수도 없었지만. 그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생각하는 것 밖에는 할 게 없었다. 그 생각마저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었지만. 물론 생각은 한정되어 있었다.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자들의 가족에게는 평생 먹어도 모자랄 만큼의 식량과 돈을 준다고 했으니까 내 목숨 값은 되겠지. 엄마는 울지 않으려나. 혹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쨌든 생각의 끝은 하나였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잠든 검은 밤이었다. 별이 총총히 떠있는. 잠시 망설이다 가만히 객실을 나섰다. 답답한 내 방이 아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기차의 끝 칸에서 끝 칸으로... 한참 걸음을 옮기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은 곳을 발견했다. 짐칸. 여러 잡동사니가 뒤엉켜있는 것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천천히 짐칸으로 들어섰다. 불청객 아닌 불청객을 보기 전까지는.
...아. 동시에 터진 탄성을 이후로 정적이 짐칸을 가득 채웠다.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그건 정호석도 피차 마찬가지였는지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정호석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나무 상자의 뚜껑이 열린 듯, 짐칸에는 지붕이 없었다. 이러다 짐 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쓸 데 없는 걱정을 하며 혀를 차다 등을 편하게 기대어 앉고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이 잔뜩 떠있는 모습이 퍽 예뻤다. 멍하게 하늘을 보다 야, 하는 정호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먼저 그쪽에서 까칠하게 군 게 죄라면 죄고.
"나 너 존나 싫어."
"응, 나도 너 존나 싫어."
아무렇지 않게 뱉은 정호석의 말에 무덤덤히 내뱉었다. 나도 네가 정말 싫다고. 그런 내 답에 정호석은 소리 없이 작게 웃고는 다시 입을 연다. 너 존나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정호석의 말에 나도 너 싫어. 짜증나, 하고 답하자 정호석은 아예 몸을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가식쟁이. 다시 내뱉어진 말에 입술을 삐죽이고는 입을 열었다. 누가 할 소리를. 한참 소리내어 웃던 정호석은 곧 입을 꾹 다물고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사실 살고 싶어.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눈물 겹다. 하늘을 보던 것을 멈추고 정호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6.
그 날 이후로 우리의 사이는 호전되었다. 사실 애초에 아무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호전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날 밤 많은 것들을 터놓고 이야기했다. 정호석의 집 안 이야기부터 우리 가족까지. 그리고 수도에 가서 어떻게 살아남을지까지. 정해진 답은 없었다.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호석은 그저, 같이 해쳐나가자고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층 더 애틋한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수도에 도착할 때쯤 되었을 때는 이게 연기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리게 되었지만. 그러니까, 내가 어쩌면 정호석을 좀,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정호석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훈련소, 혹은 합숙소라고 이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이미 다른 구역에서 온 아이들이 있었다. 저마다 이미 훈련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린다는 그 전의 헝거게임과는 달리 순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온 수도의 사랑을 받는 아이도 있었다. 김태형이라고 했었나.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살아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평을 받았다고, 정호석은 그렇게 내게 일러주었다.
정호석은, 훈련소에 들어간 첫 날까지만 나와 함께 다녔다. 놀랍게도 이번 헝거게임에 여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더더욱 정호석에게 의지하고 싶어했지만 정호석은 매정하게 나를 밀어낼 뿐이었다. 우리 연인인 척 해야 한다며. 그런 정호석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작게 소곤거렸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정호석은 가만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7.
어느 날 밤, 정호석은 내 방에 찾아왔다. 한참을 방 안 곳곳을 둘러보던 정호석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한참 훈련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정호석은 어느 한 곳에서 멈추어 방 안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기차와 같은 짐칸이었다. 내 양손을 맞잡은 정호석은 퍽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들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석은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넌, 나를 좋아한 게 아니야. 정호석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술을 꾹 물었다. 정호석은 그런 내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기댈 곳이 필요했던 거야. 그러니까, 나만 너를 짝사랑하는 거야. 너는, 김태형을 좋아하는 거야. 알겠어? 그런 정호석의 물음에 무어라 답하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맥아리 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싫었다. 나 봐. 그리고 내 말 따라해. 정호석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놓고는 내 양볼을 손으로 감싸왔다.
"나는."
"...나는."
"김태형을."
"김, 태형을."
"좋아한다."
"..."
빨리. 채근하는 정호석의 말투에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입을 열었다. 조... 조, 차마 말할 수가 없어 한참을 머뭇거리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좋아한다. 정호석은 그제야 내 볼을 놓아주었다. 잘 기억해. 그리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나는, 가만히 주저 앉아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헝거게임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내 의지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8.
그 다음 날부터 나는 보란 듯이 김태형과 붙어다녔다. 그리고 정호석은 비련한 남자 주인공 연기를 할 뿐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세상 누구보다 아련한 소설 속의 주인공이었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에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호석과 나, 그리고 김태형에게 점점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따분함의 극치를 달리던 그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즐거운 존재였을까.
그리고 김태형은, 정말 의외라는 말로 밖에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수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서 무언가 연결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만하거나 무시한다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를 말없이 챙겨줄 뿐이었다. 그래, 딱 그만큼. 김태형은 따스한 사람이었다. 카메라가 켜지든 꺼지든 한결 같은. 어느 순간, 김태형과는 말을 트게 되었다. 말을 트는 것과 동시에 김태형은 간간히 웃기 시작했다. 김태형은, 웃음이 더 따스한 사람이었다. 내가 수도의 사람이어도 김태형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정호석은 2 구역에서 온 전정국, 박지민이라는 아이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전정국은 그래도 가끔 살갑게 웃으며 누나, 하고 인사와 함께 말을 섞곤 했는데, 박지민은 영 종잡을 수가 없는 아이었다. 말수도 없는 조용한 아이. 말하는 사람이라고는 전정국과 정호석 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9.
그렇게 싱숭생숭한 상태로 헝거게임이 하는 날이 밝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 했지만. 영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김태형은 괜찮아? 하며 내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어, 응... 애써 고개를 끄덕이자 김태형은 조심해야겠네, 하며 내 손을 잡아끌어 조물거리기 시작한다. 아, 괜찮은데.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웃으며 말하자 김태형은 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을 꾹꾹 누른다. 검지와 엄지 사이를 꾹꾹 누르자 아, 하고 작게 신음하자 김태형은 봐 봐, 진짜 조심해야겠네, 하며 중얼거린다. 소화제 같은 거라도 조공으로 들어오면 좋겠는데... 김태형은 곧 내 손을 놓고는 제 자리로 가 선다.
그게 몇 시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의 나는 김태형이고 뭐고 도망다니기 바쁘다. 조공인들에게 죽기 전에 말라서, 혹은 굶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들에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인상을 살짝 찡그리다 숲으로 향했다. 적어도 숲이라면 숨을 곳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훈련소에서 배운 전투 기술들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여자인 나한테는 더더욱. 나는 싸움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살아서 돌아가야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울며 주저앉는 엄마의 모습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랬기 때문에. 한참 주위를 경계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뒤로 돌아 총구를 겨누었다. 입술을 꾹 물고 감은 눈을 떴을까.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는 정호석이 보였다. 넌 살고자 하는 애가 그렇게 겁이 많냐. 총알부터 날리고 봐야지. 태연한 정호석의 말에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눈물을 참았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지. 속이 홧홧하게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정호석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 마주쳤더라도.
정호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내게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손을 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달렸을까. 정호석은 한 동굴을 발견하고는 멈춰섰다. 더 달렸으면 심장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숨을 고르고 있었을까. 정호석은 주위를 살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굴 입구로 들어섰다. 얼른 와. 정호석의 말에 얼떨결에 동굴로 발을 뗐다. 그리고 그 곳에는,
놀랍게도 모두가 앉아있었다.
10.
정호석과 아이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술술, 잘도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없었다는 것이 자꾸만 속이 상했다. 반란이 쥐도 새도 모르게 준비되고 있었다는 말이, 괜히 서운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정호석과 나를 보고 반란을 결심했지만 차라리 수도의 사람들에게 핫한 김태형과 내가 붙어다니는 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일부러 그랬다는 말도. 그래서 부잣집 아들인 김태형이 굳이 이 헝거게임에 출전했어야 했던 이유도, 그들은 명쾌하게 설명해내었다. 우리는, 이르자면 반란의 불씨였다. 아주 조금만 자극을 준다면, 크게 터져버릴 기폭제.
그래서 죽음을 알리는 대포 소리가 울리지 않았구나. 왠지 모르게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늦은 밤, 나는 정호석과 그 날 그 밤과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차에서 함께 별을 보았던, 그 날처럼. 정호석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11.
금세 반란은 일어났다. 활활 타올라 금세 죽어버리는 불꽃처럼. 나는 반란에 성공하길, 그리고 내가 살아남기를 빌었다.
이번에는 행운의 신이, 내 편이길 빌었다.
12.
눈을 뜨자 정호석이 보였다. 얼굴에는 온통 상처를 매단 채로. 그렇게 바보 같이 웃고 있는 정호석을 보다 겨우 손을 움직여 정호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성공이야? 지금, 세상은... 변했어? 내 물음에 정호석은 내 등을 끌어안고는 가만히 토닥였다. 응. 정호석이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헝거 게임은 그렇게 끝이 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와. 근데 저 헝거게임 진짜 옛날에 봐서 기억이 잘 안 나요. 대충 이런 내용 맞겠죠?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반란의 방탄과 우리 여주...
독방에 짧게 글 올렸었는데 저 진짜 잡혀가지는 않겠죠. 세계관은 세계관일 뿐...
어, 사실 저번에 제가 연재할 일 없을 썰들 올렸었잖아요? ㅋㅋㅋ 그때 헝거게임이 좀 핫했던 걸로 기억해서... 언젠가 구(독료) 무(료) 인 날이 오면 꼭 단편으로 쪄야징! 'ㅅ'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오르치데우스나 쓸걸 그랬어요... ㅎㅎㅎㅎ... 하ㅏㅎ... ㅠㅠ 그래도 구독료 무료니까 좀 높게 받겠습니다... 덜덜. 30이라니... 저 30 걸면서 손 떨렸어요. 어쨌든 재밌게 읽어주시고! 고맙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