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죽고 싶었다. 이 끝도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토해내는 토사물들이 이제는 지긋지긋해질 정도였다. 죽고 싶어서 안 해 본 짓이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 걸까. 죽음에 가까워질 때쯤 나는 다시 살아났다. 씨발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돼, 말아야 돼…. 제발 선한 사람들 말고 나 같은 새끼를 데려가라고 몇 번이나 빌었다. 왜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없는 건데. 이토록 당신 곁에 가기를 원하고, 또 원하고 있는데.
흰색으로 가득 찬 이 환경도 이제는 엿 같다. 하얀색만 보면 다시금 구역질이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나는 흰 환자복, 흰 침대,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과 같이 지내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 먹어야 된다고 처방해주는 알약도 흰색이었다. 나는 죽어도 흰색을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알 수 없던 병에 걸리고 나서 모든 걸 내려놓아야 했다. …아, 아니지. 한순간에 모든 걸 잃었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쓰지 못해 폐기 처분당하는 물건처럼, 그래서 이제는 상품 가치가 없어진 것처럼 나는 버려졌다.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나에게 투자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당신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 빌어먹을 병 하나 때문에 나는 끝도 없이 추락했다. 더 이상 나는 필요하지가 않다.
아, 그냥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차라리 그냥 죽어버렸으면. 진짜 나중에 신이라도 만난다면 묻고 싶었다. 나는 대체 잃을 게 뭐가 더 남았길래 이렇게 살려놓고 있는 거냐고. 내가 아직 잃지 못한 게 뭐냐고. 삶에 대한 미련까지 버렸는데도 뭐가 남아있기라도 한 걸까? 나중에 당신을 만난다면 꼭 물어볼 것이다.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이유가 뭐냐고.
병실이 답답해 잠시 밖에 나왔는데 하늘은 더럽게도 맑았다. 씨발….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아서 더 짜증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비라도 왕창 쏟아지지. 어딜 가야 그나마 나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그건 모두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내가 있을 곳은 병실 밖에 없었다, 슬프게도. …하아. 긴 한숨을 내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힘이 빠져 더 우울해지던 그때,
"아이코!"
내 앞으로 어떤 꼬맹이 하나가 철푸덕 엎어졌다. 꽤나 아플 정도로. 그걸 보는데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으, 저거 무릎 완전 나갔겠는데. 끙끙대며 몸을 일으키려는 그 꼬맹이를 도와줄까 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울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뭐 근처에 아이 엄마나 아빠가 와서 도와주겠지. 그렇게 링거대를 밀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아조씨."
"……."
"아조씨!"
……? 설마 지금 나 부른 거니?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주변에는 아이와 같이 있는 애 엄마나 노인 분들, 그리고 웬 커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저 꼬맹이가 부르는 아저씨가 나라는 말인데….
"……."
"어? 봤다!"
살며시 뒤를 보자 나를 보고 꺄르륵 웃던 그 아이. 무릎은 까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이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잠시 혼란스러울 때쯤,
"나 좀 일으켜주세여, 아조씨."
꼬맹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을.
*
그냥 약국에서 연고랑 밴드를 사와 그 아이의 무릎에 대충 붙여주었다. 신기하게도 울진 않았다. 꽤나 쓰려 보이는데도. 이제 네 갈 길 가라고, 빨리 엄마 찾아가라고 하고 그 아이를 떼어내려고 하는데 그 아이는 내 환자복을 쥐여왔다. 왜, 뭐. 투박하기만 한 내 질문에 너는 살며시 앞에 있던 편의점을 가리켰다. 뒤이어 들려오던 꼬르륵 소리. 얘는 밥도 안 먹고 다니나…. 대체 애 엄마가 누군지는 몰라도 애를 왜 굶기고 다니는 건지. 내가 지금 이름도 모르는 애를 왜 돌보고 있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이 아이가 불쌍해서 그 편의점에 들어갔다.
네가 고른 것은 조그만 단팥빵 하나였다. 그걸로 돼? 내 말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애니까 저거 먹고 배가 부를 수도…. 빵을 들고 카운터를 가는 그 아이를 보다가 흰 우유 하나를 집어 들고 그것을 같이 올려놓았다.
"오, 아조씨. 우유 마시게요?"
"네 거야."
"우와-!"
입을 크게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는 그 애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계산을 다 하고 밖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 아이가 먹는 걸 가만히 쳐다보았다. 배가 정말 많이 고팠던 건지 아주 복스럽게도 먹는다. 턱을 괴고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빵을 먹고 있는 그 아이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꼬맹아."
"나 꼬맹이 아닌데에."
"너 몇 살인데."
"나요? 엄마가 나 몇 살 이랬지…."
우음…. 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눈을 굴려가며 잠시 동안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던 그 아이는 이내 우렁차게 답했다.
"여섯 살!!!"
"…너 꼬맹이 맞아, 인마."
"에? 그럼 아조씨는요?"
"나?"
"응!"
"스물셋."
"우와, 대빵 많다!"
……스물셋이 그렇게 많은 나이였나? 뭐, 여섯 살 애한테 스물셋이라는 숫자는 많이 클 수도…. 사실 내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생각은 안 해봐서, 또 형, 오빠란 말을 들어봤지 아저씨라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 이 아이가 나한테 아저씨라고 했을 때 솔직히 기분이 막 좋진 않았다. 그런데 이 애의 반응을 보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섯 살 애한테 나는 아저씨가 맞겠구나.
"아조씨."
"그거 아니야."
"네?"
"아저씨."
"아조씨."
"아니, 아저씨."
"아조씨!"
조씨가 아니라고…! 속이 답답해져 그 아이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아, 저, 씨. 낱말로는 곧잘 따라 하던 너는 합쳐서 말을 해보라고 했을 때 또다시,
"아조씨."
라고 내뱉었다. ……그래, 아조씨라고 하자. 뭐 이제 헤어지고 나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아저씨든, 아조씨든 뭐가 중요하겠니. 됐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그냥 얼른 먹으라고 말했다. 내 말에 다시 빵을 먹기 시작하던 그 아이.
"아."
"?"
"아조씨는 어디가 아파요?"
…왜? 아이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어쩔 때 보면 참 무섭다.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꽤 타격이 큰 말이었다. 왜 아픈 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지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비참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까.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표정이 차차 굳어져 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리기만 한 너는 내 표정을 파악할 만한 눈치는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네 얼굴을 보는데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내가 모르는 애한테 내가 어디가 아픈 지를 일일이 다 말해줘야 되는 건가…? 조금은 짜증이 나서 그게 왜 궁금하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우리 엄마는 머리가 아파요."
"……어?"
"많이 아픈가 봐요. 그래서 오늘도 얼마 못 봤어요, 우리 엄마."
너는 속이 상하는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프시구나. 그래서 네가 혼자 있던 거구나. 아빠는 어디에 계시냐는 말에 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 말했지. 할머니랑 같이 지낸다고. 그 말에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아서 나는 이내 물어보는 것을 멈춰야 했다. 아이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서 자기가 매일 같이 엄마를 보러 오지만 엄마를 만날 일은 드물다고 했다. 엄마를 만나는 게 드물다는 것은, 상황이 좀 안 좋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어린 너는 그 정도인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야. 그런 걸 알아봤자… 힘든 건 너 일 테니. 우유를 끝까지 다 마시던 너는 말했다.
"아조씨는 아프지 마요."
"…뭐?"
"엄마가 그랬어요. 아프면 몸이랑…."
여기두, 여기두 아프다구. 꼬맹이는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아프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맞아. 몸이 아픈 건 둘째치고 심적으로 너무 아파서,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아주 죽을 지경이야. 떠오르던 옛 기억들에 잠시 울컥해질 때쯤, 꼬맹이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프지 말아요, 아조씨."
아프지 말라고.
"어, 비 온다."
아까 그렇게 쏟아지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던 타이밍에 쯧, 혀를 찼다. 병실로 가려면 여기서 저 맞은편에 보이던 건물로 가야 했다. 나야 그냥 맞고 가면 된다지만 이 꼬맹이는 어떡하지. 이거 잠깐 때문에 우산을 사는 건 좀 돈 아까운데.
"야, 꼬맹이."
"?"
"너 뛸 수 있겠…."
……아. 무릎. 다쳤지, 얘. 밴드를 붙였음에도 피로 붉게 물든 아이의 무르팍이 보이자 나는 말을 하는 것도 멈춰야 했다. 아, 진짜 우산이 답인가. 오늘 얘 만나서 대체 얼마를 쓰는 거야. 구시렁거리며 다시 편의점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 아이는 다시금 나를 잡아왔다.
"? 왜."
"아조씨. 좀 이따 가면 안 돼요?"
비 싫어…. 후두둑 쏟아지는 비를 보며 아이는 말했다. 비가 너무 싫다고. 비가 그칠 때, 그때 가면 안 되겠냐고. 아… 이 꼬맹이 진짜 성 가시네. 그냥 가자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순간 현기증이 느껴져 비틀대며 옆에 있던 벽을 겨우 짚었다. 밖에 있던 시간이 꽤나 됐나 보다. 약발이 서서히 떨어져 가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이 너무나도 피곤해 가야는 될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울 것 같은 네 얼굴을 보자니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좀만 버텨보지, 뭐. 그 꼬맹이를 데리고 다시 그 편의점 테이블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하지만 몸이 점점 테이블로 쏠리는 걸 어쩔 수가 없어 결국에는 그 테이블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조씨, 졸려요?"
"……아니."
"졸린 거 같은데…."
"…야, 꼬맹아."
"네?"
"너는 비가 왜 싫냐."
비가 얼마나 좋아. 먼지 같은 것도 싹 씻겨주고, 분위기도 있고. 또… 뭔가 우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정신이 몽롱하긴 한가보다. 애 앞에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를 만큼 허심탄회하게 말을 내뱉고 있는 내가 웃겨 혼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눈을 살짝 치켜뜨고 너를 바라보았다. 역시 너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아직 꼬맹이라 뭘 모르는 거야. 네가 인생의 쓴맛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래.
"잘 모르겠어요, 하나도 안 좋아요. 비 무섭자나…."
"비가 뭐가 무서워…."
"난 눈이 좋아요."
"눈?"
"네!"
"왜?"
"예쁘잖아요. 또 하얗고!"
그래서 너는 이왕 하늘에서 내릴 거면 비 말고 하얀색 눈이 내리는 게 좋다고 했다. 으으, 하얀 거라면 앞서 말했듯이 딱 질색이다. 눈이 뭐가 좋아, 일단 하얀 것부터 별론데 눈이 오고 나면 길바닥도 더러워지고, 또 그게 얼면 완전 빙판길 되고…! 어휴,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날 만큼 별로여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꺄르륵 웃던 너. 진짜 애긴 애구나.
"나중에 엄마 다 나으면 썰매장 가기로 했어요. 거긴 눈 짱 많잖아."
"…눈 진짜 좋아하는구나."
"아조씨도 같이 갈래요?"
"내가 거길 왜 가."
"재밌을 거 같은데에-!"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막 같이 가자고 해?"
"아조씨 착한 사람이자나여."
허, 참. 얘 큰일 날 애네. 꼬맹아, 너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면 안 된다, 어? 진심으로 걱정돼서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서스럼없더라니….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살면 안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인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뒤통수 맞을지 모른단 말이야.
"괜찮아요. 아조씨 눈 보면 알 수 있어요."
"뭘?"
"아조씨 착한 사람이라는 거."
"……."
"나는 알 수 있어요."
……참나. 내가 진짜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이 꼬맹이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저렇게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듯이 말하는 너를 보고 있자니….
…뭐, 썩 나쁘진 않네.
*
아이는 그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내 병실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기겁했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물었을 때 너는 해맑게 말했다. 그때 아조씨 여기로 들어가는 거 봤어요! 라고. 아이는 엄마를 먼저 찾아갔다가 내게 오는 것 같았다. 낑낑대며 간이의자에 겨우 앉으면 너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으니까. '오늘 엄마는…', 을 시작으로. 그런 너를 볼 때마다 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이 많았다. 나에게 너무 의존해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고민이 참 많았는데… 이제 나는 하염없이 병실 문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네가 없는 이 병실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간호사들이 말하는 걸 듣자니 아이는 제 엄마가 입원을 한 이후부터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더 딱하다고. 한창 유치원에 다닐 아이가 병원에 드나들고 있는 것이. 그 소리를 듣는데 나도 네가 안타까워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이미 스물셋이라는 나이는 유치원을 졸업하고도 한참 지난 나이라 나는 대체 뭘 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가 있을까…. 하다못해 인터넷에 검색도 해봤다. 유아들에게 뭐가 좋은지.
"…동화책?"
오,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책 읽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외출증을 끊고선 병원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이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너무나 낯선 세상에 나 혼자만 도태가 되어버린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어느새 나는 병실, 그 공간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그곳을 죽어라 싫어하면서도. 이런 내가 싫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됐어, 딴 생각은 하지 말고 너에게 뭘 사다 줄지만 생각하자. 근처 서점에 들어가 동화책이 있는 코너로 가서 하나하나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
요즘 동화책들 진짜 다양하게 많이 나오는구나. 펼쳐보면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도 있고, 알록달록 색칠을 하게끔 생긴 것도 있고. 그것들을 보는데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나는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렸을 때 내 모습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이런 걸 읽으면서 꿈을 키웠던 때가 있었지….
"…아."
잠시 눈앞이 흐릿해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요즘 들어 몸이 더 나빠지기라도 한 건지 예전보다 이상 증세가 더 늘곤 했다. 이런 내 모습이 비참해 피식 웃었다. 맞아, 이게 현실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꿈같은 거 꾸지 말걸.
괜찮아 보이는 책 몇 권을 들고서는 계산했다. 봉투를 들고 서점을 나가며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본다. 이 책을 들고서 방방 뛰며 좋아할 네 모습을. 내 바람대로 그 꼬맹이가 좋아해 줬으면 좋으련만…. 네가 이 책을 읽고 자그마한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렸을 적 내가 그랬으니.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훗날 너만큼은 나와 다르게,
네가 원하는 것들을 꼭 이루길.
하지만 그날 너는 오지 않았다. 그날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옷장 한 켠에는 네게 줄 동화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
"우욱…!"
변기를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끝이 아릴 정도였다. 이젠 먹은 게 없는데도 하염없이 변기를 붙들고 켁켁대야만 했다. 쓰리고 쓰린 위액이 쓸고 간 자리는 마치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바탕 그렇게 휩쓸고 가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될 만큼 너무 진이 빠져버려서 나는 이내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고야 만다. 아아… 인생. 참 고달프네. 이쯤 되면 다시 한번 물어볼 때가 됐지. 왜 안 죽이고 이렇게 살려놓고 있는 거냐고. 진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기라도 했나…. 엿 같네, 진짜.
상태를 살피러 온 간호사가 물었다. 왜 가면 갈수록 말라가냐고.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있었다. 하지만 대꾸해줄 힘조차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멍하기만 한 내 눈동자는 창밖을 바라본다. 잎이 하나, 하나 떨어지는 나무들을 보는데 웃기게도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저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나도 죽겠지. 그땐 그거 읽으면서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콧방귀를 뀌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다. 저게 다 떨어지면 나도 죽을까. 그때 되면 나도 과연 죽을 수 있을까.
간호사가 나가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다시 똑, 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아까 검사했잖아. 아까 힘을 다 써버려서 그런지 너무 피곤해 그냥 두 눈을 감았다. 알아서 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똑, 똑.
……뭐야, 진짜.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간혹 병실 착각하는 사람들 있던데 지금이 그런 경우인가.
"…아조씨."
……?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드디어 미친 걸까. 내가 지금,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몸이 진짜 맛이 가기 시작했구나. 나중에 검사할 때 청각에도 좀 문제가 있다고 말해봐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온몸에는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너였다. 그래서 그냥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금 네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정말로 밖에 있는 건… 네가 맞을까?
"아조씨… 안에 있어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섞인 것만 같은 네 목소리에 나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얼른 문 쪽으로 달려갔다. 바닥과 부딪힌 팔이 욱신거려왔지만 이 통증 따위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을 아직 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건지 하염없이 문을 두들기고 있는 네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있네요, 아조씨."
꼬맹이, 네가 서 있었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서는.
*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름 참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 여섯 살 꼬맹이한테 눈물을 참을 만한 능력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 내어 펑펑 우는 너를 보고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두 손을 벌려 조심스레, 천천히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내 목에 제 작은 팔을 감싸고 엉엉 우는 네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저 등을 토닥여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말라고 말을 건네는 것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날 내가 동화책을 사고 온 날, 기적적으로 아이 엄마는 깨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상태가 너무 호전되어 다들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이상할 정도'를 간과해서는 안 됐다. 퇴원한 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아이 엄마는 다시금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들 말했다지. 기적이란 없었다고.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아이의 엄마가 정말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남아 있던 혼신의 힘을 다 쏟아내고 간 것만 같았을까. 그 혼신의 힘을 짜내면서도 이 어린 것을 두고 갈 때의 그 비통함이란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지금 이 아이에게 남은 것은 할머니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도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었던 터라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는 내게 더 의존해왔다. 이제 이 아이는 제 엄마가 아닌, 나를 보러 병원에 오곤 했다. 하루는 제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아이는 나를 찾아왔었다. 아이가 잠깐 화장실에 갔을 때, 할머니께서는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그런 할머니의 행동에 살짝 당황을 하긴 했지만 나를 잡는 그 손길에서 아이가 이미 제 할머니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따스했으니까.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에 왜 여기서 이러고 있누."
"……."
"많이 아픈 거 아니제…?"
"……네."
"우리 아가… 잘 좀 부탁한데이…."
귀찮을지는 몰라도 저 딱한 것 좀… 부탁혀…. 눈물을 훔치시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제가 잘 보살피겠다고. 누가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인데 뭣하러 그렇게까지 챙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참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던 내게 네가 왔다. 어쩌면 나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걸 그 아이한테서, 그 꼬맹이한테서 느꼈다. 차갑고 시리기만 내 삶에 따뜻한 햇살처럼 너는… 그렇게 내렸다.
네 곁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살아야 했다. 내가 다 나아야, 네 옆에서 너를 보살펴줄 수 있었으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할, 그런 이유가.
"아조씨, 이게 뭐예요?"
"이거?"
아이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둥굴레차를 가리키며 물었다. 적혀 있잖아, 거기. 유독 오늘따라 어깨가 뻐근해 어깨를 툭, 툭 내리치며 말하는데 아이는 말이 없었다. 단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 …뭐야, 너 아직 글씨 못 읽어? 내 물음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애기네. 순간 옷장에 쌓여있을 책들이 생각났다. 지금 줘도 못 읽겠구나. 동화책은 나중에 줘야겠네.
아조씨, 빠빠이! 아이는 늦은 시간에 할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그제야 내게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갔다. 네가 나가고 나면 이 병실 안이 그렇게 휑할 수가 없다. 갑자기 느껴져오는 허전함에 괜히 이불을 더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불 따위가 네 온기를 대신할 순 없었다. …되게 조용하네. 새삼 네 존재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내일은 아이와 뭘 할까. 내일은 좀 바깥으로 나가서 놀아볼까? 한창 뛰어놀 나이에 병실에만 드나드는 건 너무 안타까우니까. 그렇게 너와 내일은 어떻게 행복하게 보내야 할까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
툭, 투둑-. 흰 시트를 물들이는 붉은색 핏방울들이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다. 물감이 퍼지듯 그렇게 시트에 퍼져나가는 핏방울들을 보다 손으로 코 쪽을 쓸어내렸다. 머지않아 내 손 또한 시트처럼 붉게 물든다. 오늘따라 몸이 유독 이상하긴 했다. 그런데 이건… 좀 많이 이상한데. 닦을 생각도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는데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필름이 끊기듯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눈앞이 흐려지고,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곧 암흑으로 물들었다.
*
"……네?"
그렇게 혼절해버리고 난 후, 담당 의사는 내게 다시 정밀검사를 할 것을 추천했다. 해봤자 똑같을 거 아니냐고, 안 하겠다고 하는데 의사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그 표정에 눌려 나는 다시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온 후 의사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졌다. 한참을 엑스레이 사진과 종이를 바라보면서 의사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후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상태가 너무 나빠졌어요. 이렇게 나빠질 수 있는 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
"…이제 약도, 주사도 다 들지 모르겠어요."
"…그 말은,"
"……."
의사의 침묵에 나는 암묵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서히 정리를 하라는, 그런 뜻을. 하….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사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럴 때 보면 의사도 참 힘든 직업이다. 이렇게 환자한테 사형 선고 비슷한 걸 내리기도 해야 되고. 그가 괜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다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나가겠다며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환자분, 정말 수술할 생각 없어요?"
"……."
"수술이라도 해서 가능성을 걸어보는 게…."
"……해봤자 5퍼센트라면서요, 수술."
"……."
"어차피 돈 없어서 하지도 못 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벌어온 돈들은 지금 이곳에 몽땅 투자되고 있었다. 나는 수술할 만큼의 돈도 남지 않았어요, 이제. 말했잖아,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만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래도 그동안 나를 위해 노력이란 걸 해주셨던 분이었으니. 그렇게 그곳에서 나오는데 지랄 맞게도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아."
왜 울어. 드디어 죽는다는데. 이 힘든 고통 끝에 드디어 죽을 수 있다는데 주책맞게 왜 울어…. 조금은 거칠다시피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천천히 병실로 걸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병실 문을 열었을 때에는,
"…아조씨."
네가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간이의자에 앉아있던 네가.
"……언제 왔어?"
"움, 방금 전에요. 간호사 언니가 문 열어줬어요."
"…그랬구나."
침대에 걸터앉아 동그라니 예쁜 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너. …왜? 내 물음에 너는 말한다.
"…아조씨, 울었어요?"
"……어?"
"여기가 빨개."
"……."
아이는 작은 손으로 내 눈을 가리킨다. 충혈된 눈이 채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찔리는 마음에 잠시 멈칫했지만 아니라고, 아까 하품을 해서 그런 거라며 둘러댔다. 그런 나를 여전히 바라보던 너는, 갑자기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꿈에 엄마가 나왔어요."
"……."
"엄마 울고 있었어, 아프다구."
"……."
"아조씨는… 진짜 아프지 마아…."
아조씨 빨리 나아요, 제발….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젖어들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네 작은 어깨도 떨리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나는 다시금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이 아이는 뭘 알기라도 하는 걸까. 뭔가 느끼기라도 한 걸까. 네 등을 토닥여주려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알겠다고도, 빨리 낫겠다고도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너를 위로해줄 수가 없다.
"…울지 마, 울지 말고."
"…흐."
"잠깐만, 잠깐만 아저씨 나갔다 올게. 금방 올 거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너를 잠시 품에서 떼어내고 병실을 나간 뒤 뛰다시피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벽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겨우내 참았던 눈물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 방울로 시작한 눈물은 이내 멈출 생각이 없는 듯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
이대로 질식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를 만큼 이 슬픈 감정은 나를 좀먹어갔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었다. 죽음이 다가오면 기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울고 있는 걸까? 죽는다는 걸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다. 그랬으면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이제야 살 마음이 생겼는데, 이제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죽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때에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제 살고자 하니까 왜 죽이려고 하는 건데. 처음으로 죽는 게 무서워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살아서… 네 옆에 있고 싶었다.
그때 뒤돌아보지 말걸. 이렇게 삶에 미련이 남을 만큼, 이렇게 네가 내 삶에 크게 자리할 만큼 너란 존재가 이리도 무서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뒤돌아보지 말걸.
……그냥 모른 척, 지나갈걸.
금방 돌아가겠다는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너를 보면, 너를 품에 안고 목놓아 울 것 같아서.
*
병실을 바꿔달라고 했다. 아이가 다시는 나를 찾아올 수 없도록. 제일 구석진 병실로 배정을 해달라고 하니 의사는 조금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내 부탁을 들어주려는 그가 고마워 나는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
딱 죽음을 맞이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조용히 혼자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지. 코피는 시도 때도 없이 흘렀다. 계속 코를 막느라 이미 그 주변은 헐어있는지 오래였다. 어쩔 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파서 발작을 일으킬 때면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나를 붙들고는 진정제를 투여해주곤 했다. 그렇게 진정이 되고 나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정말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비참했다. 이렇게 나약하기만 내 자신이.
그렇게 병실 안에 고립되어 있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상태를 보러 온 간호사 한 명이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뭐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자 간호사는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승철 씨, 저번에 그 꼬마 애 있잖아요. 맨날 승철 씨 병실에 찾아오던."
"……."
"그 아이가… 매일 병원 로비에서 승철 씨 기다리고 있거든요."
……뭐라고요? 믿을 수 없는 말에 다시금 물었다. 지금, 누가 날 기다린다고?
"그냥 거기서 매일 승철 씨 기다리고 있어요. 가라고 해도 안 가고…."
"……하."
미안해요, 승철 씨 신경 쓸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 아이가 너무 딱해서…. 더 이상 간호사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던 나를 부축해주는 간호사의 손을 됐다며 밀어내고는 천천히,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이 순간에도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지금 네게 가는 것이 중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조그마한 의자에 앉아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데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 나와 다르게 넌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어, 아조씨!"
"너 여기서 뭐해."
"네?"
"왜 기다려, 네가 나를 왜 기다려!"
너를 만나지 않으려고, 너를 피하려고 병실까지 옮겼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없으면 이제 그만 와야지. 너는 이런 병원 따위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니까. 이곳보다는 바깥세상과 더 어울리는 아이니까!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치니, 너는….
"…왜 화를 내요, 아조씨."
"……."
"난 갈 데가 없단 말이에요."
"……."
"난 이제 갈 데가 아조씨 있는 곳 밖에 없는데…."
"……."
"그런데 아조씨는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없어졌잖아요…!"
나한테 말도 안 하구! 울먹거리던 너는 끝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눈앞을 가리는 눈물을 나도 차마 참을 수는 없었다. 너 진짜 미련한 거 알지. 우리는 원래 스쳐 지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접점이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완벽하게 남남인데, 대체 너는 내가 뭐라고 이러고 있는 거야. 너는… 왜 나를 매번 찾는 건데.
이렇게 생각을 해도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너를 애써 피하려고는 하지만 사실 나 또한 너를 찾고 있었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고.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 마. 너를 꼭 껴안으며 그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여서, 결국에는 나도 모든 걸 내려놓고 울 수밖에 없었다. 로비에는 너와 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다들 우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런 건 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기적인 놈이라고 해도 좋아. 사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간다. 그만큼 나는 피폐해져만 갔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안 그런 척, 안 아픈 척 웃었다. 마지막이 언제가 되었든, 네게 내 아픈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너와 있을 때 코피가 흐르면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둘러대고, 몸이 미친 듯이 아파지면 이불 속에서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그리고 네가 나가면, 그제야 나는 비명을 질렀다.
"……."
코에서 흐르던 피는 이제 입에서도 울컥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갈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직감을 한다고 했다. 손에 가득 묻은 핏덩이들을 보고 깨달았지. 아, 나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이제 이 세상과 작별할 일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너랑도.
거울 속 내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핼쑥해 보였다. 그게 싫어 애써 입꼬리를 들어 보이며 웃어보지만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얼굴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웃어야지… 오늘만큼은, 많이 웃어줘야지.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잡아당기면서까지 웃어보지만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에게 작별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말하고 있는 네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엄청나게 복잡했다.
그러다가 문득, 옷장 안에 있을 동화책이 떠올랐다. …아, 오늘인 거 같다. 그 책을 전해줄 날이. 네가 책을 읽게 된다면, 그때 전해주고 싶었는데…. 이게 내 마지막 선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우와, 이게 뭐예요?"
"…아저씨가 준비한 선물."
"오, 짱 신기하다! 이거 진짜 나한테 주는 거예ㅇ…."
"…꼬맹아, 아저씨가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신기하다는 듯이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너는 이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의 얼굴에 순간 울컥해서 애써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눈물을 참아내고는, 천천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잠깐 여행을 가게 돼서, 아마 한동안 못 볼 거야."
"어디로 가는데요?"
"…다른 나라로. 좀 먼 데."
"힝… 그럼 언제 와요?"
순수하기만 한 네 눈을 거짓으로 마주해야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롭다.
"…네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으면, 그때 돌아올게."
"진짜로?"
"응. 진짜."
"진짜 이거 다 읽으면 오는 거 맞죠?"
"…그래."
"할머니한테 빨리 글자 알려달라고 해야지!"
책을 들고 방방 뛰는 네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걸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 좋아해주니 다행이네…. 열심히도 책을 펼쳐보던 너는 할머니한테 자랑을 하겠다고 문 쪽으로 다다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을 나서기 전,
"아조씨. 그럼 아조씨 돌아오면요."
"응?"
"그땐 나랑 같이 썰매장 가요."
"……."
"아, 아조씨 눈 싫어한다고 했지…."
"…안 싫어해."
"에? 진짜루요?"
"응."
"와, 잘 됐다! 나 이번에는 꼭 썰매장 가고 싶어요."
"……."
"아조씨, 나랑 같이 갈 거죠?"
……그래, 가자. 썰매장이든, 어디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면서 나는 끝까지 아이에게 희망만 심어주고 만다. 좋다고 소리치는 너를 나는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 할머니한테 갔다 올게요! 살짝 열린 문을 낑낑 열던 너는 이내 그걸 힘차게 밀었고, 아이의 힘에 의해 열린 문은 반동으로 인해 다시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 문이 닫히기 전… 뛰어가는 네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진다.
"……아아."
참아왔던 고통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베갯잇을 입에 물고는 부들부들 떨며 겨우 벨을 눌렀다. 얼마 되지 않아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쳐 들어왔다. 그동안 느꼈던 아픔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마지막까지 나를 조여오던 고통에 나는 끝내 비명을 질렀다. 아파, 아프다고…! 어느새 눈물은 범벅이 되어 분명 얼굴은 볼품이 없을 테지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너무 아파…….
쿨럭, 또다시 핏덩이가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졌다고 느낀 건지 의사가 큰 소리로 뭐라 뭐라 하는 게 들리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대화까지 들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제발 어떻게 좀 해줘. 제발 나 좀 어떻게 좀 해줘….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허덕이며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였다.
'…아조씨!'
순간 아이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왔다. 겨우 눈을 뜨고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저 밖에는 네가 있다. 안돼, 들어오면 안 돼. 이런 내 모습을… 네가 봐선 안돼. 아까 물던 베갯잇을 더욱 세게 물었다. 이와 이가 부딪히고, 턱관절이 아려올 정도로 그것을 세게 무는데도 혹시라도 내 억눌린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갈까봐 세게, 더욱 세게 무는 것에 힘을 주었다. 흰 베갯잇도 점차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조씨, 문 좀 열어주세요!'
그 여린 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문을 콩콩 두드릴 네가 눈에 선하게 그려져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소리를 나만 들은 건 아니었는지 간호사 중 한 명이 문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게 로비에서 아이가 기다린다고 말을 해주었던 간호사였다. 그는 잠시 머뭇하더니 이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기에 나는 그의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최승철 씨?"
"우으… 흐으… 흐으윽…."
손가락을 겨우 들어 올려 입에 가져다 대고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쉿. 제발, 제발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비밀로 해달라고. 그 아이가 알 수 없도록, 제발…. 그렇게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빌었다. 내 마지막 모습을 절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이미 사람을 잃었다는 것에 크나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먼 훗날 알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그 여린 아이에게 다시 이 아픔을 겪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는 그 간호사의 눈에도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 문을 아주 살짝 열고 나가던 그 간호사는 빠르게 문을 닫았다. 밖에서 간호사와 아이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아저씨 잠깐 나가셨는데… 그동안 언니랑 놀까?'
'네!'
점점 너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간다. 나의 시야도 아득해져 가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다시 한번 핏덩이를 토해내는 나를 보며 의사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마저 이제 아득해져 간다.
……아, 이런 거구나. 죽는다는 건 이런 거였구나. 아까는 죽을 듯이 아팠는데, 이제는 새삼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점점 이곳과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삐이이-.
온 신경이 이 세상과 멀어지고 끝내 숨이 멎어갈 때쯤 마지막, 마지막 소리만은 분명하게 들려왔다. 내 삶의 종지부를 찍어주던 그 소리가.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내 눈에서 차마 흐르지 못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미안해, 약속 지키지 못해서.
이 육신이 죽어 백골이 된다면
나는 어딘가로 흩날리겠지.
게 중에는 강물 속으로,
혹은 바람을 타고 산속으로.
아니면… 그 바람을 타고
끝도 없이, 영원히 흩날리겠지.
그렇게 흩날리다 보면
나는 다시 너에게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티끌만한 가루 하나가 바람을 타고 흘러 다닌다면,
나는 언젠가 너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너는 아직 어리니 뼛가루가 된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희고 흩날리는 무언가.
그것을 대변할 수 있는 무언가.
'난 눈이 좋아요.'
'왜?'
'예쁘잖아요! 또 하얗고.'
…그래, 눈.
눈이 좋겠다.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단편쓰 |
안녕하세요 단편쓰입니다. 아, 이번 편은 쓰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약간 인연 쓰는 느낌이었달까... 처음부터 너무 무겁기만 해서 쓰는 내내 저도 마음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던, 그런 편이었습니다. 오늘 치환이 없는 이유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정말 어린 아이와의 뭐랄까... 그런 걸 쓰고 싶었어요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마땅한 말이 갑자기 떠오르지가 않네요.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데 사실 저는 도깨비를 4회까지 밖에 안 봐서 내용을 잘 몰라욬ㅋㅋㅋㅋㅋ큐ㅠㅠㅠ 내용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이 노래를 들으면 막 도깨비랑 저승사자랑 막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바꿔볼까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노래가 너무 좋아서 포기가 되지 않았네요...☆ 그래서 그런지 도깨비랑 유사하게 쓰고 싶진 않았어요!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다가 나온 게 이거네요. 승철이 현실에서는 꽃길만 걷고 만수무강해라...
명호 그 시절이 인트에도 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많은 독자님들께서 정말 많이 좋아해 주셨다는 것에 저는 정말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했답니다ㅠㅠㅠㅠ 독자님들 제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많이 애정합니다 정말로... 독자님들 덕에 제가 이렇게 한편 한편 쓰고 있는 거예요 정말 승관이 소나기에서 그냥 멈췄을 수도 있었는데...(왈칵)
늦은 시간임에도 보러 와주시는 우리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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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아이러부승관 일공공사 오영복 킬링 감귤 파인 호시부인 전늘보 당무당근 독짜님 쿱스팝 이지훈오빠 라넌큘러스 민세 새봉 슬곰 11023 피카츄 쿵망몽 다람쥐 롬곡 아이러부 보름 밍구리 숭영잉 급식체 봐봐 뿌야 밍밍 킨다 원우의겨울 권수장 햄찌나린 순영이❤ 열일곱 디케이 호루 찬란한 너누넌챤 붐바스틱 자몽 뿌둥뿌둥 왕건 충전기 귤나무 세맘 찬아찬거먹지마 명호엔젤 느림의 미학 밍밍 삐용 워아이니 조아 하니만 3333 미스티블루 온담 9575 공부해야지 예랑이 부들부들 밍기적 순붐 돌쇠쿱스 호시닭 쟈몽 겸이 커밋 4702 뿌뿌까까 온니밍구 1123 과니과니 치자꽃길 늘부 디노로운 뮹하 순찌 호시탐탐 프레이그런스 천사영 순영맘 스코 사랑둥이 귤요정 Dly 빙구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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